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한 가지 불행한 건 이 세상에 이미 환상이 없어졌다는 거야. 때때로 말이지."
여기서 집게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유럽의 재상들은 말이야, 가끔 자기 아내에게 자그마한 소포를 보내거든.
그래 그 아내가 그걸 열어 보았더니… 가만··."
그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열어 보니 무엇이 나왔느냐…그건 바로 아내의 정부의 머리였지.”
==
"그 사람은 만사가 그런 식이거든. 어젯밤에도 두 시간을 부자처럼 지냈다지만, 그건 차라리 부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랬을 게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가난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모두가 꿈이지.
그리고 얼큰한 술기운도 그를 도왔으리라는 것 역시 잊어선 안 되지만…”
==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 자꾸만 가라앉아 갔다.
마치 그들이 지금 어두워지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듯이.
그 골목길에는 전주의 절연체조차 번들 거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뇌에 사로잡혔다.
레코드 일이 다시 생각났다.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라고.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우선 고독이 있다.
고독은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가득 찬 황량한 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짙고 추악한 어둠 뒤에 보다 커다란 태초의 어둠이 있듯이.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 목구멍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치광이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보다 훨씬 강렬한 긍정이다.
그러나 남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행동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 한 사람에게만은 기요라는 존재는 그가 해온 행위가 아니었다.
오직 기요에게만은 메이라는 여자는 메이의 과거 이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애정에 의해서 사람들의 고독을 잊게 해주는 포옹은 결코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미치광이에게, 비길 데 없는 괴물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 괴물 말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가 괴물이며, 저마다 자기 가슴속으로 파고들 때는 헤아릴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
그래도 첸이 있을 때 활기 띤 공기가 아직도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첸은 살인의 세계로 뛰어 들어갔다. 이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는 없으리라.
필사적인 열정으로, 마치 감옥에 들어가듯이 테러리스트의 생활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10년도 못 가서 그는 붙들려 고문을 당하든지 사형을 당할 것이다.
그때까지 첸은 결단과 죽음의 세계 속에서 집요하고도 단호하게 살아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가 숭배한 사상 때문에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바로 그 사상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기요가 배후에서 사람을 죽이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요의 역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리 문제 삼을 것도 아니었다.
기요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틀림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조르가 놀란 것은 그러한 급작스러운 감동, 살인의 숙명적인 정확성, 자기 아편 중독은 거기에 비하면 대수롭지도 않을 만큼 무서운 살인 중독의 정확성, 그러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첸이 자기에게 바라던 도움을 얼마나 베풀어주지 못했는가, 살인이란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뇌로 기요가 얼마나 자기에게서 멀어졌는가.
이러한 것들을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자기가 여태까지 입버릇처럼 자주 되풀이해 온,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란 없는 법'이란 말이 자기 아들의 얼굴과 함께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
"마르크스주의는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와 그 추종자들 - 즉 여러분 - 에게는 자기를 인식하며, 스스로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싸워 이기려는 '의지'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론적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배반하는 일 없이 싸워 이기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첸은 마치 물속에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곳으로 올라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벽에 등을 기댔다. 벽 모퉁이가 그들 전 대원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차츰 진정되면서, 자기가 밧줄을 끊어 준 그 포로 생각이 났다.
'그대로 놔 두면 그만이었지, 무엇 하려고 그 녀석 밧줄을 끊어 주었단 말인가.
그래 보았자 결국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만약 그대로 내버려 뒀더라면, 다리가 끊긴 채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던 그 사내의 모습이 지금도 자꾸 떠오를 것이 아닌가.
자기 팔의 상처 때문에 문득, 호텔에서 죽인 탕옌다가 생각났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은 왜 그렇게 줄곧 바보 같은 생각만 했을까?
막상 전투를 겪고 보니 죽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은 없었다.
==
"글쎄, 잘 좀 생각해 봐야겠어.
무엇보다도 먼저 한커우엘 직접 가 봐야겠지?
대체 국제 노동자 연맹의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국민당 군대를 이용한다,
그다음에 선전이나 기타 방법으로 혁명을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이 혁명을 저절로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로 넘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도일 테지.”
==
"아마 장도 아들이 소중하긴 할 테지만 자기 자신과는 바꿀 수 없을 걸요.
그리고 그가 우리를 탄압하지 않으면 자기가 위험하게 되지요.
농민 운동을 탄압하지 못하는 날엔 부하 장교들이 그를 버릴 테니까요.
