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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총신 대학원 양지 캠퍼스에 복원된 소래교회를 찾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구글 길 찾기에서 대충 보고서 지하철을 타고 기흥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내려 또 버스로 갈아타려니
30 여분을 기다려도 마지막 버스가 오지 않아 더위에 참기가 너무 힘들다
견디다 못해서 학생인 듯한 사람에게 총신대 양지 캠퍼스를 물어보니 마침 총신 신대원 학생이라
여기서 버스는 거의 없다시피 간간 너무 늦게 오니 택시를 타면 기본 요금이란다
바로 택시가 있길래 탓더니 금방 총신대 캠퍼스인데 요금 3000원이다
맙소사! 둘이서 버스비만도 2500원인데 500원 때문에 이런 미련스런 고생을 했나 싶어 억울하다 ㅠㅠㅠ
택시를 타고 총신 신대원 입구로 들어서서 소래교회 표지판을 따라 5분여 더 가서 내려
야트막한 언덕길을 조금 걸어가니 소래 교회 기념비가보인다
복원된 소래교회는 학교 정문의 왼쪽에 있는 생활관 뒤 산등성이 위에 세워져 있다.
총신 신학 대학원 양지 캠퍼스 중앙 도서관
총신의 역사는 1901년 5월 15일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가 개교된 것이 총신대의 전신이다
초대교장으로 마포삼열(Samuel A. Moffet) 박사가 취임하고, 방기창, 김종섭의 두 학생이 첫 입학생으로 입학하다.
제1회 졸업생으로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등의 7명을 배출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생활관인데 방학이라 그런지 텅 비어 있었는데 이런 생활관이 3동 정도 있는거 같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학생에게 물었더니 생활관을 안내해준다
생활관 옆길로 올라가 뒤쪽으로 복원된 소래교회가 있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송천교회)의 송천리는 순 토박이말로 '솔샘'이었다.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흘러
‘솔샘’이라 부르던 것이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다
소래교회는 1883년 5월에 평안도 의주 출신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자생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처음에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예배당 없이 서경조의 초가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이 차츰 늘어 나면서 장소가 좁아 청일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교회를 짓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1895년 7월에 8칸 기와집을 건축하여 헌당하고 일년 뒤 교인 수가 점차 늘어가서 8칸을 더 증축하여 헌당하였다
이 곳 총신 신대원에 복원된 소래교회는 1896년 6월에 증축된 16칸 총 32평의 기와집을
실물 크기 그대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교회가 세워진 자리는 수백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서낭당 터였다.
우상 숭배를 하던 곳에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이 세워진 것이다.
소래 교회가 세워진 것은 1883년 5월인데 한국 최초의 기독교 공식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부활절에 이 땅에 들어오기 2 년 전에 이미 소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역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인 소래 교회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점에서 한국 크리스쳔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진다
또한 소래교회가 의미가 있는 것은 서양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우리 스스로 최초로 세운 교회라는 점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교회 건축에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교인들 스스로의 힘 만으로 헌금과 건축자재, 무료 봉사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봉헌하였다
1988년 소래교회 복원사업에 참여했던 이종규(당시 소래교회 복원 위원회 서기·금성교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소래 교회의 의미는 몇 가지로 얘기해 볼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한국 교회의 자립적 신앙의 뿌리가 됐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의 전도나 복음이 한국에 전파되기 전 만주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성서 번역에까지 참여했던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소래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죠. 더불어 그 교회가 날로 번창하여
마을 58가구 중 50여 가구가 개종자가 됐다니 전도 신앙의 훌륭한 표본도 되는 겁니다.
또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의 훈련과 교육의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아펜젤러와 함께 공식 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소래 교회를 방문하면서
"우리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거두러 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서경조를 비롯해, 최명오, 정공빈 등 모두 소래교회 교인들이었고
이후 20여 명 가까운 이들이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소임을 다할 수가 있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 교회 출신들이었다.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장로교 최초의 7인의 목사 중 1인이 되었고
아들 서병호는 상해 임시 정부의 독립 투사로 해방 이후에 교육가로 사명을 다했다.
