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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집트의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神殿)
이전(移轉) 후(後)의 아부심벨 / 이전(移轉) 모습 / 아부심벨의 벽면 부조 / 사랑과 미의 여신 하토르
고대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Ramses Ⅱ)가 건설한 기념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집트 상부지역 아스완(Aswan)에서 320km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은 정면이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닮은 네 개의 거대한 석상(石像)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각상은 높이가 20m,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m, 입술의 폭이 1m에 달하며 정면을 지지해주는 기둥들의 높이는 31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이다.
뿐만 아니라 람세스의 다리 옆에 서 있는 작은 석상들은 파라오의 가까운 가족들인데 왕비인 네페르타리(Nefertari), 람세스의 어머니, 세 딸, 두 아들을 묘사한 석상도 있다.
BC 1300년 경에 만들어진 아부심벨 신전은 1812년 스위스의 탐험가인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보고되었고, 1837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조반니 벨초니(Giovanni Battista Belzoni)에 의하여 신전(神殿)을 덮고 있던 모래와 자갈이 제거되면서 대 신전 정면의 거상이 비로소 위용을 드러냈다고 한다. 1960년대 초, 이집트 정부에서 근처에 아스완댐을 건설하면서 저수지가 생겨 아부심벨 유적이 수몰(水沒) 당할 위험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주관하여 이 유적을 보호할 방안을 강구했다.
1964~66년,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기사(技士),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국제팀과 노동자들이 절벽 꼭대기를 파서 2개의 신전을 완전히 들어내 강바닥에서 60m 높은 지점에 복구했다고 한다.
이 신전 자체는 태양신인 아몬 레(Amon Re)와 라 호라흐티(Ra-Horakhty)에게 바쳐진 신전이라고 한다.
이 신전은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고들어가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여러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1년에 어느 특정한 며칠간은 아침 햇살이 신전 전체를 꿰뚫으며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 제단까지 비치도록 지어졌다. 주신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에는 창공의 여신,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숭상되던 하토르(Hathor)를 경배하기 위하여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하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彫像)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신전 남쪽에 있는 또 다른 1쌍의 좌상(坐像)에는 낙서들이 새겨져 있는데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새긴 것으로 초기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고 한다.
22. 그리스 델포이(Delphoe/Delphi)의 아폴론(Apollon) 신전(神殿)
델포이 유적 / 아폴론 신전 / 아라호바 마을 / 표시석 옴파로스
그리스 중부의 파르나소스 산(Parnassos, 해발 2,457m)의 남쪽 기슭에 있는 고대 유적 델포이(Delphoe/ Delphi)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론(Apollon) 신전과 원형경기장, 델포이 신탁 등의 유적들이 산재(散在)해 있는 곳이다. 최초의 신전은 BC 650년경에 건립되어 후에 소실되었다고 하며 BC 510년경에 세워진 두 번째 신전도 BC 4세기 초에 일어난 지진으로 불에 타서 붕괴되었고, 현존하는 유적은 BC 330년에 완성된 세 번째 석조 신전의 유적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 이 유적과 관련된 신화는 한도 끝도 없다.
파르나소스(Parnassos)산 기슭에 있는 아라호바(Arachova) 마을은 델포이 신전이 있는 해발 1,100m 지대에 형성된 산악지대 마을인데 우리나라의 인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마을로 유명하다.
17세기, 프랑스 작곡가 쿠프랭(Louis Couperin)은 당시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오르간 연주자, 하프시코드(Harpsichord/Cembalo)의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인데 ‘파르나소스산의 코렐리(Corelli) 찬가(讚歌)’라는 곡을 작곡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연주되는 유명한 곡이다. 이 곡은 예술의 신(神)인 아폴론이 산다는 파르나소스 산에 모셔져 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코렐리(Corelli)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악가 륄리(Lully)를 찬미하는 음악이다.
코렐리(Arcangelo Corelli)는 바로크 시대(16세기 말)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륄리(Jean-Baptiste Lully)는 17세기 프랑스의 궁중음악 및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던,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로 평가 되었다.
‘파르나소스산의 코렐리(Corelli) 찬가(讚歌)’는 콜렐리가 6부, 륄리가 9부로 편성되어 있는 곡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Jupiter)는 부인 헤라(Hera) 여신이 있었지만 항상 수많은 여신들을 건드렸고 헤라여신은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제우스를 감시했다.
