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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대한민국 공화국(Republic of Korea)에서 지금으로부터 70년전에 나온 백제(百濟) 관련 노래가 한 곡(曲)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많이 알고 있을 '백마강'이라는 곡입니다. 지난 1954년에 발매(發賣)된 '백마강'이라는 노래는 올해가 2024년이니까, 정확히 70년전에 나온 노래입니다. 굉장히 오래된 곡인데 손로원 작사(孫露源 作詞), 한복남 작곡(韓福男 作曲)의 '백마강'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 여러분도 같이 불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 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 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白馬江)이라는 곡을 불러보면 애절(哀切)함과 비장(悲壯)함이 함께 느껴지게 되는 대한민국 공화국의 수많은 대중가요(大衆歌謠)중 백제를 상징하는 몇 안 되는 명곡(名曲) 중의 명곡(名曲)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외국어(外國語)가 심하게 난무하는 해괴(駭怪)하고 기괴(奇怪)하며, 엽기적(獵奇的)이기까지 한 대한민국 공화국식 대중가요보다는, 정말 가사 하나하나에도 민족혼(民族魂)이 들어가 있는 백제나 기타 멋있었던 우리의 역사를 회상(回想)할 수 있는 곡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멋진 제국의 신민(臣民)이 함께 역사를 회고(懷古)하고 찬란한 미래와 영광의 제국으로 전진해가는데 일조(一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재건회(再建會)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백마강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忠淸南道 夫餘郡)을 휘감고 흐르는 강의 이름으로 금강(錦江)의 이른바, 별칭(別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강을 백마강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 지난 2024년 3월 9일 저희 재건회가 '帝國 二百六十五: 팔전 중 세 번째 신전 숭덕전'의 이름으로 언급했던 내용처럼 백마(白馬)가 상징하는 역사에 대한 본질(本質)과 유래(由來)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통해 관련 내용은 상세하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금일은 관련하여 더욱 특별하게, 전국 팔전(全國八殿) 중 백제 관련 신전으로 유일하게, 남한(南韓)에서 보존 전수(保存傳授)되고 있는 숭렬전(崇烈殿)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숭렬전은 전국 팔전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특징(特徵)이 일차적(一次的)으로 있습니다. 대부분, 전국팔전이 도심지대(都心地帶)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상기(想起)할 때, 숭렬전만 전국 팔전 중 유일하게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는 산성(山城)내에 위치하고 있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이라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인데, 숭렬전이 남한산성에 위치하게 된 것일까?
남한산성은 백제와 매우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백제 상징물(百濟象徵物)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백제의 한성백제(漢城百濟) 시기 도성인 위례성(慰禮城)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대표적 성이 바로 남한산성이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마치 백제 멸망 730년이나 흐른 후인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시기에, 도성인 한성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한산성과 동일한 목적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던 사례가 바로, 과거 백제의 예를 따라서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조대왕(仁祖大王) 14년, 당시 청나라(大淸國)의 침입으로 시작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벌어졌을 때, 46일간의 혈투(血鬪)끝에 결국 청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조선왕조 보장처(朝鮮王朝 保障處)이지만, 비축된 물자만 보장되었다면 장기간의 항전(抗戰)이 충분히 가능하였던 우리 민족의 매우 중요한 군사적(軍事的)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戰略的 要衝地)였습니다. 그만큼 아쉬움이 큰 전쟁이었는데 만약, 후일담(後日譚)입니다만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金自點)같이 조선의 도원수(都元帥)이자, 조선군 총사령관(朝鮮軍 總司令官)으로서 전체 조선군을 이끄는 매우 막강(莫强)하고 중차대(重且大)한 직책을 맡고 있던 인물이 적어도 그리고 최소한, 전시 상황(戰時狀況)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만이라도 있었다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으로 어느 정도 전투 경험(戰鬪經驗)도 갖추고 있었고, 무기도 보유하고 있었던 조선군(朝鮮軍)이 청군(淸軍)에게 쉽고 어이없게, 그리고 청군보다 대규모 병력을 소유하고도 출전(出戰)조차 하지 않아, 결국 조선이 허무(虛無)하게 패배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결국, 김자점은 훗날 당시에 병자호란 후 군율(軍律)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을 받고, 1637년 절도정배 형벌(絶島定配 刑罰)을 받아 충청남도 서산군(忠淸南道 瑞山郡)의 한 섬으로 유배되었고, 14년 후인 1651년 12월 17일에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일부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여 당일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고, 결국 사형(死刑)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정말 아쉬운 부분은 청나라의 침락에 대한 전략(戰略)적인 부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청군에 대항한 충분하고 합리적인 작전과 계획을 세웠습니다만, 결정적으로 전술적인 부분에서는 팔도(八道)의 