그 외 교육가 김함라, 민족 운동가 김마리아 등 한국의 역사에 있어 큰 획을 그었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소래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 역시 한국 교회의 초기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자립 신앙의 근거지였던 소래교회를 신앙의 뿌리로 둔 이들이었던 것이다
소래교회 기념비 뒷면에 새겨진 소래교회 설립 약사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초대 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한국 기독교의 문화 유산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의 산 교육 현장이 되며,
북한 교회의 수복과 남북 통일을 위한 기도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후세에 길이 전한다
지난 1988년 한국 기독교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복원된 것이다.
본래 소래교회가 세워져 있던 북한 송천땅에 소래 교회가 복원되는 그 날을 위하여
언젠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 기독교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겠다
.소래교회는 한국로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어학 및 한국 풍습을 익히고 배우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소래 교회는 황해도 지역 복음화의 전초 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안내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언더우드 등 서양 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게일(James S. Gale)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
펜윅(Fenwick) 선교사, 맥켄지 선교사 등이 언어와 선교 방법 그리고 한국 문화를 소래 교회에서 배웠다.
또한 평양 선교의 베이스 캠프로서 평양 복음화를 위한 정상 오르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제시대 소래 교회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 지방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한국 전쟁으로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현재 황해도 옛 소래 교회 터에는 교회의 흔적초자 남아 있지 않다 한다
신발을 벗고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넓다란 마루와 몇 개의 나무 기둥,그리고 앞쪽에 교회의 강대상이 있었다.
벽면을 빙 둘러 소래교회 역사를 말하는 사진들이 액자에 넣어 진열되어 있다
어릴 적 신발 벗고 마루 바닥에 앉아 예배드리던 고향 마을 산골 교회가 생각난다
외가의 큰 할아버지께서 선교사에게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이셔서 고성군 연화면 연화리에 연화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일가 친척 모두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을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일가 친척들 모두 연화 교회에서 하였다
몇 년전 한국 갔을때 마음 먹고 일부러 주일날에 고향을 찾아 옛 예배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렸었다
서울서 큰 기업가이신 당숙께서 고향 교회 건축헌금을 거의 다 담당하여 시골에서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
이층으로 현대식 교회를 지었는데 교인이라야 고작 노인네 몇명 뿐이었고
옛 교회 모습은 어디 한 구석에라도 찾아 볼 수 없어 너무 마음이 언짢았다
이번 어머니의 소천으로 모두 만나 모처럼 고향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내 사촌 오라버니는 그 교회 장로님에게
옛 교회를 전부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일부분만이라고 남겨 두라고 신신 당부 하였다는데
모조리 다 쓸어버리고 새로 지은 교회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고향 선산에 가도 교회에 몇년동안 들르지 않았단다
그 산골 마을에 120년 가까이 역사를 가진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지도 모르고
허영심과 시치스런 무지함에 나 또한 마음이 언짢아서 괜히 와 보았나 할 정도였었다
고즈녁한 분위기와 정갈해 보이는 기와 에배당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 교회를 세운 서상륜. 서경조 형제.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성적인 전도로 활기를 더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 58세대 중 50세대가 교회에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해서 제일학교는 처음에는소래 교회 주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소래 교회 안에 있는 야학교 였다
1895년 캐나다 선교사였던 윌리암 죤 멕켄지 선교사의 순교로 가족들이 그의 유산을 기부하면서 설립하여
정부 허가를 받아 황해도 장연 지역에서 최초의 학교가 됐다.
정부 허가를 받기 전 해서 제일 학교는 고종황 제가 1894년 12월에 공포한 한국 최초의 헌법인
홍범 14조에 의해 교육 입국의 뜻을 구현시킨 의미도 갖고 있다.
학교의 운영은 전적으로 소래교회가 담당했으며, 교육이념은 철저하게 기독교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적인 인간 형성과 사회 봉사,애국 애족의 민족 사상을 특별히 강조하고 고취하는데 진력했다.
이런 교육이념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은 하나로 뭉쳐 있었고, 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진출해서
민족정기와 기독교적인 사상의 기반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해서 제일학교가 배출한 졸업생으로는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의사며 독립 운동가인 김필순을 비롯하여,
서상륜의 사위로 미국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한 의사 홍종은이 있다.
