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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남미 가미아나 중증학교 여학생 기숙사 화재 19명 사망
2023년 시칠리아 화산폭발
2023년 정기기선 응시생 609명 분 답안지 착오로 채점전 파쇄
2022년 윤석열 대통령, 美 타임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
2022년 손흥민 아시아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등극
2018년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남측 취재 허용
북한이 이날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갱도 폭파 방식으로 폐기했다. 북한은 이날 한국과 미국 등 5개국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17분쯤까지 핵실험장 2·3·4번 갱도와 막사, 단야장(금속을 불에 달구어 버리는 작업을 하는 자리), 관측소, 생활건물 본부 등을 연쇄 폭파하는 방식으로 핵실험장 폐기를 진행했다.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공판 시작.
2018년 문재인 대통령-트럼프 미대통령 정상회담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지로 확정
2013년 일본학자들 독도에서 ‘독도는 한국 땅’ 선언
2010년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 별세
86년 역사의 국내 대표 장수(長壽)기업인 삼양그룹의 김상홍(金相鴻·88) 명예회장이 2010년 5월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삼양사 창업주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선생의 7남6녀 중 3남인 고인은 서울에서 출생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와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나왔다.
1947년 삼양사에 입사해 선친인 김 회장을 보필하다가 56년 삼양사 사장에 취임한 고인은 지금까지 62년간 삼양사·삼양제넥스·삼남석유화학·삼양화성 등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키웠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으며 장학재단인 양영재단과 수당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고인은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1986), 한국의 경영자상(1989), 유일한상(2001) 등을 받았다.
2009년 조은화씨,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
작곡가 조은화(36)씨가 2009년 5월 23일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1위(상금 1만유로)를 차지하며 한국 음악계의 숙원(宿願)을 마침내 풀었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음악 경연 대회. 한국 출신 음악인이 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작곡·성악·기악을 통틀어 조씨가 처음이다. 그동안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1976년, 3위)·권혁주(2005년, 6위), 피아니스트 백혜선(1991년, 4위)·박종화(1995년, 5위)·임효선(2007년, 5위) 등이 이 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다.
조씨는 1973년 부산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와 독일 베를린의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수학했으며 2002년 한스 아이슬러 상을 받았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현대음악제와 2004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 2006년 일본 도쿄의 '오늘날의 음악 21' 등 여러 음악제에서 작품을 발표했으며, 아르디티 4중주단과 앙상블 모데른 같은 명문 현대음악 단체들이 그의 작품을 연주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 사망
노무현대통령은 1946년 9월1일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출생하여 부산상업고들학교를 졸업 후 곡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인권변호사로 일하다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부산,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후 김대중 총재와 손잡고 대통령을 당선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니고 2002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 하였다
2008년 퇴임 후 귀향하여 경남 김해시 본산리의 봉하마을에서 기거하다가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23일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 하였다
2007년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 새 앨범 홍보차 방한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Amerie.27)가 세 번째 앨범 ‘비커즈 아이 러브 잇(Because I love it)’ 홍보를 위해 2007년 5월 23일 방한했다.
1980년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출신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에이머리는 2002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2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 한국계 최초로 빌보드 싱글차트 ‘톱 10’에 올랐다.
2005년엔 영화 ‘히치’ 삽입곡 ‘원씽(1Thing)’을 불러 이듬해 그래미상 2개 부분에 후보로올랐다.
영화 ‘대통령의 딸’에 출연했고,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100인’에 두 차례 뽑히기도 했다.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방중
중국 베이징(北京) 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중국측으로부터 ‘극진한 대접’ 을 받았다.
