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여러차례 답사를 통해 각인된 깊이나 글씨 형태로 봐선 100년 남짓 된것으로 판단되고 그 이전부터 사용했던 길이고 추성리,송내동,엄천사터,오봉리에서 천왕봉으로 갈려면 방장산(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새겼을 것이다
이후 산업화에 따라 삶에 형태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길과 함께 석각도 묻혔다.
인근 주민들과 옛사람들이 이용한 이길은 한 모랭이를 돌때마다 물이 있고 오르내림이 적은 허릿길을 따라 가면 방장문을 통해 슭(쑥)밭재까지 편안하게 접근할수 있고 김종직 선생도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유람했다.
김종직_유두류록
○ 1472년 8월 15일, 기묘일(양력 9월26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짐을 싸는 인원을 줄여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나무 덩굴이 깊숙히 우거진 숲속으로 나아갔다. 큰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어 좁은 길에 넘어져 있으면서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절반쯤 썩어 있는 가지가 그래도 땅을 지탱하고 있어 행마(行馬)와 같은 모습이여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아홉 고개, 바로 구롱(九隴) 가운데 첫번째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세번째, 네번째 언덕을 지나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하략>
▼ 광점동 주차장에서 먼저 기념촬영을 하고
▼ 2구간에 대한 산행설명을 듣고
▼ 된비알을 올라 광점동 고개를 넘었다.
광점의 유래는 강점마을에서 왔는데 광주리(강아리,강어리)를 만드는곳에서 유래되었고 한다.
마을 안쪽 오름길에 강아리 민박집 간판에서 옛흔적을 찾을수 있다.
1918년 일제 강점기에 그린 1/50,000도에는 고개넘어 현재 어름터가 광점동으로 표시되어있다.
▼ 지산대는 각자 부근으로 이름이 많이 세겨져 있고 앞쪽으로 제단이 꾸며져 있는것으로 보아 산을 들고 날때 무사 안전과 감사를 기원하던 곳이라 추정된다.
▼ 어름터 독가 직전에서 옛길을 따라 벽송사능선으로 향한다
▼ 장흥에서 인문산행을 오신 <버들피리>님
▼ 미타봉 아래조망터에서 구롱길을 설명중인 <산영>님
▼ 미타봉 정상에서 바라본 벽송사능선
▼ 독녀암 방향
▼ 허공달골이 훤히 보이고 뽀족한 영랑대 왼쪽으로 써리봉능선도 조망된다
▼ 소림선방 부근으로 단풍이 곱게 물들고있다
▼ 일강길 안부에서
▼ 고래바위 부근 습지에서 점심을 먹고
▼ 세모랭이 갈림길에서
▼ 구롱길에 유일한 전망바위
▼ 다섯모랭이 집터에서
▼ 구롱길 장애물은 톱으로 자르고
▼ 여덜모랭이 쉼터바위에서 배낭을 벗고 거석군락지로 내려선다
▼ 석문
▼ 문어나무
▼ 거대한 이정목
▼ 아랫쪽에 벌집마냥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 다시 돌아온 쉼터바위
▼ 방장문 석각이 있는 바위에서
▼ 마지막 된비알을 치고 올라 2구간 종점인 슭(쑥)밭재에서 도착했다.
쑥밭재의 어원은 쑥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산에선 쑥이 자라지 않는다고한다. 기슭에 붙은 밭처럼 평평하다고 붙인데 유래했다고 본다. 이것을 한자로 옮기는 가정에서 봉전령,애전령으로 불리워 지다가 다시 한글로 바뀌면서 쑥밭으로 변한것으로 본다.
▼ 능선은 단풍이 제법 많이 보인다
▼ 다시 구롱길을 따라 내려오던중 두아름이 넘는 거목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폐사지에 대한 논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두류암(頭流庵) 또한 그중 하나이다. 이번에 해주 석씨 세보에서 의병장 석상용 장군의 묘소 지명을 확인하니 두류암(頭流巖)이다. 지역 주민들이 '두류암'이라고 하는 것을, 선답자들이 두류암(頭流庵)으로 잘못 해석하고, 더군다나 승탑과 와편들이 오판을 하도록 도운 듯하다. 사물의 이름 또한 인간들이 서로 원활하게 소통을 하기 위한 언어의 수단이다. 어름터의 '멍에배미'처럼, 석장군 묘소 뒤의 커다란 바위를 두류암(頭流巖)이라고 한 것은 아닐는지.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를 읽어보면 두류암(頭流庵)의 위치(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畓 90번지, 田 91번지)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墓馬川面楸城里頭流巖甲坐有碑石一九八三年八月三十一日獨立有功褒賞受賞 묘 마천면 추성리 두류암(頭流巖) 갑좌 비석이 있다. 1983년 8월 31일 독립유공포상수상
<출처:도솔산연소재>
▼ 하산길에 두류암(頭流巖)으로 추정되는 바위에 오른다. 두류암 뒷면
▼ 두류암(頭流巖) 앞면
▼ 석상용장군묘
석상용(1870~1920), 권석도(1880~1946) 의병장도 함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석상용 선생은 지리산 일대 화전민을 규합해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돼 문태수, 양한규, 고제량 의진과 함께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했다. 일본군은 '비호(飛虎·날쌘 호랑이)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그를 두려워한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