또한 서경조의 장남인 서광호는 세브란스 제2회 졸업생이었고 차남은 중국 남경대학 졸업하고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였고
해방 후 경신 중·고등학교 교장과 새문안 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또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감한 박헌식, 연세 대학교 부총장, 원자력 병원장 유한 공전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남대문 교회 장로로 한국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명선도 훌륭한 분이다.
이 밖에도 의사로는 조광현 최창수 홍순각 고명우 등이 있다.
특히 고명우는 세브란스 병원 원장이며 선교사인 에비슨의 추천으로
1926년에 미국의 뉴욕 롱 아일랜드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얼마동안 모교에서 교수로서 후학들에게 의술을 가르치며 연구 활동을 하면서
남대문교회 장로로 교회를 섬겼는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납북되었다
고명우 장로는 서울여자대학교 총장인 고황경 박사의 부친이기도 하다.
1919년 2월 8일 동경 한국 유학생으로 구성된 2.8 선언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을 하고 즉시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 마리아 여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김 마리아의 고모이자,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하고 광주 수피아여고와 정신여고
교장 및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김필례도 해서 제일 학교 출신이다.
육군준장 출신인 김경선, 상해 임시정부 입법 원장인 김규식 부인인 김순애,
남궁 혁 박사의 부인인 김함라도 해서 제일학교 출신이다.
이 밖에도 많은 해서제일학교 출신들이 많은데 이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며, 한국사회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이와 같은 인물을 볼 때, 소래 교회와 해서 제일학교는 독립 운동의 산실이었고, 한국 교회의 모교회였다.
소래교회 성도들로 인해서 YMCA와 대한적십자가 설립될 수 있었고, 대한 부인회가 조직됐다.
이때는 조금 개화를 해서인지 남 녀가 구분하여 앉지 않고 같이 앉아 예배드리는 모습이다.
지난 1988년 한국기독교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복원된 것이다.
본래 소래교회가 세워져 있던 북한 송천땅에 소래교회가 복원되는 그 날을 위하여.
본 선교회는 북한 선교에 매진할 것이다.
언젠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 기독교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겠다.
옛 강대상 뒤에 하얀 탁상 위에 있는 성경 찬송은 요즘 것인걸로 보아
아마도 여기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러 온 자들의 것인듯 하다.
소래교회 안을 둘러보고 나오니 높다란 옛 모습 그대로의 종탑이 서 있어 반갑다.
옛날 어린 시절 교회는 새벽마다 종지기가 종을 쳤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은혜스러웠든지 가끔 그립다.
아동 문학가요 몽실 언니등의 베스트 셀러 작가였던 권정생 선생은 고향 안동의
시골 교회 종지기로 지내면서 추운 겨울날 새벽에 장갑을 끼고 종을 치면.
혹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종소리가 가지 않을 것 같아 꽁 꽁 언 맨손으로 종을 쳤다는 일화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남아 있다.
교회 옆 뒷켠 옆 뜰에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 서상륜과 이수정의 기념비가 있다.
서상륜(1848.7.19~1926) 평안도 의주 출생.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약 20년 전인 1866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가
조선의 대동 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이 스코틀랜드에까지 전해지자
1872년 8월에 스코틀렌드 선교부에서는 후임으로 로스(John Ross) 선교사 일행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로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꿈을 가졌는데 산둥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던 로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던 곳인 고려문을 방문하게 된다.
그 곳에서 로스 선교사는 평안북도 의주에 사는 이응찬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조선말을 배울 뿐만 아니라
1877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초급 교재인 ‘코리아 프라이머(Corean Primer)’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익힌 로스 선교사는 본격적인 성서 번역 사역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 번역 사역에 집중하였고. 그 이유는 조선말로 된 성경이 조선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만주를 오가며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있었는데
형인 서상륜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중국 선교부 병원의 헌터(J.M.Hunter)의사의
치료와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병이 완쾌되었고. 이때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와 로스(John Ross) 선교사로 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고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1882년 로스 선교사와․매킨타이어 선교사와 중국어 에 능통했던 서상륜과 의주 청년들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우리말 성서인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전셔”가 출판되었다
1879년, 중국 심양에서 최초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복음서와 로마서까지 번역되었다.
