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96
“검(劍)이란 게 무엇입니까?”
거창한 서두와 어울리지 않는 질문. 모두들 ‘뭐야?’ 하는 얼굴로 멍하니
단리혜를, 또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께를 한번 으쓱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렸
다. 워낙 확실한 대답이 서 있기에 대답 자체가 쉽지 않다. 술자리에서였다
면 쉽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단리혜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파랑검객 노선배님. 소녀 단리혜가 천하에 이름 높으신 남궁
선유 노선배님을 뵙게 되어 늦게나마 인사 올립니다.”
공손하게 포권을 하는 단리혜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선유가 껄껄
웃었다.
“이름이 높긴... 너의 질문은 너무도 평이하면서도 굳은 얼굴로 보아 그리
간단치...”
“사람 죽이는 쇠붙이지, 뭐!”
장추삼이 툭 끼어들었다. 어른 말하는데 끊는 것 처럼 못 배워먹은 행동도
없거늘 그에게는 별 상관이 없나보다. 그러나 사실 아닌가?
검이란 것은 병장기의 일종이고 병장기가 태동된 이유는 좀더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적을 제압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상대방을 가장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목숨줄을 끊는 것이다. 검의 재질이 하루가
다르게 강건해지고 날 역시도 예리하게 세워진 이유도 같은 것이다. 말이
좋아 검을 닦으면 마음이 닦이네 어쩌구 하지만 진짜 도인들이 아니라면 어
불성설에 불과하고 검을 참오 하는 진정한 이유는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의
실체적 접근과정을 풀어보겠다는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으음...”
검로를 밟고 있는 모두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세어 나왔다. 이어지는 장
추삼의 독설이 아프게 귓가를 두드렸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서 여기
저기 눈 둘 곳을 찾기에 바빴다.
“사실 검이라고 하면 멋진 장식에다가 형형색깔의 수실이 달려있고 이름까
지 새겨져서 얼핏 보기에 멋있지만 도부들이 소 잡을 때 쓰는 도끼랑 다를
바가 뭐가 있어? 자루가 나무를 대충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흔한 수
실하나 없어서? 킁! 바보 같은 소리지. 어차피 둘 다 쇠붙이로 만들어졌고
매일매일 날을 세우는 건 같아. 왜냐구? 둘 다 어떤 목적 때문에 만들어졌
다는 거야. 왜 도부들이 도끼를 쓰는 줄 알아? 소나 돼지 잡을 때 검보다
더 유용하거든. 만약 사람 상대 할 때도 검보다 도끼가 효과적이라면 너도
나도 도끼를 들걸.”
명검의 가치가 순식간에 도살장에서 쓰이는 도끼와 동류 취급을 받는 순간
이지만 거칠고 투박스러운 말투 속에는 굉장한 설득력을 함유한 단어들이
산재해 있는지라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하나 더 여쭈어보지요. 검법은 무엇입니까?”
“말을 돌리지 마시오.”
단리혜의 질문은 북궁단야에 의해 가로막혔다.
“선문답이나 듣자고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단리혜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이것을 한번 봐주세요.”
촹!
검을 빼들고 그녀가 초식하나를 시전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목검을
쥐고 뒤뚱거리며 장난치는 듯 느리고 어색해 보이는 검법, 그나마 검초에
맞는 보법도 모르는지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남궁선유는 단리혜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하품을 할려고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단리혜라는 실체가 사라지며 검의 궤적만
이 머릿속에서 몇 가닥의 선을 그리고 지나갔다.
‘ ! ’
얼마나 놀랐던지 하품마저 꿀꺽 삼켜버리고 남궁선유가 뭐라고 하려는데 장
추삼들의 경악성이 한발 앞서나왔다.
“어?”
“저것?”
손가락으로 연신 단리혜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추삼과 떡하니 입
을 벌리고 있는 하운, 그리고 한층 예리해진 눈으로 검의 방향을 쫓고 있는
북궁단야.
이들이 반응이 의외였는지 초식을 거두고 단리혜가 장추삼들을 바라보았다.
