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미 시인>>
<<안현미 시인의 양력>>
*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1년 『문학동네』로 등단.
* 시집으로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등이 있음.
* 문학동네 신인상, 신동엽창작상 수상.
<<안현미 시인의 시>>
훼미리주스병 포도주/안현미
그때 포도밭에서 돌아와 여름 내내 살뜰히 숙성시킨 포도주를 훼미리주스병에 담아들고 당신이 회사 앞으로 찾아와 곧 먼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향과 맛이 가장 좋을 때 아끼는 사람들과 나눠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건넨 훼미리주스병 포도주
그때 당신은 이 별의 여행자 중 가장 향기로운 여행자 마치 제 자신의 그림자를 우주복처럼 착용하고 지구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최초로 지구 밖으로 떠날 결심인 우주인처럼
그때 내가 빠뜨린 안녕, 당신 집 천장에 매달린 몸통이 텅 빈 한지 물고기등(燈)처럼 웃기만 하다가 내가 빠뜨린, 포도알 같은 안녕, 그 붉은 우주선 같은 안녕은 지금 어느 우주를 지나가고 있을까
어항골목/안현미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풀어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을 벗고 부풀어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퐁퐁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post- 아현동/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시간들/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와유(臥遊) /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거짓말을 타전하다/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
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
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
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
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댓국밥을 먹었
다 순댓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
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
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
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
족 같았다 불 꺼진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
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총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
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
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안현미
'시인은 죽었다'
허블 우주 망원경
블랙홀
시간의 띠(뫼비우스0와 공간의 일그러짐을 클릭하라
치사량의 열정과 눈물 한방울만큼의 광기와 고독
개미의 페로몬 같은 상상력을 복용할 것
보르헤스와 랭보와 백석과 소월의 키워드를 해독할 것
시인은 그렇게 복제된다
여기는
사이버 우주
사이보그 si-in
시인의 영혼을 처형하라!
그리고
낡은 시대와 서둘러 작별하라
시,인,은,죽,었,다
디스켓에 시인의 사리(舍利)를 저장하고
e-메일로 전송할 것
나는 온라인으로부터 왔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신(神)이다
이때 떠돌이 시인 등장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막을 내리듯 플러그를 뽑는다
(100년 동안 안전)
태초의 빛처럼 무대가 밝아지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원고 위에 적고 있다
짜가투스트라는……
옥탑방/안현미
12개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녹슨 열쇠구멍 속에 갇혀있는 옥탑방이 있지
그 방에는 먼지 쌓인 편지들과 당신이 선물한 액자가 있지
액자 속에선 시간을 잃어버린 여자가 삭발을 하고 녹슨 가위는 액자를 오리고 있지
불면을 앓고 있는 컴퓨터는 반송된 e-메일로 용량이 부족하고 커튼도 없는 창문에선 별도 뜨지 않지
물도 주지 않는 선인장은 뿌리가 썩어가고 있지 옥탑방이 울고 있기 때문이지
잃어버린 시간이 울고 있기 때문이지 울고 있는 옥탑방 낡은 침대에선 곰팡이꽃이 피고
포자처럼 무성생식 하는 액자 액자들 12개의 사다리를 올라가면 녹슨 열쇠구멍 속에 갇혀있는 내가 있지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분열을 앓고 있는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하지 증오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는 녹슨 가위를 들고 동맥을 오리지
피 흘리는 나를 안아주는 나는 당신이 선물한 액자 속에 있는 당신이 사랑한 삭발한 여자에게 말해주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도 아니었지 그냥 지상에서 가장 높은 방에 서로를 모셔두는 일이었지
그래서 당신과 여자는 울지 못하고 옥탑방만 울고 있는 거지
계절병/안현미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입니다
거대한 고래처럼 거대한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밀거래하는 이 도시에서
서로가 서로의 휴일이 되어주는게 유일한 사랑입니다 병인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우울과 당신의 골다공증 사이를 자객처럼 왔다 가는 계절
그 그림자를 물고 북반구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의 날개 같은 달력 한장 가없는 당신
나의 엄마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 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건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을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안현미
서둘러 밥을 먹고 낙산으로 산책가는
점심시간
산동네 담벼락에 누군가 그려놓은 낙타가
베란다 그늘에 서 있다
그늘 아래서 꿈꾸고 있다
시원한 꿈이겠다
내가 탐하는 그늘은 고비사막에 있다
내 더듬이는 한번 더듬은 것들을 지문처럼 새긴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점심시간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
봄/안현미
그 봄에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맨발이다 일순간 일제히
모든 시선이 여자가 몰고 온 여행가방의 테두리처럼 상처
투성이인 그 발에 주목한다 사위는 적막을 껴입은 듯 고요
하다 여행가방처럼 먼 길을 끌려다닌 여자의 그림자가 여
자를 끌어안고 먼저 쓰러진다 누가 누구의 배후인가 눈물
