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색하는 더듬이 / 오차숙
나는 수필을 종합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시대에 문학은 장르 해체가 되고 있으며, 작가들의 자유로운 의식과 독특한 몸짓만이 무한한 창의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앵글(angle)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독자의 영혼을 위로시킬 수 있다면 수필문학이 아닌가 한다.
나는 늘 겨울나무처럼 살아온 것 같다. 힘이 센 동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살았다고나 할까. 내가 태어난 고향이 가을처럼 적막했고, 결혼 전 삶의 풍경, 경쟁단체에서 진땀을 흘리며 달려온 30년 가까운 남편의 군생활,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한 톨의 곡식을 거두기 위해 동네 유지들에게 쟁기를 부탁하며 처신을 기다려야 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나에겐 우울감으로 다가왔다.
이때 느껴지는 숨 가쁨과 외로움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여객선과 다를 바 없었고, 뭍을 향한 긴 기다림 속에는 미지의 날씨들과 초조함이 배어 있었으며, 기다림이라는 불투명한 실체가 글을 쓸 수 있는 텃밭을 제공해 준 것 같다.
부모에게 재능을 전수받아 글쟁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나의 경우는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그 무엇 하나, 마음속에 찌꺼기처럼 각인된 상흔의 날갯짓이 유혹의 몸짓들로 다가와 영혼을 질타했기에 원고지와 펜을 찾은 것 같다. 이때 땅 속을 헤매며 살 곳을 찾는 지렁이처럼, 녹슨 뇌 더듬이를 훈련시키며 글의 소재를 찾아 나서게 되고, 주제를 설정하게 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만이 간직하고 싶은 사소한 비밀 하나, 상식과는 빗나간 듯하지만 자기만의 야릇한 정서, 자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킬 것 같은 죄송한 아집을 통해 나름대로의 사상을 토해낸다.
가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들꽃의 생동감, 뙤약볕에 몸을 비틀며 헉헉대는 들꽃의 절망감을 바라보다가, 가슴 끝에 암세포처럼 매달리는 작디작은 실체 하나 ― 순간, 이 작은 실체들을 확대경을 통해 바라보면 거대한 우주로 다가온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갈수록 절벽이라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할 상황이 생길 때면 양심적으로 등골에 땀이 배인다. 도자기를 굽는 장인들은 세월이 갈수록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탄생시키지만,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 작업은 밀림 속을 헤집는 방랑객이나 다를 바 없다.
글쓰기 작업은 이때부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이때, 어려운 순간들을 타개하기 위해 잔잔한 바닷물에 돌멩이를 던져보기도 하고, 순간 파생되는 파장 자체를 삶의 과정, 인생의 과정이라고 간주하며 분석해 보기도 하고, 여행을 통해서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가 보기도 한다.
문학의 화두는 자연 탐구, 현실 탐구, 인간 탐구가 대부분이므로, 나는 작법론을 통해 인간 탐구의 한 부분인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후의 과정들을 모티프로 그려보려고 한다.
첫사랑의 소재를 단계별로 분류해 보면, 사랑의 긴장과 절정, 행복의 극치, 사랑의 영원성, 권태, 사랑하는 사람과의 멀어짐, 이별과 슬픔, 이별 뒤에 따르는 그리움, 방황, 사랑했던 사람을 회상하며, 자신의 존재 확인, 삶의 기적에 감사해 하며, 하지만 지금 내게 남는 것은, 고독, 또 다른 사랑을 찾아서, 갈등, 현재의 사랑을 위한 노력, 결혼에 도달, 회의감에 사로잡힘, 지난날을 추억함,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 가지 않은 나머지 길은…….
‘첫사랑’이라는 한 가지 소재를 갖고 여러 편의 연재 수필을 구상해 본다. 이러한 분류는 시조시인 이영지 교수의 시조 모티프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수필도 첫사랑을 통해 긴장과 절정을 상상해 보고, 사랑의 과정이 무르익어 감에 따라 희열의 극치를 사모해 보면서 글을 쓰면 될 것 같다.
정신적인 세계가 절정에 이르게 되면, 상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인간의 양면성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극대화 시키며 희비의 연출을 그려보기도 하고, 인간의 본질인 권태감과 감정의 질식을 서로가 의식하는 순간,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마음 한 구석에는 또렷한 멍울 하나를 키워나간다.
이때 희비의 파생물인 멍울은 도달할 수 없는 섬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그 자체가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며, 그 과정들이 스릴로 남아 글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랑하던 관계가 권태의 시발점인 여건타령, 오해타령으로 확산되어 번민하다가 야릇하게 멀어지는 묘한 아이러니, 권태 뒤에 따르는 이별과 슬픔, 그 터널을 비집고 촘촘하게 몰려오는 초록빛 그리움, 허상 속의 그리움은 헤엄쳐 갈 수 없는 돌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므로 방황의 길목에서 헤매는 과정들이 글감이 된다.