‘왜?’ 란 물음을 담고서.
장추삼과 북궁단야의 끄덕임 속에 하운이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들고
한 장씩을 넘겨주었다.
“군자검이라 불리 웠던 백소유노대협이 그린 것이오.”
한 장 두장 넘어가는 그림은... 어설프게 펼치던 단리혜의 검식 이었다!
“어멋!”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느라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을 생각조차 못하는 단
리혜를 일별하고 남궁선유가 종이를 받아보았다. 달빛 속에 춤을 추듯 검을
놀리는 사내하나.
“중원천지에 이런 검식이 존재했었다니!”
그제서야 단리혜가 검법에 대해 물은 진의를 알게 되었다.
필살검초! 달 속에 그려진, 단리혜의 손에서 펼쳐진 검식은 오로지 사람을
죽이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요사스러운 흐름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강하다!’
남궁선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실질적으로 철검십식중 마지막 초식을 전력
으로 펼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보아하니 소저는 백소유노대협을 모르는 것 같구려.”
하운이 그림을 얻게 된 경위 - 장추삼이 말해준 그대로 -를 털어놓자 그제
서야 땅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남궁선유에게 조심스레 종이를 청해서 모
았다.
“그분도 보셨나 보군요. 월광살무(月光殺舞) 중 제 일식을...”
“이런 젠장!”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폭갈. 모인 사람 중에서 이따위 막소리를 지껄일만한
인물은 오직 하나다. 가뜩이나 째져서 날카로운 눈인데 거기다 인상까지 쓰
니까 장추삼의 표정은 살기등등 그 자체였다.
“하나 피하는데도 죽을 맛 이었는데 더 있단 말이야?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하운은 쓰게 웃었고 북궁단야는 무덤덤한 얼굴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러나 단리혜의 반응은 달랐다.
백년을 허비했다, 무려 백년을!
“정말로... 정말로 월광살초의 제 일식을 깨뜨렸나요? 지난 백년 동안 노
력했었지만 우리 선조들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찾아 헤메였거늘 결코 파훼하
지 못했던 것을?”
남궁선유가 망연히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만남은 단
순히 우연의 중첩만은 아닌가보다. 무언가 거대한 흐름이 모두를 이곳에 불
러 모았고 기묘한 비무와 얘기를 유도한건 아닐까?
“왜? 못 믿겠어요?”
장추삼이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하운의 어께를 쳤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라고 했다.
“자... 직접 보여주자고. 하형도 이거 할 줄 알지?”
“뭐, 그냥 시늉은 낼 수 있을 것 같소.”
둘이 공터로 나서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사실 남궁선유는 매우 기뻤다. 장
추삼들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기도와 유연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청년이었기
에 주시의 대상이지만 어떻게 물어볼 방법이 없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들고 하운이 그림의 사내처럼 검극을 중극 으로 이동시켰다.
“오시오.”
입을 쭉 내민 장추삼이 돌멩이를 발로 찼다.
“이건 아냐!”
“ ? ”
“이건 아니라구. 새색시가 서방맞이하듯이 다소곳하게 ‘오시오’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그림 속에서 칼춤 추던 놈은 그렇게 공손하지 않았
거든.”
‘기세를 말함인가? 장형은 그림의 어디까지 본 것일까?’
실체적인 외면이야 두 눈 멀쩡한 누구라도 볼 수 있다. 감추어진 외면도 무
공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라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낸다. 그러나 정물화된 그
림에서, 그것도 얼굴조차 여백으로 자리한 인물화에서 분위기를 가늠한다는
건 쉽지 않다. 이면의 이면... 그걸 장추삼은 본 것이다.
우우웅!
하운의 기세가 일변했다. 잘선 칼날 같은 기세, 그러나 장추삼은 여전히 딴
청을 부렸다.
“아냐, 아니라구. 그때 내가 느낀 건 그렇게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단 말이
야. 그래도 깡 하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꿇려본 적 없었던 이 장추삼이가 겁
을 집어먹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구.”