이 고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문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물도 그와 같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 된
다는 것
그 봄으로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가 등장한다 그 봄
의 입구에는 19금(禁) 표시가 붙어 있다 누가 누구를 금지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봄이 이어진다 봄을 사용하기
위해선 봄 안으로 입장해야 한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 된다는 것
그도 그렇겠다/안현미
그리하여 그도 그렇겠다 글렌 굴드를 듣는다 당신은 가
벼울 필요도 없지만 무거울 필요도 없다 내 생의 앞 겨울을
당신을 훔쳐보면서 설레였으나 그 겨울은 거울처럼 깨져
버렸고 깨진 겨울의 파편을 밟고 당신은 지나갔다 글렌 굴
드를 듣는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게 시라고
나는 생각해오고 있다 그게 나무라고 나는 생각해오고 있
다 포도나무가 있는 여인숙에 홀로 투숙한 여행객의 고독
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매일 아
침 자신을 속이는 어떤 허무처럼 일인용이고 일회용인 한
개도 재미없는 삶처럼 그리하여 죽음처럼 글렌 굴드를 듣
는다 출근과 퇴근, 누가 만든 미로일까? 당신은 무거울 필
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다 당신이 없는 겨울을 거울처럼 들
고 사랑의 부재 또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해보는 겨울이다
내간체/안현미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
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
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
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개의 얼음을 사용
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
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
춘천, 씨놉시스/안현미
#1 청량리역 혹은 뽀르뚜갈 광장
경춘선을 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봄이었으므로. 그러
나 곧바로 떠나는 기차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즉흥
적인 여행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량
리역 광장이 아닌 뽀르뚜갈 광장에 서 있는 이국의 여행자
들처럼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 위를 어슬렁거리며 광장의 시계
탑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을 공유하며.
#2 기차 안과 밖
어두운 차창 밖으로 몇겁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그 어둠속에서 전생 혹은 전전생을 시
청 중이다. 홍익회의 삶은 계란과 캔맥주를 홀짝이며. 이어
폰의 리시버를 한쪽씩 나누어 꽂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부
에나 비스따 쏘설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가 부르는 [Dos
Gardenias]. 이국적인 그 음악은 전생의 당신을 닮았다. 당
신은 노래한다. "치자꽃 두송이를 그대에게 주었네 사랑한
다 말하고 싶어서 잘 돌봐주세요 그것은 당신과 나의 마음
입니다."
#3 새춘천교회 그리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간다. 성경책도 믿
음도 없이. 그러나 당신을 향한 찬송가처럼 몇개의 빗방울
흩뿌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
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말한다. "이 길 끝에
는 아무것도 없어."
#4 공지천 이디오피아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
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
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
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
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
았던 그 봄 춘천에.
눈사람의 공식/안현미
빠른 겨울과 느린 겨울, 두개의 겨울을 가지고 눈사람을
만드는 공식이 전국적으로 공모된다 인생역전의 거대한 상
금에 사람들은 생업을 멈추고 열광한다
두개의 겨울을 공처럼 굴린다 털모자를 씌운다 중력을
추가한다 자전하고 공전한다 저녁이 추가된다 골목이 필요
하다 악수와 박수 중 박수가 차선이다 말도 안된다 말이 많
다 아니다 진보다 진부다 지옥이다 악마다 막말이 쏟아진
다 핵심은 눈사람이 아니라 빠른 겨울과 느린 겨울이다 하
얀 겨울 추운 겨울 혹독한 겨울 수많은 겨울 중에 왜 하필
빠른 겨울과 느린 겨울인가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아
니다 날씨가 핵심이다 아니다 부동이 핵심이다 아니다 안
이 핵심이다 맞다 아니다 맞다 아니다 아니다 그것도 맞고
이것도 맞다 그 말이 그 말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눈
덩이처럼 부풀어 지는 말 말 말들
결국 공식 속에 모든 사람들의 말을 백 퍼센트 담을 수
있다는 여자가 공모에 당선되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
갔으나 결국 눈사람을 만들기 위한 혹독한 추위가 전국적으
로 선포된다 다시 백 퍼센트 겨울 공화국이 시작되고 있다
*음악처럼, 비처럼/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은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해바라기 축제/안현미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 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 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까, 라고 해바라기 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명들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으로 달아난다 피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기타여/안현미
기타의 현을 끊고 시인의 노래는 서글픈 모음들을 술잔 속으로 빠뜨린다 비타민B가 부족한 야맹증 환자처럼 나는 캄캄하다 시인의 서글픈 노래만이 내 영혼의 귀를 하얀 붕대처럼 감는다 시시해서 죽이고 싶다가도 시시해서 죽이기 조차 귀찮은 그들 보다 더 시시한 나, 불멸할 질투와 애증, 살아온 날 동안 흘린 눈물 만큼의 술을 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 나를 벗고 싶다고 지껄이는 환절기 저기 환속한 비구가 걸어간다 심장이 불덩이 같다 내 눈물이라도 얼려 먹어야겠다 지랄금지, 애인이 두고 간 포스트잍에 쓴 작별 인사 붕괴된 나라 러시아제 망원경을 들고 무용수들의 기형적인 발가락만 들여다 볼까? 노랑 풍선을 사고 노사모에나 가입할까, 어차피 나를 속일 거라면 죽을 때까지 속여줘! 내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지의 말이 아니라 테라야마 슈우시가 돈을 주고 잔 터키탕에서 일하던 여자가 속삭였던 말이 오늘은 시처럼 들린다 시시하고 시시한 나라는 방에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게 인생이다 오늘은 자꾸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영혼에게 책에서 훔쳐 온 문장 하나를 읽어준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기차표 운동화/안현미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마침표/안현미
