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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어지는 신앙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로마 3:2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4).”
인간은 사연을 달고 살며 사연만큼이나 고통까지 달고 삽니다. 사연과 고통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마디마다고통의 정도에 따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살 방향과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시각이 변하면 그간 보았던 탑이 무너지고 새로운 탑이 보이게 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익숙한 세상 법으로 보다가 믿음이라는 신뢰하는 것으로 보니까 사람부터 다르게 보입니다. 사회 부적응자로 보였던 예수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로 제 가슴에 모시게 됩니다. 성당마다 예수 그리스도상이 모시게 되고, 제단 위의 고상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이 제단에 담겨 있습니다. 제단 위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세상 삶에 치이고 다쳐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성당에 들어오는 우리를 가엾게 바라보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상처입고 따돌림당하고 포기한 인생에게 제단과 고상 십자가와 그리스도 예수상이 선하고 활기차고 기쁨으로 살게 만들어 줍니다. 은총의 큰 빛으로 비쳐주시어 빛을 잃어버린 얼굴을 영광스러운 빛의 얼굴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손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오직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빛만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있으라!” 하시는 말씀에 따라 거저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기에 온몸을 땅바닥에 엎드리옵니다. “하느님의 대가없는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은총 덕분에 인간적인 수단인 하느님의 교회를 우리의 힘이 미치는 곳에 두셨습니다(시몬느 베이유의 “신을 기다리며”에서).” 하느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천상의 맛을 보며 살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올라야 우리의 입술에서 영가가 흘러나오고 말씀 전도가 크게 펼쳐질 것입니다. 교구의 평신도 교육원에서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운동과 복음전도의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종신부제로 인하여 새로운 선교운동이 사제들과 함께 불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내 삶을 바꿔놓으신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좋은 소식인 복음이 세상에 바로 지금 퍼질 것입니다. “우리 야훼의 집에 심어진 자들아, 하느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리라(시편 92:13).” 성령은 우리를 영원히 사는 길로 이끌어 하느님의 집인 성교회에 하느님의 나무들로 우거질 것입니다.
풍세 용머리 앞 논에 모를 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오래된 기억 속에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에서 노동일을 해서 번 돈으로 용머리 앞 논을 사서 둘째의 몫으로 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이 땅을 기억하라고 모를 심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모를 심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대개 12살이 되어야 논에 모심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저는 그 절반의 나이에 논에 모심는 모습을 자세하게 본 것입니다. 그해 겨울에 큰집에 불이 나 모든 것들이 탔고 할머니는 예수에 빠졌습니다. 남관리의 길가의 땅을 바쳐 새벽별 교회를 세우신 할머니를 따라 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모심는 방법을 주셨고 할머니는 예수를 주셨습니다.
천안 남관리의 새벽별교회는 할머니의 가슴으로 땅을 바치고 할머니의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로 지어진 교회입니다. 할머니의 신앙이 큰어머니의 신앙으로 이어지고 큰어머니의 신앙이 어머니 신앙으로 이어지고 그 신앙유산이 제게 이어지고 제 신앙이 딸인 보리테레사에게 이어지고 필립과 테레사의 신앙이 손녀들인 밤에스터와 새벽베로니카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리테레사는 자신의 일상사를 하느님께 이야기를 나누는 기도의 신앙생활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는 딸 보리테레사가 출근할 때 뉴스방송을 듣지 않고 입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면서 출근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주신 자비심 덕분에 신앙이 막힘없이 후손에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막힘없이 살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힘을 받아야만 막힘없이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말씀을 새기고, 말씀을 따라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면 죄가 씻겨지기에 순결한 신앙생활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성가정은 식구들이 모여 식사 때의 기도를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배고플 때의 기억을 하게 하고 성가정을 배고프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감사기도를 바치게 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식사의 기도시간입니다. 동시에 성령께서 식구들의 하루 일과를 주관하셔서 식구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게 됩니다. 제 할머니는 모든 식구를 모아놓고 밥을 잡수시기 직전에 정성을 다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식구와 한민족을 위하여 길게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만나를 주소서. 만나 없이는 이 거친 광야에서 앞으로 가려는 자도 뒷걸음을 치게 됩니다(단테의 “신곡중” 11곡 13-15절).”