5월24일 박 대표가 만리장성 방문에 나섰을 때는 국가원수급 다음 서열에 해당하는 대우를 했다. 중국 공산당이 검은색 링컨 콘티넨털 리무진 승용차를 제공했고, 수행한 한나라당 의원 10명은 5대의 벤츠 차량에 나눠 탔다. 차량 행렬은 앞뒤로 경광등을 단 호위차량이 붙고 별도의 차량 3~4대가 혼잡한 교통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중국 공안원들은 박 대표를 위해 도로 곳곳에서 출근길 차량들을 막고 있었다. 박 대표의 ‘요란한’ 행렬이 만리장성 입구에 들어서자 서양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박 대표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만났다. 후 주석과의 면담 약속이 잡힌 것은 방중 열흘 전쯤이라고 했다. 이것부터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김하중(金夏中) 주중대사는 “중국에 오면 누구나 후 주석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박 대표는 중국측에서 자발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고 전했다.
또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지난 23일 박 대표와의 면담 때 실내 에어컨을 모두 끄도록 했다.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박 대표를 위한 배려였다. 이날 베이징의 오후 기온이 25도에 육박했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1시간 이상 진행된 면담시간 내내 박 대표를 위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외교부장 출신인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은 영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주최한 만찬 때 박 대표를 위해 ‘특별’ 음료수를 준비했다. 콜라 절반에 뜨거운 물을 섞은 중국식 감기 특효 음료였다. 만찬 후에는 별도의 감기약을 건네기도 했다.
탕 위원은 만찬 도중 한국의 포항제철을 다녀온 경험을 얘기하면서 “박 대표가 4·30 재·보선에서 어머어마한 대승을 거둔 후, 이 정치인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는 말도 했다. 탕 위원의 부탁으로 한나라당의 방중단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10여권의 책을 전달하기도 했다.
2005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박성용씨 별세
박성용(朴晟容)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96년 동생인 고 박정구(朴定求) 회장에게 그룹총수직을 물려준 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 정력적으로 문화예술 후원활동을 펼쳐 왔다.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재학 중인 1956년 미국으로 유학가 65년 예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68년 귀국한 박 명예회장은 이후 대통령 경제비서관, 경제기획원 장관 특별보좌관 등 공직생활을 거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부친의 권유로 금호실업 부사장을 시작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에 뛰어들었다.
박 명예회장은 기업인으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고 금호타이어를 키우는 등 ‘제2의 창업’ 을 단행,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이다. 박 명예회장은 84년 부친이 타계하자 그룹 총수에 올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제2 창업을 주도했다. 그룹회장 취임 후 계열사 간 합병 및 비수익사업 정리 등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이던 구조조정을 단행, 그룹의 재도약 기틀을 마련했다. 88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 항공운송사업에 진출했다.
고인은 또 ‘식물과학계의 노벨상’ 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지난 2000년 ‘금호국제과학상’ 을 제정하는 등 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쌓았다.
2005년 몽골 새 대통령에 엥흐바야르 前총리 선출
2005년 5월 23일 몽골 신임 대통령으로 몽골 야당 인민혁명당(MPRP) 당수 남바린 엥흐바야르(47)가 선출됐다. 그는 47세의 많지 않은 나이지만 문화부장관과 총리를 지내고 의회의장을 맡고 있던 거물 정치인이다.
1980년 모스크바문학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리즈대학에서 수학한 문학도 출신인 그는 1980~1990년대 몽골작가연합에서 사무총장, 부회장을 지냈으며 번역가로 활동해 몽골의 고전 서사시들을 소개하고 찰스 디킨스 등 서양작가들의 작품들도 번역했다.
1985년 몽골 인민혁명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 1992년 의원으로 선출돼 그해부터 1996년까지 몽골 문화부장관을 지냈고 2000년 7월 26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총리로 지명돼 4년간 재임했으며 2004년에는 의회의장이 됐다.
