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데 그건 좀…어렵네요.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군요.
아시다시피 중국 사상이 행동을 지향한 적은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행동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 중국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마치 평등 사상이 1789년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사냥감을 하나 입에 문 셈이죠. 어쩌면 황색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상황은 같을 겁니다.
일본에서는 독일 연사들이 니체 사상 강론을 시작했다 하면 광신적인 학생들이 바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기도 했으니까요.
광저우에서는 사정이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건 아니지만 어쩌면 훨씬 더 심각한 지경입니다.
예전엔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개인주의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짐꾼들마저도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자각하는 중인 거죠…
대중 예술이 있듯이 대중 의식이라는 게 있지요.
그렇다고 천박 하다는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겁니다.
보로딘의 선전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분들이 노동자들이고 여러분들이 농민들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말이죠,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나라를 지탱하는 강력한 힘인데도 매 맞고 굶어 죽는 형편이니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죠.
그들은 노동자로 그리고 농민으로 이제껏 너무나 멸시당해 왔던 겁니다.
그들은 혁명이 이대로 끝나 버리는 건 아닌지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그토록 떨쳐 버리고 싶었던 박해를 다시 받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웠던 거지요.
반면에 가린의 민족주의적 선전은 그들에게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가린의 선전은 분명치는 않지만 뭔가 감동적이면서도 폐부에서 우러나오는(더구나 전혀 예측 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그는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그들에게 가능성을 부여했는 데 이를테면 그건 바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존엄성과 자신들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그런 가능성이었던 겁니다.
얍삽한 고양이 같은 우스꽝 스러운 얼굴에 넝마 조각 따위나 걸치고 밀짚모자를 쓴 인력거꾼 십여 명이 지원병으로서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고 그들 주변 군중에게서 존경받는 모습을 봐야 우리가 쟁취해 낸 게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건 토지를 분배한 덕분이었죠.
한데 이곳의 혁명은 민중들 각자에게 각자의 삶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 어떤 서구 열강도 이에 맞설 수는 없을 겁니다…
증오심이라는 것, 모든 게 바로 이 증오심이란 걸로 설명될 수 있겠죠.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우리 지원병들이 광신적인 이유야 나열하자면 수없이 많겠지만 우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됐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자기들 인생에 침을 뱉을 수밖에 없는 거구요…
보로딘은 아직도 그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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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이 아주 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말이나 하는 사이인 거죠, 뭐.
서로 보완도 해 주는 사이입니다. 보로딘이 행동하는 유형이라면 "
"가린은요?"
"행동할 수 있는 유형입니다. 필요하다면 말이죠.
잘 들어 보세요. 광저우에는 두 가지 유형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쑨원의 시대, 즉 1921년, 1922년에 행운을 찾거나 도박하듯이 자기 인생을 걸고 중국에 온 사람들이죠.
그들은 그야말로 모험가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들에게 중국이란 어쨌거나 그 들이 몸담은 무대와도 같은 겁니다.
그들에게 혁명적 사고란 외인부대 병사들에게 있는 군대 취미와 맞먹는 거고요.
사회 생활에 결코 순응할 수는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대단히 많은 데다가 자기들 인생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안 해 본 일 없이 두루 거친 후에 이제는 봉사하기로 마 음을 먹은 겁니다.
반면에 보로딘과 함께 온 사람들, 즉 직업적 혁명가들에게 중국은 원석 같은 곳이죠.
첫 번째 부류는 선전부에서, 두 번째 부류는 노동 활동이나 군대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가린은 첫 번째 유형들을 대표하고, 또 통솔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그들이 강인함은 부족하지만 훨씬 더 똑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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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빠르게 달려서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다.
구석에 몸을 처박고 두 팔로 상체를 거의 감싸다시피 하자 오늘 저녁 식사 때 나눈 민주주의에 관한 잡담들 이 마치 귓가에 아직도 울리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한 물간 구호들이 이곳에서는 녹이 다 슬어 버린 낡은 증기선처럼 흘러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구호들이 이곳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대부분 노인들인 그들에게 불러일으킨 진지한 열정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게 보인다…
더 이상 감추고만 있을 수 없다 보니 상처가 하나둘 터지듯 만천하에 공개돼 버리고 만 홍콩발 전보들의 배후로서 이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광둥 위원회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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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생각을 좀 해 봐야 해. 왜냐,
너도 잘 알겠지만 나한테 장 그라브는 그냥 인간 한 명이기만 한 게 아니야.
그는 내 청춘이야… 한땐 이런저런 꿈을 꿨지만 이젠 장난감 새나 돌리는 신세라…
그때가 지금보다는 좋았지. 하지만 뭐 어쨌건 생각을 잘못했던 거야.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냐?
그러냐? 그래, 우리가 틀렸던 거라고. 왜냐, 내 말 잘 들어.
단 한 번뿐인 인생인데 사회 체제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건 아니지…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진짜 원하는 게 뭔질 아는 거야. 그거라니깐.
만약 네가 대법관 머리통 위에다 폭탄을 하나 터뜨린다면 말이지, 그자는 다 터져 뒤져 버리겠지, 그럼 잘한 거라고.
하지만 만약 네가 정치적 이념을 알릴 마음으로 신문을 하나 낸다면 말이지, 어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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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부는?"
"광둥 정부 말인가?"
"그래."
"저울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한쪽으로는 경찰과 조합들을 쥔 가린과 보로딘, 다른 한쪽으로는 아무것도 쥔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은 쩡다이,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애를 쓰며 좌우로 흔들리는 저울 말이야.
여보게, 무정부란 건 말일세, 정부가 힘이 없을 때지,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야.
우선 정부가 하나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고 일이 안 될 때는 여러 개 있게 되는 거고 다 그런 거지 뭐.
그런데 가린은 바로 그 정부로부터 확답을 받아내려고 하지.
가린이 원하는 건 자신이 제안한 그 대단한 법령을 정부가 공포하게 하는 거야.
영국 놈들이 겁을 먹은 건 분명해!
항구에 기항할 배 한 척 없는 홍콩에다 중국으로 가는 선박들의 입항마저 금지된 홍콩이라면 이미 끝장난 항구가 아닌가!
생각 좀 해 보라고.
예전엔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영국인들이 이곳에 군사 개입을 즉각적으로 요청했었지.
한데 지금은 세상에!
만일 가린이 이번 일을 해낸다면 그 자는 영리한 사람이 되는 거야, 가린 말일세.
하지만 그게 쉽진 않아…쉽지 않다고……"
"왜 그런가?"