난 그가 유럽 영사들에게 어떤 약속을 받아내든지, 또는 그럴듯한 연극을 꾸민 뒤에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리고 볼로긴, 당신이 규합하고 싶어 하는 소시민층은 우리가 무장 해제를 당하는 즉시로 장의 편에 붙어 버릴 거요.
그들은 늘 힘있는 편에 가담하니까. 난 그들의 근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는 국제 노동자 연맹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빈약하며 자기 행동에 근거를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여기 와 보니 국제 노동자 연맹은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시간을 얻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들의 선전 공작은 이미 홍수처럼 대중을 휩쓸었던 것이다.
그 선전이 바로 대중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가 아무리 신중하더라도 그 홍수는 이미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장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마도 다른 방법으로 혁명을 유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쓰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일단 공산주의 세례를 받은 뒤에는 농부들은 토지를 차지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노동 제도의 변경을 요구할 것이다.
코뮤니스트의 병사들은 모스크바 측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또는 모스크바를 적대시하는 서구의 여러 수도에서는 지금도 어둠 속에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정열을 조직해 저마다 그것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혁명은 지금 만삭이 된 셈이다. 순산을 하느냐 사산을 하느냐만 남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 느끼는 동지애가 그를 첸에게 한 더 접근시키는 동시에, 무엇인가에 사뭇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단지 한 인간일 뿐이고 결국은 혼자라는 단절감 때문이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중국 회교도들의 모습이 기억에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밤이면 불탄 라벤더의 광막한 초원에 엎드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수천 년 이래로 괴로움에 시달리는 인간의, 덧없이 죽어야 함을 아는 인간의 가슴을 찢는 듯한 노래였다.
==
"어떤 하나의 관념이 그런 경지를 준단 말이지?"
"그렇지. 나 자신의 죽음이 말이야."
여전히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아마 자살할지도 모른다.
기요의 머릿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기요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늘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도 악착스레 '절대'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오직 감각 속에서만 찾아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의 갈증, 불멸에 대한 갈증에 사로잡혔으니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첸도 어쩌면 본바탕은 비겁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신비론자가 다 그렇듯이 자기의 절대는 오로지 순간 속에서만 파악 될 수 있으리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순간적 파악 속에서 절대를 자기 자신과 빈틈없이 연결해 주는 그런 순간을, 지향하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두워서 기요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기와 함께 걷고 있는 이 사람에게서 그 형태를 지배하는 맹목적인 힘이, 즉 '숙명'을 빚어내는 무형의 본질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지금 묵묵히 자기의 낯익은 망상에 잠겨 있는 그 친구는 어딘지 미친 사람 같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성스러운 인상도 주었다.
그것은 언제나 비인간적인 존재에서 풍기는 성스러움이었다.
아마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장을 죽이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득, 입술이 선량해 보이는 첸의 예민한 얼굴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살펴보려는 순간, 불현듯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불안, 바로 첸 을 죽음과 꿈속의 문어들에게로 몰아가는 그 불안이 기요 자신의 가슴속에도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
"우리 아버진 이런 생각을 하시지.
인간의 본질은 고뇌이며, 자기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온갖 공포가 생겨난다고 말이야. 죽음의 공포까지도…
그러나 그 공포에서 구해 주는 것이 아편이며, 그것이 바로 아편의 의의라는 거야."
"사람이란 늘 자기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거야.
좀 깊숙이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어.
다행히도 인간은 행동을 할 수가 있지.
모스크바에서 내 행동에 찬성 한대도 나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또 찬성하지 않는대도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그뿐이거든.
난 떠날 테야. 자넨 더 머물러 있겠나?”
==
에멜리크는 자기 아내와 자식을 죽지 못하도록 간신히 먹여 주는 셈이었다.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돈이 있어서 그들에게 남겨 줄 수 있다면 그는 마음 놓고 그들을 버리고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태껏 한평생을 두고 발길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그를 경멸했던 것처럼, 지금에 와서는 그가 지니고 있는, 아니 지닐 수도 있는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인 '죽음'마저도 그에게서 빼앗아 버린 것이다.
==
"기요 말이 옳아. 우리에게 제일 부족한 건 하라키리(일본 사무라이가 배를 갈라 죽는 자살 행위)의 정신이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살하는 일본인은 자칫하면 자기를 신격화할 위험이 있지.
그게 곧, 더러운 기만 행위의 시초거든.
안 될 말이지.
신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피가 다시 인간들 위에 튀어야 하며,
또 어디까지나 인간들 위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야.”