고수들은 분위기를 스스로 잡아내는데 능하다. 하운의 선한 성품상 그런 패
기나 살기를 품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굳이 만들어내라면 못할 것
도 없다.
위이이잉!
검끝이 파르르 떨리며 사이한 기운이 떨어져 내릴 듯 검극에 맺혔다. 양 미
간이 좁아지며 하운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개체적인 성격을 버리고 또 하
나의 인격체로 전이를 시도했다.
‘검의 귀신이 되어 피의 춤을 한번 춰 볼까나!’
파파팟-.
외향적으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세가 죽은 것 처럼 완화된
감마저 있었다. 그러나 장추삼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얼음덩어리는 이 검법하고 어울리지 않아. 하형밖에 없다. 이 괴상
막칙한 검을 소화할 사람은.’
순식간에 조여드는 살기! 마치 뱀의 동굴에 빠진 듯 전신을 옥죄어드는 사
이한 기운들!
이를 악물고 장추삼이 외치듯 말했다.
“이제 가오.”
말과 함께 전력으로 추뢰보를 펼쳤으나 어느새 하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추뢰보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의 신형은 어느새 한발 옆으로 옮겨져 있었
고 등골이 시릴 정도로 사이한 죽음의 검무가 하운의 손에서 펼쳐지기 시작
했다. 뱀의 혓바닥이 움직이듯이...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듯한 절망감. 검법이 아니었다. 이건 오로지 피와 죽
음만을 갈구하는 악마의 광소성처럼 은밀하면서도 거대한 기세로 장추삼을
휘감아오고 있었다.
삼류무사-97
한 번을 상대해보았고 투로 또한 경험했었던 초식이거늘 실제로 펼쳐지자 머
릿속에서만 그려왔던 관념과 또 다른 위력과 기괴로움의 그림자로 너울너울
다가오는 미친 검무. 방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멋대로 뻗어나가고 솜
처럼 부드러운 가벼움 속에 번들거리는 승냥이의 독아(毒牙)를 감춘 저주의
손짓!
그런데 관전하는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이 기경할 초식을 무리 없이 펼쳐내
는 하운의 몸동작이다.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지극히 친근한 검로를
밟듯 그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으며 음산한 분위기까지 정확히 구현해 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대저 모든 문파에는 비전의 절기가 있다. 소림의 삼대절학이 그것이고 무당
의 양의문검이 또한 그것이고 화산이라면 창궁우전검이 손꼽힌다. ‘비전’
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것을 수록해놓은 구절 몇 자, 몸동작 몇 가지 만
으로는 본래의 위력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깊이가 들어있기에 내려받는 후
학들은 선사들의 이해 한 편, 시무 한 번이 금과옥조와도 같이 소중하고 값
진 비급인 것이다. 책자 하나 붙잡고 씨름해봐야 건질게 없다는 거다.
장추삼이 소지하고 있던 그림들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 경천동지
의 위력을 함유한 검법을 수록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별무소용이다. 검
로에 맞는 보법하나, 깨달음 한 줄 쓰여 있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재주로
검을 펼쳐낸단 말인가. 검법이란 게 상체만으로 펼쳐내는 아이들 골목놀이도
아니거늘.
‘오늘은 놀랄 일이 너무도 많구나! 당년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패검
의 기재를 보는가 했더니 신체의 움직임을 극한의 자유까지 이끌어내는 괴
이한 녀석부터 검의 천재까지 만나게 되다니.’
그렇다. 하운은 보법하나, 조언 하나 없이 몇 십장의 종이만으로 누가보아
도 까다로운 검식을 내 것 처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스스슥.
추뢰무영이 펼쳐지자 한번 견식을 했던 남궁선유와 단리혜의 입에서 또다시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건 누가 봐도 아름다웠으니까.
‘직접 대하니까 정신을 차리기 어렵군.’
눈앞에서 사람하나가 넷으로 불어난다고 상상새보라.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운의 검이 월광살무라고 명명된 검초의 마지막 변화를 시도
했다.
빙그르르.