천안서 공주로 가려면 차령 고개를 넘습니다. 차령을 넘으실 때의 발자국 걸음마다 가슴 저미며 오르셨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울컥거리곤 합니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할아버지는 손자인 저를 데리고 모심는 것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손자인 제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아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마음에 이미 떠난 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죄송해요. 사랑해요.”라고 하면서 이어서 “아들아, 정말로 미안하구나, 사랑한다.”고 산소 앞에서 외칩니다. 제가 무지해서, 제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뛰어나고 싶은 욕망에 온 신경이 쏠려 있을 때 제가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꼭 잡는다고 해서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고 문제가 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오직 예수를 붙잡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가는 길에 신당중앙교회가 있기에 등하교 때마다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곤 했습니다. 그때 만난 김지철 전도사와 밀알 기수를 통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의 길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대학교에서 대학생성경읽기 모임 UBF에 가입해서 임제임스(네덜란드 주재)를 만나 독하게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자취방 방 친구 김광섭을 통해 성서침례교회에서 성경공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진리에 대한 강한 외투를 입은 이후에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도 주일성수는 필수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 덕에 군대에서도 중대군종병으로 한밤중에 보초서는 동료병사들에게 보리차와 커피를 날라다 주고 기도하는 삶이 기뻤습니다. 이후 공장활동에서도 주일성수는 필수적인 삶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을 꼭 붙잡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저를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셨다고 믿고 산 것입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어떤 기간 동안 학교교정에서 교정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매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경찰들이 교정에 많이 들어와서 학생회의 간부들을 감시하던 때였습니다. 도서관 앞과 학생회관 앞에서 연일 시위를 열었고 그 속에서 늘 연설을 하였기 때문에 교정 밖으로 나갈 때에는 경찰에 잡힐까 봐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앞에 세 명, 곁에 한 명, 뒤에 한 명의 동료학생들이 제게 붙어 저를 안전하게 교정 밖의 안전처로 데려 주었습니다. 얼굴만 보았지 이름도 모르는 동료 학생들이 학생운동의 간부라는 이유로 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고 이름도 모르고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보호하려는 동료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악마들이 나를 올가미에 잡아넣으려고 할 때 천사들이 저를 호위하여 안전처에 데려다주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느님은 제게 학생운동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 경험하게 하신 듯합니다.
큰길로는 다니면 눈에 띄일 수 있으니 큰길의 뒷길로 다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다녔습니다. 악마에 잡히지 않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잠행하는 사람은 뒷길로 다녀야 한다고 독립운동하는 일제하 선조들의 활동규칙을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뒷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볼 수 있고 삶의 솔직함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하면서 만나야 긴장없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을 이 때 배우게 됩니다. 알만한 사람만 알면 됐지 모두가 알지 않아도 될 일을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때 배우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것도 결국 악마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탈 때에는 가장 늦게 타고 내릴 때에도 가장 늦게 내린다는 원칙을 지녔습니다. 내 뒤에 누군가가 붙어 있는지 미행자를 늘 확인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행자를 따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미행자로 인해 잡힌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후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을 챙기는 습관이 되어 환대의 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종”을 세우기 위해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하느님께서 하도록 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명을 부르지 않고 가명을 사용했고 특히 전화가 도청되어 전화할 때에는 늘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가락’이라고 했고 다른 친구는 ‘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일하는 것을 익혀 교만하지 않는 것이 잡히지 않는 비결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제생활에서 교만하지 않는 기반이 되었다고 봅니다. ‘병원’은 지금 대전의 유명한 내과의사로, ‘가락’은 뉴욕과 런던에서 해금연주를 하며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곳곳에서의 경험을 하느님의 도구로 선용하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됐습니다. 여러 경험을 통하여 세상의 색깔을 사라지게 하시고 하느님의 색깔로 입혀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바칩니다. Deo Gratias!”
전통적인 기도를 익히게 된 곳은 성공회 대전주교좌성당입니다. 여기서 대도代禱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세계라는 음간(성공회에서는 음간이라고 하고 가톨릭에서는 연옥이라 함)의 영혼들이 이승에 남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이승에 남은 사람들은 음간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칩니다. 진리의 말씀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작품이 인간의 삶이라면 사랑의 역사가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유산이란 말이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알고 싶었습니다. 성공회의 조만도의 기도 전통에 들어가니 사랑의 보물창고를 본 듯 너무 기뻤습니다. 세상의 최고 보물들이 성공회의 조만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고 홀로 있을 때 춤을 추며 조만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보석이나 금붙이들은 안중에도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여, 세상의 최고 보물이 여기에 있소. 어서 이 보물들을 가져가시오. 보물이 성공회 조만도요.”