각도(各道) 근왕병(勤王兵)들이 남한산성으로 진군(進軍)하였을 때, 병력은 청군에 비해 월등(越等)하게 많고 또 대부분 신무기(新武器)라고 할 수 있는 조총(鳥銃)까지 대부분 소지(所持)하고 있을 만큼 무장력(武裝力)도 매우 우수했던 것으로 많은 역사서는 당시 우수했던 조선군에 대한 군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정작 각도 근왕군(勤王軍)을 이끌던 지휘관(指揮官)들의 전황(戰況)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비롯하여 전술(戰術) 및 판단력(判斷力)의 매우 부족함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전시상황에서 어이없는 착오(錯誤)나 오인(誤認), 그리고 대처(對處)가 부족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부분 패퇴(敗退)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솔직히 너무 아쉬운 패배(敗北)의 전쟁이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참고로, 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의 군 병력 구성을 보면 1차 선봉대(先鋒隊)가 300명, 2차 선봉대가 1,000명, 3차 선봉대가 3,0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익군(左翼軍) 12,761명, 후미군(後尾軍)이 12,840명, 본군(本軍)은 15,272명이었습니다. 기타, 쿠툴어(Kutule)라고 하여 소위 노복(奴僕)이라고 하는 부역자 집단(赴役者 集團)이 2,000명으로 도합(都合)한다면 약 47,173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반면, 조선군 경우는 지방군인 속오군(束伍軍)이 기록된 숫자로 80,000명에서 90,000명, 정규군(正規軍)은 54,000명, 수군(水軍)이 30,000명으로 총 병력은 명확히 기록으로 확인되는 병력만 174,000명 수준으로 청나라 군사보다 약 4배 이상의 월등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왜, 무엇 때문에 패배했을까?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주요 전투의 장소가 압록강(鴨綠江) 근처 평안북도(平安北道)가 아닌, 가장 조선의 중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도 일원(京畿道 一圓)까지 내려와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고, 더욱이 상식적으로 국내 지형지물(地形地物)에 대한 장점조차 최대한 이용하지 못한 채, 오히려 청군에게 역으로 기습(奇襲)까지 당하여 패퇴하는 사례까지 보면, 아무리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쉽게 이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전황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의 군대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굉장한 회의감(懷疑感)조차 갖게 하는 하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부 많은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인조대왕이 지나친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전쟁을 불러와서 결국 치욕적인 항복을 한 군주라는 매우 극단적이고 극히 폄하(貶下)시키는 발언들을 하는 학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만, 전쟁(戰爭)이라는 것을 무조건 피한다고 하여 무조건 성군(聖君)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한번 해당 학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시, 전력면에서 충분히 싸울 수 있었고, 또 큰 피해없이 이길 수 있었던 전쟁임에도 지휘관들이 오히려 방임(放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신성한 사명과 책임성있는 의무조차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패배까지 모두 군주(君主)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지나친 폄하이고 진실 왜곡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명나라와 청나라간 명운을 건 대규모 전투는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가 대표적인데, 당시 참전한 명나라 연합군(大明聯合軍)은 약 10만5천 정도의 병력이었고, 청나라군은 약 6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임 임금이셨던 광해군(光海君)의 경우, 청나라와 명나라(大明國)간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고, 고의로 싸움이 시작되면 항복할 것을 지휘 장수인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 강홍립(姜弘立)에게 명령했으나, 실제로는 청군과의 전투 시작 과정에서 이미 13,000명의 파견 조선군 중 상당수 조선군이 60%이상 전멸한 상태에서 5,000명만 이틀간 포위로 인한 굶주림으로 결국 항복(降伏)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고의로 거짓 항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지 먼저 의문이고, 또한 일부 국내 역사학자들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中立外交) 또는 실리 외교(實利外交)라고 주장하는데, 얼마나 누더기같고 엉터리의 주장이었는지 확인시켜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청군 진영에 제공함으로써 이후 더 큰 전쟁을 막았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명나라의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처참하게 전사한 약 8,000명의 조선군들은 강홍립이 광해군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고의(故意)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을 전사시켰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정말 사실입니까? 왜,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항복하지 않은 것입니까? 당시, 억울하게 전사한 수많은 조선군들은 누가 위로(慰勞)해줘야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 본다면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는 전혀, 고의적 항복이라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참한 전투 패배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양심은 있을까?