==
"난 자네와 같이 갈 테야." 베이가 우겼다.
베이는 될수록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끼느라고 턱밑의 목청뼈가 연방 실룩거려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변했다.
"안 돼, 오늘은 내게 맡기고 자넨 보고만 있어." 첸은 베이의 팔을 움켜쥐었다.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또 한 번 뇌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베이는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안경을 닦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는 사람이 이렇게도 외로울 줄은 지금까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
'그럼 푼돈이라도 벌어야지.' 남작은 생각했다.
그는 다가서서 긴 의자 위에 널려 있는 묵화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미술을 세잔이나 피카소와 관련시켜 비판하지 않을 만한 식견은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일본화가 싫었다.
정적의 운치란 지금의 그처럼 쫓기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약 것이다.
산 속에 외로이 깜박이는 불빛이라든지, 쏟아지는 빗발 저편에 뽀얗게 사라지는 시골길이라든지, 눈 덮인 벌판 위를 날아가는 백로 떼 따위 - 모두 하나같이 애수가 행복을 마련하고 있는 그러한 세계였다.
클라피크도 천국은 쉽사리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 천국의 문턱에 잠시 발을 멈춰야 할 테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그러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못마땅했다.
"이건 참 절세의 미인인 걸! 나체에다 색정적이고…하지만 정조대를 차고 있군.
페랄에게는 안성맞춤이지만 내 취미엔 맞지 않아."
클라피크는 이렇게 떠벌리면서 그중 네 폭을 골라서 가마의 제자에게 페랄의 주소를 받아쓰게 했다.
"당신은 우리 서양 미술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서양 미술과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지조르가 말했다.
“가마 씨, 어째서 그림을 그리시지요?"
늙은 화백은 이렇게 묻는 클라피크를 호기심에 찬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제자처럼 일본 옷을 입고 있는 화백의 벗어진 머리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때 제자가 스케치를 옆에 놓고 와서 통역을 했다. 이러한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내 아내를 위해서, 아내를 사랑하니까...'라고요."
"아니, 누구 때문이 아니라 무엇 때문이냐고 물은 거요."
"선생님 말씀이, 설명하기 곤란하시답니다. 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유럽에 갔을 때 미술관을 구경했다.
서양의 화가들은 사과를 그리면 그릴수록 - 비록 그들이 긋는 선이 어떤 사물을 나타내고 있지 않을지라도 -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나로서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세계'인 것이다라고요.”
==
이때 가마가 다시 한마디 했다.
너그러운 노부인 같은 그의 얼굴에 순간 거의 남이 알아보지 못하리만큼 부드러운 표정이 가벼이 스쳐 갔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그림이라는 것은 아마 당신네가 '인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요."
요리를 담당하는 다른 제자가 술잔을 가져다 놓고 곧 물러갔다.
가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만약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면 장님이 된 것 같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외로울 거라고 하십니다."
"잠깐!"
클라피크 남작은 한쪽 눈을 뜨고 다른 한쪽 눈은 감은 채 집게손가 락으로 화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의사가 '당신은 불치의 병에 걸렸다. 석 달밖에 못 산다'고 한다면 그래도 그림을 그리시겠소?”
"선생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안다면 더 잘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답니다.
그렇다고 화법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잘 그리다니, 어째서?" 지조르가 물었다.
그는 속으로 줄곧 기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라피크가 들어서며 던진 한마디로 그는 벌써 불안해졌던 것이다.
그는 '오늘 같은 날에 정적이니 뭐니 하는 건 거의 무례한 일인 걸' 하고 말했던 것이다.
가마가 지조르에게 대답했다. 지조르 자신이 통역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소.
'내게는 두 가지 웃음이 있다. 즉, 내 아내와 내 딸의 웃음이다.
내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 미소를 생각 할 수 있을 것이고 더욱 비애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세계란 우리 일본 사람이 쓰는 글자와 같은 것이다.
기호와 꽃 - 꽃 자체 - 과의 관계는 (꽃을 그린 묵화를 가리키며) 바로 이 꽃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은 기호다.
기호에서 구체적인 사물로 향한다는 것은 세계를 보다 깊이 파악하는 것이며 신을 향하는 것이다.'
즉, 그가 생각하는 바로는 죽음이 다가오면
…잠깐, 뭐라고 했더라?”
지조르는 가마에게 다시 묻고는 통역을 계속했다.
"옳아, 참 그랬군.