그리고 1883년 사도행전과 1886년 가을에는 서신서와 신약성서의 번역을 완성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로스역(譯)성경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서상륜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신자들의 힘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1886년 10월 서상륜은 영국 성서 공회에 의해 한국 교회 사상 최초의 권서인으로 임명되었다
권서인이란 성경을 번역하고 읽도록 권하는 자를 말한다
서상륜은 아직 기독교가 허락되지 않았던 때에 한글과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압록강 세관에서 성경은 모두 빼앗기고 겨우 몇권만 가지고 간신히 몸만 피신하여 고향 의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 의주에서 전도를 하며 복음을 전하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 체포위기에 놓이자
그의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모이자 1883년 5월 작은 초가집을 마련하여 예배당으로 삼고
예배를 드림으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래교회의 시작에는 그의 동생 서경조가 함께 있었는데.훗날 한국 최초의 장로요 목사 7인 중 한 인물이 되었다.
이수정은 1842년~1886)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했다.
가계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왕족의 먼 친족으로 전해지나, 일설에는 평창 이씨(平昌李氏)인
천주교도 이승훈(李承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항다
일본 기독교인들의 기록이나 선교사들의 보고서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학식이 높고 가풍이 당당했던 것으로 보아며
이수정의 총명함은 조정에 등용되어 도승지 까지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임오군란(1882년 고종19년에 음력 6월에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집단으로 반발하여 군란을 일으킨 사건)
당시에 명성왕후 민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로 인해 수신사 박영호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거기서 이수정은 도꾜 외국어 대학의 한국어 교수직이 마련됨으로 정부의 공식적인 임무없이
일본에 머물면서 서구 문물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었다.
일본 체재 중 당대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쓰다(律田仙)와 교분을 가지고,
쓰다의 방에 한문으로 쓰여진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족자를 읽고 그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뒤 쓰다의 인도로 한문 성서를 탐독하다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1882년 성탄절날 쓰다의 안내로 예배에 처음 참석하여 깊은 은헤를 받고 1883년 4월 29일 동경 시바 교회(露月町敎會)에서
일본 주재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Knox, G.W.)의 입회하에 목사 야스가와(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 고백서’를 발표,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대표해 주고 있다.
세례를 받은자 불과 일주일 만에 그해 5월 동경에서 제3회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라는 대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이수정은 한국어로 기도하는 특별 기도 순서를 맡았다.
한국 기독교의 선각자가 이국의 하늘아래서 한국어로 행한 최초의 공식적인 공중 기도 였다
일본의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 우찌무라 간죠는 그때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우리들의 머리위에는 무엇인가 기적적이요 놀랄만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온 회중이 다같이 감복하였다.
우리들 회중일동은 다 태양이 머리위에 비치고 있지 않은가 하기까지 신기하게 여겼다."
우찌무라의 간증과 같이 그 집회에서 한국어로 한 이수정의 기도는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기독교에 입교한 뒤 한글성서 번역 사업에 착수, 일본주재 미국 성서 공회 총무였던
루미스(Loomis, H.)의 권유와 협력에 따라
먼저 한문 성서에 토를 단 "현토 한한 신약 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다.
이어서 순 한글 성서인 "신약 마가젼 복음서"를 번역 하였고
1883년 12월 13일 미국에서 발간되던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에
한국의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 외국 선교 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편지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G.)가
미국을 떠나 한국에 올때 2개월 간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자기네를 부른 장본인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웠고
그가 번역한 한글 성경 "마가젼 복음서" 를 들고 1885년 4월 부활절에 조선에 입국했다.
일본 주재 매클레이(R.S.Maclay)선교사를 김옥균과 접속시켜 한국을 방문케 하고 고종을 만나
교육과 의료 선교 실시의 윤허를 받아내는 데에도 큰 조력자가 되었다.
이 밖에 몇 편의 교리서를 번역하고 한국 문학과 천주교 관계 저서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점차적으로 일본에 공부하러 오는 유학생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들을 모아서
1906년 9월에 창립된 동경 YMCA를 주일에 예배처소로 사용됐다.
YMCA 관계자들과 학생들의 청원으로 우리 총회는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를 파송하여
조만식을 비롯한 3인을 영수로 백남훈 외 4인을 집사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교회를 조직했는데 오늘의 동경 교회이다.