“글쎄…설명도 쉽지 않군.
자네도 알다시피 정부야 우리 편에 있고 싶겠지.
아니 가능하다면 군림하고 싶을 테지.
하지만 정부가 저만치 뒤에서 우리를 따라온다는 건 말이지, 정부가 영국이 되었건 우리가 되었건 잡아먹힐까 봐서 두려운 거라고.
만일 우리가 오직 홍콩을 상대로만 싸운다면야 상관없는데 문제는 내부라고, 내부라니까!
놈들이 우리를 잡으려는 건 바로 우리 내부 안에서부터라니까…
좀 더 가까이에서 문제를 살펴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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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당시에 말이야, 거물을 하나 잡아들였는데 그자가 '아니, 경관님들. 저는 정치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답니다!'라고 외치자 뭘 좀 아는 경찰이 '바로 그래서지!'라고 대답하며 그자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는 거야.”
"그래서?"
"늘 같은 사람들만 고통을 겪을 수는 없지.
예전 어떤 축제 때가 생각이 나는군. 그때 바로 쟤네 같은 애들을 봤지…
아! 총알 몇 방이면 저놈의…뭐라고 할까…웃는 저놈 낯짝을 박살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처먹는 거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것들 낯짝을 좀 보라니까!
그래, 인간다운 삶이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저자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고!
드물다니까, 아인 멘슈…인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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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밤 너무 예민하군…
보통 피곤한 게 아니라니까! 그런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란 쉬이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니야…
고통이 끝난 뒤에 바로 그 인간을 버리지 말아야 할 거야…하지만 어려운 일이지…
그들에게 그러니까 모두에게 혁명이란 뭘까?
혁명의 슈티뭉이라는 거 말이야, 너무나도 중요한 거지, 그건 도대체 뭘까?
자네 대신 내가 답하지.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몰라.
왜냐하면 우선은 가난이 너무나도 만연해 있기 때문인데, 단지 돈이 없어서 그렇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쨌거나…살아남는 건 언제나 저 부자들이고 나머지들은 그러지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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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를 만드는 건 영혼이 아니라 정복이라니까."
그가 언젠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빈정거리는 투로 "불행히도 말이야."라고 토를 단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며칠 후에(그는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회상록』을 읽고 있었다.)
"특히 우두머리 영혼을 유지시켜 주는 게 바로 정복욕이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심지어 이렇게 말 했다니까.
‘어쨌거나 나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한 편의 소설이 아닌가!’
천재도 썩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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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꿈속 같은 것이 아니라 이상한 희극, 약간 비열하고 허황된 것투성이인 희극을 보는 듯한 느낌 말이다.
중죄 재판소만큼이나 합의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곳은 오직 연극뿐이다.
배심원들이 요구한 판결문을 재판장이 피로에 지친 학교 선생 같은 목소리로 읽자, 평정을 유지하던 장사꾼 열두 명이 놀라고 갑자기 감격에 겨워 하며 정의에 따라 한 치 실수도 없이 열의를 다해 판결을 내리겠다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 역력한 데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판결을 내리려는 사건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들을 조금도 동요시키지 않고 있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일부 증인들, 주저하는 다른 사람들, 재판장이 심문하는(문외한들 사이에서 전문가가 보이는 듯한) 태도 그리고 변호인 측 증인들에게 말할 때 그가 드러내는 반감 등 모든 것들 이 피에르에게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과 이러한 의식에 관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 그는 과도하리만치 관심을 기울였다. 변론술이 그에게 흥미진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싫증이 났고, 그러자 마지막 증인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을 했다.
'심판을 한다는 건 필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장과 검사가 이 사건의 결과를 배심원들이 모두 다 잘 아는 범죄의 개념으로 몰고 가려고 애쓰는 게 그에게는 어찌나 우스꽝스러운 흉내 내기로 보였던지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공간에서 정의란 너무나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또한 법관, 헌병, 방청객들이 어찌나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던지 분노가 들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 웃음이 무시당하자 피에르는 광신적인 군중 앞에서, 인간의 부조리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현장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비통한 무력감과 경멸 그리고 환멸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엑스트라 역할에 짜증이 났다.
멍청한 관객이 동의한 터무니없는 가짜 심리극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들어가서 단역 배우 노릇이나 하는 듯 한 기분이었다.
넌더리가 나고 기진맥진해져서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까지 상실한 그는 체념이 뒤섞인 초조함으로 연극이 어서 빨리 끝나 고역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렸다.
자기 감방에 홀로 있게 되었을 때에야(심리가 있기 이틀 전에 그는 그곳에 수감되었다.) 심리의
특징이 그에게 중압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그것이 재판임을 이해한 것이다.
자기 자유가 그 재판에 달려 있으며 의미 없는 그 희극은 수치스러운 애벌레와도 같은 생활을 끝없이 하도록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언도하면서 막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감옥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충격은 덜했지만, 처지가 좋아지리란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도 제법 긴 세월을 이렇게 보낸다고 생각하니 자기 안에 불안감이 솟구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더 무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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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가 나쁘다고도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보지 않아.
나는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이건 정말 다른 거야.
내가 이 머저리들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석방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건 내가 내 운명 때문에라도(내가 아니라 내 운명 때문에라도)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감옥살이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부조리해.
'상식적이지 않다.'라는 말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아.
이런 세상을 바꾼다는 건 내 관심 밖이야.
나에게 충격적인 건 이 사회에 정의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언가 더 심각한,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무언이건 간에 나는 어떤 형태의 사회도 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
나는 무신론자인 만큼이나 반사회적인 사람일세.
만일 내가 학자라면 이 모든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평생에 걸쳐서 나는 사회 질서를 필요로 할 테지만 나라는 사람 전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거야.
곧 이어 그는 이렇게 썼다.
다른 무엇보다도 강열한 열정, 정복해야 할 대상들은 더 이상 안중에도 없는 열정이 하나 있지.
완벽히 필사적인 열정.
권력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들 가운데 하나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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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러시아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서야."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방금 전에 러시아 소설을 진열해 둔 서점 앞을 지났다.
"그들이 쓴 책에는 흠이 하나 있는데, 회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야.
그 작가들한테는 하나같이 결점이란 게 있어.
그건 단 한 번도 살인을 저질러 본 적 이 없다는 거지.