그가 생각하는 바로는 죽음이 다가오면 아마 모든 것에 충분한 정열과 비애를 불어넣을 수가 있을 테니까 자기가 그리는 모든 형상들이 이해하기 쉬운 기호로 되고 그것이 뜻하고 있는 것이 - 또한 그것들이 감추고 있는 것도 - 뚜렷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
메이를 남겨 두고 혼자 왔지만 기요의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메이가 그와 마주 서서 그에게 대들던 때보다도 집에 남기를 승낙한 지금, 오히려 보다 더 강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기요는 중국인 거리에 들어섰다.
자기가 그곳으로 들어온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무관심한 기분이었다.
"제가 뭐 누구의 보호를 받는 여자처럼 살아왔던가요…”라고?
내가 혼자 나가는 것을 승낙한 이 여자에게 과연 나는 무슨 권리로 보잘것없는 내 보호를 베풀어 주겠다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나는 그 여자를 떼어 놓고 나온 것인가? 정
말 내 태도에 복수 심리가 섞여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메이는 지금도 틀림없이 말이나 심리를 훨씬 넘어선 고통에 짓눌려 침대에 쓰러 져 있을 것이다.
그는 후닥닥 달음박질로 되돌아왔다.
봉황새 그림이 있는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나가고 메이는 여전히 자기 방에 있었다.
그는 문을 열기 전에 주춤 발을 멈췄다.
죽음을 나누는 절대적인 애정에 육체까지도 마비된 듯.
이러한 마음과 마음의 결합 앞에서는 육체 따위는 그 걱정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금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은 애정의 완전무결한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최고의 표현임을.
그는 문을 열었다.
메이는 급히 외투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말없이 남편의 뒤를 따랐다.
==
그는 다시 넓적한 얼굴을 들어 2층을 가리켰다. 어린애가 다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토프는 감히 '죽음이 자네를 해방시켜 주겠지'라는 말을 입 밖 에 낼 수는 없었다.
카토프 자신을 해방시켜 준 것도 죽음이었다.
에멜리크가 얘기를 시작한 후로 어느덧 죽은 아내의 기억이 스며들어 카토프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카토프는 희망을 잃고 녹초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뒤, 의학 공부도 집어 치우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혁명도 보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는 오직 자기를 사랑하는 어떤 여직공을 학대하는 것으로써 아직도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처참한 증거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에게 가해지는 온갖 고통을 달게 받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그 여자의 지극한 애정에, 오히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서 괴로워하는 그 애처로운 사랑에 감동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 여자를 위해서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타성으로 혁명 활동만을 계속했지만 그는 그 가엾은 여인의 가슴 깊이 간직된 끝없
는 애정에 사로잡혀, 자나 깨나 뿌리칠 수 없는 그 애정의 집념을 혁명 속으로 이끌어 들여 해소
했던 것이다.
몇 시간씩 그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하루 종일 같이 누워 있기도 했다.
그 여자가 죽었다. 그때부터…
그러나 그 모습이 지금 에멜리크와 자기 사이에 아련히 떠오르고 있었 다.
말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말을 초월해 몸짓이든지, 눈빛이라든지, 또는 그저 한자리에 같이 있다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는 가장 뼈저린 고통은 거기에 따르는 고독감 속에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또한 거기에서 해방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깊은 고뇌를 표현할 수 있는 말처럼 찾아내기 힘든 말도 그리 없을 것이다.
에멜리크로서는 지금 이 순간에 서투르게 표현하든지 또는 거짓말을 하면 오히려 습성이 되어 버린 자기모면에 새로운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카토프는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쓸쓸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들끼리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어색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난 아무 말도 않겠네만 자네는 이해해 줘야 해. 할 말이 없어." 카토프가 말했다.
에멜리크는 한 손을 들었다가 다시 무겁게 내려놓았다.
마치 자기는 고난의 생활과 허무한 생활, 그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혀 그대로 카토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곧 여기를 떠나서 첸을 찾으러 가야지.' 카토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
"내 생각으로는 이 문제에서 정신에 의뢰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충 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한 인간을 안다는 것은 소극적인 감정이고, 거기 대해서 적극적인 감정,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느끼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끝내 낯선 존재라는 안타까움입니다."
"인간이 정말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시간은 때로 그 안타까움을 씻어 주는 수가 있죠, 오직 시간만이.
우리는 결코 한 인간을 알 수는 없는 거요.
나는 지금 내 아들을 생각하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리고…또 한 명의 다른 청년 생각도.
