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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세 여성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이다.(로마 4:17)”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까? “예, 아브라함처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확신 있게 대답하는 성교회의 신앙이 아름다운 대단함으로 보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수없이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흔들리지 않는 말씀이고 정석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게 만드는 하느님을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하느님을 믿는 생활을 하는 성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죽은 곳에서 건지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나의 비전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의 비젼도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큰 비전은 우리가 살아야 할 동기를 주며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 않는 비젼은 자기 힘을 주장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하느님보다도 자신을 내세우는 것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남을 배제하고 분열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질투는 변명이 많아지고, 부정적인 관점이 팽배해지며, 신뢰를 잃게 하여 험악한 이야기가 주도하는 사회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질투하는 사람은 좋은 일은 자신에게만 일어나야 하고 나쁜 일에는 자신과 관계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단점을 크게 보고 비난만 일삼게 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거만함의 냄새가 풀풀 납니다. 이런 질투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즉시 피해야 합니다. 질투는 남에게 피해만 주고 결국 자신도 망가지게 합니다. 하느님께 아니라 자신에게 비전을 둔 사람은 자신과 남까지도 망가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질투로 나타나는 사건이 바로 금송아지 사건으로 3,000명이 죽었고(출애 32:28), 모세에 대한 고라의 질투로 야기된 반역사건으로 15,000명이 죽었고(민수 17장), 시므온지파의 지므리와 미디안여성 고즈비의 바알우상을 섬겨 염병재앙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민수 25장). 하느님에 비전을 두지 않고 제 잘난 체 거만을 피울 때 공동체가 망가집니다.
하느님께 비젼을 둠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내게서 이루어지고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모시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루가 4:18).”는 것이 하느님께 비젼을 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인도되어 사는 것이 하느님께 비젼을 둔 사람입니다. “이방인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된 나 바우로(에페 3:1).”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채 사는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께 비젼을 두고 사는 사람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노르위치의 줄리안, 시몬느베이유, 도로시 데이, 세 여성입니다.
* 시몬느 베이유
오래전 대학생일 때 일이 기억납니다. 방에 큰 상을 펴고 동생들과 함께 연필로 A4 종이에 각자 존경하는 사람의 얼굴을 연필로 그렸습니다. 그때 저는 시몬느 베이유 Simone Weil(1909.2.3.- 1943.8.24.)의 얼굴을 그려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2003년에 영국 켄트의 욜딩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욜딩 아래에 애시포드가 있는데 그곳에서 베이유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25세에 프랑스의 알톰스 전자회사에 1934년 12월에 노동자로 들어가 1936년까지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다.”고 고백한 철학자이자 활성가이자 영성가였습니다. 베이유가 공장에 들어간 이후 62년 후인 1986년 말에 제가 26세에 봉제공장, 유리공장, 기계조립공장에 들어가 1989년 2월까지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노동의 가치를 잊지 말라는 베이유의 테제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제가 가졌던 원칙은 “육체노동을 하자. 육체노동을 하지 못하면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자. 그것이 어려우면 꿈에서라도 육체노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려면 몸에서 땀을 흘리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게 된 근거가 됩니다. 땀 흘림 없이 얻는 것은 금방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979년 프랑스에서 발행한 시몬느베이유의 얼굴이 나온 우표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관심은 하느님께 접근할 유일한 능력입니다.”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한계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을 때 좌절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궁극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늘 하느님이 다가오게 됩니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의 궁극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이유는 인간존재라는 궁극의 문제를 과제로 인식했기에 하느님께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 집중된 관심이 약할 때 질투를 하게 되기에 오직 하느님께만 관심을 집중하고자 한 것을 베이유에게서 배웠습니다.
