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의 고대 건축물들과 세계 역사의 조각
1. 유태인 비극의 역사 ‘마사다(Masada/히브리어 מצדה, 요새라는 뜻) 요새’
마사다를 공격하는 로마군 / 마사다(Masada) 요새(이스라엘)
이스라엘 남부의 황야에 있는 마사다 요새는 사해(死海) 인근의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위에 자리 잡은 고대 유대의 왕궁(王宮)이자 요새(要塞, Fortress)이다. 1842년에 최초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는데 2,000여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고 철저히 숨겨졌던 곳이다.
마사다의 절벽은 동쪽이 가장 높아서 400m에 이르고 가장 낮은 서쪽도 높이도 90m정도이며 절벽의 정상은 비교적 평평한 마름모꼴로 남북이 550m 동서로 270m정도 크기라고 한다. 절벽 테두리를 따라 세워진 성곽(城郭)의 둘레는 1,300m에 달하고, 곳곳에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감시탑이 서 있다.
마사다의 동쪽과 서쪽에는 아래에서 위로 각각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동쪽은 본래 있던 뱀길(Snake Path)이라고 하는 이리저리 휘돌아가는 길인데 엄청나게 길고 가파르다.
마사다에 관한 기록은 1세기 유대계 로마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갈릴리(Galilee)지역의 유대장수였지만 뒷날 로마에 투항하여 역사가로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당시 유대(Judea) 왕국은 헤롯왕(헤로데 1세, BC 73년~4년)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통치기간 중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聖殿)인 ‘예루살렘 성전(헤롯성전)’을 증축했고,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 항구 건축’ 및 ‘마사다 요새’와 ‘헤로듐(Herodium) 요새’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보면 헤롯왕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유대의 왕이신 구세주 예수가 태어났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왔다며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묻자 깜짝 놀란 유대의 왕 헤롯은 자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혹시 찾거든 자신도 꼭 가서 경배를 드리고 싶으니 반드시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왕궁에서 나온 동방박사들은 밤이 되자 밝게 빛나는 별이 인도하여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과 함께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를 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를 드리는데 절대로 헤롯왕에게 알리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그냥 돌아간다.
헤롯왕은 아무리 기다려도 동방박사들의 소식이 없어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다고 하자 헤롯은 베들레헴을 위시하여 그 부근 마을을 샅샅이 뒤져서 2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한다.
그때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꿈에 아기를 데리고 빨리 애굽(Egypt)으로 피신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이미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한 뒤였다. 이후 예수님은 헤롯왕이 죽은 후 유대로 돌아오신다.
당시 로마(Rome)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AD 14)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세계 정복을 꿈꾸던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헤롯왕은 BC 37~31년 사이 난공불락의 마사다 절벽 정상에 궁궐을 짓고 요새화하여 그곳으로 피신하였으며 마사다 정상을 빙 둘러 성벽을 쌓고 38개의 감시탑을 세웠다고 한다.
성벽 안에는 110개의 방이 있었고 1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와 함께 수십 년 먹을 곡식 및 과일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헤롯왕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왕비와 자식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어린 생명들까지 앗아간 나쁜 놈이다. 그 만행의 보복인지 헤롯왕은 나쁜 병에 걸려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다가 병으로 죽는데 헤롯이 죽은 뒤 마사다는 로마군에게 넘어간다.
마사다의 함락이 너무나 가슴 아픈데, 서기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럿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남녀노소를 모두 합쳐 천명도 안 되었지만, 그들은 마사다를 근거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로마군을 괴롭혔다.
서기 73년 5월 2일 밤, 사해(死海) 부근 마사다 요새에서 일어난 가슴 저리는 비극.....
‘내일이면 끝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적의 손에서 구하자.’
회의장에 모인 전사(戰士)들은 제비를 뽑아서 뽑힌 사람 1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처와 자식을 죽이고는 가만히 옆에 누워서 기다렸다.