세월이 흘러 완숙한 성인이 되었을 때, 마침내 ‘사랑했던 사람에게’라는 마음속의 주제를 갖고 글을 쓰게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떠난 사람을 찾아 나설 수 없는 입장이므로, 자신의 존재 확인과 삶의 기적에 대해 스스로 감탄하게 된다.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 현재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으며, 또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고독감이 주변을 휘돌기 시작하면, 백지 위에 마음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영화, ‘화인딩 포레스트’에서 노(老)작가인 윌리엄 포레스트가 말했듯이, 초고에는 가슴이 끌어가는 대로 글을 쓰다가, 재고에 이르러서는 이성(理性)을 갖고 객관적인 눈으로 글밭을 응시하며 작품을 완성시키라는 말에 공감해 보면서…….
삶 자체가 갈등 속에서 번민이 따르겠지만, 차츰 다른 사랑을 용납하게 되고 결혼에 이르게 되며, 세월이 흐르면 자아가 성숙하게 무르익어 담담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글, 사랑의 추억을 들춰내며 음미하는 글을 쓰게 된다.
이때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해 봄은 물론, 가지 않은 나머지 길에 대해서는 ‘미지의 사건들’로 남게 되므로, 그 자체가 문학의 핵심 화두로 남는 것 같다.
삶 자체가 순간을 음미하는 긴 여행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실타래 같은 환상들이 문학 속에서 성숙하길 바라며 정신여행을 떠나게 된다.
[대표작]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 싶다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 보랏빛 쓸쓸함이 솟아납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제 1악장을 듣는 날이면, 가슴속엔 비가 내린답니다. 마음 깊이 묻어둔 고향이기에,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희망 하나로 살아간다고나 할까요.
고향을 떠나던 아픔의 시절을 더듬어봅니다. 흙냄새를 외면하고 고향을 등졌지만, 뒤돌아보면 백지 위엔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못했어요. 고향을 밀어낸 오만은 공허감과 그리움이라는 형벌만 내려주더군요. 나는 그 형벌이 힘겨워서 치적치적 울곤 했답니다. 언젠가 그 곳으로 가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낡은 일기장을 뒤적이며 살아왔답니다.
하지만, ‘타향보다 차가운 고향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난날은 안개 자욱한 슬픔뿐이지만, 아름다웠던 시절과 아픔의 계절은 거대한 스승이었다고나 할까요. 마음이 우울할 때나 짜증이 날 때도 추억 속에서 소중한 것만을 만지며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게 했답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도 고향의 흔적을 주워 모으는 작업이라며 부추겼답니다.
고향은 나에겐 운명처럼 떠나야 했던 아픔의 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땅 속에 숨어 사는 지렁이처럼 긴 세월을 타향에서 보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이젠, 그 땅에 안겨 긴 밤을 쉬면 안 될까요. 그동안 귀향길은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현실은 이북 땅처럼 멀기만 했답니다. 눈앞에 파도가 출렁이고 따스한 바람이 한라산을 휘돌았지만, 적삼 풀어 안길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향의 파도는 여전한데, 그 길을 가로막는 철조망은 단단하기만 했답니다.
고향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늘 꿈속을 헤맨답니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땅이 아니라서 숨이 가뿐 것일까요. 선배 중에 교수로 재직하는 분이 계십니다. 친구의 남편입니다. 40대 중반을 넘은 나이로 대학에 근무하지만, 50대 초반까지 교직생활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더군요. 그 나이가 되면 자녀들의 뒷바라지에도 분주한 시기인데, 고향 바닷가에 내려가 통나무집을 짓고 해초를 뜯으며 살고 싶다는 거예요. 무언가 있을 것 같아 유학생활까지 하며 정상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 곳엔 아무것도 없더라는 거예요.
선배의 말이 실행될 수 없는 푸념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인생을 알 것 같은 선배의 여유가 부러워 보였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공통된 외로움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의식 없이 세월을 삼키다 보니, 나그네는 아슬아슬한 연처럼 창공을 휘돌며 외로움에 떤답니다.
몸도 마음도 허기진 지금, 나도 고향의 흙냄새, 바다 냄새를 마시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와 비 오는 날 해변에서 조개도 줍고 싶고, 내가 뛰놀았던 환상의 돌담길도 거닐고 싶습니다. 더 이상, 타향에서 방황하는 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밤, 흙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도 정낭이 열릴까요. 그동안 불확실한 미래를 걸머지고 얼마나 진저리를 치며 산 줄 아십니까. 언제까지 울고 웃어야 완성된 삶이란 말입니까. 인생의 승리자는 고향을 지킨 사람들이랍니다. 흙이 인생의 고향이듯, 나그네의 고향은 불나방이 넘실대는 돌담집이랍니다.
삶에 지친 이 밤, 고향 하늘은 맑기만 하군요. 세월에 비례하여 망각도 따라올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동네 어귀가 붉게 타오르고 있으니, 내 병이 짙어지기 때문일까요.
어디선가 파도의 속삭임 소리가 들려옵니다. 짙푸른 파도가 나를 유혹하는군요. 넓은 바다 중에서도 유난히 반짝이던 고향 바다, 반겨줄 물새가 사라지더라도 가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곳이 고향 바다랍니다. 꿈꾸는 곳에 환상이 있듯이, 꿈길을 따라서라도 검붉은 바다로 향해 보렵니다. 고향의 산야를 정신없이 뛰어보렵니다. 주인 잃은 집터에 허망한 울음소리 들릴지라도, 진득한 흙냄새에 취해 보렵니다.