그리고, 만약 정말 광해군이 청나라에 대해 거짓 항복할 예정이었다면 무엇때문에, 그토록 파병된 조선군을 굶겼는지도 의문입니다. 실제로,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은 1619년 1월 이후, 처음 보급이 된 것은 1619년 3월 1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당시 보급은 평안도 관찰사 박엽(平安道觀察使 朴燁)과 분호조참판 윤수겸(分戶曹參判 尹守謙)이었는데, 태업(怠業) 때문에 무려 2개월 가량을 한겨울 혹한 속에서 조선군은 그냥 굶거나 명군(明軍)에게 식량을 빌렸을 정도의 극심한 기아(飢餓) 속에 전쟁을 해야 했으며, 3월 1일에 보급된 군량도 매우 극히 모자란 수준이었는데, 거짓 항복할 예정이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군량 보급을 제대로 안한 것인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르후(Sarhu) 전투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전장(戰場)에 투입된 조선군 총병력 18,000명 중 기병(騎兵) 5,000명의 후방 병력(後方兵力)은 보급선(補給線)을 지키면서 후방 정찰(後方偵察)과 군량 조달(軍糧調達)을 전담했지만, 박엽과 윤수겸의 태업 때문에 와해(瓦解)되어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머저 13,000명 중 20% 정도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 생활 중 처형(處刑)되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총 조선군 참전 군인 중 7,000명이 전사(戰死), 4,000명 포로(捕虜)인데, 900여 명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500여 명은 포로 신분으로 범죄를 저질러 학살(虐殺)당했습니다. 조선으로 생환한 병력은 2,700명도 1년 후에 겨우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실리적 외교를 위해 고의로 항복한 군대의 모습입니까?
이러한 상황이 결국, 훗날 벌어지게 될 병자호란에서 청군이 쉽게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조선의 북방을 마음대로 유린(蹂躪)할 수 있는 단초(端初)가 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이 청나라에게 일부러 실리 외교를 위해 항복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말하는, 매우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언사(言辭)이면서, 지극히 우매(愚昧)한 의견이라는 점 여러분은 아셨으면 합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좌영장(左營將)이었던 선천군수 김응하(宣川郡守 金應河) 장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처절했던 전투 상황에서 청군 기병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부분의 우리 조선군이 전멸을 당하고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혼자 남게된 김응하 장군은 버드나무에 의지하며 큰 활 3개를 들고 싸웠는데,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웠고 칼이 부러지자, 이번에는 칼자루만 들고 버드나무 아래에 지쳐 쓰러져 전사한 것으로 실제로 보고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모습은, 이미 몸에 수십 개의 화살과 창을 맞은 상태였으며, 가슴팍을 창이 관통하기도 했었지만 활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청나라의 청군들도 그의 분전(奮戰)에 감복(感服)하여 김응하 장군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고, '의류장군(依柳將軍)' 혹은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김응하 장군은 특히 죽기 직전, 전포(戰袍)를 찢어 전사일자(戰死日字)를 혈서(血書)로 써서 그가 타고 온 말의 목에 맨 뒤 "집에 돌아가서 전하라"하고 죽었는데, 말이 3일만에 집인 강원도 철원(江原道 鐵原)에 도착하자 동생인 김응해(金應海)가 김응하 장군의 전포를 매장해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또한 전포를 전달한 말은 여물을 먹지않고 굶어 죽어, 사람들은 관을 만들어 말을 매장해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반면, 강홍립은 실리 외교라는 허울 좋은 명목하에 정작 오도도원수였던 강홍립 본인은, 포로 신분에도 오히려 항복한 대가(代價)로 객장(客將)의 대접을 받았고, 청나라측의 주선으로 허투알라(Hetuala), 후의 만주족(滿洲族)이 흥경(興京)이라고 하는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건국한 곳에서 첩까지 얻어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과 국내 학자들이 말하는 중립 외교이고 실리 외교의 실태입니다.