제비에 뽑힌 10명은 성안을 돌며 누워있는 전우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남은 10명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누워있는 아홉 명을 죽이고 마지막에 스스로 자살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에게 점령당한 요새에는 960구의 시체만 남았을 뿐이었으며, 그리하여 마사다 함락으로 66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1차 유대전쟁도 끝났다. 이 전쟁에 동원된 로마군은 8만여 명. 로마가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유대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반란의 싹을 잘랐다며 개선문을 세우고 기념주화까지 만들었지만 유대의 저항은 113년과 133년의 2, 3차 유대전쟁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의 끝없는 투쟁은 마사다의 항전(抗戰)이 가슴속에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구약성서(舊約聖書, Bible) 속의 미스터리 바벨탑(Babel Tower)
성서 속의 바벨탑(상상도)
구약성서(舊約聖書) ‘창세기(創世記, Book of Genesis)’에 등장하는 바벨탑(Tower of Babel)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훨씬 앞서 지어진 고층의 건축물이다.
이 탑은 인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짓기로 하는데, 신은 인간의 오만함을 벌하려고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했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결국 탑을 쌓는 일이 불가능해져서 탑 쌓는 일이 중단되고 일하던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내용이다.
갑자기 ‘저기 망치 좀 건네주게’ 하면 벽돌을 집어주고, ‘줄자를...’ 하면 곡괭이를 들고 오고.... ㅎㅎ
현재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는 대충 6,500가지 정도로 추정하는데, 같은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에서는 840여 가지, 인도네시아(Indonesia)는 711개, 아프리카에 있는 나이지리아(Nigeria)는 517개, 인도(印度,India)에서는 456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인도를 여행할 때 들은 이야기로, 해외에 나가있는 인도 사람들은 인도의 공용어인 영어로 편지봉투를 쓰고 내용은 자기들 부족어로 쓴다고 하였다.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이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Noah)의 후손이었는데 노아는 하느님의 계시로 대홍수에서 살아남도록 ‘노아의 방주(方舟,Noah's Ark)’를 만들어 온갖 생명을 살려낸 은인이다.
성서(聖書)에 의하면, 세상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이 땅을 멸(滅)하기로 결심한 하느님은 정직하고 의로웠던 노아에게 임박한 재앙을 알려주고 그와 그의 가족을 재앙으로부터 구원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배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즉시 거대한 배(方舟)를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대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이 다시 번성할 수 있도록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암수 1쌍씩 배에 실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대 홍수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죽었으니 오늘날의 모든 인류는 그의 3명의 아들의 후손인 셈이다.
노아의 아들들은 포도밭 경작의 창시인 첫째아들 셈(Shem), 둘째아들 함(Ham), 셋째아들은 야벳(Japheth) 인데 셈족(Semites)의 조상이다.
3가지 이상의 성서 전승 자료를 종합해보면 노아(Noah)는 의인의 상징이며, 이스라엘 하느님인 야훼(Yahweh, 창조주)로부터 다시는 자연을 재해로 멸하지 않으리라는 언약을 받았다고 한다. 노아가 만든 배를 방주(Noah's Ark)라고 하는 까닭은 문헌을 통하여 그 모양과 크기를 조사한 결과 길이가 135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거대하면서도 안전한 장방형(長方形)의 배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노아의 방주의 비율대로 1/50로 축소 제작하여 그 안정성을 실험한 결과 노아의 방주는 무려 30m의 파도도 견딜 수 있는 안전한 배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기록에 대한 증거는 인디언(Indian)들이 남긴 석판(石版)과 중국 동이족(桓檀族)이 만든 한자(漢字)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목수인 요한 휘버스(Johan Huibers)는 33살이 되던 해 폭풍우가 내리치는 꿈을 꾼 후 노아의 방주를 재건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역경 속에서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네덜란드 서남부 도시 도르트레히트(Dordrecht)의 랜드마크가 된 방주는 대홍수 때 살아남은 동물의 형상 전시장 등 노아 시대의 삶과 그의 여정을 체험할 수 있는 성서박물관을 만들고 각종 이벤트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데 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휘버스씨가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로 자신이 만든 노아의 방주를 우리나라에 영구 기증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며 금년(2022) 7월 경 한국에 온다고 한다. <그런데????>
휘버스씨 제작의 노아의 방주 / 내부모습(동물 모형) / 제작자 휘버스
바벨(Babel)은 히브리어로 ‘신(神)의 문(門)’이라는 뜻이며 지상 최초의 영웅인 니므롯(Nimrod)이 세운 도시였는데 훗날 바빌론(Babylon)이라 불리던 도시이다. 바벨탑을 신화나 상상 속의 건물로 여길 수 있지만 많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건축 학자들은 실재했던 고대의 건축물로 믿고 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는 바벨탑의 높이가 90미터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이 추정하는 높이는 약 7층 가량으로, 위치는 이라크(Iraq)의 수도 바그다드(Baghdad)에서 남쪽으로 약 90킬로 가량 떨어진 바빌론(Babylon)인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태동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방의 고대도시이다. 성서 중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바벨탑이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4백여 년 전인 BC 1440~1400년으로 당시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BC 587년, 유대인 선지자 예레미야(Jeremiah)가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한 후로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전쟁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바벨탑이 있던 곳이 바빌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에리두(Eridu, 현재 이라크)가 더 유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라크 남부의 곳곳에는 이런 대규모 건축물들이 수도 없이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는데 일부학자들의 주장에 근거가 있는 것은 이라크 남부(南部)가 수메르(Sumer),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바빌로니아(Babylonia), 아시리아(Assyria) 등 최초의 인류문명을 꽃피웠던 지역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3. 이탈리아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Colosseum) / 콜로세움 모형 / 내부 모습
모든 스포츠 경기장의 어머니로 불리는 로마(Rome)의 콜로세움은 AD 72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원형 경기장으로, AD 80년, 아들인 티투스(Titus) 황제 때 완공되었다 한다.