지성으로써 알려고 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헛된 시도입니다.”
"지성의 기능이란 여러 구체적 사물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닐 테죠."
지조르는 문득 그를 쳐다보았다.
"지성이란 말을 어떤 뜻으로 하시는 겁니까?"
"일반적인 뜻 말입니까?"
"네."
페랄은 잠시 생각했다.
"사물 또는 인간을 강제하는 수단의 파악이죠.”
==
"무엇보다도 기이한 일은, 그렇듯 잔인한 율법이 4세기까지 성현들의 손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오.
그들의 사생활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매우 어질고 인간적인 성현들의 손으로 말입니다.”
지조르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 날카로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 밑에서 올려 비치는 램프 불빛에 수염 있는 곳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지금 이 밤안개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생사를 걸고 있을 것인가?
지조르는 여전히 몹시 긴장한 그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육체와 정신의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억누르고 인간의 원한이라는 어리석은 힘으로 그 굴욕감을 한사코 막아 내려는 얼굴을.
이성 간의 성적인 애증이 그 굴욕감 위에 다시 겹쳐져 있었다.
마치 이미 그가 스며든 땅 위로 아직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그 피에서 가장 오랜 옛 증오가 되살아나기라도 하듯이.
==
"적이건 남이건 어디까지나 노동자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한갓 관념을 위해서 바친다는 것은 인간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페랄이 말했다.
"사람이, 글쎄 뭐라고 할까요?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참을 수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죠…”
이렇게 대답하면서 지조르는 자기 아들 기요가 품고 있는 사상을 생각했다.
이해타산을 초월해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모든 사상은 - 다소 막연하기는 하지만 - 인간 조건의 토대를 존엄성 위에 세움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인간 조건에 존엄성을 주는 것으로, 이를테면 예전 노예들에게는 기독교가 있었고, 근대 시민에겐 ‘국민'이란 개념이, 그리고 노동자에겐 코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
"그 길이 당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느 딴 사람의 손으로라도.
마치 어떤 장군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와 같은 거예요,
'내 부하를 데리고 나는 저 도시를 공격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가 몸소 포격을 할 수 있다면 장군이 못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권력에 무관심한 것인지도 모르죠.
권력이라는 관념이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현실적인 권력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만족의 환영일 테죠.
가령 왕의 권력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갈망하는 것은 다스리는 일이 아니고 - 아까 당신도 말했듯이 - 남에게 강요하는 거예요.
즉,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다는 거죠.
나는 그것을 숙명적인 인간 조건을 벗어나려는 갈망이라고 말했지만.
그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고 전능의 권력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가공의 병, 그 '권력 의지'란 이지적인 합리화일 뿐이지요.
다름 아닌 신성에의 의지입니다.
인간이란 신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니까요.”
==
처자의 시체가 바로 저기에 있다.
지금 땅에 끈적끈적 붙는 내 발은 바로 그들의 피에 붙는 것이다.
이 학살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사람을 개나 돼지로 아는 짓이다.
특히 병든 어린애를 학살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 애는 아내보다도 더 죄 없이 죽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무기력한 사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나도 역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갑자기 그는 깨달았다.
삶만이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길이 아니며, 그것이 최상의 길도 아니라는 것을.
자기는 삶에서보다 오히려 복수를 통해서 더욱 자기 처자를 알고 사랑하며 소유하는 것이라고.
또 한 번 신발 바닥이 땅에 붙는 것을 느끼며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몸의 근육은 생각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강렬한 흥분이었다. 그는 완전히 이 무서운 도취에 심신을 내맡겼다.
'사랑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사랑으로 말이다!'
주먹으로 카운터를 쾅 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필경은 온 세계를 상대로…
그는 불현듯 손을 움츠렸다.
목구멍이 죄어들어 오는 것이, 당장 오열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카운터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 손에서 벌써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손이 마치 신경 발작을 일으킨 양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말라붙은 피가 딱지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웃어라, 울어라, 이 결박되고 뒤틀리는 가슴의 고통에서 풀려나도록…
쥐 죽은 듯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의 거대한 무관심만이 움직이지 않는 불빛과 함께 레코드 위에, 시체 위에, 핏자국 위에 버티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군 쇠집게로 사형수의 사지를 뜯어냈다"라는 구절이 머릿속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둔 후로 잊어버렸던 구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렴풋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느꼈다.
이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나 또한 떨어지지 않는 나를 여기서 떼어내야 한다고.