1996년 성공회 영성센터의 모임을 꾸리고 매월 1박 2일 피정을 하면서 영적친구들이 모여 서로에 대한 영적안내를 10년 넘게 참여했습니다. 모임에서 영적독서의 책 중에 시몬느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이 있었습니다. 성공회 사제들이 좋아하는 시몬느 베이유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웃을 사랑하라.”는 생각을 가진 시몬느베이유가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1935년에 포르투갈의 북부해안도시인 바르짐의 거리행진 중 성가를 듣고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 신앙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철학교사가 노동자가 되었을 때 들었던 성가가 베이유의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제가 공장에 다니던 1987년에 대전주교좌성당에서 우마가신부님이 선창하셨던 기리에엘레이손(긍휼경)과 감사성찬례때 노래로 부르는 주의 기도문이 천상의 노래로 들렸습니다. 지금도 이 두 노래는 제 가슴에 성령을 모시는 노래로 천국을 느끼게 하기에 공장을 오갈 때나 쉴 때나 밥을 하면서 긍휼경과 주기도문을 노래로 흥얼거렸습니다. 베이유가 하느님을 향하게 한 두 번째는 공장에서 나오고 나서 1937년에 아시스의 프란시스코 산타마리아의 안젤라대성당에서 처음 기도를 바치게 된 것이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된 계기라고 합니다. 저는 제단이 보이는 대전주교좌대성당 안의 제단이 제게 평화를 주었습니다. 베이유에게 안젤라대성당이었다면 제게는 대전주교좌대성당이었습니다. 베이유가 하느님을 모시게 된 세 번째 계기는 1952년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성공회사제의 “사랑”이라는 시를 낭송하면서 하느님께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웨일즈 출신의 조지 허버트 성공회사제(1593.4.3.-1633.3.1. 솔즈배리교구 배어튼 성 앤드류성당)가 1633년에 시집 <성전>에 실린 “사랑”의 시를 베이유가 낭송하게 되면서 거대한 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내려와 나를 사로잡았다.”고 고백하는 베이유의 신심으로 제가 들어가는 듯 합니다. “주님이 제 목자이시기에 저는 제 필요한 모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는 시의 첫 절부터 시작되는 시편 23편이 저에게 사제의 삶과 주교의 삶으로 하느님을 향할 때마다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존 키이츠의 시도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니, 그 사랑스러움은 늘어나고, 그것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존 키이츠(1795-1821)의 엔디미온의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달의 여신 셀레네가 잘생긴 목동 엔디미온 Endymion을 보고 반해 아름다움이 영원히 가시지 않도록 영원히 잠들게 하고, 셀레네가 엔디미온 대신에 양들을 돌보게 됩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라는 결핵으로 로마에서 죽은 영국인 존 키이츠의 묘비명입니다. 자기의를 주장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알면 인간은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거리행진의 성가를 듣고, 가난한 이를 위해 온 삶을 바친 프란시스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에서 바친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시를 낭송하며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확신이 들었던 시몬느 베이유처럼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자신 위에 내려온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사로잡았던 장소와 시간을 말할 수 있습니까? 조지 허버트 성공회신부의 “사랑”이라는 시를 우리도 읽어보면서 시몬느 베이유처럼 그리스도가 내려와 우리를 사로잡는 신비의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배은망덕하고 더럽고 믿음이 부족한 나를 환영하고 사랑의 몸을 먹으라 하여 나는 사랑을 먹었다.”는 케임브리지대출신의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신부의 “사랑”이라는 시詩입니다. 이 시는 시몬느 베이유를 혁명가, 노동운동가, 철학가에서 영성가인 신앙인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교구민들을 돌보고 환자를 방문하시고 옷과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목활동을 평생 하신 조지 허버트신부가 좋아하는 시편은 51편입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않으시니(17).”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생명으로 살고자 원한다면 예수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베이유도 시편 51편으로 전부 연민으로 채워져 묵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 뜻을 받들어 우리는 천국을 각 처소에서 세워갑니다. 가정에서 천국가정을 세위기 위해 성교회가 되고, 교회에서 천국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교회가 됩니다. 각자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들과 우주와 만물에 큰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아주 작은 자비에 자신을 내맡기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신조로 삼고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조지 허버트신부처럼 하느님 말씀으로 신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 그리스도인의 자리라고 성육신하신 하느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의 비전을 이집트제국의 파라오 왕에게 제시한 모세처럼 우리는 인류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우리가 줄 비전은 무엇입니까? 가장 어려운 자리에 성공회 사제가 찾아갑니다. 1945년부터 2023년의 78년간 분단민족으로 살아가는 아픈 한반도에 그리스도인인 성공회가 주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양극단 진영으로 나누어 일치에서 멀어져 사는 한반도에 그리스도인으로 비전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한반도에 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젖고 사랑에 젖어 평화가 넘치는 사람이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 도로시 데이
어릴 때 성공회 성당에서 자란 도로시 데이 Dorothy Day(미국, 1897.11.8-1980.11.29)는 자서전인 《The Long Loneliness》(오랜 외로움이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역간)이 있습니다. 김홍일암브로스사제의 소개로 도로시 데이를 알게 되었고 미국에서 도로시데이가 세운 환대의집을 찾아가 노숙인의 삶을 보았고 도로시가 환대의 집의 운영원칙을 성바우로의집과 나눔의집의 생활원칙으로 “환대”를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한현선생이 발간하는 “참 사람되어”에 도로시를 소개하는 글을 보고 조세종선생은 “피터 모린”에 대해 번역책을 내서 도로시와 영적관계를 맺은 모린의 농작공동체에 대해 알게 되어 도로시 데이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도로시는 1940년대 초반에 성 베네딕도회 성 프로코피어스 수도원 St. Procopius Abbey의 봉헌자Oblate가 되어 1955년에 봉헌예식을 하였고, 일생을 통해 수도원과 영적인 연결을 유지하였습니다. 아브레이트 Oblate는 수도생활에 몸을 바친 봉헌자로 영적인 삶을 살겠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사는 수도사는 아니지만 세상 생활 속에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는 아브레이트가 도로시이고 한현선생이고 김홍일사제이고 제가 아브레이트이고 싶었습니다. 김홍일사제는 프란시스수도회의 제 3회를 세워 박경조주교, 양혜란신도 등 고결한 성공회 신도와 성직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도로시 데이의 삶을 보고 배우고자 하는 고품격의 영적인 모임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데오 그라치아 Deo Gratias!(‘하느님께 감사합니다!’는 뜻).”라고 외치면서 일어나는데, 이 말이 도로시의 묘비명이 된 것도 도로시다운 묘비명입니다. 현실에서 하느님께만 초점을 맞춰 산 도로시의 마지막의 말도 아마 “하느님께 감사”이었을 것입니다.