로마(Rome)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首都)로,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콜로세움은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는데 AD 82년에는 로마제국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대체로 언덕을 파서 세우는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Gladiator)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제로 공연되었는데 중세(中世) 때 낙뢰(落雷)와 지진(地震) 등으로 손상되었으며 아프리카 반달(Vandal) 족의 침공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화려한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중세(中世) 이후에는 교회를 짓는 재료로 쓰이기 위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뜯기게 되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현재까지도 2,000년 전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축물이다.
맹수와 검투사 / 막시무스(Russell Crowe 분) / 코모두스(Joaquin Phoenix 분) / 감독 리들리 스콧
2000년에 개봉되었던 영국 영화로,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던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검투사)’가 불현 듯 떠오른다.
글래디에이터는 뛰어난 영화 기술을 바탕으로 벤허(Ben-Hur, 1959년)를 능가할 만큼 웅장한 볼거리들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였다. 벤허는 아카데미 12개 부문을 수상하였고, 글래디에이터는 제58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도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 작품상까지 수상했고 12개 부문에 수상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5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던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죽을 날이 머지않은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막시무스(Maximus)를 총애하여 아들이 아닌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한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Commodus)는 이에 질투와 분노를 느껴 황제(아버지)를 살해한다. 왕좌를 이어받은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겨우 살아남게 된 막시무스는 노예로 전락하고, 투기장의 검투사로 매일 훈련을 받는다. 그에게 남은 건 오로지, 새로 즉위한 황제 코모두스에 대한 복수 뿐. 검투사로서 매 경기마다 승리로 이끌면서 살아남자 그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 간다.
4. 페루의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
마추픽추(Machu Picchu) 유적
‘비밀의 공중도시’로 불리는 페루(Peru)의 마추픽추(Machu Picchu)는 고대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zco)에서 88km 떨어진 우루밤바(Urubamba) 계곡 해발 2,430m로 우뚝 솟은 안데스산맥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에 잉카인들의 마지막 저항지(抵抗地)였다고 기록되어있는 빌까 밤바(Vilcabamba)로 추정되던 곳이었다.
이 도시는 잉카제국의 통치자 파차쿠티(Pachacuti Inca Yupanqui)에 의해 1450년경 건설되었다고 하며, 1532년, 스페인 침략자들이 이곳을 침략하지만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 깊은 계곡(神聖溪谷)과 울창한 산꼭대기에 있던 이 도시는 침략자들의 눈에 띄지 않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공중도시 건설이 완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전체에 천연두 전염병이 휩쓸어 도시 전체를 버렸다고도 하는데 이 마추픽추 고대도시는 200개 이상의 계단으로 연결된 석조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옆에는 와이나픽추(Wayna Picchu)라는 해발 2,720m의 봉우리도 있는데 이 산으로 오르는 길은 마추픽추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비밀통로 형태로 오르는데 약 2시간이 걸린다. 와이나픽추 정상에서는 마추픽추 도시전경과 그 주변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졌던 이 공중도시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자인 하이람 빙엄(Hiram Bingham /1875~1956) 교수가 잉카의 만꼬(Inca Manco)왕이 스페인 정복자들에 맞서 싸웠다는 문헌상의 기록을 보고 마지막 저항지로 여겨지는 ‘빌까밤바(Vilcabamba) 황금도시’를 찾으러 이곳 신성계곡으로 오는데 한 인디오 농부로부터 산꼭대기에 고대도시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디오 소년의 안내로 답사하여 이 신비에 싸인 공중도시 마추픽추가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마추픽추 오르는 지그재그길 / 인티파타나(태양을 묶는 기둥) / 계단식 밭 / 콘도르 신전
빙엄 교수가 처음 돌계단을 통하여 이곳에 올라왔을 때는 나무와 풀로 뒤덮여 전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는데 지금은 너무도 말끔하게 정돈되어 한눈에 모든 윤곽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빙엄 교수는 밀림으로 뒤덮인 이곳 유령도시에서 인디오 한 가정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130여구의 유골과 5,000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여 수습하였다고 한다.
