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자꾸 삼천포로.. 쿨럭...
여튼 공주고는 봉황기와 황금사자기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봉황기는 안희봉의 대전고가 차지했구요. 안희봉 선수는 불의의 교통사고 이후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도 4번타자까지 해내며 팀에 우승을 안깁니다. 황금사자기에서는 대통령배 우승팀이던 충암고와 1회전에서 다시 붙어 졌고, 충암고가 결국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합니다. 공주고는 마지막 한번 남은 전국체전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공주고의 전력은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져서 빙그레 2군 선수들과 연습경기도 했고, 대학야구 봄철리그와 가을리그를 하러 서울로 올라가던 지방대학팀들이 공주에 머물면서 공주고와 연습경기를 한 후 올라가는게 일정코스가 되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특히 당시 박찬호 선수의 인기가 대학감독들 사이에서 상당히 높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때 공주고의 에이스가 손혁이었다는 등의 말씀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과연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공주고와 대학팀들과 붙었던 경기에서 박찬호와 손혁이 어떤 차이를 보였는지 눈으로 확인했다면 절대 그런 말 못할 거라 장담합니다. 박찬호 선수는 경성대학교 등과의 연습경기에서 상대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횟수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손혁 선수는 난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 당시의 모습만 봐도 당시 공주고의 에이스가 누구였는지는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분명한 건 손혁 선수가 못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 보자면92학번 가운데 전국레벨의 투수라면 강속구 투수로는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공주고 박찬호, 경남상고 곽재성이었고 상당한 수준의 선수라면 공도 빨랐지만 슬라이더가 예술이었던 경기고의 손경수, 작은 체격에도 두뇌피칭이 뛰어났던 경남상고의 차명주, 대전고의 정민철, 공주고의 손혁, 원주고의 안병원, 광주일고의 김봉영, 박주언, 인천고의 최원호 등이 2인자 대열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염종석 선수는 이 당시에 체격이 크고 유망한 선수이기는 했으나 적어도 염종석이 2학년이던 시절 부산고는 경남고에 밀려 전국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또한 공 위력만큼은 좋았던 선수로는 지금도 타자로 활동중인 광주일고의 박재홍, 배재고의 이정길이 있었는데 이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변화구 구사 능력이 좀 약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보낼 투수라면 당시 공주고로서는 신재웅과 박찬호였습니다. 다만 손혁은 비교적 안정된 제구력을 가지고 있었고 타자로서보다는 투수로서 기량이 좋았고, 박찬호, 신재웅은 투타 겸장의 선수였다는게 달랐죠. 손혁 선수가 지금껏 당시 공주고 에이스로 기억되는 것은 부모님이 부자고 아니고는 둘째치고, 겉으로 드러난 성적은 나무랄데가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전국대회에서 제가 기억하는 완봉승만도 두번이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상대팀들이 군산상고, 강릉고 등 당시로서는 그리 강팀이 아니었던 팀들이었고, 박찬호가 나섰던 경기는 대전고, 충암고 등의 강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어쨋든 공주고는 당시 2학년 가운데 박찬호, 홍원기, 오중석, 고경찬 등 청소년대표에 갖다 놔도 손색이 없을만한 선수가 있었고, 투수진도 손혁, 김종국, 김대영 등 꽤 좋은 선수들이 있어서 야구 관계자들이 91년도 공주고는 전국대회 5관왕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선수들이 이 선수들보다는 좀 처지는 선수들이 있었지요. 문제는 좀 처지는 선수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대어급 선수와 같이 대학에 입학하는게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이 발생했던 걸로 압니다. 요즘 인터넷 하기가 무서워서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상당히 꺼려지지만 그 가운데 약간의 돈 문제가 발생을 했고, 또한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라는 빅3학교는 선수 끼워넣기가 잘 되지 않는 학교였는데 당시 공주고 멤버중 손혁과 홍원기는 고려대, 고경찬은 연세대, 박찬호와 오중석은 한양대행이 거의 확정적이었는데 이 선수들이 한 급만 대학을 낮춰 다른 학교에 진학하면 다른 선수들도 충분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이 가운데서 부적절한 금전 문제가 야기됩니다.