만일 그들 소설의 등장인물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괴로워 한다면 그렇게 했는데도 그들이 보기
엔 세상이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하자면 '거의' 말이야.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이 완전히 변해서 그들의 시각이 달라지고 결국엔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인간의 세상이 되는 걸 그들이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변하지 않는(자네가 원한다면 '충분하진 않더라도'라고 해 두지.) 세상이란 거, 나는 그런 세상의 진실이란 믿을 수가 없어.
살인자에게 범죄란 없어, 오로지 살인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기야 살인자가 명석한 사람이라야 그렇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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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들이 패배자들이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이야.
그래, 전체를 놓고 본다면야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인정 있고 인간적이지.
그게 패배자들의 미덕이야…
정말 확실한 건 부르주아인 내가 부르주아에 대해서는 증오로 가득찬 혐오감만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부르주아가 아닌 다른 이들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란 우리가 함께 승리를 쟁취하자마자 그들이 비열해질 거라는 사실이지…
우리의 공통점이란 우리의 투쟁일 뿐이라고.
하기야 그보다 확실한 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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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오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알겠지.
하지만 자네와 헤어지던 당시 내가 품었던 희망을 실현시켜 주는 삶을 이곳에서 찾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게.
내가 꿈 꿨고 지금 나에게 있는 권력은 오로지 농사꾼 같은 노력, 지칠 줄 모르는 활동력, 우리에게 부족한 거라면 사람이건 정보건 상관없이 가져다가 우리가 보유한 것을 보강 하려는 계속적인 의지로만 쟁취할 수 있는 거야.
어쩌면 이런 내 글에 자네는 놀랄 테지.
나에게 부족하던 끈기를 이곳 동지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고 이제는 나도 그걸 갖췄다고 보네.
나의 이런 힘은 나와 직접적으로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내가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데서 나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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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것이다.
가린은 그를 놓고 간디를 떠올리는 게 틀리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활동이 마하트마 간디와 비교해서 분명 훨씬 더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나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정치를 넘어서 인간 영혼을 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한다.
두 사람 모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냄으로써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활동이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다.
간디가 행한 업적의 중심에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열망이 있지만 쩡다이에게 그와 유사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는 본보기도 지도자도 아닌 조언자가 되고자 할 뿐이다.
쑨원의 사망으로 자기 일생에서 가 장 침통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에도 그는 순수한 정치 시위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으며 의장직을 계승하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책임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중재자 역할이 그에게는 더 품위 있어 보였고 특히나 자기 성격과도 더 잘 맞을 듯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기 활동 전체를 차지할 게 뻔한 직책을 수락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과는 다른 인물 즉 혁명의 수호자가 된다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삶 전체는 도덕적 저항이므로 정의롭게 승리하고자 하는 희망은 그의 동포들에게 만연해 있는 치유 불가능한 뿌리깊은 나약함을 해결할 수 있을 가장 강력한 의지로서만 표출되는 것이다.
어쩌면 현재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나약함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이미 벌써 몇 년 전부터 화난 지방이 영국의 경제 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렇다. 하지만 명분이야 정당할 지 모르나 억압받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이끌다 보니 그는 자기 역할에 부지불식간에 익숙해지고 말았고 급기야 자신이 옹호하는 이들의 승리보다는 자기 역할을 우위에 놓게 된 것이다.
무의식적이었음에 분명하지만 강력했다.
그는 승리하리라는 굳은 결의를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저항에 훨씬 헌신적이다.
억압받는 민중의 혼이 되고 화신이 되는 편이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다. 물론 딸도 없다. 젊어서 일찍 결혼을 했다. 아내가 죽자 그는 재혼을 했다. 그러나 몇 년 뒤 후처마저 죽었다. 그가 죽으면 그에게 제사를 올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때문에 그는 계속 이어지는 아픔, 벗어날 수 없는 아픔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무신론자이거나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는 있지만 삶과 죽음에 처해서 그가 느끼는 고독이 그를 끈질기게 따라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는 명예를 그는 고개를 쳐든 중국에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다.
슬프지 않은가! 한때 부자였으나 거의 한 푼도 없이 죽을 것이고 이 죽음의 위대함은 수백만 사람들 위에 뿌려질 것이다.
최후의 고독…이게 무엇인지 누구나 알고 있다.
바로 이 고독이 하루하루 그를 당의 운명에 더욱더 옭아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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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기에 공들이는 고귀한 희생자 모습"이라고 가린은 말한다.
그가 자기 욕망을 충족하고자 애쓴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히려 배반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결국 자기 성향, 오랜 자기 습관, 그리고 자기 나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자기 행동에서 논리적인 결과들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마저도 망각하고 있다.
결정적인 최후의 투쟁을 계획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은 더 이상 그에게 부과된 임무가 아니다.
마치 열렬한 가톨릭 신자에게 교황이 되라고 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어느 날 가린은 인터내셔널에 대한 토론을 끝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제3인터내셔널이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당시 쩡다이는 모호하면서도 무언가 감추려는 듯이 자기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있을 뿐이었고 가린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이렇듯 분명히 확인할 수 있던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쩡다이에게 행동력이 있다고 믿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떤 특별한 행동, 스스로를 이기는 행동 즉 극기뿐이다.
그가 병원을 건립 할 수 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무욕한 성정으로 난관들(심각했으나)을 극복 해 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전부 다 버려야 했다.
실제로 그랬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낀 나머지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그런 행동은 자선과 일치한다.
하지만 자선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동정심이라면 그에게는 연대감인 것이다.
오직 중 국인 당원들만이 그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덧없는 것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바로 그의 대중 활동에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러한 자세는 솔직히 말하자면 유용한 목적에 이용되기도 해서 무욕한 쩡다이는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신의 성정을 굳이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에는 그저 인간적인 면모로 여겨졌던 무욕이 능란한 연극에 힘입어 그의 존재 이유가 되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증거를 거기에서 찾게 된 것이다.
그의 자기희생은 그의 온화한 성격이라든가 그의 박학다식함과도 잘 어울리는 자존심 즉 과격하지 않은 냉철한 자존심의 표현이다.
대중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절제가 배어 있는 예의 바른 이 노인에게도 강박 관념은 존재한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고 믿는 정의라는 것, 자기 생각과 거의 동일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정의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육욕이나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오로지 정의만을 꿈꾼다.
세상이 정의를 바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정의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고결한 것이고 인간이 가장 먼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불상을 대 하듯이 정의를 믿고 있다.
예전에 그가 필요로 했을 때 정의는 심오하고 인간적이며 단순했으나 지금은 마치 맹목적인 숭배 대상과도 같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정의란 여전히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정의란 일종의 수호신과도 같아서 그것이 없다면 그 무엇도 용감히 도전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면 은밀한 복수를 두려워해야 할지도…
그의 위대 함도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기력을 잃었고 우리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의 쇠약한 육체뿐이다.
