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희망편지
朝鮮日報가 1면에 連載(2008.12.15~12.31)한 “희망편지”를 모은 것입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感動도 있고 勇氣를 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희망편지
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 (신동근·시인)
온 몸이 뒤틀려도 그녀는 웃는다 (정경희·김해 경전철 현장식당)
사채 잘못 손댔다 풍비박산 죽을 각오로 막노동 10년… (심상기·노동)
난 꿈이 있어 쉴 수가 없다 (윤윤수·휠라코리아 회장)
다 잃은 전쟁고아 '책과 꿈'이 살렸다 (고정일·동서문화 발행인)
빨간 내복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해득·KT 광화문지사)
발레리나 최고의 순간에 금이 간 뼈… (강수진·발레리나)
나를 붙잡던 두 살 민영이의 손 (현정화·KRA 탁구팀 감독)
파도가 가르쳐준 교훈 "견뎌내라" (유강호·극작가·미국 서니베일)
역경이 오면 역전을 노려라 (김성근·프로야구 SK 감독)
삶의 소중함 일깨워준 '봉사명령' (최강타·회사원)
유리벽 사이에 둔 "사랑해" (김계용·대한항공)
비켜라, 암(癌)!… 내가 간다 (장형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정직으로 빚은 동동주 (황주홍 전남강진군수)
"저도 빙판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울었죠" (김연아·피겨스케이팅 선수)
어머니가 남긴 '꼬깃꼬깃 3만원'
신동근·시인 |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뒤 어느날, 나는 가출을 해 고향인 문경을 떠났다.
그후 10대에는 주로 공장생활을, 20대에는 초상화 제작, 30대와 40대 중반까지는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목공, 미장, 도배, 페인트칠, 삽질, 벌초, 외판, 광부, 리어카행상 등등 수십 가지 일을 전전하며 30년이 흘렀다.
16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18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
내 일기장은 나날의 일상과 더불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자신에 대한 자괴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한번에 5장, 10장씩 쓰다보니 한 달이 채 못 돼 노트 한권이 꽉 찼다. 월세 쪽방에서 자꾸만 늘어나는 일기장은 짐이 되었다.
30대를 코앞에 두고 나는 10년간 써온 일기장을 몽땅 불태우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용을 추리고 추려 대학노트 20권으로 줄였다.
그 작업이 6개월 걸렸다.
그 기간에 나는 수입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 문화센터를 찾아가 시와 소설 창작을 수강하느라 군 복무 후 5년간 저축한 600만원도 모두 써버렸다.
원래는 일기장 정리를 위해 문장 공부를 시작한 것인데 강의를 듣다보니 문학에 대한 욕망이 싹텄다. 틈틈이 시간을 내 강좌를 계속 수강했다.
몰아서 합치면 4년 정도의 기간을 꼬박 채웠을 것이다.
38세 때 중앙 문예지에 투고한 나의 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만기 채운 적금을 수령할 때보다 더 보람을 느꼈다.
그후 4년이 지난 2002년 겨울에 나는 첫 시집을 발간했다.
비로소 견고한 나만의 성을 하나 구축한 것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1984년 이후 나는 파주에 산다.
1988년 6월 하순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와 나는 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나는 그때의 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쓴다.
물론 전업으로 쓸 처지는 못된다. 일류 기술자는 아니지만 용접기능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한다.
어머니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배웅하고 돌아온 나는 그날 밤 조용히 눈물 흘리며 미숫가루를 타먹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가 인근 방앗간에 가서 한 양동이 구해온 것이다.
미숫가루 몇 숟가락을 떠내다가 내 손은 전기에 감전된 듯 굳어버렸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 3만원이 푹 파묻혀 있었다.
그 돈은 내가 "차비로 쓰세요" 하고 어머니에게 건넸던 것이었다.