==
"이봐요, 나한테는 그 ‘인간의 존엄'이니 뭐니 하는 수작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걸…
알겠소? 내 '존엄'이란, 나로서는 말이오, 놈들을 죽이는거요.
중국 이라고? 그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흥! 중국이라, 농담은 집어 치우라니까!
내가 국민당에 가담하고 있는 건 오직 빨갱이들을 죽이기 위해서란 말이오.
내가 인간으로…아무 인간으로라도 좋아, 저 창 앞을 지나가는 얼간이라도 좋지, 어쨌든 내가 예전 같은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오직 놈들을 죽일 때뿐이야.
이건 아편 파이프에 대한 아편쟁이의 심정과 마찬가지지.
그래 그 녀석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왔단 말이오?
설사 당신이 내 목숨을 세 번 건져 주었다 치더라도…”
==
방금 쾨니히가 ‘누구라도 좋으니 어쨌든 한 인간으로 살려면···' 하던 그 어조가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고 있었다.
그는 쾨니히에게서 볼 수 있는 그 중독 상태, 오직 피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뼛속까지 사무친 그 중독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중국이나 시베리아의 내란의 참화를 싫도록 보아 온 터라 심각한 굴욕감이 얼마나 철저한 세계 부정을 초래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듯 철저한 부정에서 오는 고독이란 오직 집요하게 대지를 물들여 놓는 피와 마약과 신경증 따위로써만 지탱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어째서 쾨니히가 자기 곁에는 모든 현실이 얼마나 약화되어 가는가를 잘 알면서도 함께 있기를 좋아했는지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
마지막 밤이 땅을 뒤덮은 곳도 많을 테지만 지금 단말마의 고통으로 허덕거리는 이곳처럼 꿋꿋하고 믿음직한 동지애에 뒤덮인 분위기는 없으리라.
이 누워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신음하고 제물로 바친 그들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며 이 웅성거리는 비탄 속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지며 아득히 어둠에 덮인 저편 끝까지 그들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이어 나가는 듯했다.
에멜리크와 마찬가지로 그들 부상자들은 거의 전부가 처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인 운명이 평화로운 황혼처럼 신음 소리와 함께 떠올라 장송곡처럼 장엄하게 기요를 내리덮고 있었다.
기요는 눈을 감은 채 운명에 내맡긴 자기 육체 위에 두 손을 열십자로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의미와 가장 위대한 희망을 지닌 것을 위해 싸웠다.
그는 자기가 같이 살려고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죽으려는 것이며,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렇듯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해서 지금 죽어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음이라도 받아들일 만한 인생이 아니라면 대체 그런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혼자 죽지만 않는다면 죽기도 쉬운 법이다.
동지애에 넘친 떨리는 속삭임 속에서 죽는 죽음, 지금은 패배자들이 모여 죽는 죽음…
이 참담한 피투성이의 전설이 나중에 찬란한 황금의 전설로 변모할 것이다!
이미 죽음과 대면한 이 마당에 어찌 제물로 바친 인간의 이 속삭임이 들리지 않을 것인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용감한 마음이야말로 죽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영혼에 못지않은 피난처라고 그에게 외치는 그 속삭임을!
그는 이미 청산가리를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전에도 가끔 쉽사리 죽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죽을 결심만 한다면 자살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잔인하리만큼 무관심한 죽음의 허무를 알고 있기에 죽음의 그러한 무관심으로써 인생은 우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죽음이 자기 의식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반석처럼 짓눌러 버리는 그 순간에 대한 불안이었다.
아니다. 죽음은 역시 열렬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그 죽음이 그대로 자기 삶의 성격을 드러내는 삶의 최고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주저주저하며 다가오는 저 두 군인의 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기요는 명령이라도 내리듯이 독약을 이빨 사이에 넣고 힘껏 깨물었다.
또 한 번 카토프가 안타깝게 뭐라고 자기에게 물으면서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혀 카토프에게 매달리고 싶은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항거할 수 없는 경련이 일어나 자기의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
메이는 지조르가 다시 주저하면서 옆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요가 살아 있었던 동안에 메이의 모든 생각이 기요와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은 기요의 죽음이 메이의 어떤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가 아직 알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대답을.
아, 조사와 조화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비속한 행운!
아직 어떤 어린아이도 어루만진 적이 없는 내 손길에서 모성애의 애무를 앗아 간 그 고뇌를 넘어서는 대답을, 그지없이 애틋하게 죽은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하게 하는 이 쓰라린 호소를 넘어서는 대답을.