.근세 한 민족의 독립 운동사에서 정점(頂點)은 1419년 일본 동경 YMCA의 2·8독립 선언이다.
2·8 독립 선언은 본국의 3·1 독립선언 보다 20일 먼저 있었고 서명자들에게 용기와 큰 자극을 주었다.
갑신 정변의 실패이후 본국 소환령을 받고 구 한말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수구파의 음모로 즉시 체포되어
처형 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확실한 진위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수정은 여러 곳을 다니며 성경적 깨달음을 자신의 신앙 고백적 한시로 표현했는데
그 중 한 작품이 쿄토 동지사 대학의 설립자 니지마 죠의 생가에 남아있다
이 한시는 복원된 소래 교회 옆 마당 이수정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사랑함과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그 나무 뿌리가 마름과 같도다.
사랑하는 마음은 물과 같아서 뿌리를 윤택하게 하나니
가을과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그 뿌리가 마르지 아니하리라
항상 봄과 같아서 싹이 나고 꽃이 만발하여 그 잎이 무성하도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믿으면 꽃이 피고 얽히고 설킨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하니
그 깊음이 있고 심히 크고 달도다
그 몸통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아서 눈과 서리가 와도 가히 시들게하지 못하느니라"
종탑을 돌아 앞마당으로 나오니 입구 오른쪽에 신사참배 회개문이 새겨진 돌비가 보인다
만약에 지금도 이러한 배교의 고통이 교회에 들이 닥친다면 과연 현대 교회들은 얼마나 말씀에 충성할까 ?
나 자신 부터도 자신 없지만 과연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과 맞서 싸울 교회가 몇이나 될까?
후에 또 이런 회개문을 쓰고서 잘못을 용서 구할까? 생각해 보니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어 슬프다
1984년 4월 12일에 개회된 황해노회 제 126회 정기노회에 정식으로 발의되고 노회원들의 절대적인 찬성을 얻어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사업회 황해 노회 소래교회 복원 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다.
1988년 3.28 일 기공 예배를 드리고 1988.10.13일에 입당 예배와 함께
황해노회 135회 정기 노회를 복원된 소래교회에서 열었다
1889년 5,16일 소래교회 복원 봉헌 예배를 드리다
최봉석(최권능) 목사 기념비(1869.1.7~1944.4.15)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가 바로 그 인물로, 세인들에게는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삶과 사역이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주어진 명예였다.
그는 한국 교회 외침 전도의 대명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그의 브랜드였다.
당시 평양 시내의 모든 상가들은 최목사의 새벽을 깨우는 ‘예수천당’소리를 들으면서 가게 문을 열고
결국 그 사람들이 모두 평양의 대 부흥의 주역들이 되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한 위대한 전도 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깨달았던 진짜 예수 쟁이요 예수꾼이었다
구 한말 말단 관리로 지내던 그가 공금 횡령 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삭주 교회를 설립한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건네준 쪽 복음서를 탐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그는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고 중생하였다
최 조사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33세에 예수님을 믿고 45세에 목사가 된 최권능은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신학에는 관심이 적고,
오직 기도와 전도에만 열중한 나머지 평양 신학교를 세 번이나 낙제했다
세번이나 낙제하여 신학교를 졸업 못하여 목사가 될 수 없게 되자 그는 직접 평양 신학교 교수실을 찾아 가서
대뜸 "교수님들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하고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 같은 미물이 예수님을 믿고 신학교에 와서 공부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낙제가 되어 졸업을 못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바빠서 공부 못 하고 세 번째로 낙제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목사가 되겠습니까? 여기 많으신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저에게도 졸업장을 주시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끝나자 교수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아멘" 했다.
시치미를 딱 떼고 최권능 조사는 마포삼열(Samuel A. Moffet) 교장 앞에 가서 말하였다.
"교장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오늘 저도 이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엉뚱한 최조사의 말에 당황한 마포 삼열 교장은 "참 안됐고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니 내년에는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전도도 좋지만 열심히 신학 공부도 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 전에 제가 기도할 때에 '졸업장을 주시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 때에 '아멘!'이라 하셨잖아요?"