2004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붕괴 사고 발생
2004년 5월 23일 오전 7시쯤 프랑스 파리의 북쪽 외곽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여객터미널의 지붕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으면서 터미널 건물이 완전히 반 토막 났다. 한국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형 사고였다. 최소한 5명이 사망했다
사고가 난 2E 터미널은 전해 6월 개통돼 완공된 지 1년도 안 되는 새 건물이었다. 에어프랑스, 대한항공 등이 입주해 있고 한국행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곳이어서 우리로서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없는 아찔한 사고였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공항을 유럽의 허브 공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벌였다. 2E 터미널도 그 중 하나로, 7억5000만유로(약 1조원)를 들여 지었다. 철골조와 유리로 된 화려한 건물 외관은 첨단 디자인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유럽의 허브 공항’이 되겠다는 프랑스의 원대한 계획도 한 방에 날아갔다.
2004년 한국전에 첫 참전했던 미군 스미스부대 특공대장 찰스 B 스미스 별세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참전 미군으로는 처음으로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던 찰스 B 스미스 미 특공대장이 2004년 5월 23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스미스씨는 6·25전쟁 당시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반도 긴급투입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원 406명은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첫발을 디뎠다. 이튿날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포병부대원 134명이 합류, 540명 규모의 특수임무대로 탈바꿈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6시간여 동안의 치열한 교전 끝에 탱크 4대를 격파하고 4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도 170여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스미스 중령은 북진 대열에 참가,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k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가 11월 10일 전출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스미스 중령은 뒤에 준장으로 진급한 뒤 1967년 예편했다. 1975년 7월 방한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87년 7월 오산에 새 전적비가 세워짐에 따라 두 번째로 방한했었다.
2004년 ‘90경기 무패’ 멕시코 영웅 프로복서 차베스 은퇴경기서 판정승
‘90경기 무패행진’, ‘WBC 세 체급 타이틀 석권’ 신화의 주인공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41·멕시코)가 은퇴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23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경기에서 차베스는 프랭키 랜달(미국)에 10회 판정승을 거뒀다. 랜달은 94년 라스베이거스 경기에서 처음으로 차베스를 링에 눕힌 선수. 차베스는 같은 해 4개월 뒤 곧바로 설욕을 했지만 은퇴를 앞두고 다시 랜달과 맞서기를 원했다. 경기 종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주먹을 주고 받은 결과는 차베스의 판정승. 이로써 차베스의 통산전적은 106승2무5패85KO가 됐다.
멕시코가 낳은 최고의 스포츠스타 중 한 명인 차베스의 은퇴경기였지만 4만5000여석의 관중석 중 절반 이상이 비어 과거의 영화를 무색케 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차베스는 관중들을 향해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고 외쳤다.
이 경기에 앞서 차베스의 두 아들도 각각 링에 올라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하는 경기를 펼쳤다. 동생인 오마르는 2라운드 아마추어 경기를 치렀고 형 차베스 주니어(8승무패4KO)는 상대에 KO승을 거두며 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했다.
2004년 광주과학기술원 변영로 교수, ‘이코노미 증후군’ 예방알약 첫 개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충성메모’ 파문의 당사자 안동수 법무장관, 취임 43시간 만에 경질
2001년5월23일 김대중대통령은 ‘충성 메모’ 파문과 관련, 안동수 법무부 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후임 법무장관에 최경원 전 법무차관을 기용했다.
이날 경질된 안 장관은 지난 21일 법무장관에 임명된 지 43시간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역대 최단명 장관으로 남게 됐다.
김 대통령이 안 장관을 신속히 경질한 것은 안 장관의 ‘취임사 초고’의 ‘정권 재창출’ 부분이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다 작성 경위를 둘러싼 은폐와 거짓말 의혹까지 제기됨에 따라 더 이상 끌고 갈 경우, 정권 차원의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안 장관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서초구 방배동 자신의 아파트를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대통령에게 누가 된다면 용퇴를 생각해보겠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곧바로 청와대로 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전달했다.
2000년 이한동 국무총리 서리 취임
김대중 대통령은 22일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후임에 자민련 이한동 총재를 지명하고 국회에 임명 동의를 요청했다.