가린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쩡다이를 사로잡은 것은 그의 온화함, 그의 미소 그리고 그의 양반다운 기품 아래 감추어진 일그러진 신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자는 우리가 그토록 맹렬히 붙잡고 있는 혁명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상함에서 떨어져 나온 잔해들이 여전히 둥둥 떠 있는 편집광적인 꿈속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편집증적인 면이 그의 영향력과 권위를 확대하고 있다.
정의감이란 중국에서 언제나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지만 열광적인 동시에 모호한 것이기도 했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쩡다이의 삶과 연륜은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
마치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쩡다이가 존경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그에게 범접할 수 없다.
더욱이 선전부에서 만들어 놓은 열광적인 분위기는 영국에 대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기세를 잃지 않는 한 투쟁 노선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쩡다이가 이 모든 것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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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광저우에 입항해야 하는 선박들의 선장 모두를 상대로 홍콩 기항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법령이 필요한데, 쩡다이가 현재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는 한 법령은 공표되지 못할 것이다.
홍콩은 영국이다.
천중밍 군대의 배도 영국이다.
쩡다이를 둘러싼 메뚜기 떼 뒤에도 영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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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실패의 본보기나 들어 보려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게다가 제게 너무나 과분한 영광을 돌리시는 그 같은 비교에 감사드립니다.
간디는 자기 동포들이 저지를 과오를 스스로의 고난으로 대신해서 속죄할 줄 아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의가 그의 동포들에게 가져다준 건 채찍뿐이죠."
"가린 씨, 흥분하시는군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냅니까?
가린 씨의 신념과 제 신념 사이에서 중국은 결국 선택을 할 겁니다…”
"중국으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도록 하는 게 바로 우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선생께서 중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중국이 외면하도록 가르치신다면, 다시 말해서 만일 무엇보다도 급선무인 것, 즉 '살아야 한다.'라는 걸 선생께서 인정하려 들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걸 해낼 수 있을까요?"
"중국은 자신을 정복했던 이들을 언제나 굴복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랬죠, 서서히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든…가린 씨. 만일 중국이 정의의 중국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게 되어야 한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제 나름대로) 세워 보고자 애를 쓴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이를테면 말이죠…잠시 침묵. (‘러시아와 같다.'라는 암시.)
중국 생존이 급선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기억만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청조가 제아무리 못된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중국 역사는 존중받아 마땅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역사의 페이지들이 폐망의 인상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가린 씨, 5000년 역사가 비애로 가득 찬 몇 페이지 없이, 그러니까 어쩌면 선생께서 언급한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비극적인 페이지들 없이 흘러갈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그걸 쓰는 사람이 저는 아닐 겁니다…”
그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서 잰걸음으로 문을 향해 간다.
가린이 그를 배웅한다. 문이 닫히자마자 가린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말한다.
"세상에, 주여, 우리를 성인들로부터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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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영역이든 열정의 영역이든 간에 쩡다이에 맞서서 우리가 힘이 모자 라는 건 아니야.
오늘날 아시아 전역은 개인의 삶을 지각했을 뿐 아니라 새로 이 발견한 죽음에 푹 빠져 있어.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한 자기들 삶엔 그 어떤 희망도 없으며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들이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지.
신앙심을 잃어버린 나병 환자들이 샘물에 독을 탄 적도 있다니까.
중국인 다운 삶, 중국 관습, 중국의 모호한 신념을 내팽개쳐 버린 데다가 기독교에 반발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한 명의 훌륭한 혁명가인 거라고.
홍 그리고 앞 으로 자네가 만나 보게 될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들의 경우를 통해서 자네는 그러한 사실을 철저히 알게 될 걸세.
의미 없는 죽음, 속죄받지도 보상받지도 못하는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가난한 생활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 그렇게 해서 특별하고 개인적인 삶, 말하자면 부자들이 누리는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막연히 생각되는 그런 삶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난 거야.
바로 그런 생각들 덕분에 보로딘이 러시아에서 가져온 몇 가지 체제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
노동자들로 하여금 공장 조정 위원들을 직접 선출하도록 한 것도 바로 그런 거지.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더 실질적으로 인간적인 존재감을 성취해 내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특별한 인생을 산다는 감정 말이야.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뭔가 분명히 남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느낌, 그러니까 기독교의 원동력이 되는 감정과 유사한 게 아닐까?
증오심이 이런 감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 광적인 증오심과도 그리 다르 지 않다는 걸 나는 매일 보고 있다네…
만약 어떤 하역 인부에게 자기 주인의 자동차를 보여 준다면 여러 결과가 벌어질 수 있겠지.
하지만 만일 그 하역 인부 다리가 부러진다면…게다가 중국에서는 다리가 부러지는 일들이야 다반사니…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중국인들의 막연한 생각을 결심으로 변화 시키는 거라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야 했지.
물론 점진적으로 말이야, 그래서 바로 그 자신감이 고작 며칠이 지난 후에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말일세.
그들을 전투에 참가시키기 전에는 그들의 승리를, 수없이 계속된 그들의 승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지.
이유야 여러 가지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홍콩을 상대로 하는 투쟁이 훌륭한 예야.
성과는 눈부셨고 우리는 그보다 혁혁한 성과들을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거야.
영국의 상징인 도시를 무겁게 짓누르는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들 모두는 이 투쟁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원하지. 그들은 스스로 승리자라고 여기고 있어.
그러니까 그들은 끔찍한 전쟁 장면, 전쟁 하면 오직 패배만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혐오감을 줄 뿐인 그런 끔찍한 장면을 견뎌 낼 필요도 없는 승리자들인 거라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오늘은 홍콩인 거고, 내일은 한커우 , 모레는 상하이, 그다음엔 베이징인 거야.
천중밍에 맞선 우리 군대에 사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건(물론 앞으로 불어넣게 될 것이기도 하지.) 바로 이 투쟁으로 고양된 분위기라고.
이거야말로 북벌을 떠받치는 힘이 될 거야. 그래서 우리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서사적인 힘이 되어 가고 있는 대중적인 이 열의가 정의라든가 아니면 또 다른 쓸데 없는 이름으로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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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오래된 원한 같은 게 있어, 그래서 나는 혁명에 투신하게 된 거야…”
"하지만 자네는 가난했던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야.
뿌리 깊은 나의 적개심은 가진 자들을 향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자들이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서 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원칙들을 향하는 거라고.