마침내 다산의 여신 레토(Leto)가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자 헤라는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레토는 숨을 곳을 찾다가 델로스 섬에 숨는데 델로스는 월래 떠다니는 섬이었는데 레토가 아이를 편히 낳을 수 있도록 제우스가 고정시켜서 바위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레토는 긴 산고 끝에 쌍둥이를 낳는데 아폴론(Apollon/Apollo-태양이 신)과 아르테미스(Artemis/ Diana-사냥의 여신)이다. 아르테미스가 먼저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다시 산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도와서 쌍둥이 동생 아폴론을 낳는데 도왔다고 하여 해산(解産)의 여신으로도 일컬어진다.
레토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기슭에 사는데 산을 지배하던 뱀 신 피톤(Python)이 어머니를 괴롭히자 아폴론이 피톤을 죽여 산기슭에 묻는데 이곳이 바로 델포이 신전이 들어선 자리이다. 이 델포이 신전에는 제우스가 기도의 소원을 들어주는 제우스신탁(神託)이 설치되는데 이곳에서 빌면 제우스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하며, 바로 돌로 깎은 델포이 옴파로스(Omphalos)가 그것이다. 이 델포이의 옴파로스(Omphalos)는 대지의 배꼽 또는, 지구의 배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그 표지석 진품은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중이고 현지에는 모조석을 세워놓았다. 하나 덧붙인다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Venus)의 아들 개구쟁이 날개달린 소년 신 에로스(Eros/Cupid)는 아폴론을 골려주는데, 아폴론이 소년신인 에로스를 꾸짖자 이폴론의 가슴에는 사랑의 화살(황금 화살촉)을 쏘고 강(江)의 신의 딸인 요정(妖精/Nymph) 다프네(Dafne)의 가슴에는 미움의 화살(납 화살촉)을 쏜다.사랑의 불길에 휩싸인 아폴론이 다프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자 다프네는 꼴도 보기 싫다며 몸을 뺀다.
뒤돌아보며 도망치는 다프네를 넘어 질까봐 애를 태우고 천천히 도망가라며 아폴론이 쫓아가자 다프네는 ‘아~, 나는 당신 아폴론이 꼴도 보기 싫어요. 신이여 제발 나를 돌이나 나무가 되게 해 주세요...’
다프네의 발이 점차 무거워지며 자리에 멈추더니 발에서 뿌리가 내리고 머리와 팔은 점차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돋아나며 곧 나무로 변했다. 그 나무가 바로 월계수(月桂樹)이다.
아폴론은 너무나 애통하여 나무를 얼싸안고 울었다. 이 후, 아폴론은 월계수 나뭇가지를 둥글게 말아 머리에 두르고 다녔는데 바로 월계관(月桂冠)으로, 시인의 머리에 쓰거나 운동경기를 벌여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었는데 바로 올림픽의 시작이라고 한다.
23. 중국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Forbidden City)
자금성과 천안문 / 자금성 조감도(鳥瞰圖) / 기념사진(천안문 앞)
자금성(紫禁城)은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명·청(明淸) 시대의 궁궐로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으로 건설되어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던 황궁(皇宮)이다. 영락제(1403〜1424년)는 명나라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고, 1406년 자금성 건축을 시작하여 14년에 걸쳐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축조한 세계 최대의 궁전이다.
자금성(紫禁城)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궁전으로, 예전에는 800여 채의 건물과 9,999개의 방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8,886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1925년부터는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개관하여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 내가 방문했을 때 가이드는 방의 개수를, 사람이 태어나던 날부터 매일 방을 바꾸어 자면 27살이 되어야 모든 방에서 잘 수 있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365×27=9,855. 방의 개수 9,855개)
이곳은 명(明)나라 시대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부터 청(淸)나라 황제들까지 궁전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고궁(故宫)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925년부터는 박물관(故宮博物院)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어 명·청(明淸) 시대의 다양한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해마다 엄청난 해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자금성(紫禁城)이라는 명칭은 ‘자주색의 금지된 성(紫禁城)’이라는 의미인데 ‘자(紫)’는 황궁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금(禁)’은 금지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니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만큼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이겠다.