후일 학자들은 건물의 수와 주변에 조성된 계단식 밭의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상주인구가 2,000명에서 10,000명 정도로 추정했다니 상당히 규모가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미스터리인 것은 수습된 유골들을 분석한 결과 80% 이상이 여자와 아이들 유골로 성인 남자의 유골은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천연두 때문이라 추측도 있지만 아직도 수수께끼가 많다고 한다.
이곳에는 태양의 신전, 인티파타나(태양을 묶는 돌기둥), 콘도르 신전과 감옥, 달의 신전 등 유적도 많을 뿐더러 정교한 잉카인들의 석축술(石築術)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2015년 집사람과 함께 신성계곡의 삐삭(Pisac) 주변과 수많은 잉카 유적들을 둘러보는 행운이 있었다.
5. 인도의 아름다운 능묘(陵墓) 타지마할(Taj Mahal)
아그라의 타지마할(Taz Mahal) / 타지마할 내부 / 쿨다바드(Khuldabad) 능묘 ‘비비카막바라(Bibi Ka Maqbara)’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인도 최대의 이슬람 제국이었던 무굴(Mugul) 왕조의 5대 술탄 샤자한(Shah Jahan)이 왕비 뭄타즈 마할(Mumtāz Maḥall)을 위해 만든 무덤이다. 자한은 본래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고 특히 건축을 사랑했는데 이 타지마할을 비롯해 델리(Delhi) 성,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이슬람 사원 등도 건축했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인도 북부도시 아그라(Agra)에 있다.
술탄 샤자한은 아름다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왕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전국 순회와 해외 정복전쟁에까지 그녀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열네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녀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너무나 비통에 잠겨있던 술탄(Sultan) 샤자한은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온갖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22년 동안 그녀의 무덤 궁전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Taz Mahal)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고자 한 샤자한은 막대한 예산과 노동력은 물론, 세계 각지의 기술자들을 아그라(Agra)로 모아들였다. 건축가로는 페르시아 출신의 우스타드 이샤와 이란 출신의 이사칸이 초빙되었고 각 분야별로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 이태리의 베네치아(Venice) 등지의 기술자들도 참가했으며 이 공사에 동원된 건축가와 인부는 2만 명가량이었고 코끼리도 1000마리나 동원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대리석, 청금석, 홍옥석, 공작석, 터키석 등의 석재를 사용했고 외벽은 루비, 사파이어, 옥과 같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500킬로그램 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샤자한은 국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타지마할을 건설했지만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ēb, 1618~1707)는 아버지 샤자한이 무차별한 국고 낭비로 왕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한다. 샤자한은 생애 마지막 8년을 아그라성에서 연금(軟禁) 상태로 보냈는데 아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소원 하나는 들어주었다. 하얗게 빛나는 위대한 사랑의 증거 타지마할을 아그라성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샤자한 왕 / 뭄타즈 마할 왕비 / 야무나 강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 아그라 성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주(Maharashtra)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는 아우랑제브(Aurangzēb)가 황태자 시절 태수로 부임하였던 데서 도시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아우랑가바드 인근의 작은 도시 쿨다바드(Khuldabad)에는 아우랑제브가 자신의 왕비가 죽자 타지마할을 본 떠 17세기 중반에 건축하였다는 능묘(陵墓) 비비 카 막바라(Bibi Ka Maqbara)가 있다. 아름다운 이 건물은 타지마할과 꼭 닮아 작은 타지마할이라고도 불린다는데 크기는 30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능묘였다. 이 능묘는 아우랑제브가 어머니 뭄타즈마할을 생각하며 지었다고도 하고.....(나는 2011년 인도 여행 중 직접 둘러봄)
6. 요르단의 잃어버린 도시 페트라(Petra)
페트라(Petra)의 알카즈네(Al-Khazneh) 신전
세계에서 또 다른 ‘잃어버린 도시’로 꼽히는 페트라(Petra)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해(死海)와 아카바(Aqabah) 만 사이의 요르단 영토에 위치한 페트라(Petra)는 기원전 나바테아(Nabataea) 왕국의 수도였는데 수백 년 된 석조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에서 서기 106년 사이 나바테아왕국의 수도로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 될 때까지 계속 존재했다. 로마제국에 점령된 이후 도시는 경제 문제로 인기를 잃었고 곧이어 대지진으로 함몰되는 바람에 잊혀졌는데 1958년 발굴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페트라(Petra)는 깎아지른 바위절벽 사잇길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알카즈네를 마주하면서 감격하게 되는데 높이 40m, 폭 30m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곳이 페트라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곳은 사실 페트라 유적의 입구에 불과하다. 조금 더 들어가면 장밋빛 암벽에 유럽 제라늄 문양인 파사트(Passat)들로 장식된 파사트 대로가 나오고, 잇달아 장밋빛 유적이 끝없이 이어진다.