그리고 다른 이유가 또 하나 있지.
내가 아직 사춘기 소년이 던 때 나는 막연한 생각이나 했을 뿐 나 자신에 대한 신념을 품기 위해서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았지.
나는 여전히 신념에 차 있지만 이제는 다른 식으로야.
지금은 증거가 필요하거든. 나와 국민당을 맺어 줄 건 바로······."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내 팔 위에 놓으며 말한다.
"익숙해서거나 무엇보다도 공동의 승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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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위험이 나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유감스럽습니다만 제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하시는군요.
진심으로 유감 스럽습니다. 가린 씨, 저는 선생 계획을 지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심지 어 거기에 맞서 싸우게 될지도…
선생과 선생 동지들이 민중을 위한 선한 목자는 아니라 생각하니까요.
(쩡다이에게 불어를 가르쳤던 사람들이 신부들이었다고 가린이 자기 목소리로 설명한다.)
심지어 당신들은 민중에게 위험하죠. 위험천만하고말고요.
당신들은 민중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과연 누구를 더 좋아해야 할까요?
아이를 사랑하지만 물에 빠지게 내버려 두는 유모와 아이를 사랑하지 않지만 수영할 줄 알아서 아이를 구하는 유모 사이에서 말이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바라보며 예의를 갖추어 답하더군.
'가린 씨, 어쩌면 그 답은 아이의 호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달려 있겠군요.'
‘물론이죠. 하지만 이건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선생은 이십 년 가까이 만중을 돕느라 여전히 가난하신데…'
'내가 일부러.....'
'저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구멍이 다 난 제 구두를 본다면 제가 부정 축재를 했는지 안했는지야 가늠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내가 벽에 손을 대고 그자에게 내 신발 밑창을 보여 줬지.
내가 그자를 당황하게 만든 건 분명하지만 그자는 대꾸할 수도 있었을 거야.
우리 자금이 취약하긴 하지만 새 구두 구입이야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이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은 걸까?
쩡다이도 같은 연배 중국인들처럼 폭력, 성가신 말싸움, 상스러운 표현을 두려워하지.
그자가 양 소매에서 두 팔을 더니 양팔을 벌리는 시늉을 하며 일어서더군. 그게 다야."
가린은 책상 위에 마지막 종이 한 장을 놓고 그 위에 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되뇐다.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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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걸 심판해야 하겠죠. 좋아요. 하지만 내 감정은 안 됩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제 생각엔) 그런 거죠, 정의로운 거.
왜냐하면 가난에 찌들어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이란 길고 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인간들에게 그것을 참고 견디라고 가르쳐 온 자들은 성직자든 아니든 응당 벌을 받아야 해요.
그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몰라요.
그러니 그들이(제 생각으로는) 강제로라도(그는 이 단어를 마치 무언가를 후려치기라도 하듯이 몸을 움직여 가며 강조한다.) 알아듣도록 해야 할 겁니다.
그들에게 군인들을 풀어 놓아서는 안 돼요. 안 되죠.
문둥이들이어야 합니다.
사람 팔이 진흙처럼 변해서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제게 와서 체념을 말한다면, 그렇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바로 그 사람 이 말입니다, 그자가 딴말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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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난이 곧 세상의 전부인 사람들 사이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곳은 중국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최하층의 구렁텅이와도 같은 곳으로 병자들, 노인들, 온갖 부류 약자들, 언젠가는 굶어 죽어 나갈 사람들로 득시글거리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가 나약한 상태에서 형편없는 먹을거리로 연명하는 데였다.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그저 근근이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단 하나 걱정거리인 그런 사람들에게 있
어서 상실감이란 너무나 철저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증오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감정, 마음, 존엄성, 모든 것이 무뎌져 버리고 사무치는 원한과 절망은 제대로 표출되지 않는다.
여기저기 먼지 속에서 나뒹구는 몸뚱이들과 누더기 더미 바로 위에서 선교사들이 준 나무 의족에 몸을 지탱한 채로 눈만 뜨고 있는 그 얼굴들.
하지만 다른 사람들, 기회가 닿아 군인이나 아니면 도적이 될 기회를 얻은 사람들, 아직은 뭔가 한탕 할 수 있는 사람들, 온갖 술수를 부려서 담배라도 피워 물 수 있게 된 사람들에게는 끈질긴 증오가 피를 나눈 형제처럼 존재하는 법이다.
마음속에 증오심을 품은 채 살아가는 그들은 도망가는 부대의 요청으로 약탈과 방화를 마음껏 하게 될 그날만을 기다린다.
홍은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거기서 얻은 교훈도 비참한 세상, 힘 없는 증오심으로 얼룩진 무자비한 세상도 잊지 않았다.
그는 " 세상에는 두 가지 인종만이 있을 뿐이야. 하나는 찢, 어, 지, 게 가난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지."라고 말했다.
권력자와 부자 들을 향한 그의 혐오감은 이미 그가 어렸을 때 만들어졌기에 그는 권력도 돈도 바라지 않는다.
빈민굴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그는 자신이 증오했던 대상이 부자들의 행복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자긍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래서 이렇게도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어."
그가 만약 자기 조상들처럼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기 한 사람의 인생 역정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 했더라면 그는 그러한 사실을 감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직 현재에만 온 힘을 다해 집착하는 그는 더 이상 참아내지도 더 이상 애쓰지도 더 이상 토론하지도 않고 오로지 증오할 뿐이다.
그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달콤한 악마와도 같은 것, 인간에게 천박함, 비겁함, 나약함 그리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속성을 끊임없이 증명해 보이려 애쓰는 악마를 보는 것이다.
분명 그는 자긍심 강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찬 그런 모든 인 간들을 증오하고 있다.
자신 같은 인간을 상대로 그보다 강렬하게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혁명가 대열로 이끈 것은 중국인이 가장 뛰어난 덕목으로 여기는 체면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그는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표현하는데 그러한 모습이 그를 타협할 줄 모르는 단호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한데 이렇듯 단호한 모습은 이상주의자들을 향해서 그가 지닌 극단적인 증오심(특히나 쩡다이에 대한 증오심) 덕에 더욱더 강화된다.
그런데 그의 증오심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면 틀린 것이다.
그가 이상주의자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들이 '문제를 해결한다.'라고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이 개선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자신이 품은 현재의 증오심을 버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채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들쑤시고 다니는 이들에게 그는 분노를 터트린다.
