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고속도로 대구에서 춘천방향 단양휴게소에서 가면 휴게소 뒤편으로 단양적성이 보인다. 이 성으로 오르다보면 작은 비각 안에 ‘단양적성비’를 볼 수 있다.
단양은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다가 삼국시대에는 잠시 백제에 이어 곧 고구려에 속해 적산현(赤山縣)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단양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551년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의 영역이있다. 고려 축숙왕 때인 1318년 단양군으로 승격되었는데, 단양이란 이름은 연단조양(練丹調陽)에서 유래되었다. ※연단조양 : ‘신선이 산다는 고을’이란 뜻이겠다
단양적성비는 충북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 적성에 있는 진흥왕 때인 545년에서 55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고비(古碑)다. 높이가 93cm, 윗너비가 107cm, 아랫너비가 53cm며 위가 넓고 두꺼우며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아들고 얇아진다.
비문은 전체 22행으로 1행에서 19행까지 20자씩 380자이고, 20행에서 21행까지는 19자씩 38자이다. 마지막 22행은 12자로 전체적으로 430자인데, 판명이 가능한 글자는 284자이다. 그런데 석비 주변에서 옛 건물터와 비편, 기와, 토기편, 금속제 유품 등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비편은 일부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어 비의 윗부분이 둥근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비편 중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모두 21자가 판명된다. 그래서 단양적성비의 판명 가능한 글자는 모두 305자다.
단양적성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비의 내용인데. 이 비는 가로세로 간격을 맞추어 새겼지만 막상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가 않고 문체 자체도 어려워 판독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으로는 왕경인 10명, 이사부, 두미, 서부질, 거칠부, 내례부, 고두림, 비차부, 무력, 도설, 조흑부 등이 등장하는데.. 이사부는 지증왕대에서 진흥왕 대까지 북방개척에 맹활약했던 주역이며, 거칠부는 진흥왕 대 후반기부터 이사부의 임무를 맡았고, 비차부는 551년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 10군을 탈취할 때 출정한 장군이며, 무력은 백제의 동북지방을 공취하여 샤로 설치한 신주(新州)의 군주가 된 장군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된다.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 적성비는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인의 고관에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사업에 충성을 다한 ‘야이차’를 공훈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을 적고 있다.
이 적성비는 국왕이 직접적인 순행비가 아닌 척경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건립연대는 비문의 첫머리 네글자가 멸실되어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대체로 비문에 등장하는 왕경인의 관등으로 보건데 551년보다 앞선 545년에서 550년 사이로 추정된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울 휜님들 트레킹 전에 준비해 드린 자료를 숙지하시고 보도하시면 더 의미가 있는 걸음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매헌님이 몇년전 적성비를 탁본해 온 것이 있었는데 어디 두었는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ㅠㅠ
찾으면 사진 찍어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