내가 조급하게 굴거나 베스트셀러 집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은, 재능도 물론 미비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시인이며 소설가인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해줄 어머니가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와 소설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지갑 속 지폐 3만원과 더불어 어머니가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2009년이면 49세가 되는 내가 아직도 미혼이라니, 동년배와 비교하면 나는 분명 사회생활에 실패한 낙오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내 비교의 대상은 허기에 지쳐 홀쭉해진 배를 움켜쥐고 대구시내를 배회하던 그 소년이다.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의 자력으로 일할 수 있는 하루가 밝았다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다만 시인 존 클레어의 말처럼 만약 생애에 제2판(版)이 있다면, 단 한 군데 16세의 무단가출 부분만은 교정을 하고 싶다.
온 몸이 뒤틀려도 그녀는 웃는다 정경희·김해 서풍건설 경전철 공사구간 현장식당 |
부산 김해공항 옆에 있는 덕두마을에 이사온 지 벌써 3년이다.이 마을엔 늘 환하게 웃는 미소천사가 있다.
성아는 서른네 살의 뇌성마비 장애인 아가씨다.
손도 다리도 발도 뒤틀려 먹는 것도 걷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녀는 늘 환하게 웃는다.
사계절 하루도 빠짐없이 낡은 유모차를 끌고 열심히 박스를 모으러 다닌다.
세상이 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지만 성아는 늘 행복해한다.
오늘은 박스가 너무 많다며 "이모 고맙다"고,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나 또한 살기 힘들어 속상해하지만, 성아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발음이 서툴러도 남이 알아듣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해 보이는지! 온 얼굴이 뒤틀려도 그녀는 웃는다.
성아는 82세 노모와 슬레이트 단칸방에 둘이 살고 있다. 성아는 가끔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엄마는 이가 없어 불쌍해요." 그녀의 말에 얼마나 가슴이 저려오던지. 빵 하나랑 음료수를 먹으라고 주면 나에게 말한다.
"이모, 빵 이거 주머니에 넣어주세요." "왜?" "엄마 갖다 주려고요." 세상에 이런 천사가 또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행패를 부리고 불효한다는 소릴 많이 듣는다. 그녀는 장애인 몸으로 팔순 노모를 부양하는 가장이다.
"한 달 내내 모으면 돈이 얼마나 되니?" "만 원요." 물론 정부에서 장애인에게 나오는 지원금이 있을 테지만, 기가 막혀 가슴이 멍했다. 그런데도 "박스가 많이 나오는 날은 기분이 좋아 걸음이 잘 걸어진다" 하면서 성아는 한여름 내내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공사장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나는 설거지 전문가고 성아는 박스 수집 전문가네" 했더니 또 활짝 웃는다. 그런 성아가 너무 예뻐서, 식당에 들르는 근로자들, 그리고 옆 우체국 직원들도 성아가 올 때쯤이면 미리 박스를 모아 끈으로 묶어놓고 기다리게 된다.
성아가 나를 가르치는 것 같다. 가진 것 없다고, 세상 어렵고 힘들다고 투정하지 말라고. 성아를 보면서 나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육신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한다.
오늘은 시장에 가서 성아가 부탁한 235mm짜리 털신을 샀다. 이 추운 날 조끼 입고 플라스틱 슬리퍼 끌고 다니는 성아가 안타까워 잠바랑 목도리도 샀다. 교회 갈 때 다른 사람 5분 걸릴 길을 한 시간 걸려 걷는 성아. 이제 털신을 신고
30분 만에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내년엔 덕두마을 주민들이 대문 앞에 박스를 많이 모아두면 좋겠다. 차가운 겨
울바람을 등에 업고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성아가 내년 따스한 봄이 올 때는 더 많은 박스를 모으기를 바란다.
사채 잘못 손댔다 풍비박산 죽을 각오로 막노동 10년… 심상기·노동·서울 관악구 |
고향인 경남 하동을 눈물로 떠나온 지 어언 10년이다. 1998년 IMF로 세상이 힘들 때였다. 직장 때문에 주말 부부로 살다가 아내가 이왕이면 장사를 해보겠다고 우유대리점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아내가 사채를 빌리게 되었고 급기야 제품 판매 대금에까지 손을 댔다. 아내는 나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 혼자 끙끙 앓다가 고리대금까지 끌어들여 걷잡을 수 없이 빚을 키웠다.
