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된다.
반 아이 중에 성태순이란 나의 단짝 친구가 있었다. 성태순은 시장 귀퉁이에 있는 슬레이트집에 살고 있었는데 연탄 아궁이와 단칸방 하나 뿐인 하꼬방이었다.
그곳에서 일곱이나 되는 식구가 바글대고 있었다. 아빠가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가난한지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태순이 언니는 중학교도 못 가고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슬레이트 집 앞은 시장 상인들이 갖다 버린 푸성귀 껍질이 언제나 가득했다.
여름이면 옥수수 껍질 더미가 높이 쌓여 있어 우리는 신발도 없이 그 곳을 걸어다니며 놀았다.
태순이는 집안은 가난해도 성격이 밝고 활달해 언제나 낙천적이었다.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싸우는 일이 없었다. 마음이 너그럽고 온화해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같이 놀아 주었다.
언젠가 태순이를 따라 용산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용산역 근처에 목조 다리가 있었는데 그 밑으로 개울물이 흘러가던 생각이 난다. 바로 그 옆에서 태순이 외숙모가 다라니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주변을 따라 놀다 보니까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한강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차비도 없고 걷자니 너무 멀었다. 그때 태순이가 한 꾀를 냈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순경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버스를 공짜로 얻어 탈 수 있다고 했다. 멀리서 순경 아저씨가 보이자 태순이는 다가가 일부러 울면서 말했다.
"아저씨 노량진이 어디에요?"
"여기서 한강 다리를 건너면 금방이야."
"아저씨 우린 차비도 없고요 아무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집이 여기서 머니?"
"네, 노량진 본동 지나서 한참을 더 가야 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버스를 태워 주면 갈 수 있지."
"네."
그날 태순이와 나는 순경 아저씨가 공짜로 태워 준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편안히 왔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동산에 올라가 뛰어 놀던 기억도 난다. 태순이와 나는 시간만 나면 어지간히 쏘다녔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순이와 나는 봉천동에 있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태순이는 살던 집을 노량진과 상도동 중간지점인 산꼭대기로 옮겼는데 그 역시 하꼬방이었다.
태순이와 나는 차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노량진에서 봉천동까지 약 4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쩌다 하교길에만)
그런데 차비 10원을 아끼려다 도중에 까먹는 아이스케키 값이 더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태순이는 장질부사를 앓았는데 머리칼이 홀랑 빠진 일도 있었다. 참 열악하고 힘든 환경인데도 그애는 언제나 명랑하고 낙천적이었다.
여고 1학년 때였다. 노량진 중앙시장에서 우연히 그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난 그때 교복차림이었는데 그애는 앞머리를 눈썹까지 내리고 옷도 머리 모양도 전혀 학생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학교 안 다니니?"
내가 묻자 그애는 남영동에 있는 무슨 여고를 다닌다고 몇 번이나 우겨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때도 태순이 부모님은 병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가난도… 그런 가난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약간 기는 죽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명랑하고 씩씩했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쯤은 아이 엄마가 되어 중년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으리라.
김영미란 아이도 생각이 난다. 영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짝이었다. 영미 언니도 우리학교 4학년인가 그랬었다. 얼마나 집안이 가난했는지 그애는 점심을 싸오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때 영미는 상상 꼭대기 판잣집에 살고 있었는데 나와는 마음씨도 말투도 전혀 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난 엄마라고 하는데 그애는 그 어린 나이에도 꼭 어머니라고 호칭했다.
또 나는 경어를 잘 쓰지 않는데 비해 그애는 어른들만 보면 꼭 경어를 사용하며 집안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어린 나이에 본 영미네 집은 정말 가난하고 형편없어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미 언니는 무슨 공장엔가 다니고 집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늘 궁색해 보였다. 그런 환경속에서도 영미는 늘 부모님께 순종했고 한번도 원망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 찢어지는 가난속에서도 그애는 얼마나 마음이 어질고 푸근했는지 모른다. 정이 많아 늘 나눠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받기만 하고 준 기억은 별로 없다. 영미는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집 근처에 신설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 나보고 같이 전학 가자고 몇 번이나 조르던 그애의 선한 눈빛이 생각난다.