홍, 그자는 자식을 갖는 다든지 자신을 희생한다든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한다든지 하는 부류가 전혀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시궁창 옆에서 먹을 것을 찾게 된다고 할지라도 쩡다이라면 정의를 들먹거리는
훌륭한 노인이 하는 말을 기꺼이 들을 거라고 홍은 말한다.
홍이 고뇌하는 노지도자에게서 보는 거라고는 정의를 내세워 자기 복수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의도뿐이다.
그는 레베치가 털어놓은 모호한 고백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상이라는 허깨비 때문에 유일한 자기 소명을 스스로 외면해 버리고 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장난감 새 따위나 빌려 주면서 인생을 끝내고 싶지도 않고 스스로에게 세월을 짐짝처럼 얹어 주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화베이의 어떤 시인이 읊은 이 시를 듣자마자 그가 바로 외워 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홀로 싸워 이기든 아니면 지리라.
나는 자유롭기 위해 그 누구도 필요치 않노라.
그 어떤 예수가 있어 나를 위해 죽었다 생각지 않기를 바랄 뿐.’
레베치에 이어서 가린의 영향을 받은 홍은 오직 현실주의자가 될 필요성만을 키워 갔으며 그의 현실주의란 분노심으로 가득 차 있고 증오심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마치 기운은 아직 있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폐병 환자처럼 그는 자기 인생을 바라본다.
그러면 극도로 혼란스러운 그의 감정들 사이에서 증오심이 난폭하고 거친 명령을 내리고 이어 하나의 의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오로지 증오심에 봉사하는 행동만이 거짓말도 비겁함도 나약함도 아니다.
말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동뿐이다.
바로 이런 행동의 욕구가 그를 우리의 동지가 되게끔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인터내셔널이 너무 느리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관리한다고 여긴다.
이번 주에도 벌써 두 차례나 그는 인터내셔널이 보호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암살했다.
"살인을 할 때마다 마음속에 신념이 커져서 그는 점차 자신이 얼마나 뿌리 깊이 무정부주의자인지를 깨닫는 거지. 우리가 결별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때가 너무 빨리 오지 않기를 바라!” 가린은 말한다.
그러고 나서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덧붙인다.
"내가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아는 적도 별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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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병이란 건 말이야, 걸려 보지 않는 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사람들은 병이란 맞서 싸워야 하는 어떤 것,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천만의 말씀.
병이란 자기라고, 자기 자신이란 말이야…
아무튼 홍콩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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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11시.
멀리서 북과 징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가운데 일현금과 피리가 느닷 없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귀에 거슬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음조를 달리하며 잠잠해진다.
불티처럼 탁탁 소리를 내면서도 동시에 둔탁하게 들리는 나막신 소리 그리고 징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는 듯한 말소리를 뒤로하고 백파이프 소리가 높은 음인데도 가늘고 단조롭게 이어진다.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댄다.
행렬은 내 앞이 아니라 길가 끝에서 벌어진다.
오리들처럼 고개 돌려 뒤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한 무리 아이들, 구름처럼 끝없이 부옇게 일어나는 먼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박혀 있는 진홍색, 자주색, 앵두색, 분홍색, 석류색, 양홍색 등 온갖 종류 붉은색으로 된 비단 깃발들.
장례 행렬은 보이지 않고 내 눈에는 행렬에 울타리를 둘러치는 듯한 군중만 보이는데…아니, 전혀 안 보이는 것은 아니고 하얀색 광목천을 수평으로 기다랗게 매달아 마치 배의 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높다란 깃대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큰북이 사람들 내지르는 음산한 소리에 맞춰 앞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현수막을 뒤덮은 글씨들이 눈에 띈다. '영국인들에게 죽음을…’
이어서 길 끝까지 울타리처럼 둘러서 있는 인파. 서서히 일어나는 먼지.
망치를 두드리듯 퍼지는 징 소리. 자, 이제는 제물을 바치는 예식 차례다.
열대 과일들을 그려 놓은 거대한 정물화처럼 과일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그 위에 한자가 빼곡히 적힌 명패가 올려져 있다.
한데 남자들이 옮기고 있는 과일도 금방 떨어질 것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며 흔들린다.
그리고 이제는 상여가 지나 간다.
키가 대단히 큰 짐꾼 삼십 명이 어깨에 멘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전통 상여는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데 상여꾼들 머리통이 언뜻 보이고 그들의 잰걸 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절뚝거리며 모두 동시에 다리를 한 번에 똑같이 내딛으면서 이 거대한 검붉은 무리는 천천히 마치 어떤 선박처럼 앞뒤로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데 상여를 뒤따라가고 있는 건 도대체 뭐지…? 마치 광목으로 만든 집인 듯하다…
그렇다. 댓살로 엮어 그 위에 천을 두른 집인데 그것 역시 남자들이 짊어지고 이리저리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재빨리 옆방으로 가서 가린의 책상 서랍 안 쌍안경을 꺼내 돌아 온다.
그 집은 아직도 제자리다. 벽마다 커다랗게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쩡다이의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을 총검으로 찌른 영국인의 발밑에 쓰러져 죽어 있다.
그림 주위로는 주홍색으로 ‘영국 악당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마치 무대 가림막 같은 길모퉁이로 이 낯선 문장이 사라지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작은 플래 카드만 보일 뿐인데 그것들은 마치 배를 뒤따르는 새들 모양 천으로 만든 집 뒤를 따른다.
그리고 그것들 역시 영국에 대한 증오를 토해 내고 있다.
뒤 이어서 등불과 막대기,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자,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마치 울타리처럼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 무리가 서서히 풀어 헤쳐지며 사라지는 동안 북이며 징 소리도 멀어지고 서서히 일던 먼지도 햇빛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몇 시간 뒤 가린이 돌아오기도 훨씬 전부터 그의 연설문 구절이 비서들 입에서 입을 통해 선전부 전체에 퍼진다.
보로딘과 마찬가지로 대중 연설 때 중국어 통역자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가린은 짧은 문장, 정형화된 구호로 의사를 밝히곤 한다.
오늘 사무실에서는 우연히 시도 때도 없이 내 귀에 이런 말이 들린다.
"홍콩은 감옥 간수처럼 비열하게 재산을 빼앗아 굶어 죽어 가는 우리들 앞에서 과시하고 있다.
홍콩, 곳간 열쇠…말하는 사람 앞에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항의하는 자들 앞에 영국인을 쥐새끼 몰듯 홍콩에서 내 쫓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집 창문을 열려고 애쓰는 도적의 손을 도끼로 단번에 잘라 버리는 신사 양반처럼 내일이면 당신들은 제국주의 영국의 잘린 손, 폐허가 된 홍콩을 차지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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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 노동자들이 거리를 지나간다.
