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로 오르는 진입로 양옆으로는 625그루의 자작나무들이 이곳에서 산화한 영령이되어 탕방객을 맞이하려는 의미를 부여한 듯~~!!
이곳에서 치러진 화살머리 전투 유적 발굴과정에서 나온 무기나 장비등을 녹여서 만든 "기억의 종탑"은 나름의 상징성을 나타내어주고 있다.
백마고지전투 승적비가 외로이 한쪽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의 시점의 백마고지전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켜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게되는데,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백마고지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상승각이다~! 건너편으로 백마고지 현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기까지한 평야의 저편~! 당시에는 수많은 포탄과 비행기의 폭격의 아우성으로 몸서리 쳤을~~
생각보다 꽤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에 놀라웠던 순간~~!!!
철원 평야를 가로지런 앞쪽의 야트막한 산(395m)이 백마고지이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파월을 하면서 이곳에 주둔했던 백마부대는 파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곳에서 30개월이라는 군 생활을 하게되면서 얻어진 역사적 지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