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4 月/ 연중 제 12주간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대축일 미사.
① 이사 49,1-6 ② 사도 13,22-26
㉥ 루카 1,57-66.80
* 오늘의 성인('24.06.24)
바르톨로메오 은수자 남, 알레나 동정/순교 여, 알리베르토 순교자 남, 요한 세레자 남, 이반 은수자 남, 파우스트 순교자 남, 헨리코 증거자 남.
ㅡㅡTㅡ묵 상ㅡTㅡㅡ
♧ 연중 제 12주간 월요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진짜 헛수고는? ♧
ㅁ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4)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한국관구//
서울오류동공동체/서울신사동수도원분원//
평의원/여기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국가영적보조/재속프란치스코회 위원장"
(ofs/정릉 아타나시오 韓 옮김)
ㅡㅡTㅡ복 음ㅡTㅡㅡ
◈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적독서 후에 잠시 묵상합니다>
<묵상 후 사도신경을 바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