최 조사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진 마포삼열 교장은 할 말을 잃었다.그때 저만치 앉아 있던 교수 한 분이 말했다
"최 조사, 우리는 졸업장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습니다."
"교수님들, 어찌 이렇게 믿음이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기도를 할 때 구한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기도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마포삼열(Samuel A. Moffet) 교장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주십니다. 맞습니다. 최 조사는 우리 신학 교육에 보탬이 되는 학생 생활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방금 하나님은 저에게도 총명을 주셨습니다."
교장은 최권능 조사에게 졸업장을 주기 위해 교수들을 설득시켰고, 결국 최 조사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장로회 사기를 보면 1913년에 최권능 조사가 평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기록이 있다.
그는 지식을 애써 구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전하는 확성기가 되면 그만이었고 예수님을 전하는 기계로 족한 것이었다.
그는 오직 혼을 꿰뚫고 영혼과 직접 통하기를 원했다.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일 외의 일체를 헌신짝처럼 생각하였다.
그는 27년간 전도를 하였는데 만주에서 12년간 50개 조선에서 15년간 30개, 합해서 약 80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최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형사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 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심한 고문으로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최 목사는 병 보석으로 나와 평양 기휼 병원에 입원했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어 1944년 4월 15일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나흘뒤에 순교하시므로 평양의 어두운 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개의 큰 별이 하늘로 올라갔다
최권능 목사의 생애는 오직 '예수 천당'이 전부였다
강의동에서 바라보니 멀리 백주년 기념교회가 보이는데 걸어가려니 너무 덥고 멀어 가지 못햇다
이제 집으로 가려니 갈길이 막막한데 마침 신대원 학생듯한 청년이 오길래 택시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어보니 어떻게 오셨으며 어디로 가시냐고 물어본다
여기 온 사연을 말하고 올때 불편했던 차편을 말하니 자기가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 주겠단다
편하게 태워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두 분만 왔으니 같이 사진 못 찍으셨을테니 사진까지 찍어 준단다
학교 입구까지 내려와서 좁은문과 교훈이 새겨진 돌비 앞에서 폼 잡고 같이 두 컷 짱!
손장로가 학교 교훈처럼 꼭 하나님 기뻐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덕담 한마디 하신다 ㅎㅎㅎ
학교 입구에 세워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 문구와 함께 세워진 조형물 역광이라 사진이 어둡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좁은 문에 높이가 5m 나 된다
총신 신대원 교훈이 새겨진 돌비
부디 이 교훈 따라 여기서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이
휼륭한 신자요.학자요. 성자요.전도자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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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bonita 권사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남기셨습니다
저 역시도 감사해요. 빨리 쾌차하세요.
소래교회에 대한 역사와 자료들 보고 은혜 받았습니다 ㅎ 폭염날씨에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추석은 잘 지내셨지요? 모처럼 김권사도 만났겠군요. 전 형제가 없어서 형제 많은 집이 제일 부러워요
열심히 국내 성지순례에 저와 함께 동참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함께 은혜 받으며 나누는 시간 되어요.
저 역시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아 이 순례기를 쓰면서 알아가고 있거든요 ㅎㅎㅎ
잘 감상합니다.
늘 오신 흔적 남기시고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해요, 지난번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도 함께 은혜나누어 주셔서 감사했는데 또 국내 선지순례도 함께 해주시니 감사해요
@bonita 옙 감사드려요 권사님 ♡내외분 ""
권사님 나 지금 교회 갈려고 준비하다 성지순레 한국을 열고 눈물이 넘 나서 화장도 다시 해야 도고 마음이 넘 감동되여 흥분된 상태에서 이글을 올림니다 한국의 믿음의 조상들께서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알고 영접 한것을 이제야 알게 된것이 참 부끄럽기도 하고 또 이렇게 권사님의 수고로 알게 된것 또한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네요
교회차가 온다고 해서 나감니다
오늘 주일 예배 은혜 많이 받으셨어요?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권사님 댓글 기다려지네요.ㅎㅎㅎ
감사합니다.
수고도 많이 하셨네 나는 무식하게 소래 교회가 인천 소래에 있는 교회인줄 알었다오 내가 많은 근대 역사까지 많이 알았네요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