또, ‘자(紫)’는 천구(天球)의 북쪽을 가리키는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를 뜻하는데 옛날 중국 사람들은 천제(天帝)가 자미원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북극성을 포함한 별자리인 자미원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천제가 거주하는 하늘의 궁전을 ‘자궁(紫宮)’이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금성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궁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서 길이 약 753m, 남북 길이는 960m, 담장 길이는 약 4km에 이른다. 면적은 72만m² 정도(22만 평)로 800여 채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자금성은 좌우 대칭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직사각형 모양이며 10m 높이의 벽과 폭 52m, 깊이 6m의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는 성곽의 둘레를 감싸는 도랑을 말하는데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건널 수 있는 4개의 다리가 있으며 궁궐 주위는 높이 10m, 길이 4km의 담장(울타리)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서남북으로 4개의 큰 출입구가 있다. 자금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인데 일명 천안문(天安門)이라고도 불리는 문이다. 전체 모습이 주작(朱雀)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유사하다하여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불리는데 오문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황제가 사용했던 가운데 문은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건물은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인데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은 태화전으로 금란전(金棄殿)이라고도 불리며, 황제가 관료들을 만나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이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 바로 뒤에 있는 건물로 황제가 대신들을 만나던 공간이고 보화전(保和殿)은 황제의 도서관이자 각종 행사를 치르던 연회장이라고 한다.
내정(內庭)의 중심은 황제가 휴식하던 건청궁(乾清宫), 황후가 거쳐하던 교태전(交泰殿), 황후가 황제를 맞는 침소(寢所)인 곤녕궁(坤宁宫) 등이 있고, 황제와 황후만을 위한 정원인 어화원(御花園)도 있다.
교태전(交泰殿)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가 어린 시절 뛰놀던 곳인데 세 살에 황제에 오르지만 곧이어(3년 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황제 위를 박탈당하고 18세까지 이곳에서 연금생활을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에서 어린 푸이가 자전거를 타는데 문턱이 높아 가지 못하자 문턱을 깎아 낮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깎은 문턱을 발견하고 놀라던 기억도 있다.
천안문 앞에 있는 광장인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만 오천 명의 희생자를 낳았던 비극의 현장인데 광장 한쪽에는 마오저뚱(毛澤東) 기념관도 있다.
천안문사건은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던 시기로, 시민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민주화(民主化) 시위를 벌이자 덩샤오핑은 계엄군을 동원해 탱크와 장갑차로 무차별 발포를 했던 사건이다. 당시 피해자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 알 수 없지만 최소 200명에서 최대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곳에서 멋진 곳으로 자금성과 인접하여 북쪽에 있는 경산공원(景山公園)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언덕은 자금성의 해자(垓字)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 만든 인조산(人造山)에 조성한 공원이다.
경산공원에서 내려다보면 베이징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 자금성 적갈색 지붕의 찬란한 모습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내려다보인다. 베이징시(北京市)나 자금성(紫禁城)에서 보면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볼 때 불길한 기운(혹은 북쪽에서 오는 황사)으로부터 궁(宮)을 보호해 주는 역할도 한다고 했다.
24.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神殿)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파르테논 신전 / 니케 신전 / 제우스 신전 /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기념사진)
그리스의 수도(首都)는 아테네(Athene)로, 전쟁의 여신 아테나(Athena/Minerva)의 도시라는 의미인데 도시 가운데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언덕이 우뚝 솟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세워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은 기원전 5세기경 세운 신전(神殿)으로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은 아테나 여신은 ‘처녀의 여신’ 이라는 의미의 ‘아테나 파르테노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은 언덕 전체가 파르테논을 위시하여 니케(Nikis)신전, 디오니소스(Dionysos/Bacchus-술의 신) 신전과 극장, 바람의 궁전 등이 들어서 있는 신성한 지역인데 언덕아래 쪽의 바람의 궁전, 디오니소스 극장 등은 일반인 출입이 가능했지만 윗부분의 신전은 황제와 신관(神官)들 만이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니케(Nikis)는 그리스어로 ‘승리’를 의미하므로 ‘승리의 여신’으로, 아테나(Athena)는 ‘지혜의 여신’이라는 의미인데 두 의미를 합성하여 아테나여신을 ‘아테나 니케(Athena Nike)’라는 이름으로도 숭배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여신상이 떠받치고 있는 니케신전도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언덕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제우스(Zeus) 신전은 어마어마한 석주들이 서 있는데 위 사진에서 뒤쪽으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바라보인다. 제우스 신전은 넓은 공터에 거대한 승리의 문과 무너진 돌 더미, 열 댓 개의 돌기둥만이 쓸쓸이 서 있는데 제우스 신전의 서쪽 문 앞에는 ‘이 곳은 아테네, 테세우스(Theseus)의 옛 고을’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동쪽 문에는 ‘이곳은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고을, 이미 테세우스의 고을이 아니다’라고 새겨져 있어 신화와 역사의 아이러니가 읽혀진다. 테세우스(Theseus)는 신화 속의 영웅,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로마제국 14대 황제이다.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는 소크라테스 감옥도 있다.
