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어에 죽음의 길을 '돌아간다' 한다. 온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북구 유럽의 루터교인들의 死後墓地(사후묘지)는 교회마당이다. 교회의 牧士(목사)가 祭祀長格(제사장격)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을일의 中心(중심)이 교회라는 것이 祖上神(조상신)이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목사는 國家公務員(국가공무원)과 같단다. 國家考試(국가고시)에 합격되어야 牧士(목사)가 될 수 있고 교회 목사로 임명되어 부임되며 月給(월급)을 국가에서 준다는 것이다. 奉給(봉급)으로 생활 한다는 말이다. 準 社會主義國家(준 사회주의국가)인 셈이다.
하여 誠金制度(성금제도)가 없다고 한다. 성금 내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의 교회와는 性向(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다. 교회가 山所(산소)인 것도 완전 다르다. 오히려 요즘 우리나라 불교가 이와 유사하다. 火葬(화장)해 納骨堂化(납골당화) 한 것이 다르고 성금을 받고 墓地(묘지)장사 한다는 것이 또한 다를 뿐이다. 한국의 요즘 法堂(법당)은 수도방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말세의 현상이다.
노르웨이의 윗동네는 한국처럼 山(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산 아래 또는 산중턱에는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陽宅明堂(양택명당)은 잘 보이지 않는다. 陰澤明堂(음택명당)은 더더욱 없다. 山勢(산세)가 밋밋하기만 하여 山精氣(산정기)가 聚氣(취기)된 穴處(혈처)될 만한 땅이 없기 때문이다. 한기가 지나쳐 양기가 발동하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流行歌 歌詞(유행가 가사)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ᆢ ᆢ' 云云(운운)한 풍경에 가까운 草園(초원)이 많기는 한데 집터들은 대개 높은 산의 壓殺之氣(압살지기)를 받는다. 산촌마을 출신은 그 殺氣(살기)에 오히려 純粹性(순수성)의 마음을 지닌다. 넓은 平野地帶(평야지대)에서 살면 野性(야성)을 갖는 것과는 對照的(대조적)이다. 時俗(시속)에 野俗(야속)하다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無情(무정)한 행동이나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섭섭하게 여겨 언짢다는 뜻이라 한다. 또는 좀스럽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旣實(기실)은 들에 살면서 농번기가 되면 손님이 오히려 밉다. 왜냐하면 바쁜 와중에 손님맞이 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허니 無情(무정)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니 그 마음이 야속하다는 말이다.
유사한 경우의 단어로 乾達(건달)이란 말이 있다. 하늘에 達(달)한 道人(도인)을 말한다. 그 도인이 천하의 自然(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게 유랑하는 모습이 농번기의 일손 바쁜 농부 눈에는 좋게 보일리 萬無(만무)하니 當然(당연)히 나쁜 이미지의 말이 되었고 이젯날에 이르러 말세가 되니 공부도 않고서 하는 일도 없이 겉 넘어 겉 돌아다니는 자가 건달의 이미지로 왜곡되어졌다. 바쁜 농부에게 손님으로 가게 되면 좀스럽게 보일 것이다.
환경에 따라 민심이 달라진다.
노르웨이는 내가 어리던 시절 전봇대 모습 그대로인 나무 전봇대들의 모습인 경우를 본다. 나무가 흔하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陰陽(음양)인 落葉松(낙역송)을 一名(일명) 電(전)나무라 칭한다. 전봇대 만드는 나무라는 뜻이다.
북유럽 땅의 공통적인 모습 중 하나는 흰 자작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서로 어우러진 이곳의 모습에서 철학적인 관점으로 보아 金火交易(금화교역) 또는 夏秋交叉期(하추교차기)의 개벽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여름날씨가 마치 선선한 가을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봄과 같은 氣候(기후)이기에 春秋(춘추)의 후천날씨로 推測(추측)되게 한다.
인구가 부산 인구보다 조금 더 많은 노르웨이는 북쪽은 너무 춥고 남쪽의 산들도 겨울에 역시 춥기 때문에 陽氣(양기)가 부족하여 자라는 속도가 느리다. 초목도 남부지역에서나 살만 할 곳이므로 산 위의 空地(공지)에는 여지 없이 집이 지어져 있다. 겨울에는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山莊(산장) 아니면 겨울 외에 여름의 목장으로 이용되는 모습이다.
또한 자동차 문화가 발달되기 이전 없었던 길을 뚫고 다리를 건설하여 교통을 발전시킨 현실들을 본다. 그러므로 많은 피오르의 灣(만)과 江(강)을 건너는 배 로서의 교통수단 또한 발달했다.