곡선처럼 다가오는 직선인가 싶었는데 직선의 흐름을 살펴보면 커다란 호선
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탓!
개체 분열된 세 명의 장추삼이 알 수 없는 선의 세계로 빠져드는 동안 남겨
져있던 장추삼이 빠르게 한보 나섰다.
파슛!
‘......’
‘......’
그것으로 비무는 종료되었다. 비무라기 보다 정해진 틀에 맞춰 보이기 위한
겨룸, 즉 대타의 성격이었거늘 무언가에 홀린 듯 전력을 다해 지닌 바 모
든 것을 털어내고 둘은 서로를 외면한 채 숨을 골랐다.
장추삼의 눈은 베어진 자신의 오른쪽 묵에갑을 담담하게 응시했고 하운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아니 하늘 위 무언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끝에 마지막에 당했어. 검쓰는 인간들이 죄다 이런 춤을 춘다면 맨주먹
가지고는 어렵겠는걸... 그나저나 묵예갑이 망가졌으니 녀석들에게 뭐라고
한다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빙글 돌아선 장추삼이 베어진 오른쪽의 묵예갑을 벗어서
들어보였다.
“보다시피 이렇게 됐어. 다른 건 몰라도 피하는 건 선수라고 불리 우는 내
가 - 잠깐 우건의 말이 떠올라 고소 지었다 - 죽을 똥을 싸면서 이리저리
날뛰었지만 저놈의 검식은 끝끝내 쫓아와서 기어이 흔적을 남기고 갔거든.
뭐, 어떻게든 한번은 피했지만 또 다른 공격이 가해진다면 피할 도리가 없
다는 거지. 안그래, 하형... 어?”
하운을 돌아본 그가 깜짝 놀랐다. 밤하늘을, 그 뒤편을 응시하는 착한 젊은
이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형, 왜 그래?”
말없이 그렇게 서있던 하운이 고개를 바로하고 장추삼에게 웃어 보이려 했
지만 잘되지 않는 듯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장형, 이 검식은 참으로 슬프오. 안 그렇소?”
“에?”
“그게 무슨 말이죠?”
단리혜가 냉큼 나섰다. 그녀로서는 하운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해
서도 안 된다. 고조부님을 앗아갔고 가문의 영광을 앗아갔다는 악마의 검식
이 슬프다니! 그건 피의 아수라무(阿修羅武)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것에
감정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런 미친 검식이 슬프다니! 맞아요, 슬프죠. 그 검식을 마주대한 이는
슬펐겠죠.”
그녀의 눈이 장추삼에게 옮겨졌다.
“공자의 보법은 실로 눈부시지만 제 이초가 날아왔다면 어떨까요? 또 한번
피할 자신이 있겠어요?”
“어쨌든 이 검식은 슬프오.”
하운의 무거운 말은 중인들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반박하려던 단
리혜가 곧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고조부님께서는 태을검선(太乙劍仙)이라는 명호를 가지고 게셨습니
다. 물론 백년도 더 지나 이제 잊혀져가는 노을 같지만.”
“태을검선 단리고학!”
남궁선유가 깜짝 놀랐다. 그건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백 년 전에 가
장 강했던 세 명의 무인중 하나의 이름이, 남궁선유가 철들면서 우상처럼
들어왔던 명호가 언급되었으니까.
무림십좌(武林十座).
백 년 전의 가장 강했던 열명의 이름. 그중 태을검선 단리고학은 삼선삼목
사왕(三仙三目四王)중 가장 윗 서열인 삼선의 반열에 들었던 절대고수였다.
삼선과 삼목 그리고 사왕중 두 명의 신비로운 실종 때문에 한때 무림계가
들썩했으나 강호의 속성은 이들의 이야기를 세월의 흐름 속에 묻어버린 것
인데.
“소저가 정녕 태을검선 노대협의 혈육이란 말인가? 이럴수가...”
그의 노안은 많은 질문을 담고 있었다. 태을검선의 실종원인과 검식의 상관
관계, 단리혜가 검식을 펼친 이유... 그리고 두 번째 초식의 실존여부 까지
도.