신화속의 영웅 테세우스의 이야기는 너무나 재미있고 다양해서 어린 시절 푹 빠져들던 기억이 있는데 생략하고, 아테네에서 버스로 두 시간 남짓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계에서 물빛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수니온(Sounion)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졌는데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그 위에 거대한 포세이돈(Poseidon-바다의 신) 신전의 돌기둥들이 2천여 년 동안이나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우뚝 서 있다.
포세이돈 신전 / 전쟁의 신 아테나 / 영웅 페르세우스 / 괴물 메두사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절세의 미인이었다는 고르곤의 세 자매(Gorgones) 중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특히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막내 메두사(Medusa)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꾐에 빠져 정사(情事)를 하게 되어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괴물로 바뀌게 된다.
머리카락은 뱀으로, 몸은 흉측한 괴물로 변하여 세 자매가 모두 서쪽 끝 망자(亡者)의 섬으로 추방되고, 영웅 페르세우스(Perseus)에 의하여 머리가 잘려 아테나 여신의 방패에 걸리고...
그 흉측스런 모습을 보는 사람은 모두 돌이 되고, 그 잘린 머리에서 떨어진 핏방울들은 전갈이 되고....
25. 이스라엘의 예루살렘(Jerusalem) 성전과 통곡의 벽(Wailing Wall)
예루살렘 성전 터 / 통곡의 벽 / 예루살렘 시내 모습
예루살렘 성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이 아들 이삭(Isaac)을 제물로 바칠 제단을 쌓았던 곳이라고 하는데 BC 957년 지혜의 왕 솔로몬(Solomon)이 이곳에 성전이 건축하는데 바로 예루살렘 제1성전으로 계약궤(契約櫃-Ark of the Covenant)를 안치하였고, 백성 전체가 모이는 장소였다고 한다.
계약궤는 모세가 구약시대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2개로 된 십계명 돌 판을 보관했던 나무상자를 말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전은 이웃나라였던 바빌로니아(Babylonia)의 느부갓네살(Nebukadnessar) 2세가 쳐들어와서 BC 604년과 BC 597년에 성전 보물들을 노략질해갔고, BC 586년에는 성전을 파괴해버렸다.
성전이 파괴되고 BC 586년과 BC 582년에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지금도 합창곡으로 너무나 유명한 베르디(Verdi)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그것이다.
나부코(Nabucco)는 이태리어로 느부갓네살(Nebukadnessar)을 줄여서 발음하는 것이라고....
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그 노랫말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아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 계약의 궤 / <영화포스터>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이후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키루스(Cyrus) 2세는 BC 538년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고 성전 재건 작업은 BC 515년에 끝났다고 한다.
이후, BC 20년 유대의 왕 헤로데(Herod)가 제2성전을 세웠는데 이미 계약의 궤는 사라진 후였고 그 이후 영원히 찾지 못했지만 이곳은 이스라엘 민족생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고 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1981)’가 기억에 생생하다.
사람들은 사라진 성궤를 찾으려고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하지만 끝끝내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고대 유대인들이 대단히 거룩하게 여긴 곳이었는데 AD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제2성전도 파괴되고 벽만 남아있는데 이곳이 통곡(痛哭)의 벽이다.
결국 유대가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터전을 잃은 유대인들이 유적으로 남은 이 벽에 모여 통곡을 하였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벽은 이슬람의 바위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관할권을 놓고 오랫동안 투쟁해왔으나 1967년,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이 벌인 제3차 전쟁이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가 ‘6일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때 이스라엘이 옛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곳에 대한 관할권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무슬림/기독교인/유대인/아르메니아인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26.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의 성지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
카바(Kaaba) 신전(메카) / 쿠바사원(메디나) / 예언자의 사원(메디나)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헤자즈(Hejaz) 지방에 있는 이슬람교 제2의 성지인 메디나의 하람(Haram)에는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다. 메디나는 메카(Mecca) 북쪽으로 401km, 홍해에서 내륙으로 136km 들어간 비옥한 오아시스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도는 해발 625m로 헤자즈 산맥의 건조한 구릉지대(丘陵地帶)이다.