자신이 데리고 갔던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학살로 전멸하고 있는데, 본인은 중국에서 첩까지 얻으며 편안하게 두 집 생활을 했다?
이것이, 과연 역사 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광해군의 업적, 실리 외교였는지 분명하게 답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3년 뒤에 엉터리같은 광해군은 쫓겨나고 폐위(廢位)가 됩니다.
만약, 무엇보다도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광해군의 의도인 중립 외교로 명나라와 청나라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이어갔을 경우, 그래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그대로 조선의 국격(國格)과 외교권(外交權)을 그대로 인정해줬을지 의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제될 조건은 조선이 청나라를 명나라처럼 상국(上國)으로 모신다는 맹세(盟誓) 및 맹약(盟約)이 전제되어야 할 것인데, 광해군은 정말 그럴만한 용의(用意)까지 진실(眞實)로 진심에 있었는지 역시 역사 학자들은 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가 병자호란을 지금 언급하는 이유는, 만주에서 여진족(女眞族)이 스스로 후금으로 통일하여 후에 청나라가 되는 국가와 조선은 이미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에 대해 사전(事前)에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연,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을까. 오히려 사르후 전투에 파병된 군대는 당시로서는 인구대비 매우 큰 병력인 약 2만에 해당하는 조선의 정예병(精銳兵)들이 특별하게 차출(差出)되어 만주로 파병된 사례인데, 2만에 가까운 정예 병력이 한 순간 타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과연 조선이 제대로된 군사력을 빠른 시일안에 회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청군의 조선 침략의 길을 열어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원래 조선의 조총부대(鳥銃部隊)는 훗날, 1654년과 1658년의 나선정벌(羅禪征伐)에도 확인되는 사례입니다만, 매우 뛰어난 사격술(射擊術)을 가진 것으로, 명나라 및 청나라 중국 정부에도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정평(定評)이 있던 우리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군사력(軍事力)이었습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시의 외교적으로 명나라(大明國)와 조선(朝鮮)과의 조공(朝貢) 관계가 지금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과 대한민국 공화국간의 한미 상호 방위 조약(ROK-US mutual defense treaty)과 같은 관계와 같다고 가정(假定)해 볼 때, 그리고 비유를 하여 여진족을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과 같은 작은 소국으로 가정하여 미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고 가정한다면, 대한민국 공화국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광해군처럼 양쪽 눈치만 보며 모른 척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당시의 국력 수준으로 볼 때, 그리고 조선 입장에서 예를 들어 미국과 같은 국력의 명나라가 북한과 같은 여진족(女眞族)에게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할 것이라고 예상할 사람이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혹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도 없었겠지만, 그것은 앞으로도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재건회가 유교(儒敎)와 단군교(檀君敎), 그리고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포함하여 영광스러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재건(再建)하고 역사를 복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공화국 국민의 인성(人性)을 먼저 복원하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영국(英國)이나 일본(日本)처럼 단순히 지나온 역사가 오천년(五千年)인 나라가 아닌 영혼(靈魂)과 문화(文化)가 존재하는 앞날의 오천년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 가장 큽니다.