“증조부님께서는 월광살무의 이 초식을... 감당... 해내지... 못하시고...
”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단리혜가 두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렇다면!’
하운들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무림십좌중 최소한 둘 이상이 같은 검식에 의
해 희생되었다는 거다. 그것도 암습이 아니라...
누가 있어 백 년 전 천하십대고수들을 둘이나 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
도 상대는 이초 이상을 쓰지 않았다는 거다. 단 이초만으로 백 년 전 천하
제일인을 바라보았던 인물을 죽였다.
그런데...
‘검법에 서리서리 맺힌 이 비애(悲哀)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하운을 갑자기 들고 있는 검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다. 슬픔은 한이 되어 세
월의 시공을 돌고돌아 이 젊은 청년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무언가를 넌지
시 묻고 있는 것이다. 단지 초식한번을 펼쳤음 인대 시전자의 아픔을 느꼈
다는 건 상식선에서 말이 되지 않겠지만 하운은 눈이나 손이 아닌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해한거다. 예전, 화산에서 창궁검식에 매달렸던 일대
제자로는 도저히 불가능 했을 법한 일.
...... 잊어라, 잊어라 네가 배운 초식을 잊고 너의 마음속에 있는 상념을
잊고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와 무게를 잊어라. 너를 잊고 이 동굴도 잊고,
나도 잊고... 삼라만상 모든 걸 버릴 때 비로소 너는 하늘을 보게 될 것이
다......
상념을 털 듯 검을 칼집에 갈무리하고 단리혜에게 하운이 물었다.
“두번째 초식은 남아있지 않겠구려.”
“그렇습니다. 지금 소녀가 펼친 일초식도 겨우 재현해낸 것이니 이초까지
전해 내려오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정녕 월광살무를
근자에 접한 것 입니까?”
“그렇소이다. 내가 이 초식을 접한 건 오일이 채 지나지 않았소.”
저도 모르게 하운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단리혜가 낫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들 삼인조는 뭐하는 청년들이란 말인가? 파랑검객 남궁선유 조차 감탄을 금
치 못하는 중검의 북궁단야와 백 년 동안 깨지지 않던 무적의 초식을 일순
간에 파훼해버린 장추삼, 그리고 몇 번 본 그림만으로 백 년 동안 묻혀있던
고대의 초식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아니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 집어내는
하운. 무엇보다 구색이라도 맞추어 놓은 거처럼 상이한 분위기를 지닌 셋의
기질.
척 보기에도 물불 안 가릴 것 같은 천방지축의 장추삼과 두어 번의 생각 뒤
에도 한번을 더 장고(長考)하고 나서야 몸을 움직일 것 같은 북궁단야, 이
들의 중간에서 가교처럼 버티고 서서 아무런 특징이 없는 듯 묻혀있는 하운.
‘성격과 무공까지 일치한단 말인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듯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상념에 몰두해 있었다
. 무언가 크게 놀랄 것이 있기는 한데 애써 자제하듯 어금니를 꽉 물고 사
고의 조직을 끼워 맞추려는 듯 턱을 숙이고 북궁단야의 모습을 보며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찢어진 장갑을 어떻게 하
면 기우지’ 하고 궁상을 떨고 있는 장추삼.
이때 망연히 서있던 남궁선유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왔는데 소리의 고
저가 없어서 그런지 을씨년스런 느낌마저 주었다.
“정녕 그들이 존재했단 말인가... 단순히 전설 같은 것 인줄 알았거늘...”
매우 작았으나 불문의 사자후처럼 모두의 귀를 세차게 두드리는 내용을 함
유하고 있기에 몰입해있던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모두의 시선이 남궁선유에
게 향했다.