세계 4대 종교 중의 하나로 꼽는 이슬람교(回敎)는 AD 610년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 일명 모하메트(Mohamet)에 의하여 창시되는데 전지전능의 유일신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 천사 가브리엘(Gabriel)에 의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고, 이것을 기록한 것이 코란(Koran)이며 모든 종교의 완성체라고 주장한다.
무함마드(Muhammad/Mohamet)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메카(Mecca)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7세에 어머니가 죽자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는데 25세에 부호(富豪)의 미망인 하디자(Khadijah)와 혼인하여 한때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隊商)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40세에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은 뒤 자신이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알라의 계시를 받아 적었다는 코란을 앞세워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포교활동 초기, 고향 메카에서 냉대와 박해에 시달리자 AD 622년, 400km 북쪽의 메디나(Medina)로 옮겨 교세를 확장한다. 이슬람에서는 메디나로 옮긴 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 부르고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는다.
메디나는 이슬람교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슬람교도의 성지인데 이곳에는 이슬람사원인 쿠바 사원, 투키블라스(Two Qiblahs) 사원 및 그 밖에 마호메트와 관련된 곳곳에 기념사원이 있는데 무엇보다 마호메트가 직접 건립한 예언자의 모스크(Prophet's Mosque)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마호메트는 모든 사원에 설치한 기도의 제단 방향을 메카(Mecca)로 향하도록 지시했으며, 사원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 올리는 기도도 반드시 메카 방향으로 올리도록 하였다.
이슬람 최대의 성지는 무함마드의 출생지 메카(Mecca)의 카바(Kaaba) 신전인데 하지(Hajj) 순례기간이 오면 전 세계 무슬림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는 한다. 카바 신전에 들어오면 정방형의 거대한 규브(Cube) 모퉁이에 있는 검은 돌(Black Stone)에 입을 맞춘 후 시계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4바퀴,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3바퀴, 총 7바퀴를 돌아야 되는데 횟수를 빼먹거나 제대로 못하면 순례 자체가 무효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순례자들이 항상 구름처럼 모여드는 까닭에 매년 압사사고가 발생하는데 2015년에는 2,400명이 깔려죽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올리는데 이슬람 사원마다 있는 탑(Minaret) 위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Adhān) 소리가 들리면 손발을 씻고 메카방향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는데 일출전(파즈르), 정오(주흐루), 오후(아스르), 일몰(마그립), 밤(이샤)의 다섯 번이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있는 카라위인(Qaraouiyne) 사원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22,000명 예배), 세계 최초의 대학(859년 설립/천문학)을 설립한 회교사원으로 유명하다.
카라위인 대학은 천문학을 연구하는 대학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연구 목적은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해가 뜨지 않는 궂은 날씨에도 이슬람 기도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의 성지 메카(Mecca)의 사원(Mosque)만 미나레트(Minaret)가 9개이고 다른 사원들은 그 이하인데 미나레트의 수는 모스크(사원)의 규모와 권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27. 중국(中國) 난징(南京)의 영곡탑(靈谷塔)
영곡사(靈谷寺)와 영곡탑 / 영곡사 그림(1721년) / 재건한 영곡탑 / 문짝의 문양
15세기, 명(明)나라 영락제 때 중국 난징(南京)에 대보은사라는 절이 있었고 영곡탑(靈谷塔)이 지어졌다.