작고 하얀씨 같고 벌꿀로 만든 과자맛이 나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인 것을 만나 Manna 라고 불렀고,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너희를 이끌어낼 때에 광야에서 먹여 살린 양식인 만나를 증거판 앞인 야훼 앞에 보관하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출애16:13-36). 각자의 인생을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예를 바치고자 하느님이 돌에 새긴 증거판인 십계명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이 성당입니다. 증거판 앞에 만나를 보관하게 하였고 지금은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인 성체를 모셔둡니다. 성체를 먹는 영성체領聖體(성체를 받아모심)의 모습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최고의 기도 자세임을 성공회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성체하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좋았고 기뻤기에 성공회가 참교회임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예배의 최고 절정이 영성체를 기다리는 그 시간입니다.
종도신경宗徒信經에는 “음간에 내리사”로 되었고 지금의 사도신경使徒信經에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로 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혼이 늘 우리 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들 제레미가 할아버지와 함께 저희 식구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를 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승에 남아 있는 우리는 돌아가신 영혼들이 빨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대도代禱(개신교에서는 중보기도中保祈禱라고 부릅니다)를 바치고 행동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별세기일과 설과 추석명절에 대도를 바칠 때 별세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부르는 사제의 소리로 돌아가신 영혼이 다시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시간이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시간이 되어 모두가 고개를 숙여 별세하신 영혼이 하느님의 품에 안기길 바라며 순결한 마음으로 깊게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정말로 죄송해요.” 아들의 마지막 글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 좋은 면도기를 사주세요.” 면도기를 사용하다가 늘 턱 밑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좋은 면도기를 사주라고 엄마에게 부탁하는 글이 마지막 떠나면서 쓴 아들의 글입니다. 이런 아들의 속도 모르고 자신의 잣대로만 고집하고 일만 하며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며 산 아버지입니다. 절약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계몽주의적인 사고가 절약하는 삶을 살게 했지만 사랑으로 살게 하기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있을 때 잘하고, 있을 때 잘 섬기고, 있을 때 잘 존중하는, 사랑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이제야 돼 갑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모르나 성당의 제단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당의 제단 아래에 자주 가곤 합니다. 아들을 보내고 이후 감사성찬례를 바칠 때에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보곤 합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면, 연옥에서 벌 받는 기간이 단축된다고 하여 더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특히 훌륭하고 착한 사람의 기도일수록 더 많이 단축된다고 하여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면 이미 경건했어야 하는 것을 할머니 신앙으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하느님의 우리 집안을 건져주시려는 은총이었습니다. 경건함으로 하느님께 엎드려 사는 것이 신심의 핵심입니다.
“그대들의 명성은 왔다가는 풀잎의 빛깔과 같으니, 풀이 땅에서 힘겹게 돋아나게 하는 태양이 색깔을 바꾸지요(단테의 신곡에서 11곡 중 115-117절).”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의 색깔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제 인생의 색깔을 아름답게 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색을 밝음의 색으로 우리들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신학교에서 동료들을 만났고 예수원에서 대천덕신부를 만났고 대성당에서 마가신부를 만났고 전주서 만난 청년이 강촌수도원의 스테반으로 만났고 성가수도원에서 카테리나수녀를 만났고 전주에서 도미닉과 레오를 만났고 광혜원에서 베드로회장을 만났고 나눔의집에서는 레오나르도와 암브로스를 만났고 유성에서 토마스를 만났고 나눔의집에서는 다니엘과 콜만 동료들을 만났고 영성센터에서는 요나단신부와 프란시스주교를 만났고 주교로 선배 사무엘신부를 만났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보내 주신 탁월하시고 훌륭하신 분들을 통해 제게 힘을 주어 후배들과 신도들에게 하느님의 힘을 전달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진 역할로 신앙전통의 그림을 일차적으로 그렸고 이제는 후배세대들의 신앙의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와 힘과 권위가 후배세대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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