이한동 신임 총리서리는 23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충성 서약’ 을 했다.
이 총리서리는 “그동안 대통령께서 경제위기를 극복해 경제를 안정시키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에 대해 경하를 드린다” 면서 “신명을 바쳐 나라와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다” 맹세하고, “경제안정과 지역갈등, 계층갈등 해소에도 최선을 다하겠다” 고 다짐했다.
김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 총리서리를 “공부하는 정치인으로 식견이 높으신 분” 이라며 “무엇보다 덕을 갖추신 인물로서 주위나 친구, 국민들에게서 신뢰를 받고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 극찬했다.
2000년 시리아 북동부서 6000년전 도시 발견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에 도시 문명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6000년전 유적이 시리아에서 발견됐다. 미국 시카고대 근동연구소는 시리아 북동부, 고대 주요 무역루트에 있는 `텔 하무카르`의 거대한 흙더미를 파고 들어갔다. 그 결과 시가지 방호벽 등 6000년전에 복합적 형태의 사회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연구소측은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이 문명지가 남부의 수메르 문명과 같은 시기에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은 얻었다고 2000년 5월 23일 발표했다. 하무카르 유적은 수메르 유적과 같은 시기인 6000년 경으로 추정되지만,여러 흔적으로 보아 하무카르의 도시문명이 수메르 이전에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에서 최대의 성과는 6000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폭4m의 방호벽.이런 규모의 축조물은 문명이 시작된 증거로 간주된다. 또 방호벽 안에서 이글루 모양의 거대한 화덕과 조리용 토기, 동물 뼈,밀-보리-귀리 등 곡물 흔적이 나타나 사회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소풍’, 한국영화 사상 첫 칸영화제 수상
칸 국제영화제 52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상을 받았다. 1999년 5월 23일 제5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송일곤 감독의 ‘소풍’ 이 단편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소풍’ 은 실직 가장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동반자살하는 이야기를 다룬 내용으로 단편영화로는 드물게 35㎜ 필름으로 찍은 14분짜리 작품이다.
송 감독은 서울예전 영화과를 졸업하고 폴란드로 유학, 몇 년전 데이콤 광고 모델로 등장해 어머니와 통화하며 폴란드에서 눈물짓는 아들역으로 일반에 얼굴이 알려졌던 인물이다. 이미 ‘광대들의 꿈’ 으로 1997년 제3회 서울단편 영화제 우수작품상을 받았고, ‘간과 감자’(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의 작품으로 폴란드 토룬 국제영화제와 이탈리아 시에나 영화제 등 해외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1999년 미국 81세 노령 산악인, 국립공원 요세미티 엘캐피탄봉(2307m)에 올라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 수립`
미국 뉴저지주 우즈베리에 사는 아마추어 산악인 제리 블록(81·전 엔지니어) 할아버지가 23일 오후 5시(현지시각) 11일간의 사투 끝에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 엘캐피탄봉(해발2270m) 정상 정복에 성공, 요세미티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을 세웠다. 블록 할아버지가 택한 코스는 엘캐피탄봉 최난코스인 ‘아쿠아리안 월스’. 정상까지 750여m에 걸쳐 가파른 암벽을 타야한다.
오렌지색 헬멧을 쓰고 물과 음식, 침낭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정상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쉬운 코스로 올라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손자 샘(20)과 힘찬 포옹을 나눴다. 할아버지는 환호하는 기자들을 향해 “16살때 산을 타기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려운 등반이었다” 고 말했다.
등반 도중 암벽에서 미끄러져 천식 약병을 절벽으로 떨어뜨린 블록 할아버지는 약 없이 11일간 등반을 계속했다. 갈비뼈 부근에 멍이 들어 고생도 했다.
