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양현근-
그리움 짙어
제 무게로 무너지는 밤이면
창밖 세상에는
비가 내려도 좋다
나단조의 젖은 음계로
나지막이 비가 내리면
때절은 세간사는 꾸밈없는 이역(異域)
보고 싶은 사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비라도 내리면 좋다
목마름으로
대지는 허기져 오고
서툰 인연 탓으로
질퍽한 하늘 녘에는 천둥이 치는데
일상의 짐이 무거운 날이면
창밖 세상엔 비가 내려도 좋다
비라도 내리면 좋다
-비 내리는 이사/박형권-
지금 난 이삿짐 옆에서 담배를 피우네
빗소리와 얼크러진 니코틴이 희미한 악수를 청하네
어제 널어두었던 구멍 난 양말과
뜯어보긴 했지만 사용하지 못한 즐거운 섹스도
라면박스에 포장되어 있네
이사를 위해서 몇 가지는 버렸네
이 동네에 들어와 아옹다옹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자고
부지런히 돌렸던 시루떡의 행방을 모르겠고
비바람이나 피하자고 지붕 한 귀퉁이 얻어
꼬박꼬박 바친 월세 34만원은 누구의 뱃속에서 이자를 벌고 있는지
사람 좋아 보이라고 벙글벙글 웃었던
그 아까운 웃음이
골이 깊은 골목에서도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아
웃음마저 버렸네
새로 이사 갈 집에는 한 평 남짓 텃밭과 옆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좋겠네
이제 내 등짝을 갈아엎어 오이 심고 부추 심는
낭만을 버리고
그 낭만 위로 별빛 쏟아지는 꿈도 버려야겠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하수도 냄새도 나고 찢어지게 우는 아이도 있고
젊은 여자의 브라자도 옥상에서 펄럭여 내 식구들이 쉽게 적응할 것 같네
시끄러운 봉제공장이 옆에 있어
깊은 잠 들지 않아 좋겠네
나는 아직 이 방에서 신을 신지 못하는데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정든 내 방에 젖은 신을 신고 들어오네
-비/유금옥-
구름의 절벽에서 떨어져야 한다
천둥과 번개에 머리를 부딪쳐야 한다
손과 발과 엉덩이를 허공에 버려야 한다
늙은 염소 뿔에 떨어지거나, 혹은
풀잎 위에 떨어져도 산산조각 부서져야 한다
공기처럼, 다시 한 번 튀어 올라
장미꽃을 통과할 순 있으나
붉은 꽃잎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아야 한다
혹, 어느 강가의 날렵한 횟집 주방장이
식칼로 당신의 배를 갈라도
내장 한 올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서 푸른 바다까지 당도할 수 있다
-비의 圖錄/윤의섭-
마당에 꽂히는 장대비에선 대숲 냄새가 났다
수직으로 늘어선 수평선
빗줄기에 베일수록 풍경은 시퍼렇게 날이 선다
그렇지만
이라고 반박하려다 그만 둔다 비에 젖으면 비가 된다니 우산을 내리고 묵묵히 비를 맞기로
한다 비는 곧바로 온몸을 휘감는다 축축한 혓바닥이 들러붙는다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린
서서히 식어가는 체온이라고 비가 되면 각자 흘러 어느 지층인가로 사라져갈 뿐이라고 스산
해졌지만 우산을 다시 들지는 못한다 두 빗방울
장대비는 더 거세졌다
는개 안개비 가랑비 이슬비 여우비 보슬비 작달비 웃비
비님이라고도 했다
다 놔두고 종일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렇게 세상이 잠기는데 종말에 대한 소식은 없다
비린내가 끼치고 거대한 바람고래가 산자락을 쓸고 지나간다
비 오는 날이 무서운 건 고요해서다
정말이지 음산하다
비는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지중을 파고드는 빗방울
서로 같은 뿌리를 가졌으므로 인연은 있을 것이다
빗줄기 피어오른다
구름꽃이 하늘 가득 피었다
-비의 자화상/김중일-
허밍, 내 코끝을 맴도는 밤의 냄새 같은
캔버스 위를 허밍처럼 흩날리는 붉은 비
비오는 날 침대 위에 수북이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은 나를 그리던 세필의 흔적. 일생을 떠도는 허밍 같은 나를 스케
치한 흔적. 베개 위에 머리카락은 매일 잠에서 깨면 몸 안에서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망령 같은 내 밑그림의 흔적. 나는
잠시 나로 채색되어 있을 뿐. 내가 지난 계절 귀뚜라미로 밤새 흥얼거렸던 허밍은, 먼 대륙까지 날아가 잡풀로 무수히 웃
자라 있다. 팔레트 한 쪽에 덜어놓은 물감덩어리 같은 대초원의 양떼들이 그 잡풀 속에, 내가 쏟아낸 허밍 속에 코를 박
고, 듣다가 울다가 울다가 뜯다가 하며 검게 뒤섞이는 밤. 나는 하얗게 튼 입술의 사시나무로, 긴 머리 까만 발의 밤들을
기분 따라 바꿔가며 빙글빙글 바람의 왈츠를 추고. 나는 찬 밤을 입에서 입으로 하얀 입김처럼 떠도는 허밍. 분명히 다 불
렀는데 끝내 끝나지 않는 허밍. 나는 허밍으로 짜여진 새털방석에 앉아 간지러운 궁둥이를 들썩거리고, 고독의 긴 손가락
으로 적막을 가르며 드럼을 단 한번 격렬하게 내려친다. 낙뢰가 구름을 치듯. 퐈아앙앙치이이익.