당시에 큰 명제(命題)였던 명분(名分)으로도 수 천년의 유교문화(儒敎文化)의 뿌리(根源)이며 중화 문명(中華文明)의 종주국(宗主國) 문화가 보잘것없고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문명(文明)도 없는 족속(族屬)들에게 갑자기 패배하여 문화가 말살되는 상황에 대해서 과연 소중화(小中華)를 내세우고 가장 큰 명분으로 살아왔던 조선의 유학자들 입장에서 과연 여진족의 중국 점령에 대해 반기고 찬성할 사람이 있을 수 있었을까? 명나라를 지금의 미국으로 대비(對比)시켜 생각을 한다면 명확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물론, 같은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우리의 민족적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여진족인 청나라가 거대한 한족(漢族)의 중국대륙(中國大陸)을 점령하고 통일하는 일에 대해서 결코 반대하거나 또는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유한 종교가 없는 민족은 설사 타국을 무력으로 점령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타민족에게 동화(同化)되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예를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이미 무수히 많이 봤습니다. 바로 여진족이었던 만주족이 거대한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세워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지금 만주족은 중국 한족에 동화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만약, 우리 조선족(朝鮮族)이 같은 방식으로 중국대륙을 점령하였을 때도 만주족(滿洲族)과 다를까?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재건회는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솔직히 민족종교(民族宗敎)라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고유한 단군교(檀君敎)같은 민족종교를 천시(賤視)하고 금기시(禁忌視)하는데, 타민족이라고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까.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지금까지 114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우리는 아직도 남은 언어의 일본어(日本語)와 불교 잔재, 영어(英語)와 기독교(Christianity) 잔재를 지금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한번 정확하게 당시의 상황으로 이해를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내 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이고 사리판단(事理判斷)이나 상황인식(狀況認識)면에서 지극히 인지력(認知力)이 뒤떨어지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 재건회는 본 카페에 올리는 글들에 대해서는 모든 글들이 최대한 객관적이고 지극히 명확한 근거가 아니라면, 글을 올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금일, 작성하고 있는 숭렬전 관련 글 역시 배경이 남한산성이기 때문에 관련 의견이나 객관적 사실들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였던 것이고, 특히 역사적으로 잘못되고 왜곡된 내용에 대해서는 시정(是正)하는 차원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는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다시 숭렬전에 대한 이야기로 계속 이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숭렬전은 지금의 남한산성내 원래 세워졌던 것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1464년 세조대왕 10년에 천안(天安)의 직산현(稷山縣)에 소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면서 전후에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게 되었고, 결국 고심(苦心)끝에 고른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습니다.
특히, 인조대왕이 숭렬전을 세운 1638년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1년 뒤에 일로 당시에는 온조왕사(溫祚王祠)로 건립되었으며, 1661년에 지금의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에 다시 1795년, 정조대왕(正祖大王) 19년에 임금께서 숭렬(崇烈)이라는 전호(殿號)를 내리셔서 숭렬전으로 사액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역대 시조묘, 즉 전국 팔전 가운데 북한(北韓)에 소재(所在)하고 있는 숭령전(崇靈殿)과 숭인전(崇仁殿)은 한국전쟁(the Korean War)으로 폭격(爆擊)받아 파손(破損)되었던 것을 1954년에 복구하였고, 특히 숭인전은 1977년에 숭령전 옆으로 옮겨서 이건(移建)된 건축물입니다. 다음으로 휴전선(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이남 남한(南韓)에 위치하고 있는 숭의전(崇義殿)은 역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全燒)되었던 것을 1973년 숭의전 복원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폐허(廢墟)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고, 현재 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해 있는 숭덕전(崇德殿)은 1928년에 새롭게 중건(重建)한 건축물이며, 숭혜전(崇惠殿)은 고종대왕(高宗大王) 연간인 1887년 건축된 전각인데, 역시 숭신전(崇信殿)도 고종대왕 연간인 1898년에 처음 세워서 1980년에 월성(月城)에서 이전하여 건축된 건축물입니다. 김해시(金海市)에 위치해 있는 숭선전(崇善殿)은 고종대왕 연간인 1878년에 처음 세웠으나 1987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을 정도로 전국 팔전 중 사기(四基)가 모두 19세기 고종대왕 연간에 신축되었거나 1948년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 이후에 재건되었습니다. 반면, 숭렬전은 유일하게 17세기에 이건한 뒤에 지은 건물이 원형 그대로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국팔전 중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성이 매우 중요한 사묘(祠廟)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만약, 숭렬전이 다른 팔전들처럼 읍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면 지금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보전될 수 있었을까.