그들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데 적위군 만세라고 쓰여 있다.
그들은 7인 위원회가 열리는 강연장 창문 앞으로 향하고 있다.
마치 가축들이 흩어지기도 하고 또다시 한데 모이기도 하듯이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찌감치서 들리는 외침, 산발적이거나 한데 뒤엉키거나 혹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적위군 만세.'라는 외침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아우성과 더불어 중국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압도한다.
내가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중국, 이 중국에서는 마치 열어젖힌 창문으로 도시의 소란과 뒤섞여 들어 오는 후추 냄새가 무언가 썩는 냄새를 압도하는 것처럼, 야만적 이상주의의 물결이 얌전하지만 비열하고 상스러운 짓을 뒤덮어 버리려는 것 같다.
'적위군 만세.’라는 외침과 자기 장례식에 매장된 듯한 다이 앞에서 나의 서류는 온통 비뚤어진 야심, 명예욕, 선거원 무리, 국민당에 도착한 수상쩍은 기부금, 횡령, 아편 밀매 관련 법안, 적당히 은폐된 관직 매수, 노골적인 공갈 협박 따위로 어수선하다.
과거 관료주의로 이루어졌던 이 세계는 이제 삼민주의 원칙을 악용하며 버티고 있다.
혁명가들이 극심한 증오에 차서 비난하는 일부 중국 부르주아지들은 이제 그들과 한편이 돼서 혁명 대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린이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이 모든 것 사이를 잘 지나가야 한다고. 쓰레기 더미 사이를 잘 빠져나가야 하듯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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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던진 몇 마디 말로 실내에는 인간적인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리자마자 알아본 클라인의(키가 큰 바람에 내가 단번에 알아본) 얼굴 한복판에 커다란 자국이 하나 나 있다.
입술이 면도칼로 큼직하게 찢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내 몸의 근육이 또다시 긴장하는데 어찌나 심한지 나는 두 팔로 온몸을 부둥켜안고는 벽에다(나도 마찬가지로) 몸을 지탱한 채 기대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시선을 돌린다.
쩍 벌어진 상처 자국, 시커멓게 응고된 큼직한 핏자국, 뒤집혀 있는 눈알, 시체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이다. 고문을 당한 것이다.
날아다니던 파리 한 마리가 내 이마 위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심지어 팔을 들어 올릴 수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눈은 감겨 줘야지."
가린이 클라인의 시신을 향해 다가가며 거의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늦을세라 서두르며 거칠게 허둥지둥 파리를 쫓아낸다.
가린이 두 손가락을 가위처럼 쩍 벌려서는 흰자만 보이는 클라인의 두 눈에 가져간다.
그의 팔이 맥없이 축 늘어진다.
"놈들이 눈꺼풀을 잘랐나 봐.”
==
"우리가 하는 일을 결국 그만두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땐…”
그가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는 씁쓸한 듯 말을 잇는다.
"봉사라는 거, 내가 늘 증오했던 것이지…
그런데 여기서 나보다 더 그리고 나보다 훌륭히 봉사한 사람은 누구지?
수 년 동안(정말 수 년 동안 말이네.) 나는 권력을 꿈꾸어 왔지.
그런데 난 그 권력으로 내 인생을 포장할 줄도 몰라.
레닌이 죽었을 때 클라인은 모스크바에 있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레닌이 트로츠키를 옹호하려고 신문에…그렇지, 《프라우다》에 실릴 기사 하나를 썼다는 거야. 레닌 부인이 그걸 직접 신문사에 제출했다더군.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레닌은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었고 그의 부인이 신문을 가져다주었던 거지.
'열어 봐!' 레닌은 자기 글이 실리지 않은 걸 안 거야.
목소리가 너무나 쉬어서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초리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모두가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
그런데 그의 시선이 멈추는 곳을 보았더니 그가 자기 왼손을 응시하고 있더라는 거야.
왼손을 침대 깔개 위에다 올려놓고 손바닥은 위로 하고.
이렇게 말이야.
레닌이 신문을 손으로 움켜쥐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똑똑하게 보이더라는 거지…”
가린이 갑자기 자기 오른손을 있는 힘껏 손가락에 힘을 주며 쫙 펼친다.
그리고 그가 말을 계속하는 동안 손가락을 천천히 안으로 오므리며 그 손가락들을 바라본다.
"오른손은 꼼짝도 않는데 왼손 손가락들을 마치 거미가 자기 발을 집어넣듯이 이렇게 오므리기
시작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죽었어.
그래, 클라인이 말하곤 했어. '거미처럼'이라고.
그가 나에게 그 말을 한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어.
그 손을 말이야, 실리지 않았다는…그 기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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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인생을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었네."
"아! 맞아. 그러니까 그게…” 적당한 문장을 찾는 건지 그가 말을 멈춘다.
"그런 걸 말하기란 늘 어려운 법이지…
내가 산파들에게 돈을 주었던 당시에 자네는 내가 '대의'라는 가치에 대해 환상이 없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위험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네.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두지를 않았던 거지.
그러다 전 재산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나를 갉아먹는 듯한 무언가에 나를 거의 내동댕이치다시피 했어.
그러니까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한 데 파산이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나의 행동이 나의 행동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행동의 결과를 필두로 해서 나를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가 혁명에 쉽게 투신한 건 그 결과가 즉각적이지 않고 늘 변화무쌍하기 때문이야.
결국 나는 도박꾼이야.
도박을 하는 모든 놀음꾼들이 그렇듯이 나는 고집스레 온 힘을 다해서 내 놀음만 생각하지.
예전보다 훨씬 판이 큰 놀음을 하는 거라고.
그래, 난 그런 식으로 놀음을 배웠지.
하지만 늘 같은 놀음이야. 그래서 나는 훤히 잘 알지.
내 인생에는 분명 리듬이 있어. 이를테면 개인에게는 숙명 같은 게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네.
놀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집착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깨달은 건 말이지, 인생에 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인생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건 없다는 거네…)
며칠 전부터 내가 어쩌면 너무나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고 무언가 다른 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에도 재판이나 파산 따위를 미리 예상하기도 했었지만 그건 모호한…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홍콩을 쓰러뜨려야 한다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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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아서야.
비참함도 적당해야 인간적으로 기억되지.
마치 죽음에 대한 생각처럼 말이야.
홍의 뛰어난 점은 바로 거기에 있지.
