-비 그치고/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 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비가 찾아온다/채호기-
비가 찾아온다
기억을 더듬듯
윗닢에서 아랫닢으로
잎에서 잎으로 튀어 오른다
돌을 디뎌 스며들다가
한 겹 돌의 피부가 될 때까지
비는 구석구석 찾아든다
빗방울 주렴에 굴절되는 산
가슴 안으로 울새 한 마리 재빨리 스며들고
도로 아스팔트 위에
텅 빈 소로 흙 위에
비의 발자국
옥수수 잎, 감자 잎, 상추 잎, 완두콩 잎
위에도 빠짐없이
비의 발자국.
농가 뒤꼍 주인 없는 수돗가
비어 있는 고무 다라이 안에 모여들고,
막혀서 고인 한적한 수로
죽어 있는 검은 물 표면을 소란스럽게 하고,
죽어 있는 검은 날들을 들쑤시며 깨운다.
기억을 소생시키듯
비가 찾아온다.
-비에 관한 또 다른 유래/채선-
빗줄기에도 각이 있다.
열차가 지나가는 기억 밖으로
매듭 풀린 시간들이 빠져나간다.
덜컹이다 휘굽는 기적소리
갈래져 아스라해지는 소실점으로부터
느닷없이 비가 몰려오고
쇳조각 긁히는 소리를 내는 이,
허공에서
힘줄처럼 뻗히는 빗줄기를 붙든다.
물컹한 어둠의 속살을 비집고
그렁그렁 불빛들 매달린다.
누군가 웅크렸다 사라진 빛으로
축축한 몸을 켜는 폐허
녹물 겹겹 들러붙는 어둠은 과녁이 되고
오래도록 문질러도 촉이 닳지 않는 빗소리에
평행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침목枕木들
가늘게 빗겨져 격리되는 모서리마다
무수한 고리로 이어진, 나는
차갑게 긁히며 비망이라는 역을 떠돈다.
-여자비/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사실은 비가 오고 있지만/이근화-
오늘은 팔과 다리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걱정 많은 인형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
빗물을 따라 흐르기로 한다
골목길에 펼쳐지기로 한다
왼다리가 없어야 나인 것처럼
새끼손가락이 없어야 나인 것처럼
오늘의 맛과 냄새를 향해서 입을 다시 벌리지만
십오 분 간 단꿈 속에 나뭇잎 몇 개 떨어질 뿐
기린을 보는 건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다
나를 얼룩덜룩한 세계로 데려다 준다
너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기에
내 발은 너무 뾰족한가
나의 팔과 다리는 떨어지고 마는가
오늘은 정말이지 팔과 다리는 내버려두기로 한다
접어서 서랍에 넣어두기로 한다
주인공처럼 인생에 푹 빠져들면 좋을 텐데
사라지는 건 그 다음 일
누군가 내 몸에 나를 심었다
튼튼한 거울을 몸속에 넣고 깨뜨렸다
-비/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불 속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뜻한 비/이현승-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한나절 내린 비에/허형만-
한나절 내린 비에
연 사흘 쌓인 눈이 다 녹았다
늙은 감나무에 핀 저승꽃을
엷은 햇살이 한참을 어루만지다가
심심한 사내의 신발 끄는 소리에 놀라
새처럼 하늘로 포르르 오른다
지상의 꿈은 아직 축축하고
심심한 사내는 곧 다가올 저녁 냄새를 맡은 듯
가랑잎처럼 어깨를 한번 들썩이곤 들어간다
우주가 고요해졌다
-다녀가는 새벽 비처럼/이미산-
후두둑, 잠결에 듣는 빗방울 소리
훌쩍, 새벽담장을 넘어오는 발자국들
내 귓속으로 걸어오는,
이것은 소설 속 한 풍경인지도 모른다 비릿한 냄새와 구겨진 옷가지와 낡은 가방과
그리고 여기 벽지의 꽃잎들 귀 활짝 열린,
나는 눈을 꼭 감아 가볍게 뒤척이고
먼 길 걸어왔거나
먼 길 돌아나가는
숨 쉬는 동안에 반복되는 어떤 현상 같은 것,
이것은 소설이 뱉어낸 흔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상을 찾아 집을 떠난 사내가 오래
길 위를 떠돌다 떠돌다 발자국과 발자국과 발가벗은 몸뚱이 소설 밖으로 뛰쳐나올 때
파르티잔의 행로는 어떻게 되나
어디로 가나 저 발자국
나는 눈을 꼭 감고 귀를 한껏 부풀려
발자국 불러들인다 눈꺼풀로 알뜰히 쓰다듬는다 아장아장,
멈추었나 싶으면 걸어가고 사라졌나 하면
거기 서있는
귓속에 걸어가는 발자국
눈꺼풀 꽁꽁 여며 밀어낸다 고독한 냄새 같은 그림자 하나 훌쩍,
담장을 넘어간다 한 점으로 남겨진 자리에 다시
발자국 넘어오고 넘어가고
어디로 가나 저 발자국들
나는 눈을 꼭 감고
간절히
-비를 맞으며/서정윤-
살아 있다는 것으로 비를 맞는다
바람조차 낯선 거리를 서성이며
앞산 흰 이마에 젖는다
이젠 그만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자
보리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태양은 숨어 있고
남루한 풀잎만 무거워진다
숨어 있는 꽃을 찾아
바람에 치이는 구름 낮은 자리에
우리는 오늘도 서 있고
오늘만은 실컷 울어도 좋으리
오늘만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땅의 주인이 되어져 있지 못한
보리이삭이 잊혀지고
편히 잠들지 못하는
먼저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며
비는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에도 젖지 않은 빗물이
신암동 하수구에서
가난이 녹은 눈물에 불어나고
낮은 구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만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자 하늘조차도.