페트라는 기원 전후,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고 하는데 사막 내륙의 대상(隊商)들의 주요 루트인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바닷길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막 한가운데 유일하게 풍부한 물줄기가 있고, 외부 침입을 막아 줄 바위로 된 성벽이 있기 때문에 상인들의 안전한 휴식처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성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요르단으로 들어가면서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 페트라라고 하며, 유적지 주변 마을에는 아직도 모세의 샘이 있어서 마을의 중요한 식수원이 되고 있다.
고대 도시 페트라는 극장, 사원, 집과 같은 모든 구조물들이 석회암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이 특징인데 알카즈네와 로마 시대에 지어진 원형 극장이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이다. 사암(砂巖)으로 된 암석지대에 다양한 건축물들로 구성된 페트라의 규모는 약 100 평방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최근 페트라의 알카즈네 지하에서 왕들의 비밀무덤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페트라 유적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이 제작한 일련의 모험영화 인디애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 중에서 제3편인 최후의 성전(Last Crusade, 1989년 작), 영국 데이비드 린(David Lean)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awrence of Arabia, 1962 작) 등 명화의 촬영지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한국의 드라마 미생(未生:20부 작, 2014)에도 나오면서 한국인들의 관심도 받게 되었다.
와디럼(Wadi Rum) / 달의 계곡(Valley of the Moon) / 사해(死海) 1,2
요르단에는 페트라 유적 외에도 광대한 메마른 사막 와디럼(Wadi Rum)의 붉은 바위로 둘러싼 달의 계곡(Valley of the Moon)은 기막힌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고, 북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면의 호수인 사해(死海)도 있는데 물의 염분(鹽分) 농도(濃度)가 무려 30%(일반 바닷물은 3.5%)나 되어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라도 몸이 물에 그냥 둥둥 뜨니 누구라도 수영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7. 멕시코 마야문명의 심장 치첸이트사(Chichen Itza)
쿠쿨칸(Kukulcan) 피라미드 / 이트사 부족의 우물 세노테(Cenote) / 신성한 뱀 쿠쿨칸
메리다(Merida)는 멕시코시티로부터 1.440km, 칸쿤(Cancun)까지는 320km 떨어진 유카탄반도(Peninsula de Yucatan)의 끝부분에 있는 도시인데 안내책자에 ‘마야의 심장부로 가는 관문(Gateway to the Maya Heartland)’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도시로 인구는 80만 정도이다. 메리다에서 동쪽으로 80km정도 떨어진 유카탄 반도의 중심부근에 마야(Maya)의 대 유적 치첸이트사(Chichen Itza)가 있다.
치첸이트사(Chichen Itza)라는 이름은 ‘이트사(Itza) 부족의 우물의 입구’라는 뜻인데 건축시기가 서기 60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 문명의 유적이다. 이곳은 한때 유카탄의 종교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마야인들의 정치 및 경제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원(寺院), 천개 기둥의 홀, 마야 사원인 쿠쿨칸(Kulkulkan) 피라미드를 비롯한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다른 부족들의 침략, 약탈 및 유기(遺棄)로 인해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밀림지역이라 지표면을 흐르는 강이나 시냇물이 거의 없고 지표면 7~8m 아래로 물이 흐르며, 물이 귀한 관계로 주로 우물(Cenote)이 있는 곳에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치첸이트사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유적이 흩어져 있어 꽤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는데 한 가운데 쯤에 쿠쿨칸 대 피라미드(El Castillo/ Pyramid of Kukulcan)가 우뚝 솟아있다.