확 타올랐던 불길 위로
오늘도 다 잡쳤다는 분노의 붓질처럼 시커먼 폭우가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짓뭉개듯 내리긋고 있다.
-저녁 비/황영숙-
낮게 흔들리던 구름이
내려앉으며
어둠보다 먼저 비가 내린다
오랜 우물 속에 잠겨 있던
풍경들이
빗속에 젖어 가고
베란다의 꽃들은 먼 야생의
숲속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키 작은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있는
비가 내리는 저녁
햇살을 데리고
떠난 새들은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닫힌 방안에서
오래오래 잊었던
슬픔 하나
다시 비에 젖는다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나희덕-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비가 오기 전에/윤의섭-
연인을 보내고 나는 아프다
이제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지 지평선에서 비구름이 몰려오는 사이
추락 가까운 단풍잎이 가장 먼저 흐느낀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 더 가지 못하고 쓰러진다
서서히 어두워진다
저토록 슬픈 마중 저토록 속절없는 임종 저토록 불길한 전조
쏟아지는 빗줄기에 갇혀 서서히 지워지면
그렇게 무너진 저녁 속에 녹아들면
헤어날 수 있을까 아프지 말았어야 했던 것일까
조금 젖을 뿐이라고 다 아는 듯 위로했지만
예언자여 이미 젖은 배는 가라앉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잠잠할 때도 있었다
잠시나마 행복했었다
나는
세상이 숨죽이고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멀리서 고해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더 멀리서 파도 같은 신음이 들린다
한 사람만 빼고 비구름은 그 모두를 몰고 온다
-비의 무덤/박지우-
비가 무단횡단을 해요
길들이
깜박거리며 경보음을 울려요
뿌리가 잘린 화려한 화환들
억지웃음을 짓고 있어요 붉은 입술에서
공중전화부스의 욕설이 신나 냄새를 풍기는 도시
문을 닫는 여관골목을 엘리스의 고양이가 떠돌아다녀요
배배꼬인 날씨를 진공포장하고 싶어요
과거의 시간이 출렁이는 모형 바닷속으로
싸움을 부추기던 자본의 간판들이 떠내려가요
갈 곳을 잃은 가로수들은
폐기된 약속들이 모여 있는
영등포역에서 미래의 차표를 구걸해요
조각조각 떠도는 허공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새들이 온종일 젖어 있어요
자전거보관소
유기해버린 시간이 녹슬어가고 있어요
세상은 비의 무덤
무너진 하늘이 울컥해요
앓는 빗소리가 잠속을 떠돌아요
-비의 암각화/최정진-
마당에 고인 웅덩이를 어머니가 빗자루로 쓸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사냥한 짐승의 울음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흙은 비에 젖고 동굴의 벽은 빗소리에 젖던 날이 있었습
니다 짐승의 비명을 사랑한 물이 하늘까지 달아나 구름이
되었고, 인간에게 연민을 품은 물이 지상에 돌로 남은 날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빗소리를 주워 남들 몰래 동굴의
벽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빗소리를