결국 내가 알게 돼 빚을 갚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거액의 은행대출을 한 것이 문제였다. IMF가 오자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가 어려워졌다. 마침내 나의 급여와 퇴직금에 차압이 들어왔다.
큰애의 대학 진학을 앞둔 1998년 말 나는 퇴직금을 한 푼도 찾을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총무부에 통사정을 해 등록금 용도로 현금 500만원을 찾아오는 길엔 서럽고 막막한 마음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시불 수령이 가능했던 국민연금을 받고 그 돈이 떨어지면 죽기로 했다.
아내와 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서울로 올려 보냈다. 나는 막내와 함께 시골에 남아 술로 지냈다. 풍비박산된 가족이었다. 용기가 없어서 죽지는 못했다. 대신 몇 달 뒤 마지막 남은 800만원을 들고 나도 서울로 올라왔다.
술과 불면(不眠)의 연속이었다. 좁은 반(半)지하방이 우리 거처였다. 사람이 망하면 친척도 떨어져 나가고, 부귀해지면 모르는 사람도 모여든다고 했다(貧賤者親戚離 富貴人他人合). 꼭 그랬다. 가장 괴로운 것은, 가난하고 천해 보이니까 동창으로부터도 '양아치'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차피 죽을 바엔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큰아이가 공부를 제법 잘했다. 노동판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날로 담배를 끊고 몸을 단련했다. 이후 안 해본 일이 없다. 석재공 보조, 페인트공, 택시 운전….
지나간 10년은 눈물밖에 안 나오는 모진 삶이었다. 하지만 그 시련 속에서 나는 소중한 것을 얻게 되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어렵다고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숨기기에 급급하다면 행복은 오지 않는다. 체면과 부끄러움은 사치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현실을 당당하게 맞이할 때 재기의 기회가 온다.
10년이 지났지만 아내는 여전히 식당에서 일한다. 대신에 우리 가족은 소중한 것을 얻었다. 나도 아내도 부모로서 당당하게 노동일을 하고, 떳떳하게 식당일을 한다. 큰아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지금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다. 막내 또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선하게 살고 있다.
지난 10월에 드디어 10년 반(半)지하방을 탈출했다. 좁지만 세 칸짜리 셋방을 구해 10년 만에 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는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산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내 가정이 행복하면 우주가 행복한 것이다.
난 꿈이 있어 쉴 수가 없다 윤윤수·휠라코리아 회장 |
2주일 전쯤 나는 뜻 깊은 연말 선물을 받았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양국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국가 공로 훈장을 받은 것이다. 사실 6개월 전에 훈장 수여 결정 소식을 받았지만, 막상 여러 하객들 앞에서 훈장을 받으니 느낌이 달랐다. 수상 소감에서 나는 25년 전 이탈리아 휠라(FILA) 브랜드와의 인연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휠라와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휠라를 처음 찾아가고 나서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1983년 당시 나는 국내 한 신발회사 영업담당 이사였는데, 처음 찾아간 휠라 본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나는 "휠라의 신발 사업을 맡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이미 미국 회사가 휠라의 신발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휠라는 옷 사업만 했지, 신발사업 자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다니던 국내 회사에서마저 실적부진을 이유로 옷을 벗어야 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는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아직 40대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휠라 신발 독점권을 가진 회사를 찾아갔다.
당시 자금사정이 어려웠던 그 회사는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금융을 내가 책임질 테니, 휠라 신발 생산을 내게 맡기라"고 수 차례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회사와 휠라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휠라 본사의 의류사업보다 미국 신발 비중이 더 커졌다.
마침내는 휠라 회장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와 "휠라코리아를 세워 대표를 맡아달라"고 제의해왔다. 근 10년 만에 내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내 몸은 여러 번 '고비'를 넘겼다. 미국의 신발전시회를 찾아갔다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귀국해서 갑상선 암 수술을 했고, 그 후 심장과 폐 수술도 해야 했다. 지금도 의사는 "해외출장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고, 주위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한다.