-나무와 비/강 정-
나무들이 펼쳐 놓은 구름들 사이
유황빛 새가 튀어나온다
날개를 펼치고
회색 물컹한 구릉들의
얇디얇은 미립자들을 가르며
나무들의 뾰족한 절규 위에
내려앉는다, 내려앉아
날카로운 소리의 껍질을 벗겨
둥글고 황금 맛 나는 궤적들을
지나온 허공에 뿌리박는다
구름들이 둥그렇게 몸을 열고 있다
숨어 있던 해를 닦으며
한동안 말라 있던 빛들이
펼쳐지면
새는 다시 날개를 흔들어
나무 아래 까마득한
땅속까지 부리를 꽂아
지상에 엎드린 사람들의
각진 어깨를
연한 물질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다시, 흐르고 흘러
발아래 흥건한 진흙으로 모였다가
쉼 없이 하강하는
나무들의 푸른 정신을
붉게 달군다
곧고 날카로운 가지 끝에서
확산하는 熱愛의 빛,
붉은 전율이 나무의 몸을 빌려
하늘과 땅 사이를
고요한 진동으로 감싸고
새의 그림자가
이 모오든 풍경을
새하얀 몸짓으로 그러안아
구름 속으로 싣고 떠난다
-음악처럼, 비처럼/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은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우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럴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비/류 훈-
몇 날 며칠을 비는 밖에 서 있었고
나는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 비는 향기라도 맡을 요량인지
흠흠 창문으로 코를 들이댑니다.
비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흐릅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벽을 헐어내고 유리창을 달았습니다만
온몸을 으깨어 주룩주룩 흘러내릴 뿐
나는 그것이 그가 침묵하는 한 방법이지
그의 눈물이라거나 감정일 거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표현을 삼가겠습니다.
어쩌면, 비와 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협곡이 흐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테면, 수학 시험지 위에서 빗발치던
사선의 붉은 색연필이든가
오래전 헤어진 빗속의 여자 같은 추억 말입니다.
어떤 세월을 들이밀어도 비는 목격자인 거지요.
비는 은유를 모르면 비유의 천재이지요.
내가 뭘 채우려 애쓴다면
비는 비우라 말할 겁니다.
어느 날은 후둑후둑 느닷없이 뛰어온 비가
어? 하는 사이에 온몸을 핥고 지나갔지요.
나는 따뜻한 샤워를 하며 그의 침을 닦아내야 했는데
비의 서늘한 혓바닥은 잊을 수 없어요.
많은 날이 필요치 않았지요.
그와 나 사이에서
사이가 떨어져 나가기까지는,
많은 세월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벗기기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젖기까지는,
-비의 뜨개질/길상호-
너는 비를 가지고 뜨개질을 한다.
중간 중간 바람을 날실로 넣어 짠
비의 목도리가, 밤이 지나면
저 거리에 길게 펼쳐질 것이다.
엉킨 구름을 풀어 만들어내는
비의 가닥들은 너무나 차가워서
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거리 귀퉁이에서 잠들었던 여자가
새벽녘 딱딱하게 굳은 몸에
그 목도리를 두르고 떠났다던가,
버려진 개들이 물어뜯어
울이 터진 목도리를 보았다던가,
가끔 소문이 들려오지만
확실한 건 없다,
비의 뜨개질이 시작되는 너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 말고,
빗줄기가 뜨거운 네 눈물이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비의 냄새 끝에는/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비의 연산/이수명-
깊은 밤 검은 우산이 홀로 떠 있는 명령을 내린다.
그냥 떠 있는 것을 사랑해 우리는 일제히 비예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채운다. 우리는 우리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이 도출되지 않는 이 끝없는 연산을 무엇이라 부를까.
만나지 않는 선들이 그냥 떠 있지 그냥 사랑해 더 가늘게 더 두텁게 불확실하게
우리가 주고 받는 것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수로 탄생하고 자연수는 무효가 될 때까지 자란다.
낮과 밤이 어디로부턴가 흘러나와 시가전을 벌인다. 낮과 밤을 떠다니게 하라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이곳에서
형상을 시작하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속에서
틀림없어지거든요
틀림없이 비를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마찬가지가 될 모양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러나 없는 베개를 움켜잡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떠내려갑니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