탑은 팔각형으로 직경은 약 30m, 높이는 9층으로 79m의 높이를 자랑하였으며 당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건축물 들 중 하나였다고 하고, 내부는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백색 벽돌로 쌓은 탑은 낮에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고 밤에는 140개가 넘는 풍등(風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벽돌을 만들 때 다양한 색의 유리가루와 돌가루들을 섞어 아름다운 색조로 탑의 외벽을 만들고 그 표면에 동물, 꽃과 같은 무늬들을 그려 넣은 것은 물론, 수많은 불화(佛畵)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영곡탑(靈谷塔)의 수난은 1801년 낙뢰(落雷)로 4층이 불났고, 1850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반란군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2010년), 한 중국 자선사업가가 시에 영곡탑을 복원하기 위해 1억 5600만 달러를 기부하여 완벽하게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개인이 낸 기부금 중 가장 많은 액수로 2015년에 복원이 완료되어 영곡탑과 그 주변 일대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영곡탑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건축물이라고 핏대를 올린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정도의 수준일까? ㅎ
28. 중국 문화의 꽃 경극(京劇)
경극(京劇) / 변검(變瞼-川劇) / 월극(越劇) / 패왕별희(覇王別姬)
중국의 전통 연극으로 베이징(北京)의 경극(京劇),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苏州)의 곤극(昆劇), 쓰촨성(四川省)의 천극(川劇/川剧), 저장성(浙江省)의 월극(越劇)이 있는데 중국 4대극(四大劇)이라고 한다. 중국 고대사(주로 삼국지)를 주제로 하는 중국의 연극들 중 가장 알려진 것이 북경(北京)의 경극(京劇)인데 이 경극은 그 뿌리가 세계구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쑤저우(蘇州)의 곤극(昆劇)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경극(京劇-Peking Opera)은 중국의 오페라라고도 불리는 대표적 연극으로, 장강(揚子江) 연안 지역에서 시작되어 베이징에서 완성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경극(京劇)은 중국의 전통적인 음악이 흐르면 춤, 서커스, 무술 등을 선보이는데 특히 노래, 연기, 대사 3요소에 춤이 삽입되며 중국예술의 꽃으로 불린다.
이 경극의 특징은 화려한 복장과 가면,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북과 악기들의 연주, 높고 괴상한 창법의 노래 등으로, 신기하게도 관객들의 심금(心琴)을 울린다.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곤산(昆山)에서 시작된 곤극(昆劇)은 ‘중국 희곡(戱曲)의 시초’, ‘중국 희곡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다른 지방의 전통극(傳統劇)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쓰촨성(四川省)의 천극(川劇)은 화려한 가면을 쓰고나온 변검술사(變瞼術士)는 손도대지 않고 순식간에 가면(假面)을 바꾸는 기술이 특징이고 더불어 신기한 마술(魔術)도 함께 덧붙인다.
저장성(浙江省)의 월극(越劇)은 다른 연극에 비해 전통은 짧지만 특징으로 서정성(抒情性)이 높은 것이라고 한다. 주로 여자들이 부르는 오페라 형식으로, 중국 역사의 장면들을 노래하는 형식이다.
경극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우희(虞姫-虞美人), 제갈공명(諸葛孔明),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조(曹操) 등 중국 역사를 수놓은 역사적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작품이 주류이다.
경극은 4대 행당(四大行當)이라고 불리는 배우들이 주축이 되는데 전통적으로 하나의 배역을 맡으면 평생 그 역을 담당한다고 한다. 남자 역할을 하는 생(生), 여자 역할을 하는 단(旦), 군인, 무뢰배, 정치가, 신(神) 역할을 하는 정(淨), 우스갯소리를 하며 공연에 활기를 불어넣는 어릿광대 역할을 하는 축(丑)이다.
인물의 성격이나 선악(善惡) 여부는 배우들의 분장을 통해 알 수 있다.
경극 중 패왕별희(覇王別姬)가 유명한데 진나라 말기 천하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룬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 그리고 항우의 애첩인 우희(虞姫)를 소재로 한 연극인데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작품이다.
이 패왕별희(覇王別姬)를 1993년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이 영화화하였는데 제46회 깐느(Cannes)영화제에 출품하여 황금종려상 수상, 1994년에는 골든글러브 외국영화상, 아카데미 촬영상 노미네이트 등 큰 인기를 끌었다.
29. 인류역사의 비극 십자군 전쟁(Crusades)
십자군(Crusade) 전쟁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Jerusalem)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聖墓)을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기독교 군대의 전쟁을 말하는데 총 8차에 걸친 전쟁이 기록되어 있지만 작은 전쟁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제1차 십자군 전쟁> 3년 간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Comnenus)는 유럽 여러 나라, 특히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는 알렉시오스를 도와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탈환하고자 그리스도 교도(敎徒)의 군대를 소집했다. 제1차 십자군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지역의 민중, 기사, 귀족들로 구성되었는데 1099년 7월 15일에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 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한다.