그러나 뒷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눈빛과 다
물어지지 않은 입술이건만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 석고처럼 굳은 남궁선유는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장추삼의 눈이 역팔자를 그렸다. 그의 성격상 이런 분위기는 당최 맞지 않
으니까. 그런데 왠 일 인지 나설 수가 없다. 무어라 한마디만 하면 위태위
태하게 지탱되던 어떤 것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감히 어쩌질 못하고
눈만 꿈뻑일 뿐이었다. 하운의 눈도 어떤 기대를 강력하게 담고 있었고 단
리혜도 마찬가지 였지만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보이지 못한다는 게 옳
은 표현이리라.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에 몸을 기대어 이리저리 고개 짓을 하고 있는 나뭇
잎과 풀들 뿐. 반짝이는 별들의 몸짓이 전부였다.
그렇게 멈추어만 있을 것 같은 시간은 북궁단야의 낮은 물음에 의해 급박하
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둠의 율법자... 맞습니까?”
꽝!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남궁선유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자네가 그 이름을 어찌 안단 말인가? 자네의 연배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묻혀진...”
“묻혀졌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단리혜가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으니 지혜로 충만한 눈망울
과 웃을 때면 들어가는 양쪽 보조개는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다소 애띤
듯 여린 목소리가 귀여운 여인. 그녀의 눈망울이 흐려져 왔다.
“백년을 허비해서 알아낸 건 단 한초식과...”
끝내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저주스러운 이름하나... 어둠의 율법자...”
어린아이처럼 눈가를 훔치고 선고하듯 말을 마치는 그녀의 모습은 강하려고
노력했기에 더 처연했다.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로 실존했단 말인가... 정말로...”
하운의 눈빛을 이해했다는 듯 그의 입이 열리기전에 북궁단야가 한 발 앞서
서 말했다.
“그렇소. 나 역시도 어둠의 율법자라 불리 우는 존재의 단서를 추적 중 이
었소. 말하지 않은 건 이해해주시오.”
“자네도 어둠의 율법자를?”
오늘 남궁선유는 십 년 치 ‘놀람’ 을 모조리 사용하겠다는 듯 연신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렇습니다.”
“끊듯이 북궁단야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내에서 그의 말이 끝날 때
까지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깜빡이던 별마저도 그의 이야기를 경
청하겠다는 듯 흔한 떨림 한번 보이지 않았고 나서기 좋아하던 장추삼도 무
얼 생각 하는지 모르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노선배께서 아시는 것과 큰 착오가 있는지...”
“아닐세, 오히려 자네가 더 정확히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나저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린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남궁선유의 한숨은 자책으로 바뀌었으나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는 이 일에 나설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노선배께서 마음 쓰시는 건 이해하나 방법이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북궁
형의 말대로라면 그들, 어둠의 율법자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보게.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단 말이야...”
위로하는 하운에게 쓴 웃음을 던지고 남궁선유가 평평한 바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모든 일엔 원인이 있단 말이지. 생각해보게. 여지껏 전설로만 추정되었던
어떤 일이 현실화되었네.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거의 맞는 것 같아.
지금 내가 겁을 내는 건 말이야...”
이 대목에서 남궁선유는 길게 말을 늘였다.
“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자네들이라면
’ 이라 생각이 들기에 말하도록 하지. 현 무림 최강자라고 한다면 누구를
꼽겠나?”
“적미천존!”
투덜거리듯 장추삼이 말했다. 그의 음성은 노골적인 적개심을 가득 담고 있
는 것이라 얼핏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남궁선유가 말을 이었다. 저녀석은
원래 말투가 저런가보다 하면서.
“그래, 사람들은 누구나 적미천존이라고 말들을 하지. 그런데 그가 여지껏
변변한 생사결 한번 치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나? 이상하지 않은가? 그
래, 천하제일인이란 자리가 목숨을 건 격투한번 하지 않고 오를 만큼 만만
하다고 보이나?”
“음음.”
고개를 끄덕이는 장추삼에게 남궁선유의 질문이 꽃혔다.
“이상하지? 그런데 나를 포함한 검정오존 모두가 본적도 없는 적미천존을
천하제일로 인정했다네. 왜일까?”
“아니, 노인들이 쑥덕쑥덕 결정한 걸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소!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무안해서 신경질 부리는 그를 무시하고 남궁선유가 하운을 보았다.