그리고 터널이 많은 국가가 된 이유이다. 터널안에 四距離(사거리) 로터리 통로가 있고 터널을 통과 하면 바로 강 또는 灣(만)의 다리와 연결 되어졌으며 곧 바로 다시 터널로 이어지는 신기한 교통로를 보게 된다. 겨울에 많이 쌓인 눈이 녹으면서 물이 풍부하니 골짜기 마다 수력발전을 이용하여 마을의 전기를 충당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다. 電氣(전기)가 남아도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불을 낳는 현상이다.
太昊伏羲氏(태호복희씨)의 羲(희) 자를 소牛(우) 변으로 더하면 희생犧(희) 자이다. 犧(희) 자는 소牛(우) 자에 염소羊(양) 자 그리고 빼어날秀(수), 창戈(과) 자를 합하여 빼어난 큰 소와 양을 잡는다는 뜻의 글자가 된다.
북방민족인 우리도 옛적에는 이곳처럼 살았을 것이다. 하여 소와 양을 키우며 糧食(양식)으로 삼았을 터, 生命(생명)을 희생시키며 사는 과정에 山(산)사람의 순수한 심성으로써 未安(미안)한 마음의 發露(발로)는 祈禱(기도)와 祭祀(제사)로 하여금 달래야 했을 것이다.
犧牲羊(희생양)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로써 連想(연상)된다. 當然(당연)히 한울님 또는 太陽神(태양신)에게 感謝儀禮(감사의례)를 表(표)함에 天帝(천제)의 祭祀長(제사장)이 있었다. 추운 지방에서의 太陽(태양)은 한울님이다. 그 한울님의 代行(대행)이 太陽(태양)이요, 周易(주역)에서 帝出震(제출진)은 長男(장남)이 東方(동방)에 떠오르는 太陽神(태양신)이 되고 牛羊(우양)을 키우는 雨露之澤(우로지택)은 天動(천동)의 雷聲(뇌성)에 의해 내리는 雨露(우로)이니 震長男運(진장남)의 運數(운수)가 되는 것이다.
北方(북방)의 羊(양)은 馴鹿(순록)이고 朝鮮(조선)의 '선' 자는 본래 이끼 蘚(선) 자 이었다는 論理(논리)가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순록은 눈 밑에 있는 이끼를 먹이로 삼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추운 北極(북극)에 가까운 곳에서 산다.
그러므로 순록은 陽氣(양기)가 가장 강한 동물이다. 녹용의 가치이다. 추위에 强(강)한 면은 북극곰과 비슷하다. 북극곰은 冬眠(동면)하지 않으니 추위에 강한 순록과 비슷하다고 한 것이다. 다만 순록은 植物性(식물성)으로 順(순)하다는 것이 북극곰과 다르다. 북극의 토끼도 白色(백색)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忍苦(인고)의 능력을 지녔다. 살아남기 위해 북극의 近方(근방)까지 避身(피신)하여 추위를 견디는 힘을 길러낸 것이다. 환경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으로써 진화되는 모습이 자연현상이다.
馴鹿(순록)의 馴(순) 자는 길들일 순 자로 야생의 사슴을 길들여 사역케 하였고 그 사슴을 食用(식용)으로 삼았으며 추운 겨울의 가죽옷으로 삼았고 잠자리의 담요로, 이불로 삼았을 것이니 그 人心(인심)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이곳도 馴鹿出現(순록출현)을 주의 하도록 길가에 표시하고 있다. 로드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순록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牛羊(우양)의 牛(우)인 소는 高山地帶(고산지대)에 사는 야크이다. 犧牲羊(희생양)이라는 단어의 뜻이 북방민족 祭祀文化(제사문화)에서 나왔음을 알게 한다. 淳朴(순박)한 牛羊(우양)의 뜻을 깊이 새기면 장차 돌아오는 개벽이 丑未地軸(축미지축)의 定立(정립)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현상임을 靈感(영감)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도 버스로 長時間同安(장시간 동안) 달리고 달려 다다른 곳은 高園地帶(고원지대)이다. 여기에도 또한 거대한 폭포로 물보라를 일으키는 풍경이 장관인 자연의 風景(풍경)을 본다. 그 고원지대를 한참을 더 달려 저녁을 맞는다. 작은 산촌 마을에 철길과 함께한 곳이다. 게일로에서 칼스타드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호텔에서 하루 일과를 풀고 休息(휴식)을 取(취)하다. 旅路(여로)는 疲勞(피로)를 주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