마음껏 뛰놀던 내 작은 바다 ― 초원보다 검붉은 당머리 물살이여!
풋내기 해녀를 품어 주지 않고 왜 뭍으로 쫓으셨나요. 이제, 긴 방황을 끝냈으니 잠수복을 입으면 안 될까요. 소라와 미역을 한 아름 캐서 망사리 가득 담으면 안 될까요.
웃음과 인정이 많던 내 고향, 거대한 일출봉을 눈앞에 두고 나는 늘 행복이 버거웠답니다. 유채꽃으로 물든 짙노란 들판과 사춘기 병을 앓았던 나만의 골방을 잊지 못한답니다. 책보자기를 허리에 감고 고구마껍질을 주워 먹던 헛헛한 시절을 지울 수가 없답니다. 호랑나비와 밀어를 나누던 분꽃 핀 정원, 숨바꼭질을 하며 술래를 아프게 했던 수선스러운 날들을 떨칠 수가 없답니다.
깊어가는 밤, 조용히 두 눈을 감아봅니다. 백중날 저녁이면 요염한 달빛 아래 출렁대던 물살, 구석구석 꿈틀대던 사연 많은 별빛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릅니다. “이 생(生)에서 임을 만날 운명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임을 뵙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는 마음만이라도 갖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타고르’의 시구절도 떠오릅니다.
고향은 이처럼 나그네에겐 가까우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낯선 땅인지도 모릅니다.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고향땅인지도 모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눈높이에 맞추며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 고향이 주는 메시지 ― 임이 주는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쪽에서 날아온 새는 남쪽을 향한 나뭇가지에 둥우리를 틀고 고개를 내밉니다. 밤이 깊어 가지만 가난한 의식은 소리를 내며 날아다닙니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을 향해 달려가라’고 긴 밤을 칭얼대며 바스락거립니다.
[창작 노트]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가. 오랜 세월 타향에서 살아가지만 가슴 모퉁이를 파헤치며 계곡의 물소리처럼 다가오는 곳이 고향이 아닌가. 이 향수는 삶의 틈바구니에 구름이 자욱하게 낄 때도 위로자가 되어 주었고, 삶의 구석구석에 겨울비가 시큼하게 내려도 꿈과 환상을 뿌려 주었다.
그러나, 고향은 따뜻한 곳만은 아니다. 고향을 벗어난 나그네의 오만함에 배신감을 느끼는지 혼탁한 바람이 불 때가 적지 않다. 땅이 황폐의 길목으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바다가 오염되기 시작했으며, 정신문화가 산만의 극치를 향해 달려간다.
삶에 지쳐 고향에서 쉬고 싶을 때가 많지만, 고향을 찬찬히 응시해 보면 고향이라는 특성은 정체가 불투명하여 나그네를 경계할 때가 많다. 다가가면 갈수록 나그네의 척추를 밀어내고, 섭섭한 마음으로 인해 고향을 밀어내면 목마름의 화신처럼 달려든다.
그 화신은 환상을 꿈꾸게 하며 나를 가끔 유혹한다. 세월이 빛살처럼 지나간 후 바닷가 돌 틈에 움막 한 채를 지으라고, 움막집에 새하얀 창틀을 만들어 태풍의 밀애를 엿들으며 ‘미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라는 제목으로 애정소설 한 편을 써보라고…….
<바람 부는 날이면 그 곳에 가고 싶다> 나는 이 작품을 사랑한다. 대표 작품이라기엔 쑥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완숙치 못했던 나그네의 삶이 소복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새김질 하다보면 어머님의 얼굴과 아버님의 얼굴이 투명하게 떠오르고, 친구들의 건강한 웃음소리와 파도의 술렁임이 투명하게 떠오르고, 과거의 주홍빛 소녀와 현재의 완숙한 여인의 영상이 교차를 이루며 출렁댄다.
어른이 될 때까지 나를 보듬어 준 양질의 땅, 그 땅은 따뜻할 때도 많았고 차가울 때도 많았지만, 무엇에도 비길데 없는 따스한 대지가 되었으므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한모금의 생수로 남고 있다.
그 꿈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한 편의 글을 쓰며 생을 마감하리라는 환상으로 피어나 가끔 도서관에 앉아 책장을 넘기게도 하였고, 깊은 밤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워드를 치게도 하였다.
그러나, 빈곤한 의식은 불투명한 것이 삶이라고 속삭인다.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고향 땅이라고 속삭인다. 삶의 야릇한 아이러니는 지칠대로 지친 나그네의 영혼을 감싸주지 못하므로, 나는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작품을 통해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 작은 영혼이 타향 땅에 영원히 묻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작품이라는 앵글을 통해 망향의 노래를 불렀다. 기쁨의 땅, 슬픔의 땅. 추억의 땅, 운명의 땅. 고향은 이처럼 희비의 삶을 제공해 준 땅이므로, 창작 노트를 통해 담담하게 스케치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