<제2차 십자군 전쟁> 5년 간
제2차 십자군(1145-1149)은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Syria) 북부를 빼앗고 1144년에 에데사(Edessa) 백작령의 땅을 점령해 라틴(Latin) 제국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될 위험에 빠지자 유럽에 큰 충격을 주어 되찾기 위해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십자군은 모두 실패했고, 이슬람세력은 통합되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제3차 십자군 전쟁> 3년 간
제3차 십자군 전쟁(1189-1192)은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시조(始祖)이자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딘(Saladin)이 정복한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기독교 십자군의 전쟁이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영국과 프랑스에 십자군 동원을 요청하자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Henry II)와 존엄왕(Auguste)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pe II)가 이에 호응하여 군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1192년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살라딘(Saladin)의 대군에 밀려 철수했고, 야파(Jaffa)를 탈환하려던 살라딘도 리처드에게 패배하여 전쟁의 피로감에 지친 리처드와 살라딘은 야파(Jaffa) 조약을 맺고 휴전하였다니 결국 실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야파는 현 이스라엘 텔아비브(Tel Aviv) 지역이다.
<제4차 십자군 전쟁> 3년 간
제4차 십자군 전쟁(1202년~1204년)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의 촉구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의 본거지로 여겨지는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한 기독교의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신앙적 동기보다는 세속적, 경제적 목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원정을 가던 중 갑자기 이슬람 본거지 이집트가 아닌 동로마 제국으로 목표가 바뀌었다고 한다.
이 원정계획은 플랑드르(Flandre), 발루아(Valois), 신성로마제국 및 베네치아(Venezia) 공화국이 주축이었는데 1204년 갑자기 이집트가 아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이 도시를 유린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신교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제5차 십자군 전쟁> 3년 간
제5차 십자군 전쟁(1227~1229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헝가리 왕의 지휘 아래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로 가서 다미에타(Damietta-나일 삼각주에 있는 두미아트의 州都)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이슬람의 제안을 거절하고, 카이로로 진격하다 실패하였다고 한다.
<제6차 십자군 전쟁> 7년 간
제6차 십자군 전쟁(1248~1254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에 의해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1229년 예루살렘을 양보 받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으니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 실패일까.....
<제7차 십자군 전쟁> 3년 간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IX)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과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엄청난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는데 루이 9세는 추락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서서 튀니지(Tunisia)를 정복하고 시리아(Syria)까지 진출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국 제7차 원정도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제8차 십자군 전쟁>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들의 거센 항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도시 아크레(Acre)가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원정(遠征)이 있어 10차까지 기록된 것도 있으니 중세 200년간은 오로지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린 시기였다고 할 수 있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분쟁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엄청난 문화재의 파괴도 많았던, 어찌 보면 암흑(暗黑)의 시기였다고도 평가된다.
30.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Saladin)과 템플 기사단
<위대한 이슬람 지도자 술탄 살라딘(1138~1193)>
이 시기, 이슬람의 술탄(Sultan) 살라딘(Saladin)은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관용정신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예루살렘에는 약 1만 5000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어 포로가 되었는데 항복하고 몸값을 내면 풀어 주었고 가난한 이들이나 노인들에게는 몸값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병사들이 기독교인을 학살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다고 한다.
서양 문학 작품에서는 살라딘을 인자한 인물로 그리기도 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Alighieri Dante)는 1300년대 초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집필한 대 서사시(敍事詩)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에서 살라딘을 대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플라톤(Plato)과 함께 고결한 이교도(異敎徒)로 묘사하였다.
<템플 기사단(Knights of Templars)>
십자군 전쟁에서 템플(성전)기사단을 빠뜨릴 수 없는데 템플기사단은 원래 1118년에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파양(Hugues de Payens)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성한 종교 기사단이라고 하는데 훗날 십자군의 주력 부대로 활약하기도 했다.
가난한 수도사(修道師)들로 시작하였던 기사단은 여러 곳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막대한 부를 쌓게 되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마침내 종교계의 금융계를 휘어잡는 요즘으로 말하면 대기업이 되고 마침내...
기독교 각 교단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고 마침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Philippe IV)가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자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 기사단을 몰아붙이고 교황을 부추겨서 기사단을 해단하도록 하는 등 템플기사단은 곤궁에 처해지게 된다.
결국 교활한 필리프의 농간으로 성전기사단 기사들은 감옥에 갇히고 1314년에는 파리 시내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하고....
성전(템플) 기사단 / 화형 준비 / 템플기사 화형 모습 / 술탄 살라딘
성전기사단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해산하게 만든 클레멘트(Clement) 교황은 이번엔 필리프로부터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그 충격으로 한 달 뒤 죽었는데 죽으면서 필리프 왕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필리프도 사냥을 나갔다가 야생 멧돼지의 공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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