자하문 고개를 넘어갔지요 서쪽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세검정(洗劍亭)에 도착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요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뜨는 곳이고 당신이 도착해야 하는 곳
은 해가 지는 곳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 세상의 모든 아
침과 저녁이 있지요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죠 그녀가 맨발로 다다
르고 싶어했던 천상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그가 가지 않았으나 꿰뚫어
본 0시의 어둠일지도 모르는 채 그것은 그렇게 그냥 이미 내게 도착
했거나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아프지 말아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녔어라고 말해주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아픈 걸 테지요 이
제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가령/안현미
1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전생(前生)이었다
2
가령 당신이 수원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시다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고 합시다
당신은 까무룩히 졸았다고 합시다
당신의 꿈속에선 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빗속을 달려오는 회색빛 자동차도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수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떠났던 것일까요?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始原, 시원은 오직 당신의 꿈속에만 있다는 걸
街靈, 당신이 믿는다면
나는 당신의 전생을 들고
다신의 꿈속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3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후생(後生)이었다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안현미
귀퉁이가 닳고 닳은 통장
지출된 숫자와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 없어도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고향 집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같이 붉은 도장밥 먹으며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상처도 밥이고
가난도 밥이고
눈물도 밥이고
아픔도 열리면
아픔도 열매란다,얘야
까치발을 딛고 나 엄마를 따먹는다
내 몸 속에는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가 산다
시구문屍口門 밖, 봄/안현미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
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
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
에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
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
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
싸인 봄이에요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
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
디뜨 삐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
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
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곰곰/안현미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함부로/안현미
햇살이 내리꽃히는
한낮의 논
피를 뽑으러 들어간 아버지 종아리에서
피를 빨고 있는 거머리
피를 뽑기 위해 피를 빨리는 무서운 생업!
아비 없는 자식이 아버지가 된 세월......
함부로
돌아와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며
비굴레시피/안현미
재료
비굴 24개 / 대파 1대 / 마늘 4 알
눈물 1큰술 /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컨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총잡이들의 세계사/안현미
세상은 흙먼지 날리는 무법천지의 서부와도 같다고 아
이가 말했을 때 나는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마네킹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아이의 염색한 머리 색깔과 마
네킹의 머리 색깔이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피나 콜라다
빛 머리 색깔, 이방인처럼 낯선 아이의 말풍선 속에서는
욜라 짱나 담탱이 같은 해체된 모국어가 쉴 새 없이 튀어
나오고 구겨진 교복엔 기름때가 얼룩져 있다 지구의 반대
편에선 검은 오일 때문에 유혈 전쟁이 한창이지만 검은
오일이 장전된 총을 들고 짙은 선탠이 된 자동차 뒤꽁무
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아이의 총에선 불꽃이 일지
않는다 선탠이 된 차창이 스르르 열리고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가 골드카드에 사인을 할 때 아이는 서부의 총잡이
존 웨인이 되어 조수석 짙은 화장을 하고 마네킹
처럼 앉아 있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구출하는 상상을
한다 다행히 그건 이 도시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아이는 제 총을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에 들이
밀지 않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주유소 앞 바보 같은 허풍
선이 거인 풍선 인형만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다
열려라 참깨/안현미
이슬람의 세계에서는 '밤 속의 밤'이라 불리는 어떤 밤
이 있다.