결국, 공주고 2학년 선수들은 손혁 선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집단으로 팀을 이탈했는데 이게 아마 9월중순이었을 겁니다. 전국체전을 정확히 한달 앞둔 시점이었죠. 당시 공주고의 선수 수는 3학년이 3명, 2학년이 10명, 1학년이 10명이었으며, 베스트 라인업에 들어가는 선수는 3학년 3명(강준기, 신재웅, 이보형), 2학년 6명(박찬호, 홍원기, 고경찬, 손혁, 김종국, 오중석), 1학년 3명(김기중, 송재익, 노장진)이었는데 주축이던 2학년이 집단으로 팀을 이탈한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손혁은 팀원과 함께 하지 않은 배신자가 아니라, 손혁 선수의 아버지가 당시 공주고의 육성회장님이었고, 또한 아버지가 상당히 엄하셔서 절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학교 전체가 야구부의 집단 이탈을 알게 되면서 학교측은 선수들에게 강온양면의 회유를 합니다. 일단 학교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그렇지 않으면 모두 징계하겠다. 결국 선수들은 부모님들 손에 이끌려 학교로 왔고 그 와중에 금전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일이 발생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된 선수들과 학부모님들은 당시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당시가 시즌 맨 마지막이었고, 학교에서 중책을 담당하던 손혁 선수의 아버지로서는 쉽게 감독 사퇴 등을 입에 담기는 어려웠으리라 추측합니다.
결국, 학교 측은 중재안을 제시하게 됩니다.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하면 선수단이 원하는 대로 감독을 경질하겠다. 그러나 우승을 하지 못하면 집단이탈 선수 전체가 무기정학이다.
이쯤에서 많은 분들은 감독이 우승을 못하게 하는게 좋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미 선수단에게 신뢰를 잃은 감독이 이듬해에 감독직을 계속 수행한다 해도 어차피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에 감독은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또한 공주고에서 감독직을 물러나더라도 다른 팀에 갈 때 우승 프리미엄을 가지고 가는 것과, 단순한 금전상의 문제로 경질된 감독이라는 명함은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아주 애매한 입장이었습니다.
이 일로 선수단은 이를 악물게 되었고, 전국체전에서 청룡기 우승팀 경남고, 봉황기 우승팀 대전고,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 2관왕 충암고를 차례로 5:3, 3:0, 3:1로 제압하며 감격의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때 개인적으로 신재웅 선배는 제게 다시 한번 예고 홈런을 약속했는데 정말로 경남고전에서 청룡기에서의 굴욕을 분풀이하듯 홈런을 쏘아 올려 제가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봉황기 우승팀 대전고와의 준결승에서는 신재웅, 안희봉 3년생들이 선발맞대결을 펼쳤고 둘은 참 재미있는 경쟁을 합니다. 둘다 첫 안타를 상대선수로부터 뽑아냅니다. 선제타는 신재웅을 상대로 안희봉이 때려냅니다. 안희봉은 유격수와 3루수를 가르는 땅볼안타를 기록하며 1루에 안착합니다. 그러나 당시 안희봉 선수는 다리가 완전치 않아 절룩거리는 선수였는데 다음타자가 친 공이 공주고의 재간둥이 중견수 김기중에게 라인드라이브에 가까운 플라이로 잡히고 맙니다. 웬만한 중견수라면 안타가 될 타구였기에 안희봉 선수는 2루로 스타트를 끊었지만 김기중이 호수비와 1루 송구로 병살을 당하게 됩니다.
상대 투수에게 안타를 맞아 투쟁심에 불탄 신재웅은 2회 타석에서 우측 담장을 맞히는 큼지막한 타구를 날립니다. 2루타성 타구였는데, 투쟁심이 발동했는지 그대로 3루로 뛰었고 3루에서 간발의 차로 태그아웃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둘다 안타는 쳤지만 영양가는 없이 1합을 마칩니다. 승부는 2합에서 판가름납니다. 안희봉 선수는 두번째 타석에서 신재웅에게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신재웅은 주자 1,2루 상황에서 싹쓸이 2루타를 날리며 승리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결국 이 안타로 투수는 정민철로 교체됩니다. 바로 뒤 신재웅이 마운드에서 위기에 몰리자, 공주고도 투수를 박찬호로 교체합니다. 제가 볼 때 이 경기에서의 박찬호가 아마 고교시절 가장 잘 던진 경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박찬호는 4회에 마운드에 올라 삼진을 10여개 잡아내며 대전고 타선을 봉쇄하고 팀을 결승에 올려 놓습니다. 재미있던 것은 박찬호 선수가 이 경기에서 정민철 타석 때 데드볼을 던졌는데... 그냥 관중 입장에서 보자면 다분히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정민철 선수의 투쟁심도 장난 아니죠. 바로 다음 박찬호 타석 때 응징에 들어갑니다.
공주고는 3:0으로 대전고를 이기고 결승에 올랐으며 결승에서는 바로 전장 심재학의 "잠깐만" 사건으로 유명한 진흥고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충암고가 공주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첫댓글 이거 책으로 안나오나요 베스트 셀러될것같은데요.......
ㅉㅉㅉㅉㅉ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짜 잼있다 ㅎㅎㅎ
진짜 네이버의 민훈기 기자님 뺨치는 듯.... 최고에요...네이버에 연재 되길 바라는 1人
그러게요~ 정말 최고 인듯 ^^
정말정말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