할아버지를 취재하기 위해 동행한 NBC카메라 기자 크레그 화이트도 밧줄이 끊어져 3m 아래 바위땅에 곤두박질하는 등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블록 할아버지의 이번 엘캐피판봉 최고령 등반기록은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갱신한 것. 86년 68세 나이로 정상에 올라 영예를 안았다. 최근 한 69세 노인이 엘캐피탄봉 등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최고령 기록을 내줄 수 없다” 는 생각에 다시 도전했다.
1999년 독일 대통령에 요하네스 라우 선출
1999년 5월 23일 실시된 독일 연방의회 대통령선거에서 요하네스 라우 사민당(SPD) 후보가 전후 8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라우 당선자는 대선 2차투표에서 과반수인 690표를 획득, 헤어초크 현 대통령에 이어 5년 임기의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요하네스는 화려한 정치경력과 독실한 신앙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정계의 노신사로 평가받는다. 지난 1952년 `전독국민당`에 입당한 라우는 당 해체로 1957년 사민당에 입당한 이후 승승장구, 1998년까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모두 다섯차례나 주총리를 역임했다. 1982년 사민당 당수에 오른 그는 그러나 사민당의 연방총리 후보로 나선 1987년 총선에서 기민당(CDU)의 헬무트 콜 총리에게 패한 뒤 당수직을 사임했고 1994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기민당의 로만 헤어초크 현 대통령에게 패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사민당 지도부의 권유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총리직을 사퇴했다.
1997년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당선
1997년 5월 23일에 치룬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모하메드 하타미가 승리가 예상되던 강경파 알리 아크바르 나테크 누리 국회의장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타미는 이란 중부 아르다칸 출신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물이다.
라프산자니 대통령 시절 고문 겸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지난 1980년 카이한 언론그룹의 대표를 지낸 하타미 대통령 당선자는 1982년부터 10년간 문화부장관을 지낼 당시에 이란 최초로 여가수의 야외공연을 허용했다. 문학과 예술, 영화의 백화제방을 주도한 그는 이로 인해 젊은이와 여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아 이번 선거에서도 그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1996년 북한 공군 소속 이철수 대위, 미그19기 몰고 귀순
1996년 5월23일 평안남도 온천비행장에서 전투기 이착륙 숙달훈련을 위해 10시30분 북괴공군 미그기 3대로 이루어진 편대가 이륙하여 두어바퀴 선회 비행을 하다가 이중 한 대인 이철수대위기 몰던 미그기가 기수를 남쪽방향으로 돌려 8백미터의 초저공으로 시속 842km의 속도로 남하를 하였다
10여분간 비행하던 전투기가 황해도 태탄 상공에서 우리 한국공군 레이더에포착되었다
이를 포착한 공군은 근처를 초계비행하던 F16 전투기 2대에 격추명령을 내리고 인근 수원비행장에서 F4,F5전투기를 출격시켰다
북괴 공군기는 10시49분 북방한계선을 통과 하여 10시53분 서쪽 15마일 지점에서 F16기와 조우하였으며 우리 공군 조종사들은 육안으로 귀순기 임을 확인하고 유도하기 위해 1대는 미그19기에 접근하고 나머지 1대는 후방에서 엄호 및 초계비행을 했다.
우군기가 접근하자 귀순기는 귀순의사 표시로 날개를 흔들고 속도를 줄여 비행했으며 귀순 의사를 확인한 아군기가 작전사령부의 지시에따라 수원기지로 유도, 11시 09분 착륙했다.
귀순한 북한군 조종사는 북한 공군 및 반항공사령부 1비행사단 57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인 이철수 대위(30)로 밝혀졌다.
1996년 인천 국제공항 터미널 기공식
1995년 2002년 아시안게임 부산개최 확정
부산이 21세기를 여는 첫 아시아게임 개최지로 결정됐다. 1995년 5월 23일 롯데호텔서 열린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제14차 총회서 부산은 37개국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만의 가오슝시를 제치고 2002년 9월로 예정된 제14회 아시안게임 개최권을 획득했다. 이로써 한국은 지난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16년 만에 2번째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게 됐다.