“중원천지에서 검을 가장 잘 쓰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이지 백무량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사문의 장로라서가 아니라 존경
해마지 않는 완성된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에
게 다른 대답을 할 것을 결정했다.
“만승검존 노선배로 알고 있습니다.”
만승검존!
제 이차 무림혈겁이라는 흉몽지겁이 벌어진 하남 땅에 홀연히 출몰하여 천
하를 평정한 절대의 검객. 절대오존중 이강에 속하고, 원하지 않았는데도
무림맹주에 오른 신화의 검도고수.
“맞아, 만승검존이지. 당시 그분의 능력은 실로 놀라워서 일 검을 받아낼
자(者) 얼마나 되었을까?”
잠시 과거를 쫓듯 아련한 곳을 응시하던 남궁선유가 침착하게, 그러나 충격
적인 말을 했다.
“그분 스스로가 말 한 걸세. 적미의 사내에게 당해낼 자신이 없다고 말이
야. 우스운 일이지. 말 한마디로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천하제일
인을 다투는 절대오존의 최상위 서열로 등극했다는 것이. 허나 어쩌겠나.
화자(話者)가 당시의 천하제일인 이였거늘.”
모두들 그윽한 시선으로 돌아본 남궁선유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분은 실종되었다네.”
쿠궁!
천하제일인의 이유 없는 실종. 단서 하나 없는 연기와도 같은 증발. 스스로
를 감추지 않은 이상 어느 누가 감히...
“노선배께선 혹시 적미천존을 율법자와 관련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가정해봐야 억측일지 모르고 뱉아 놓아
봐야 말장난처럼 공허한 얘기일진데.”
겉으로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하던 무림. 그러나 알고 보면 유리판처럼 매끄
러운 그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무림에서 손꼽히는 명숙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올 때 이제 강호를 알게 된
애송이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 하는 지 장추삼의 입꼬리
는 몇 번이고 비틀림을 반복하며 갸우뚱거리는 고개와 비대칭을 이루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공기. 바람 한점 없거늘 한발 띄기도 어려울 만큼 밀도가
높아진 여름밤의 축축함이 싫었던지 남궁선유가 단리혜를 위로했다.
“태을검선의 실종 이후로 단리세가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거늘 의탁할 이 하나 없는 강호에서 백 년 전의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동분서주 했다니, 정말 가상하구나. 여인네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꼬.”
진심어린 말이었기에 단리혜의 눈망울에 물기가 맺혔다. 그러나 울 수는 없
다. 그녀는 아직 울어서는 안 된다.
“사실 소녀의 얘기는 끝난 게 아닙니다만...”
“엥?”
“음!”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장추삼들이 깜짝 놀랐다. 몸짓 한번, 이야기하
나마나 풍운을 부르는 그녀이기에 덜컥 겁부터 나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
다. 뭐, 그렇다고 ‘그만해요!’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려움에
앞서는 호기심이 모두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그녀의 눈망울이 먼 옛날의 안타까움에서 현실적인 슬픔으로 자리를 바꾸었
다. 절절한 표정은 한마다 한마디가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언어가 되어 한자
한자 여름밤을 수놓았다.
“제게는 오라비가 한 분 계셨었지요. 만인을 오시할 무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같은 지모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남들보다
위였기에 가문의 몰락과 흉수의 정체에 관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추적 하
셨었지요. 힘 하나 만큼은 장사소리를 들었었기에 거의 절전 되다시피 한
가문의 검법을 두자루 도끼로 펼칠 때면 나름대로 위력이 있었나 봐요. 강
호상에 ‘이규재래’ 라는 허명도 얻을걸 보면 말이에요.”
“비발쌍부?”
첫댓글 또?
여기서 끝이나요?
댓글이 없으니 재미가 없나보다 하고
연재 중단 하고 뭘 올릴까 하고
고민중임다
@정 주
지금까지 올린글보다
삼류무사가
신선해보이는데요.
@장돌뱅이 그래요?
그러면 계속 연재합니다~^^
@정 주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