바로 어제 메이에게 '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하던 이 입도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죽음 자체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메이는 지난날 체념 속에 바라보던 수많은 고통을 자기 추억 속에서 끌어내며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자기에게 닥쳐온 허무를 맞아들이려는 헛된 몸부림에 몸을 내맡긴 채.
==
지조르는 다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자고 나면 다시 눈을 뜰 테지…’
얼마나 오랫동안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문득 그 죽음이 떠오르곤 할 것인가?
아편 파이프가 거기 있다. 손을 내밀어 아편 알을 만들어 넣으면 된다.
그리고 15분쯤 지나면 죽음조차 바다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리라.
마치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중풍 환자를 대하듯이.
죽음도 이미 그에게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은 모든 힘을 잃고 우주의 무한한 평화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흩어지리라.
해방은 바로 저기 있다. 바로 곁에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미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 이상 괴로워한단 말인가?
그 고통이 사랑에 바치는 제물인가? 아니면 공포에 바치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아편 접시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갈망과 오열을 억누르자 안타까움이 목을 죄어 왔다.
문득 그의 손에 책 한 권이 잡혔다. 그는 평생 기요의 책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 책을 들어 보았자 자기가 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베이징 정계>라는 잡지다. 시체를 운반해 올 때 거기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조르의 강연 내용이 실려 있는 잡지였다.
지조르는 그 강연으로 말미암아 대학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여백에 기요의 필적으로 ‘이 강연은 나의 아버님의 강연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요는 생전에 아버지의 강연 내용에 찬성한다는 말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지조르는 조용히 책 을 덮고 덧없이 죽은 자기 희망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아편을 어둠 속에 내던지고 나서 되돌아와 앉았다.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자기의 고뇌가 자문자답에 지쳐 마침내 침묵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에서 치미는 고통으로 힘없이 입이 열리고 평소에 엄숙하던 그의 얼굴이 멍청한 얼굴로 변했을망정 자제력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 밤 그의 인생은 변할 것이다.
사상의 힘도 죽음이 한 인간에게 일으키는 변화에 대해서만은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외부 세계란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이미 존 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자기를 세계와 연결시켜 주던 아들의 시체 곁에 깃들인 영원한 정지, 그것은 신의 자살이나 다름없다.
그는 기요에 게서 성공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행복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요 없는 세계란···.
나는 이미 시간 없는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다.
자식이란 시간에 복종하는 것이며 사물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아마 더 깊은 의미로는 지조르도 고뇌인 동시에 희망의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어떤 구체적인 희망도 아닌 희망, 기다림 같은 것, 그리고 그의 사랑이 짓밟히지 않고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파괴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맞아들이려는 것이다!
‘죽음에는 어딘가 아름다운 점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가슴속에 근원적인 어떤 고뇌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사물에서 오는 고뇌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고뇌이며, 삶이 한사코 거기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려는 고뇌였다.
지조르는 그 고뇌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고뇌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그 무서운 고뇌의 관조야말로 죽음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라는 듯이.
마치 그의 가 슴 깊은 곳까지 스며든 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고뇌'야말로 죽은 아들의 시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조사라는 듯이.
==
“어제 에멜리크를 만났더니 그도 당신 걱정을 하더군요.
그는 지금 전기 공장의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난생처음으로 어째서 일을 하느냐는 자각을 가지고 일하게 됐어.
이제는 굶어 죽는 날을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일하는 게 아냐.”라고요.
지조르 어른께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 와 있는 동안 저는 그분이 강의 시간에 말씀하셨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문명이 변모하는 것은 그 문명의 가장 참담한 요인이 - 이를테면 고대 노예의 모욕감, 현대 노동자의 노동 같은 것이 - 갑자기 하나의 가치로 전환될 때다.
다시 말하면 이미 노예가 그 모욕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자기 구제를 기다리게 될 때, 또는 노동자가 노동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자기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될 때 그 문명은 일변하는 것이다.
공장은 아직도 노동자들에게는 지하 묘지의 교회 같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대성당 같은 것으로 바뀌어야 하며, 인간들은 그 안에서 신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지와 싸우는 인간의 힘을 보게 되어야 한다…”
==
"지금도, 우리가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우리들의 병원이 문을 닫은 이때에도 곳곳에서 비밀 지하 조직이 다시 조직되고 있어요.