나에게 총을 쏘았던 그 녀석의 용기도…분명 거기서 비롯된 거고······.
극한 빈곤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은 결코 헤어나지 못해.
마치 문둥병을 앓기라도 하듯 그들은 그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 버리는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뭔가 부차적인 일에 있어서…가장 강력한, 그렇지 않다면 가장 확실한 도
구가 되는 거지.
용기가 있는 거야, 자부심 같은 건 전혀 없고 증오심뿐인 거지…
자네 말을 들으니 홍이 팔에다가 굳이 영어로 새겨 놓았다는 문장이 생각나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과연 어떻게 세상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인가?'
레닌이 했다는 말이지.
우선 홍은 그 문장을 광적으로 찬양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만큼이나 똑같이 광적으로 증오하더군.
지우지 않고 그냥 놔둔 것도 증오심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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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은 근원적인 힘만을 믿는다.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란 '과학적 사회주의'가 전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란 노동자 열의를 조직화하는 방법이자 노동자들 사이에서 돌격 부대를 모으는 수 단이다.
보로딘은 끈기 있게 공산주의라는 건물의 터를 다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가린은 통찰력도 목표도 없으며 승리라고는(어떤 경우엔 놀랍고 필요하기도 했던 승리를) 우연히 얻은 것들뿐이라고 비난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눈에 가린은 한물간 사람이다.
가린이 보기에 보로딘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기는 하지만 그 통찰력이란 잘못된 것에 불과해서, 공산주의에 집착하다가 그가 쩡다이의 국민당보다도 이상하리만치 훨씬 강력한 우파 국민당과 손잡을 것이고 결국엔 노동자의 민병대를 깔아뭉개고 말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가린은 공산주의라는 것이 다른 모든 강력한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과도 같다는 사실을 (비록 늦게나마) 깨닫고 있다.
만일 가린이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면 보로딘은 효율성이 더 떨어질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규율을 내걸고 어쩌면 훨씬 더 복종적인 누군가를 가린의 자리에 주저 없이 앉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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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가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는 대립된다는 말인가?"
"더 까다롭다고나 할까. 아무튼 개인주의란 부르주아지의 병이야."
"하지만 선전부에서 가린이 옳다는 걸 분명히 보지 않았나.
이제 와서 개인주의를 포기한다는 거, 그건 패배하려고 자포자기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들이건 아니건(어쩌면 보로딘을 빼고 나면)
모두 다 그 못지않은 개인주의자 아닌가!”
"그들이 방금 전 심각하게 언쟁을 벌였다는 거 자네 아나?
그야말로 심각하 게 보로딘과 가린이 말이야. 근데 보로딘이…”
그는 자기 두 손을 양 호주머니 안에 넣고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미소를 졋는다.
"보로딘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정말 많지."
"로마인 유형의 공산주의자들, 다시 말해 감히 비유하자면 모스크바에서 혁명의 전리품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그런 혁명가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런 유형을 말이야, 정복자들이라고나 할까, 지금 자신들에게 중국을 넘겨 주고 있는 정복자들을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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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무슨 일이 있어서도 땅을 저버려서는 안 돼.’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네.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살든 그렇지 않은 다른 세상에서 살든…이 세상의 덧없음에 집착이나 확신이 없다면 의지도 없는 거고, 심지어 진정한 삶도 없는 거지.”
그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가 바로 이런 생각에 달려 있으며 그의 의지가 부조리라는 뿌리 깊은 강렬한 감정에서 비롯됨을 나는 잘 안다.
만일 세상이 부조리하지 않다면 그의 인생 전체는 인생의 근본적인 덧없음(따지고 보면 그를 열 광케 하는)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희망도 찾을 길이 없다는 허망함 때문에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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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들어 봐. 내 말이 옳다는 건 아니야. 자네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닐세.
그저 나 자신에게 충실한 것뿐이야.
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았지.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끔찍하게 말이야.
내가 다정다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속 깊숙이 동정심을 느끼고 목이 메어 올 때가 있었어.
한데 말이야, 홀로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을 때면 이런 동정심은 결국 언제나 무너지고 말았네. 고통으로 삶은 더욱더 부조리해지지.
고통이 삶을 공격하는 건 아니야. 고통은 삶을 그저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걸로 만들어 버린다고.
클라인의 인생이 내 안에 뭐랄까…흡사"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하기가 왠지 거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을 계속 이어 간다.
"흡사 웃음 같은 거라고. 자, 그만하지. 이해하나?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사람들에게 심오한 비교란 없는 거니까.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인생인 게지.
그 안에서 일그러진 거울에 비춰 볼 때처럼 세상이 온통 뒤틀려 보이지.
어쩌면 세상은 거기에 진정한 제 모습을 내보이는지도 몰라.
하긴 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말이지, 그런 뒤틀린 모습을 견딜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네.
알겠나! 부조리를 감내하고 살아갈 수야 있지. 하지만 부조리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거야.
‘땅을 저버리고' 싶은 사람들은 땅이 제 손가락 사이사이 들러붙어 있다는 걸 깨닫게 돼.
그걸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걸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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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제는 제국이란 무엇인지 알았지.
집요하고도 변함없는 폭력.
앞에서 이끌고 결정하며 그 결정을 강요하는 것.
삶은 거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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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취인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사관생도에게 전하자 생도는 방으로 들 어올 때처럼 사환을 앞세우고 나간다.
"앞으로 얼마간은 내 서명을 보지 못할 거야
천중밍 부대도 산산조각이 났으니…
일 년 안에 상하이가…”
이제는 희미해진 부대의 진격 소리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실려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트랙터가 내는 소리, 남자들 군화발이 땅을 울리는 진동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숨 막힐 듯한 연기 속 말발굽 소리, 대포 차축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이제 또렷이 들린다.
이렇듯 아득한 소란이 막연한 흥분과 함께 그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듯하다.
기뻐서인가?
"내일 아침 나를 배웅한다며 멍청이들 한 무리가 몰려올 테고 그럼 그 와중에 자네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걸세…”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는 상처 난 팔을 붕대에서 천천히 빼낸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는다.
깊고 절망적이며 여기 있는 헛된 모든 것과 다가오는 죽음이 불 일으키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내 안에 치밀어 오른다.
다시 한 번 불빛이 우리 얼굴을 비추자 그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잠시 전 보았던 것 같은 그 기쁨을 찾는다.
그러나 아까와 비슷한 거라곤 전혀 없이 단호하지만 동시에 우정 어린 엄숙함만이 거기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