그날 밤은 하늘의 비밀문이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
콤해진다고 한다.
그런 밤에 나는 비밀을 받아 적는 시인, 쑥쑥 자라는
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이 신비한 모래의 춤 속으로 달
려가고, 신데렐라가 마차로 변한 호박을 타고 파티장에
가고, 엘리스가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따라 이상
한 나라로 여행을 하는 마술 같은 시간.
열려라 참깨!
그 세계에선 서류를 작성해야 되는 일들이나 인생을 망
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나는 호모 루덴스, 방황하는 자, 눈으로 만든 사람.
빗자루로 만든 두 팔을 들고 꿈꾸는 몽상가,
열려라 참깨!
비밀의 문은 열리고, 나는 백 년 전에 태어난 시인과 수
은이 벗겨진 거울 속으로 여행을 가고, 세헤라자데가 되
어 아내에게 배신당한 슬픈 왕을 위로하고, 알라딘의 램
프의 요정 지니와 같이 사막을 아쿠아 마린빛 바다로 만
들고,
열려라 참깨!
나는 물병 속의 달콤한 물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어
린 당나귀, 당나귀의 노래를 꽃으로 만드는 마녀, 마녀의
고독을 시로 적어주는 검은 고양이, 고양이에게 물방울을
선물하는 생쥐, 쥐구멍에도 햇빛을 선물하는 두 개의 태
양, 사다리를 타고 태양을 청소하러 가는 청소부
열려라 참깨!
나의 시는 굳데 닫힌 문 앞에서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
지기를 기원하는 주문
열려라 시(詩)
언어물회/안현미
말린 물고기만 씹으며 겨울을 난 사내가
물고기를 물에 말아 알뜰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다
사랑할때 애인의 몸을 뜯어 먹는 여자처럼
시든 언어만 씹으며 늙어가는 여자가
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의 목걸이를 만들고 있다
죽을때 스스로의 몸을 깊은 숲에 두는 족장처럼
사위어가는 것들의 모든 우울함으로 꽃은 피고
우울한 물고기의 이름은 우울한 물고기다
그것이 한계다
한계와 임계사이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수 있다
탈모1/안현미
말이 끝났지만 한동안 팽팽하다 서로 미루다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는 건, 언제나 성질이 급한 너였다
통화가 끝나면 늦가을 낙엽 지듯 기울어지는, 쏟아져 내리는 안테나들 한동안 통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말하지 않았는데, 본 것일까 가슴 안까지 전파가 흘러왔다가 빈구덩이에 한동안 비듬 같은 먼지만 쌓일 텐데,
당분간 필요 없을 안테나가 흔들린다 바람에 날리는 비듬소리에만 귀 기울인다
내 전화기가 꺼져있어도
세상은 언제나 통화중이었다
실패라는 실패/안현미
퇴근길 청량리 종점행 지하철에서
발음이 뭉개진 어떤 사내
바늘이 들어 있는 실패를 불쑥 들이민다
사내는 자신의 발음처럼 뭉개진 다섯개의 손가락을 가졌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지불하고 산 실패
어쩌면 사내는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뭉개진 生을 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창가를 지나며 중얼거린다
통유리창 마네킹 같은 어린 창녀아이
몇개의 실패를 팔고 싶으세요?
저는 대충 빨리 늙어도 괜찮거든요,
하는 얼굴로 내 손 안에 있는 실패를 본다
너는 내 실패도 받아주고 싶은거니? 어째서?
패를 잘못 뽑아든 어린 창녀아이와
홍등 아래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실패를 감아준다
실패엔 나와 발음이 뭉개진 사내와 어린 창녀아이의
엉킨 실타래 같은 꿈이 감긴다
색색깔의 실패!