우리 동지들은 그들이 고생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지, 절대 전생의 업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다 시는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전에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들은 갑자기 3천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는 잠들지 않을 게다'라고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3억의 비참한 민중들에게 반항 의식을 불어넣은 사람들, 그들은 그저 이 세상을 언뜻 지나가는 사람들 같은 덧없는 그림자는 아니리라.
설사 그 들이 두들겨 맞고, 악형을 받고,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라고요."
메이는 여기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죽었어요.”
"메이, 나 역시 늘 그 생각을 하고 있단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과도 달라.
기요의 죽음, 그것은 나에게는 단순한 고통도 아니고, 단순한 변화도 아냐. 그건 뭐랄까…일종의 변신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까지 세상 사람들을 그다지 사랑해 본 적이 없어.
다만 기요가 나와 세상 사람들을 연결해 주고 있었지.
기요가 있었기에 내 눈에도 세상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이지.
이젠 모스크바에도 가고 싶지 않다. 가 보았자 비참한 기분으로 강의를 하게 될 테니까.
이미 내게는 마르크시즘도 생명을 잃은 셈이다.
기요에게는 마르크시즘이 하나의 의지였어. 그렇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하나의 숙명이야.
그리고 내가 그 마르크시즘에 동조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죽음에 대한 고통이 숙명에 찬동했기 때문이지.
메이, 기요가 죽은 뒤로는 죽는다는 것에 나는 무관심해졌다.
말하자면 나는 동시에 죽음과 삶에서 해방된 - 흠, 해방이라… - 어쨌든 해방 된 셈이야. 이런 심경으로 내가 가서 뭘 한단 말이냐?”
==
"사람은 오랫동안 인생을 속이고 살아갈 수도 있어.
그러나 결국은 인생이 우리를 자기가 타고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법이지.
그러나 노인이란 자기 자신의 인생의 고백이나 다름없지.
암, 그리고 숱한 사람들이 대개 늘그막에 가서 허무한 말로를 보이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숱한 사람들의 인생이 본시 허무했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야.
다만 그것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
그러나 그것도 뭐 대단한 일은 아니야.
결국 현실이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오직 관조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아편을 복용하건 복용하지 않건 간에.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거기서 무엇을 관조하나요?”
"아마 그 공허를 관조할 테지…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거든.”
==
그는 거리 변두리에 있는 기중기들과 바다 위에 뜬 배들, 그리고 한길 위에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들 괴로워하고 있구나.
저마다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늘 인간을 영원 속에 놓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생에 대한 의식은 고통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인생을 정신으로 사색할 것이 아니라 아편으로 사색해야 한다.
만약 그 사고라는 것만 사라진다면 이 봄볕 속에 널려 있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사라질 것인가..'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서까지도 해방되어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자기 파이프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눈부신 햇빛 속에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저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개미 떼처럼 들끓는 그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남모르게 치명적인 기생충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모두 미치광이다.
그러나 본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이 광증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노력의 일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는 문득 상하이에서 안개가 자욱히 낀 밤에 '인간이란 모두 신이 되기를 꿈꾸는 거요…’ 하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듣던 페랄의 모습을 떠올렸다. 램프 불빛에 비친 그 모습을.
==
"내가 사랑하던 유일한 것을 빼앗겼다.
그래도 너는 내가 예전의 나대로 변치 않기를 바라는구나.
내 사랑이 네 사랑만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네 생활이 변하지 않을 정도의 네 사랑보다 말이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육체가 변하지 않듯요…”
지조르는 메이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그걸 서로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다.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한 거다.
60년간의 갖가지 희생과 의지와…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가.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나가 버리고 정말로 그가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는 거란다.”
메이는 절망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알 테지만 나는 정말 기요를 사랑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랐어…”
그는 여전히 메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 손을 끌어당기며 자기의 두 손으 로 꼭 감싸 쥐었다.
"메이, 내 말을 잘 들어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사랑해야 돼.”
"전 사람을 사랑하려고 모스크바로 가는 건 아녜요."
그는 햇볕이 구석구석 내리쬐는 황홀한 항만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는 자기 손을 빼냈다.
"메이, 복수의 길에서 생활과 마주치는 일도 있는 법이란다…”
"그렇다고 일부러 이쪽에서 생활을 불러들일 생각은 없어요."
메이는 일어났다. 작별의 뜻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으로 메이의 두 뺨을 잡고 키스했다.
기요도 마지막 날 이렇게, 바로 이런 식으로 키스를 했던 것이다.
그 후 어느 누구의 손도 메이의 얼굴에 닿은 적이 없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아요."
메이는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나 쓸쓸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