이날 총회에는 OCA 43개 회원국 중 북한과 라오스를 제외한 41개국 대표가 참석했다. 부산은 당초 25표 정도의 지지를 예상했으나 거수 표결방식을 택한 데다 중국의 강력한 가오슝 반대 노력에 편승,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세이크 아마드 알 파드(쿠웨이트) OCA회장의 개최지 확정발표 직후 김운용 KOC위원장과 김기재 부산광역시장 등 부산유치단 대표들은 차례로 아시안게임 개최 확인서에 서명했다.
부산이 21세기들어 처음 열릴 30억 아시아인의 제전 제14회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의 영광을 안음으로써 한국은 태국(4회) 일본(2회) 인도(2회)에 이어 2번이상 대회를 유치하는 4번째 국가가 됐다.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후임을 뽑기 위해 1994년 5월 23일 실시된 연방회의 투표에서 집권 기민당의 로만 헤르초크 후보가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34년 4월 바이에른주에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명석한 두뇌, 끈기, 고위층에 친구가 많은 장점을 이용, 권력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올라온 인물이었다. 뮌헨대에서 법률(국제법)을 전공, 30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32세부터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7년 동안 법학 교수를 지냈다. 1973년 콜 총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남부의 바덴 뷔르템베르크주 문화부 장관(1978년)을 거쳐 내무 장관(1980년)을 역임했다.
헌법재판소 판사와 부소장을 거쳐 1987년부터 1994년까지 7년여 동안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하면서 기본법에 관한 새로운 해석과 판례를 통해, 법률을 신축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적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 마피아 범죄소탕에 앞장선 팔코네 이탈리아 판사 폭탄테러 당함
1985년 미 문화원 점거농성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학생운동의 반합법 투쟁기구인 삼민투쟁위원회 주도하에 서울의 5개대 남녀학생 73명이 연합으로 서울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 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72시간 만에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 기소됐고 사법사상 초유의 피고들의 재판거부사태, 묵비권행사, 재판부기피신청,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재판과정 역시 파란으로 점철됐다.
1984년 김일성 소련 방문, 흐루시초프와 회담
1982년 이란군 호람샤르 탈환
1982년 프레이저 호주수상 내한
1981년 보령 앞 바다에 식인상어 출현 전복 따던 해녀 1명 참변
1980년 시위선동 간첩사건
1979년 카르스텐스 서독 대통령에 피선
1977년 시인 이산 김광섭 사망
1976년 서울 방학동 건널목서 전동차-유조트럭 충돌 118명 사망
1975년 월남난민 태운 청룡호 부산에 입항
1973년 대법원 공해에 첫 배상판결 (영남화학에 320만원 지급 판결)
1969년 문교부 외래어 한글표기 원칙발표
1965년 ‘진통제 마약’ 메사돈 만든 제약사 급습
1960년대 중반, 농어촌과 산간 벽지 등에서 갑자기 마약 중독자가 급증, 정부가 조사에 나섰으나 진통 주사제가 범람하는 것 말고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주사제를 수차례 검사했지만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제3의 물질’ 만 검출됐다.
배·머리가 아플 때, 나무하러 가거나 바다에 들어갈 때 한 대씩 맞은 진통제로 사람들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정부는 1965년 3월 현재 중독자가 1만5000명에서 2만명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최소 10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보건당국은 1965년 5월에서야 비로소 그 물질이 메사돈임을 밝혀내고 제조업체 추적에 나섰다. 메사돈은 아편보다 진통작용이 2배 이상 강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흰가루 마약이었다.