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조대왕께서 숭렬전을 특별히 남한산성에 세우신 이유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166(忠淸南道 天安市 西北區 稷山邑 郡西里 166)에는 온조왕 사당(溫祚王 祠堂)을 특별히 2015년 5월 20일에 새로 건립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축된 사당의 현판(懸板)을 보면 한글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한글로 현판을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한글보다는 한문이 본래 사당의 목적(目的)과 격식(格式)에 맞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당이 세워지려면 먼저 왕릉이 먼저 확인이 되고 특정이 되었을 때, 릉을 기념하는 사당이 존재할 수 있는데 아쉽게 온조대왕의 릉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국 팔전 중 유일하게 백제 시조의 왕릉만 발견이 안되고 있는 것인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1429년인 세종대왕(世宗大王) 11년 7월에 직산현 관아(稷山縣 官衙) 동북쪽 사이 5리에 사당(祠堂)을 세워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을 따른다면 지금 2015년에 건립된 온조왕 사당은 젼혀 원래 위치가 아닌 오히려 반대 방향임을 알 수 있고, 추정한다면 직산 사산성(稷山 蛇山城) 동쪽 끝자락인 군동과수원(郡東果樹園) 자리 부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참고로, 직산현 관아는 인조대왕의 왕후(王后)이신 장렬왕후(莊烈王后)께서 태어나신 탄생지(誕生地)로 알려져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고 지금은 비록 4동의 건축물만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객사(客舍) 19칸, 군기(軍器) 6칸, 동헌(東軒) 14칸, 내아(內衙) 30칸 등 많은 상당한 규모의 관아 건물로 구성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선조대왕(宣祖大王) 36년인 1603년에 충청감사(忠淸監司) 유근(柳根)이 백제의 시조이신 온조대왕의 분묘(墳墓)를 직산(稷山) 땅에 세웠다는 기록이 또한 있는데, 지금 현재 상태로는 온조대왕의 릉 역시 전혀 찾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만, 단지 추정을 한다면 온조대왕의 분묘 역시 온조대왕의 사당 뒤쪽에 당시 충청감사께서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1603년에 조성한 온조대왕의 왕릉도 실제 릉이었다기 보다는 가분묘(假墳墓)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저희 재건회 입장에서 본다면 설사 가분묘라고 하더라도 온조대왕의 왕릉을 발굴하여 복원하여 기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온조대왕의 왕릉과 사당에 대한 정확한 위치나 고증에 관한 고견이나 견해도 사실은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위례성(慰禮城)의 위치를 천안으로 가정했을 때의 가정일 뿐, 현재 위례성의 위치는 학계에서 정확하게 검증되거나 입증된 사례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松坡區 風納洞)에 위치해 있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 소위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볼 때, 백제시대 도성이었다고 할 수 있는 위례성은 풍납토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라면 송파구에 위치해 있던 수많은 적석총(積石冢)과 토광묘(土壙墓) 등이 대부분 난개발로 그야말로 무참하게 파괴되면서 백제의 초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올림픽 공원(Olympic Park)내 올림픽 회관을 올림픽스포츠콤플렉스(Olympic Sports Complex)로 리모델링(remodeling) 하면서 인근에 뛰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백제시대 유적이 나왔음에도 그대로 묻었고, 옆에 장미아파트 재건축에서 나온 역시 백제 유적들은 규모나 유물의 양이 어떤 곳도 비교하기 힘들만큼 완벽에 가까웠지만, 정신나간 송파구청에서는 단칼에 문화재 가치가 없다며 그대로 아파트(apartment)를 신축하는 것으로 강행했습니다.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사실, 서울 송파구내에 위치해 있었던 수많은 적석총들이 사실 백제 왕실의 묘역이었다고 하면 송파구의 동쪽인 하남시 감일동(河南市 甘一洞) 지역의 경우는 백제시대 귀족들의 묘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일지구 개발구역에서는 수많은 백제 유적들이 나타났지만, 역시 아파트 건축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송파구에서는 곳곳에서 백제관련 유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금방이라도 바로 관련 집을 터에 잘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깨끗합니다. 한편으로 본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면서도 발견되면, 바로 무자비한 공화국의 또 정신나간 송파구청에 의해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매우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치 마약(痲藥)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하고 광란적 작태(狂亂的 作態)를 끊임없이 행하고 있는 것은 우리 조국과 민족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는 짓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공화국 시대를 종말(終末)시키고 시급하게 제국의 시대로 다시 회귀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 재건회에서 지금까지 많은 글들을 계속 카페(cafe)를 통해 게재(揭載)하고 하였습니다만, 대부분 문화재 관련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유는, 문화재의 복원이 바로 동이족(東夷族)인 우리 국민의 정신을 복원하는 길이며, 정신이 복원될 때 비로소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천지인 사상(天地人 思想)의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명(命)과 땅의 운(運), 그리고 인간의 정성(精誠) 이것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이며 가치이기도 합니다.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민족 공동 유산이며 후손만대(後孫萬代)에 오롯이 물려줘야 할 동이족 오천년의 유산이 하루 아침에 일본인들보다 못한 멍청한 공무원들에 의해 사라진다면 해당 죄는 과연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송파구청(松坡區廳)에 바랍니다.