사내는 뭉개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실패를 팔고
어린 창녀아이는 바늘을 집어삼킨 어굴로 실패를 살고
나는 곰곰이 실패라는 실패를 바느질한다
고장난 심장/안현미
빨간 장미 서른 세 송이를 들고 여자가 나를 찾아왔어요 여자의 눈물이 너무 딱딱해 나는 캐낸
눈물로 당신의 심장을 끓이면 좋겠다 생각해요 모래시계를 들고 찾아온 죽음은 백년 동안의 고
독이 매장되어있는 화장터에서 활활 타오르고 모래시계에선 시간이 자꾸 흘러내려요 흘러내리
는 시간을 가시로 꽂아 놓으며 여자는 중얼거려요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로 갔나요? 그 여름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끝내 시간을 놓아버린 내 엄마는요? 어디까지
가 바닥인가요? 왜 生은 고장 투성이인가요? 당신, 생은 다 그런 거라고 눙치지 말아요 시시해요
詩까지 시시해요 시체처럼 평온했음 좋겠어요 내 영정사진 앞에서 향나무 향이나 실컷 마시다
배불렀음 좋겠어요 불도 들어오지 않는 다다미 방에서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기다리다 보면
애국가 울려 퍼지는 화면조정 시간 이예요 치지지지 아무 것도 수신되지 않던 자정의 TV화면을
나의 내면이라고 부를까요?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을 테지만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
겠지요? 그때서야 고장난 심장은 두근두근 따끈따끈 치지지지 나는 나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빨간 장미 서른 세송이를 들고 내 여자가 오늘 나를 찾아왔어요 그게 사랑이었다 해도 무슨 상관
이예요 내 여자의 눈물은 딱딱하고 내가 캐낸 눈물은, 당신은 시체처럼 차가워요 시체처럼 딱딱
해요 생이 고장난 심장 같다는 건 하나의 농담이지만요
아주 작은 형용사야/안현미
나무 난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여자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들고
한 사내가 시간을 쪼개고 있다
난로 위엔 시간으로 끓인 주전자가
저 혼자 은밀하게 끓어오르며
노란 잠수정처럼 떠오르고 있다
시간을 쪼개다 지루해진 사내는
여자의 갈비뼈를 시간의 장작더미 위에 던져놓곤
정물처럼 버려져 있는 여자 속으로 들어간다
나 삼류야 양아치야 독 많은 옻나무야
뒷산 올빼미야 (넌) 아주 작은 형용사야
이제 네 갈비뼈는 너무 무뎌졌고
정물 같은 너도 지루해
나무 난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시간으로 끓인 주전자엔
지루함도 바닥이 난다
여자는 식어버린 나무 난로에 기대
무뎌진 갈비뼈를 들고 밑줄 긋는다
나 아주 작은 형용사야
뛰어다니는 비/안현미
수협 조끼를 입은 남자가 박카스를 돌리자
대게철이 시작됐다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
달을 찍고 싶었으나 귤을 찍는다
인생이 대개 그와 같다.
호불호를 떠나야 한다
여자도 남자도 극복해야 한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초대된 우리들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할 것
대게는 대게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나는 나로 죽을 것이다
할머니라고 아홉 번이나 불렸고
삼만 살처럼 피곤해도
소만(小滿)에는 립스틱을 사자
동문하고 서답하자
내 물음과 내 울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것
주황색은 어디서 왔을까
흰, 국화 옆에서/안현미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환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 일 아닌 일에도 심장이 뛰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벚꽃이 다녀가더니
목련이 오고 목련 뒤에는 라일락이
라일락 다음엔 작약과 아카시아가
아카시아에 이어 장미가 다녀갔다
그제는 마흔 살, 시인이 되고 싶다던 후배가
장미를 따라갔다
빌어먹을 흰, 국화 옆에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장미, 아카시아, 작약, 라일락, 목련, 벚꽃……
이어달리기를 하듯 왔다 간
환한 꽃들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녀간다
여름 언니들/안현미
빨강과 파랑 초록과 보라
색깔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여름은 비밀이 가득한 계절
파랑 물방울 사전, 초록 보라 선풍기, 빨강 코 수은주
낱말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그 비밀의 온도 사상 최고치 경신!
팡, 팡, 팡
폭죽처럼 터지는
여름 언니들
더 이상 비밀은 비밀도 아니어서
눈물과 비밀 여자와 여자라는
레고를 가지고 제2의 성(城)을
쌓았다 허물고 허물었다 쌓는
여름 언니들
마침내, 여름 언니들 그 성의 여왕으로 등극!
갱년기/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수학여행 가는 나무/안현미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
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 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쓴다.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운다
뿌리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뿌리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를 뿌
리는 간다 사월로 오월로 세월에로 뿌리는 간다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그 특별한 사
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깊은 일/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정치적인 시/안현미
우리는 선천적으로 두개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
들숨과 날숨!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
운에는 울고 율에는 웃자. 그리하여 실천으로
우리의 운율은 울음이 되고 웃음 이 되고 종내에는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밥이 되고 법이 되고 사랑이 된다.
음,파,음,파 우리는 숨 쉬자. 기억하자. 실천하자.
후천적으로 조작되고 오염되기 이전 우리들의 최초의
들숨과 날숨으로, 실천적으로, 실전적으로 정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