쿠쿨칸 피라미드는 사면을 따라 꼭대기까지 각각 91계단, 모두 합치면 364계단이고, 맨 위의 제단(Central Platform)까지 합치면 365계단으로 태양력 1년을 나타낸다고 하며, 전체 높이는 25m이다.
피라미드를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입을 벌린 커다란 뱀의 머리조각이 있는데 춘분과 추분 때면 그림자가 계단에 그림자를 드리워 뱀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마야인들은 이 뱀을 깃털달린 신성한 뱀 ‘쿠쿨칸(Kukulcan)’으로, 아스텍 인들은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이라 불렀고,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다고 믿어 수많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우물 세노테(Cenote)는 지름 7~8m 정도로 상당히 넓고 깊어보였으며 이 속에서 제물로 바쳤던 10대 소녀 인골(人骨)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 뼈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사의 신전 / 재규어 신전 / 해골의 신전
그 밖에도 4개의 볼 경기장(Ball Court), 전사의 신전(Temple of the Warriors), 해골의 신전(Temple of the Skulls), 재규어 시전(Temple of Jaguars), 신관의 무덤(Tomb of the high Priest), 사슴의 신전(Temple of the Deer), 조각(彫刻) 판넬의 신전(Temple of the Sculptured Panels), 달의 건축(Edifice of the Nuns), 독수리의 단(Platform of the Eagles) 등이 있었는데 이곳 또한 아쉽게도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다.
(나는 2010년, 한 달 간 배낭여행으로 멕시코를 샅샅이 둘러보았고 이곳에서 하루를 둘러보았다.)
8.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Cristo Redentor in Rio de Janeiro)
리우(Rio)의 예수상(Cristo Redentor)
브라질의 항구도시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코르코바도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상은 1922년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착공해 1931년 10월 12일 공식 행사로 개관했다고 하는데 설계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가 했고 프랑스의 조각가 란도프스키(Paul Landowski)가 조각했다고 한다. 이 예수상은 브라질 사람들의 평화, 따뜻함, 친절한 본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남동부 대서양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예전에는 브라질의 수도였는데 현재 브라질의 수도는 브라질리아(Brasilia)이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는 일반적으로 약칭(略稱)인 리우(Rio)로 불린다.
코르코바도(Corcovado) 언덕 정상, 30m 높이의 거대한 동상인 예수상은 8m 높이의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고 무게는 총 1,145톤, 머리 높이만 3.75m, 머리 무게가 30톤, 양쪽으로 벌리고 있는 팔의 너비만 30m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동상이다. 매년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에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리우 카니발이 펼쳐진다. 리우데자네이루는 예수상 보다 오히려 이 축제가 더 유명할 지도 모르겠다.
리우 카니발 퍼레이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로 꼽히는 리우카니발(Rio Carnival)은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축제이다. 리우카니발은 매년 1~2월 무렵에 시작해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날인 참회화요일(Mardi Gras, Shrove Tuesday)까지 약 5일간 개최된다.
사순절(四旬節)은 사순기간(재의 수요일 3일~1주일 전) 동안의 단식과 금육을 앞두고 실컷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사순절은 원래 가톨릭 전통의 카니발(축제)이지만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역사 속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원주민의 전통이 뒤섞인 다채로운 축제로 성장했다는데 일명 삼바퍼레이드(Samba Parade)라고도 부른다. 리우카니발의 리우데자네이루 지역의 삼바학교(Escola De Samba)들이 경쟁하는 삼바 경연대회라고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는 이태리의 나폴리(Naples), 호주의 시드니(Sydney)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꼽히는 항구도시이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라는 도시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1월의 강(앞에 있는 바다를 강으로 착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Portuguese)를 사용하는 나라이며, 다른 중남미 모든 나라들은 스페인어(Español)를 사용한다. (Rio-강<River>, Janeiro-1월<January>)
♧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Spain), 포르투갈(Portugal), 이탈리아(Italy)는 제각각 다른 고유의 언어를 쓰지만 세 나라의 언어가 매우 비슷하여 세 나라 사람들이 만나서 제각각 자기나라 말로 이야기를 해도 서로 언어가 통한다고 하니 세 나라 언어가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9. 스리랑카의 시기리야(Sigiriya) 성채(城砦)
성채 전경 / 성채 오르는 나선형 철제 계단 / 정상의 연못(물의 정원)
인도 동남부 실론(Ceylon)섬의 작은 섬나라인 스리랑카(Sri Lanka)에는 세계 8대 경이(驚異:8th Wonder of the Ancient World)로 꼽히는 시기리야(Sigiriya) 성채(城砦)가 있다.