1965년 5월 23일 청주시에 있는 국도제약에서 진통제를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속반이 현장을 급습, 메사돈을 주성분으로 한 진통 주사액 20만통을 압수하고 사장을 마약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16명의 업자가 구속되고 관련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파렴치한 장사꾼들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1961년 최고회의 언론기관을 정비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1956년 SEATO 본부 방콕에 설치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대처승관련 담화발표
불교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싸움이 점차 격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3일 담화를 발표 "사찰은 독신승 만이 지켜야 하며 일제 잔재인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전국 사찰의 9할은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화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구승-대처승 양측은 첫 유시가 발표되자 정화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끝내 대처승들이 소유하고 있던 태고사를 비롯, 각 절들을 뺏고 빼앗기는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11월 25일 조계사에서 양파가 충돌하고, 12월 13일에는 비구니 5백여명이 서울시내에서 데모를 벌였다. 12월 16일엔 대통령이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담화를 다시 발표했지만 양파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대통령은 1955년 6월 16일 네 번째로 대처승 사찰철수촉구 담화를 발표했고 10월초에 가서야 비구승은 전국 4백50개 사찰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51년 중국-티베트, `17조 협약` 조인
티베트와 중국 대표가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조인했다. 1950년 12월 수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하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보장한 이 협약으로 티베트는 자주성을 잃고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했다.
이 협약에서는 티베트의 자치도 약속했지만 대규모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로 자치의 의미를 크게 제약했고 장기적으로 인민 저항을 불러 일으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티베트 불교문화의 파괴를 불러일으켰다. 1959년에는 달라이 라마의 해외망명까지 초래했다. 티베트는 중국의 서장 자치구와 청해성 등 각급 지방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1950년 터키 총선, 27년 만에 1당독재 종식하고 정권교체
1950년 5월 23일 터키 최초로 실시된 무기명 총선에서 민주당이 487석 중 396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1923년부터 27년간 터키 국정을 독점해 온 공화인민당의 1당독재를 종식시켰다.
공화인민당은 근대 터키의 아버지로 추앙받아온 케말 파샤가 설립한 정당이다. 공화인민당은 민도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당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1당 독재에 대한 각계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자 야당을 합법화했다. 1946년의 총선에서 민주당은 정부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61석을 획득, 일약 대체 정당으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때 민주당을 이끈 지도자는 케말정권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했던 제랄 바야르이다. 바야르는 경제자유화, 파업권 확립, 이슬람 제한법 완화 등을 내세워 1950년의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후 바야르는 10여년간 터키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대미관계를 강화했고,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2만5천명의 군인을 한국전에 파병했다. 하지만 인플레가 재연되고 언론통제가 부활되어 민심이 흔들리자 이에 편승한 쿠데타에 의해 1960년 실각, 투옥됐다.
1950년 한국은행법 시행령 공포
1949년 서독 연방공화국 수립
서독의 새로운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1949년 5월 23일 공포돼 본을 잠정 수도로 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됐다. 이로써 동서분열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6~1947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각 점령지역에 주의회가 탄생했고 행정책임이 독일측으로 이송됐다.
1948년에 들어서 3국점령지역의 통합과 연방정부의 수립이 협의되고 6월 통화개혁이 단행되자 소련은 베를린 봉쇄로 대응해 독일의 동서분단은 피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9월부터 헌법제정의회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잠정헌법으로의 `기본법` 기초(起草)를 시작해 이해 5월 8일 채택했다. 8월 1일 최초의 연방의회선거가 행해져 9월에는 헌법제정의회의장을 맡은 기독교민주동맹의 아데나워를 수상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됐다. 대통령에는 호이스가 선출됐다
1946년 미군정 민간인의 38선 무허가월경 금지명령
1946년 극예술연구회 발족
1937년 석유왕 록펠러 사망
1934년 미국 은행강도 보니와 클라이드 사살
1934년 5월 23일, 포드자동차를 타고 미국 루이지애나주 깁스랜드 부근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남녀가 잠복해 있는 경찰들이 무차별로 쏜 87발의 기총소사 세례를 받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남자는 벌집이 된 차 운전석에서 한 손에 총을 든 채, 여자는 무릎에 기관총을 얹혀놓고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수그린 채 죽어있었다.