도로시는 자발적인 가난을 주창해 “조금씩 덜 가지면 한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된다.”고 하였고, “들판과 숲의 아름다움을 보면 하느님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못 보는 이들이야말로 무신론자이다.” “우리 모두 오랜 외로움을 안다. 우리 모두 유일한 해답은 사랑임을,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오는 것임을 이제 안다.”고 하여 본회퍼의 공동체 운동을 삶으로 보여준 도로시입니다. “그녀는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고 훈장을 받는 도로시를 위한 축사의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성인추대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미국의 산안토니오에 있는 신학교에서 워싱턴의 샬렘영성원의 피정이 있을 때 도로시의 성화 앞에서 기도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나눔의집의 이상을 행한 삶의 원칙을 도로시에게서 배워서 그 이상을 향해 가는데 힘이 부족합니다. 하늘에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도로시의 질문인 “우리는 시몬느 베이유의 삶을 어떻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가?”을 받으면서 도로시와 시몬느 베이유의 삶을 관계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 노르위치의 줄리안
영국의 중동부지역에 노르위치가 있는데 14세기경에 줄리아나Julian of Norwich (1342-1416년 이후)는 신비주의자인 여성은수자로 1373년 5월 8일, 31살에 중병이 들어 16번의 환시를 본 것을 “신성한 사랑의 계시”라는 책을 써서 가난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All is well.” 이 말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줄리안은 노리위치에 있는 세인트 줄리안 교회 St Julian's Church에 딸린 자기 방에서 거의 평생을 보내며 은둔자로 지냈고, 익명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세상으로부터도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를 원했지만 살아생전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은수자의 삶이 사제의 삶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면 성교회가 그리스도로 세상을 더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은수자 줄리안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함께 하는 마음으로 막달라마리아와 함께 더 고통을 갖기를 원했고, 30대에 육체의 고통을 얻기를 바랬고,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로 3가지 상처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느님께 충만한 영광만 전하길 원했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모든 것을 지닌다.”고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남들을 분열시키고 죄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시길 바랍니다(로마 16:17).” 은수자로 사는 삶이 사도 바우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글에서 보입니다. 분열시키는 자와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을 멀리하려면 은수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줄리안이 살던 시기에 흑사병이 일어났고 정치적인 억압으로 어려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줄리안이 70대였던 1414년 경, 잉글랜드의 저명한 신비주의자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가 은수자인 줄리안을 방문하여 영적조언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켐프의 자서전에 줄리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데임 줄리안은 하느님이 그녀의 영혼에 담은 품위 즉, 양심의 가책, 회개, 다정함과 헌신, 성스러운 명상과 사색으로부터 온 연민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훌륭한 상담가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조언을 내게 제공했다"고 기술했습니다.
14번째 환시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이 넘치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어머니로 비유하며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기술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당시의 신학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은수자 줄리안은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영혼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나의 주인이 하느님 한 분 뿐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자이자 은수자인 노르위치의 줄리안의 가치와 신앙을 성교회에 적용하는 모습입니다.
* 노리치 성공회의 줄리안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음을 추구합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입장할 수 있는 환영하는 공간을 만드십시오.
예배, 기도 및 성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십시오.
사람들과 환경을 섬기고 돌봄으로써 선교와 사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십시오.
배우고, 질문하고, 변화시킬 기회를 만들어 영적 성장을 키웁니다.
세대 간 다양한 문화와 신앙 표현을 포함하는 지역 사회 기반 삶의 질과 웰빙의 생성, 유지 및 성장을 이끌어내는 관계, 거버넌스 및 행동의 우선 순위를 지정합니다.
*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힘을 얻은 노리치 성공회 교회의 줄리안 공동체 생활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이 초대됩니다.
자신을 양육을 추구하는 영적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물의 선물로 인식하십시오.
정기적 인 예배, 기도 및 성찬을 받아들이십시오.
일상 생활에서 이웃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십시오.
세계에서 평화, 정의, 연민, 포용 및 평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 문화, 종교에서 표현되는 방식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시간과 재능의 선물로 지역 사회의 선교와 봉사 사역에 참여하십시오.
지역 사회의 선교와 봉사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십시오.
노동운동가인 시몬느 베이유, 사회변혁가인 도로시 데이, 신비가로 은수자인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제 삶이 들어오면서 활동가인 제가 하느님의 영인 성령으로 사는 활성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제 명함에다가 명칭을 쓴다면 “은수자”로 쓰고 싶지만 “성령활성가”로 쓰면 지금 수준의 명칭이 될 것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듯이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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