"이제 휠라 본사까지 인수해 글로벌 기업의 오너가 됐으니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오늘도 나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7시에 회사에 도착, 해외 파트너와의 전화 미팅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60대 중반이 되었지만, 내가 쉬지 못하는 이유는 나에겐 아직 이뤄야 할 꿈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글로벌 브랜드를 우리나라가 소유하게 됐으니 이제는 이 브랜드를 명실공히 세계 시장의 리딩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꿈이다.
요즘 미국 경기 위축으로 실적이 생각만큼은 좋지 않다. 그 때문에 더 자주 미국을 오간다.
그러나 내겐 이런 어려움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다들 고개를 저을 때에도 결국 나는 해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돼 어머니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대학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갔다.
지금 난 휠라의 오너가 됐지만,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도달해야 할 꿈이 있는 한, 늘 시련은 우리를 시험한다.
다 잃은 전쟁고아 '책과 꿈'이 살렸다 고정일·동서문화 발행인 |
1951년 1월, 중공군 백만대군이 쳐 내려온 혹한의 겨울.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서울 집을 떠나 꽁꽁 언 한강을 걸어 피란을 떠났다. 1월 25일 밤 경기도 신갈 새말의 초가집 한 칸에 피란민 열댓 명이 쪼그리고 잠들었다.
한밤중에 포탄이 쏟아졌다. 피바다가 된 마을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불렀다. 대답이 없다. 모두 죽었다. 한 달 동안 전쟁 고아로 살았다. 3월 초 길이 뚫렸다. 오산 외갓집으로 내달렸다. 외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튿날 어머니와 두 동생 뼈를 추려오는 길, 산등성 눈 속에 분홍 진달래꽃들이 서럽게 피어 있었다. 내 나이 열한 살 때였다.
서울로 돌아오며 수원에서 발행하는 전시판(戰時版) 조선일보 사동 일을 하고 영등포에서 양담배를 팔았다. 어느 날 마포로 건너가는 배가 있었다.
사공에게 남은 양담배를 몽땅 주고 비와 총탄이 뒤섞여 쏟아지는 어둠 속에 도강(渡江)을 했다. 할머니와 함께 안암동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버지도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희망을 찾는 길은 오직 책이었다.
신문 팔아 돈 벌면 끼니도 거르고 종로 영창서관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 책방 할아버지가 물었다. "책이 좋으냐?" "네." "그럼 여기서 일해보련?" 그때부터 책 마음껏 읽고 출판 일도 배웠다. 1970년대 초 작고한 장복한 할아버지는 평생 책과 함께 살 길을 열어주신 스승이다.
1953년 전쟁이 끝났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청계천에 책 좌판을 열었다. 지금은 사라진 오간수(五間水) 다리 위에서 카바이드 불빛 아래 책을 팔았다. 영하 15도. 당장 때려치우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눈물이 뺨에 얼어붙었다. 그때 단골손님이던 선우휘 선생이 나타나 나를 꾸짖었다. "사나이는 한 번 크게 울 때가 있는 법. 결코 남 앞에서 찔찔 우는 게 아니다. 꿈을 가지면,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이겨내어 꼭 그 꿈을 이룰 날이 오고야 만다." 나는 감동했다.
나는 청계천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며 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잎새 하나 없는 알몸이지만 나무는 대지(大地)의 젖가슴에 입술 대고 봄을 꿈꾸지 않는가. 그 나무처럼 가지마다 내 삶의 열매가 가득 달린 '꿈이 열리는 책나무'를 꿈꿨다.
1956년 노점으로 번 돈을 모아 서점 겸 출판사인 동서문화사를 차렸다. 용문고등학교 야간반을 다니던 열여섯 살 때였다. 첫 책 세네카의 '지혜와 사랑'에 이어 10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대망'으로 한국출판사상 공전의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앎의 즐거움'을 출판지표로 세우고 지금까지 3000여 종의 서적을 출판했다. 한국출판문화상, 국제펜클럽상, 조선일보대상을 받았다.