숨기다 그만 사냥을 나서려면 아버지들에게 들키고 말았습
니다 내 모습을 기이하다 여긴 아버지들이 돌칼로 겨누고
달려든 순간, 내 몸에 뚫린 굴에도 어떤 형상들이 그려졌
을까요 돌칼의 하염없이 날카로운 딱딱함에 내 몸에서도
자꾸만 빗소리가 새나왔습니다
비가 오면 아버지들은 동굴 밖의 빗줄기를 보며 돌칼의
날이 아직 무디다하고, 어머니들은 그런 아버지들의 어
깨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던 날이 있었습니다
쓸어내도 마당의 웅덩이는 내가 쓰러졌던 자세로 고입
니다 저 웅덩이들의 나열이 비 오는 날에서 비 오는 날
로만 이어지는, 비의 연표임을 알겠습니다 지상에 웅크
리고 울음마저 썩어가는 내 육신 앞에 앉은 어머니 하나
멍한 눈빛을 하늘에다 쏟아 붓고 있었나요 피부에 갇힌
구름이 되어 자신의 몸에 빗살무늬를 새기고 있었나요
나는 한 없이 깊은 동굴입니다 인간들이 옷으로 꿰어
입기도 하고 말려뒀다 먹기도 하는, 사냥 당한 시간입니다
-비-없는 날의 꿈/최라라-
어제는 비가 내려요 베란다의 꽃이 흠뻑 젖어요 닦아 주고 싶은데 그러면 꽃이 아프대요 왜
꽃은 물을 닦아주면 아픈지 나는 궁금해요 우리 엄마가 말할 때는 눈을 보면서 하는 거라고
했는데요 꽃은 나를 안 봐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봐주면 좋겠어요 나중에는 꽃이 추운가 봐
요 새파랗게 떨어요 내가 춥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내 이마를 짚어보는데요 아이구 우리새끼
많이 아픈가보네 그렇게 조금만 만져주면 꽃도 배시시 웃을까요 아, 우리 엄마 아빠는 거실
에서 한참 맥주 마시고 있어요 나도 먹어 봤는데요 토요일 밤에 마시고 일어나니까 일요일이
사라져버렸어요 술은 일요일이 없어지게 하니까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 엄마 아빠는
내 말을 안 들어요 나는 비가 오니까 심심해요 놀이터에도 못 가고 친구들도 놀러 안 와요 참,
내 방에 있는 꽃에 물이나 줘야겠어요 내 방에는 비가 없거든요 그 꽃은요 내가 일곱 살 생일
때 아빠가 사 주셨는데요 일 년 동안이나 꽃이 활짝 피어있어요 엄마는 조화를 사왔다고 아
빠에게 뭐라고 그랬는데요 나는 조화라는 이름이 자꾸 예뻐서 만져주고 향기도 맡아요 조화
라는 꽃은요 아빠냄새가 나는데요 내가 비를 주면 반짝반짝 웃어요 다음에 놀러 오면 소개해
줄게요 이제 잠 올라고 그래요 비 다 내리면 깨러 올게요
-태풍 주류 비와 비주류 비/송시월-
북태평양에서 남하하는 목소리 큰 태풍 주류 비와
남해안을 돌아 북상하는 몸집이 왜소한 태풍 비주류 비가
인왕산에서 술잔 부딫히며 시시비비 말씨름을 하다가
함께 굴러 떨어진다
태풍 주류 비
엎어지고 회오리치며 빌딩 나무 전선줄까지 비틀어 짜며
非非非를 지붕에다 창문에다 집집마다 퍼붓고 다닌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한 드럼 퍼붓는다
귀 막고 눈감고 몸짓도 소리도 없이 서 있는 가로등을
넘어뜨린다
태풍 비주류 비
쌩쌩쌩 웅웅웅 덜커덩덜커덩 녹슨 철책을 흔들어보다가
거리로 뛰쳐나간다
8차선 도로 중앙선이 비비비비 주르르륵
꼬였다 풀렸다 흩어진다
구름 사이로 눈 부릅뜬 해, 실핏줄이 툭툭 터진다
나는
태풍 주류 비와 비주류 비를
포르말린 병에 넣어 거리에다 전시한다
-11월의 비/위상진-
지금, 어딘가를 쓰고 있을
H에게
너는 여섯 번째 나의 구두창을 갈고 있다
음이 소거된 티브이 뉴스가
거짓 수사가 많아지는 저녁을 꿰맬 때
구두는 너보다 먼저 늙어갔다
벽화처럼 정지된 얼굴로
부르는 노래는 믿을게 못 되었죠
말言이 안 되는 말들을 수집하는 나는, 특히 잘 있죠
'거기 윗동네 공기는 어떤가요?’