부디 이성(理性)을 가지고 그리고, 무엇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인지 부디 인식하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아무리 건축비를 고가로 많이 들여서, 설사 세계 최고급의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도 30년만 지나면 재건축해야 하는 것이 공화국식 아파트 관리 실태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트를 굳이 유적지(遺跡地) 위에 지을려고 사족(四足)을 못쓰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정부는 작은 유적 하나도 발견하면 보전하고, 일본 국민에게 유적지의 모습을 재현하여 전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한국의 공무원들만 등한시(等閑視)합니다. 부디, 발굴해서 나온 백제 관련 유적만큼은 보존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한국에 태어난 사람의 의무이고 사명(使命)이라는 점 반드시 기억하고 각성(覺醒)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참고로 지난, 1993년 12월 12일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忠淸南道 夫餘郡 陵山里)의 절터 목곽 수로안에서 우연히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만약 1993년 당시에 주차장(駐車場)을 건설하려다 미처 발견되지 못하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되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백제 금동대향로와 같은 국보를 눈으로 감탄하며 확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일이 지금도, 그리고 이러한 황당한 작태를 공화국 정부는 여전히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또한 우리가 엄청나게 미워하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의 곤고구미(金剛組)라고 하는 기업은 비록 2006년 7월 13일에 폐업하였으나 무려 1,429년의 엄청난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만큼은 아니라도 오랜 역사를 가질 수 있는 전문 목조건축 기업을 국가가 지정하고 보다 크게 육성하여 궁궐 건축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교 사원(儒敎祠院)과 불교 사찰(佛敎寺刹) 등을 전문적으로 시공하고 중건하는데, 한국식의 전통 건축양식을 오래 유지 보전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국가가 인정하고 역사성을 세계가 인정한 기업이 복원하였을 때, 비록 중건하거나 복원하더라도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지, 아무 기업체에 맞겨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땜질식 수리하고 복원하는 것이 어떻게 문화재를 복원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문화재라고 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숭례문(崇禮門)을 비롯하여, 경복궁(景福宮) 복원 공사 등 문화재 복원 공사에서 해마다 나오는 문제점들은 정말 수준 미달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사라지고 있는 문화재들과 유적지들에 대한 절대 보존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국가적 사안임을 멸절될 공화국에서는 명심하고 지켜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금,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의 유적과 보물과 국보가 공화국 공무원의 일상적인 업무 태만(業務怠慢)과 비이성적인 광란적 작태로 사라진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지금 강원도 춘천시(江原道 春川市)에 위치해 있는 레고랜드(LEGO LAND)도 사실은 고조선시대 중도 유적지(古朝鮮時代 中島遺跡地) 위에 그대로 건축해 놓은 미친 건축물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공무원들의 모습입니까.
본론적으로 백제관련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몇 일을 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일본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해야 할 것이고, 후백제인 견훤대왕(甄萱大王)과 관련한 이야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면(紙面) 관계상 더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숭렬전의 제례(祭禮)는 현재 광주시(廣州市)와 하남시에서 유도회(儒道會)를 중심으로 제향(祭享)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재건회에서 바라는 점은 소위 전주 견씨(全州甄氏)라고 할 수 있는 견씨들의 후손들이 광주, 하남 유도회와 함께 제향을 드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제안(提案)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견훤과 백제 왕실의 혈통간 관련성 문제는 이견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백제를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를 했던 마지막 인물이 바로 견훤이었고, 백제의 왕실 성씨라고 할 수 있는 백제 부여씨(夫餘氏)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 관련 성씨는 견씨밖에 없다는 점도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부디, 재건회의 충심(衷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역사 백제의 역사성(歷史性)이 오래토록 영구히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동참과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한제국의 복원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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