그때 그렇게 어렸는데도 난 잔정이 없고 얼마나 무심했는지 헤어짐에 대한 슬픔이나 미련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여고 2학년 때였다. 친구가 그 동네에 살고 있어 영미가 살고 있는 그 상상 꼭대기 집을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다.
그 집 앞을 지나는데 영미가 여전히 궁상스런 모습으로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난 단발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영미는 커트머리에 낡은 T셔츠에 후줄근한 고무줄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학생 같지가 않았다.
난 그때 재미있는 표정으로 영미에게 다가가 팔꿈치를 툭 치면서 말했다.
"얘 너 이름 김영미 맞지?"
그때 영미는 슬픈 눈빛으로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그 어린 나이에 그애는 왜 그런 모습으로 집 앞에 서 있어야 했을까?
그녀의 슬픈 눈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다가가서 이름까지 확인했던 나의 행동에 대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멍하니 서서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바라보던 영미의 눈빛이 아직도 생각난다.
상상 꼭대기 흙길 위에 난 대문도 없는 판잣집 앞에 서 있던 그 착하고 순한 영미의 눈빛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그 일대가 재개발 지구로 변경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성태순과 김영미를 만났던 60-70년대는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이던 참으로 힘든시기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뒷골목에 있는 공동 수돗물을 길어 먹는 집도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일하러 간 친구도 많았다. 난 그때 그 친구들을 재미있는 표정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들의 가난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10월 유신이란 걸 알았다. 그 악법을 두고 공포 분위기에 눌려 쉬쉬하며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연. 고대 대학생들이 연일 데모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학에 들어 가서는 10.26 사태와 광주 사태를 겪었다. 그때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데모에 참가할까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도 군부의 서슬퍼런 분위기 속에서 근무했다.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개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화가 아닌 방종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때도 많다.
사람들의 인심은 더욱 각박해져 따스한 정을 주고 받는 일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다. 세월이 변했다고 삶이 윤택해졌다 해서 인심이 좋아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은 태생대로 살아가는 것 같다.
성격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그대로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풍파를 많이 겪었다고 해서 팔자가 뒤바뀌었다 해서 성격 자체가 변하거나 인품이 달라지진 않는다.
아니 점점 더 악해지는 것 같다. 옛날에는 정직하고 겸손했던 친구도 환란을 몇 번 겪고 나더니 노골적으로 악한 말을 내뿜는다. 교만한 말로 상처주는 건 예사다.
살아가면서 하도 험한 인심을 대하다보니 가끔씩 어릴 때 성태순과 김영미가 생각난다.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낙천적이고 순종적이었던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자식들 걱정에 노후를 준비하려나?
지금 생각해 보면 성태순은 어리숙한 나에 비해 훨씬 영악했던 같다. 잔꾀도 많고 처신도 잘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한 것을 숨기며 굳이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우긴 걸로 봐서 자존심도 세울 줄 알았다.
반면 김영미는 늘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걸로 보아 아마도 힘든 세월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어린 나이에 부엌일까지 하며 어머니에게 불평 한마디 할 줄 몰랐으니까. 영미가 사는 루핑을 얹은 판잣집은 보기만 해도 가난이 줄줄 흐르는 곳이었다.
그 집 앞에 감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그 감나무 앞에서 나를 쳐다보던 영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 왜 그녀의 슬픈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세월이 30년이 흘러버렸다.
언젠가 한번 보고 싶다. 어릴 때 모습을 확인하며 30년 넘게 흘러버린 세월을 세고 싶다. 세월의 증거로 얼굴에 주름살은 생겼을지라도 다시 한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그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
그동안의 세월의 여정을 잠잠한 미소로 나누고 싶다.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그 시절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하며 미래를 의논하고 싶다.
끝
첫댓글 외숙님. 어릴 때 재미있게 지냈군요. 지금의 모습이나 어릴 때 모습에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더불어 잠깐 추억에 잠겼었네요.
외숙님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계시는 두 분도 어쩌면 세월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어른 시절 속의 외숙님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외숙씨의 아름다운 친구들을 읽으며, 우리들은 지금쯤 누구의 뇌리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 있나?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살포시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소꿉친구가 50년만에 나를 찿아 온 일이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