시간의 창살 뒤에 어디에도 없는 너의 말은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거울 같아
구둣방 거울은, 안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든 채
사라지는 너를 뱉어 낸다
나는 주크박스를 빼앗긴 음악처럼 창백해지고
공중에서 노란 비가 묻어있는 신문지가 떨어진다
거미는 담벼락에 못처럼 박혀버리고
안짱다리를 한 유령이 걷어찬
우유는 하수구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너의 젖은 말言 하나가 나를 지켜본다
-사월 비/이제하-
보소, 보이소로 오시는 사월 가랑비
헤어진 여자 같은 사월 가랑비
잔치도 끝나고 술도 다 깨고 피도 삭고 꿈도 걷히고
주머니마저 텅텅 빈 이른 새벽에
가신 이들 보이는 건널목 저편
사랑한다, 한다 횡설수설하면서
어디까지 따라오는 사월 가랑비
-비/김 억-
포구십리(浦口十里)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 한나절을
모래알만 올려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 떼도
지차귀가 촉촉히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南浦) 사공 이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비가 호수를 때릴 때/이기홍-
문득 보았다
고요하던 호수가 징처럼 흐느끼는 것을
비 맞으며 호수는
비애를 가득히 밀어내고 있었다
비 그치자
징은 사라지고 호수는 넓고 깊어졌다
평평한 수면 속 푸른 핏줄이 비친다
비바람에 쓰러졌던 풀잎들도 호수가 일으킨다
어머니에게서 징들이 사라진 건,
이웃집 빨랫감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국수 반죽을 밀다 그런 줄 알았다
젊어서 네 아버지를 여의고부터
가슴속에서 종종 징이 울리더라
그래서 그 징을 저 호수에 버렸단다
우기 동안 어머니가 징소리를 견딜 때까지
아, 나는 왜 아무것도 듣지 못했나
풀잎들이 다시 바람에 씻긴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 때
젖어들며 나는
가만히 엿듣는다
호수 가득한 당신의 징소리를
-비가 오면/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비 내리는 날/양현근-
미운 이름도 고운 이름도 잊어버리는 날
여름산 넉넉히 풀어지는
낮은 목소리의 비가 내리면
나도 비처럼 조용히 가라앉고 싶다
흩어지고 넘어져
어느 한 줌 강어귀 적시는
무심함이고 싶다
울적임 치렁한 모래톱
뻘내음 흥건히
젖으라,
적시라.
-비 속의 아버지/김명인-
아버지 비 속으로 가신다, 시간의
굳게 잠긴 빗장을 걷고
빗줄기가 풀어놓은 비낱의 창 너머 무수히
그어지는 텅 빈 골목길로
아버지 걸어가신다, 얼마만큼 쫓아가다
내 기억의 비 그쳐
다시 꽃밭이었을까요, 아버지
화안한 그 꽃밭 뭉개며 내 마음의 어둔
그림자로 우뚝 서 계시는 아버지
얘야, 식구들 모두 모여 살 수 없단다, 네가
잠시만 떨어져 있어야겠다
담을 것 없어도 주체할 길 없이 쏟아지는 잠과
잠의 깊은 늑골을 비집고
비가 온다 어느새
한 세상 비 속으로 저무는데
밥과 밤으로 이어지는 중년을 흔들어 깨우며
머리맡에 앉아 계신 이버지, 기다려라
내가 너를 데리러 다시 올 때까지
그러므로 아버지, 제가 여기 있어야 한다면
저는 녹스는 제 몸을 온전히 닦아낼 수 있을까요?
칼날의 시간 작두 위에 세웠던 세월이여
아직도 식지 않은 증오 서리처럼 흐리는 창 너머로
아버지 비 속으로 걸어가신다
-비의 책/장석주-
누구나 책을 쓴다
누구나 자기만의 文字를 갖고
필생의 책을 쓴다
한때 나도 책을 쓰기 위해
오로지 책 속으로 들어가 책이 되었던 적이 있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울다가 잠든 적도 있다
함부로 집어던진 책의 모서리는 딱딱하고
누군가의 생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내가 찾아 읽고 싶었던 책은
한없이 작고 부드러운 책이다
누구나 책을 쓴다
날개 달린 빗방울들이 쓰는 책은
딱딱한 모서리가 없다
그것은 작고 부드러운 책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씌어지자마자 빨리 흘러가버린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이 세상의 어떤 도서관에도
비의 책은 남아있는 법이 없다
-비/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함민복-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취하고 싶은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