두 사람은 미주리주ㆍ오클라호마주ㆍ텍사스주에서 1년 9개월간 주유소ㆍ시골은행ㆍ간이식당 등을 휘저으며 12명을 살해하고 강도행각을 벌여온 은행강도 클라이드 배로와 그의 애인 보니 파커였다. 같은 시대의 전설적 갱스터 존 딜린저가 한 번의 강도짓에서 7만 4000달러를 훔친 것에 비하면 1500달러를 넘지 않은 두 사람의 강도짓은 좀도둑 수준이었지만 대공황기에 서민의 착취기관이었던 은행을 공격함으로써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 상징으로 인식됐다.
1923년 조선야구협회 창립
1917년 생물학 발전에 공헌한 강영선 출생
1916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 옥사
1915년 극작가 함세덕 출생
1915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1915년 이탈리아 일차대전 참전
1912년 중국 철도투자를 위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4국 차관단 결성
1908년 윤봉길 의사 출생
1908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출생 - 1956년 트랜지스터 발명, 1972년 초전도이론 개발으로 노벨상 수상
1907년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
1906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사망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906년 5월 23일 사망했다. 텔레마르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파산으로 한때는 약방의 도제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그는 독학으로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중 단막 희곡 `전사의 무덤`(1850)이 극장에 공연되자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극장 지배인으로 생활하며 발표한 현대극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고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고미술을 공부했다. 이때 발표한 `브랑`(1866)으로 명성을 얻자 `페르 귄트`와 10년의 세월이 걸린 세계사극 `황제와 갈릴레아 사람` 등을 연이어 발표, 사상적 입지를 굳혔다.
1879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이 출간되자 당대의 보수적 관객들은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위험한 선동물이라며 비판했으나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살겠다"는 노라의 전언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입센은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작품으로 근대극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93(조선 고종 30) 연등놀이(화약비 80만냥)
1891년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 출생 - 1951년 노벨문학상 수상
1886년 역사가 랑케 사망
1734년 근대적 최면술의 선구자 독일의 메스머 출생
1707년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 출생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일어남, 왜병 15만8700명 700척 배로 부산포 상륙(음력 4월 13일)
1498년 이탈리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교수형
지나치게 엄격한 수도사였던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8년 5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1452년 페라라에서 태어나 1491년 산마르코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카리스마가 있는 수도사였으며 설교자였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급진 개혁자였다.
사보나롤라는 1497년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피렌체에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진군해 오자 샤를 8세를 만나 피렌체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껴가게 했다. 불안해 하던 피렌체 시민은 그를 환호했고 추앙했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선포되자 사보나롤라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갔고 급기야 공화제는 신권 정치적 독재로 변화됐다. 시민들은 사생활 침해에도, 경찰의 빈번한 감시에도 그를 신뢰했고 메디치 가문을 대신한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었다. 그가 설교하면 성당은 사람들로 붐볐고, 그의 영향력은 철학자와 문인들,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 유력자 등 지식계급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는 로마가 부패했다며 공공연히 교황 알렉산드르 6세를 비난했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의 금욕적인 가르침에 축제도 포기했고 사치품도 불태웠다. 위선적인 맹신과 순종만이 피렌체를 뒤덮었다. 그의 혹독한 광신주의를 혐오한 교황은 그에게 설교 금지령과 파문처분을 내렸지만 사보나롤라는 반발했다.
그러던 중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통치에 내심 흔들리고 있던 시민들의 마음이 돌변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그를 경계하던 반(反) 사보나롤라파가 불속에 뛰어들어 신앙심을 가리자는 제안에 사보나롤라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군중들은 사보나롤라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폭동으로 발전했다. 결국 사보나롤라는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이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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