AD 5세기, 궁녀소생의 서출왕자였던 카샤파 1세는 아버지가 이복동생(정통 왕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아버지인 국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簒奪)하였는데 정적들에 의한 암살의 두려움에 이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우고 이 위에서 18년 간 통치하였다고 한다.
원통형 나선 계단을 7~80m 쯤 오르면 바위벽을 파내어 만든 높이 2m, 길이 10m 정도의 작은 통로가 보이는데 이곳 벽면에 그 유명한 시기리야의 미녀들(Lady of Sigiriya)이 기다리고 있다.
풍만한 여인들을 그린 이 프레스코 채색화는 원래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훼손되고 지금은 18명의 여인그림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란한 색채로 당시의 복식(服飾)과 장신구 등을 보여주고 있다. 가슴을 드러낸 반라(半裸)의 이 프레스코(Fresco)화는 그 아름다운 색채와 관능미(官能美)로 지금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프레스코화>는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회반죽은 수산화칼슘 성분이 있는 석회암을 가루로 만든 뒤 1,300℃ 정도로 구운 다음 물을 넣어 만든다. 회반죽이 굳어 버리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한번 그리면 수정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기법 중 하나가 프레스코화 기법이라고 한다.
산 중턱 절벽에 그려진 시기리야의 미녀 / 정상의 성채 유적 / 사자발 입구
이곳을 지나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 올라가면 바위산 중턱쯤으로 제법 넓고 평평한 공간이 나타나고 나무들도 자라고 있어서 쉴 수 있다. 이곳에서 고개를 젖히고 쳐다보면 다시 까마득히 철 계단을 지그재그로 올라 정상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왕은 이곳에 다시 바위산을 오르는 돌계단을 파고 그 입구에 입을 벌린 어마어마하게 큰 사자를 설치해 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머리와 몸통은 없어지고 발(獅子足)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사자의 두 발 사이를 지나 사자 몸통 속을 통과한 후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는 구조이다.
사자는 불교를 수호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상징성이 있다고 하는데 카샤파 1세는 이곳에 사자를 세워 지키게 함으로써 암살의 두려움을 털어내고자 했던 모양이다. 사자발 문 앞에서 바라보면 계단은 마치 사자 목 줄기를 따라 머리 위로 오르는 형상이다.
산의 정상은 평평하고 제법 넓은데 당시의 왕궁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바닥의 주춧돌들과 축대만 보인다. 그리고 탁 트인 사방으로는 푸른 밀림이 뒤덮인 넓은 벌판과 악어가 우글거린다는 호수(늪지)들이 한눈에 펼쳐져 보이며 기분이 상쾌해 진다. 이 시기리야 성채의 또 하나의 신비는 바위산 정상에 있는 ‘물의 정원(Water Garden)’이다. 바위산 꼭대기 왕궁터의 조금 낮은 곳에 정교하게 조성된 물의 정원이 있는데 넓이는 대략 사방 10m 정도의 야외 풀장모양으로 맑고 푸른 물이 그득하여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샘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빗물이 고였다면 썩거나 더러울 텐데 나도 손을 씻어 봤지만 너무나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 물의 정원에서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서너 군데 남아 있었는데 바위벽을 쪼아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설계된 계단이 귀엽고도 놀라웠고, 궁녀들이 이 물의 정원에 내려와 희희낙락하며 물놀이를 즐기다가 낮은 돌계단을 올라 왕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인도 아잔타(Ajanta) 석굴사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성채는 고대 세계 8대 경이(驚異:8th Wonder of the Ancient World) 중 하나로 꼽히며 유럽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 중 첫 번째로 꼽은 곳이라고 한다.
<나는 2011. 4월 스리랑카를 2주 동안 샅샅이 둘러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