절망했을 때, 꿈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인생이 멋진 이유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중 1%라도 이루어진다면, 꿈은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
빨간 내복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해득·KT 광화문지사 근무 |
수원에 살던 우리 집은 굉장히 가난했다. 남편 없이 꾸려나가는 살림으로 딸을 중학교 보낼 여력이 없던 엄마는 "공장에나 들어가서 엄마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침울해하는 나를 두고 고민하던 엄마는 며칠 뒤 단추 3개가 다 짝짝이인 낡은 교복을 얻어 왔다. 어떻게 해서라도 중학교까지는 보내야겠다고 결심하신 것이다.
겨울방학 동안 나는 시장 골목 한 처마 밑에 사과궤짝을 갖다 놓고 '뽑기' 장사를 했다. 너무 추웠다. 빨간 내복 하나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으로 공부를 했고, 방학이면 또 일을 했다. 1학년 겨울방학 때는 서울로 올라와 오빠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옥상 물탱크 한구석에 석유풍로를 놓고 밥을 했다.
컴컴한 새벽도, 30와트짜리 백열등도, 물탱크를 통해 울리는 내 목소리도 무서웠다. 새벽밥 하기가 끔찍이 싫었지만 등록금이 나온다는 희망으로 버텼다. 설날 같은 명절에는 방앗간 앞에 후추기계를 놓고 가래떡 손님들에게 후추를 갈아 팔았다.
다른 데보다 한번 더 곱게 갈아놓으니 손님이 많아 그 돈으로 엄마와 동생들 내복, 운동화를 사기도 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난 다른 애들보다 왠지 어른스러웠고 침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말하자면 애늙은이였던 것이다.
대학교까지 갈 돈은 없었다. 대신 나는 속기학원에 등록해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1년 뒤 나는 '1급 속기사 전국 1등'이라는 영광을 안고 서울시 공무원이 되었다. 4년 뒤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특채가 됐고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들 둘도 낳아 재미나게 살았다.
올림픽이 끝난 후 KT로 직장을 옮겼는데, 10년 뒤 IMF가 터지면서 남편 사업이 망했다. 집은 경매를 당했고 내 월급도 차압당했다. 순식간에 인생 밑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늘 그러했듯,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조금씩 빚을 갚아가며 작심을 하고 영업사원을 지원했다.
어려움이 자랑은 아니지만, 굳이 숨길 일도 아니기에 구질구질한 내 인생을 재미나게 풀어놓으면 너나 없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영업 현장에서도 내 인생 이야기가 먹혀들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결과 1999년과 2000년 2년 연속 판매왕에 뽑혔고, 2000년에는 통화 선불카드를 자그마치 428억원어치나 판매했다. 사내 연수원에서도 영업 성공 사례 강의를 하게 됐다. 서글픈 내 이야기가 남들에겐 희망을 주는 스토리로 변신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흔 일곱 해 내 인생은 가난과 한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가난과 한숨을 언제나 희망으로 덮고 일어섰다.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녔던 가난과 불행이 지금 나에겐 인생의 밑천이요 희망이다. 지금도 나는 쉼 없이 달린다. 법정스님 말씀처럼, 내 영혼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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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최고의 순간에 금이 간 뼈…
강수진·발레리나 |
제게는 발레가 전부이고, 그것을 다 빼앗길 것 같은 시련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를 저는 '블랙홀'이라고 부릅니다. 스티븐 호킹이 말한 그 블랙홀 말입니다. 그 어두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 때문입니다. 최악의 블랙홀은 1999년 9월에 찾아왔습니다. 그 블랙홀은 결국 저를 무대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운명은 얄궂지요. 그해 봄 저는 발레리나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영예를 안고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 걷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이 찾아온 겁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참았는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제 왼쪽 정강이뼈를 촬영한 사진이 앞에 있었습니다. 선명한 금이 보였습니다. 1995년 다쳤던 부위인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또 발레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쉰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를 미룬 채 춤을 추다 병을 키운 것이지요.
힘들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상으로 춤을 못 추는 시간 동안 "무대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옆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라"고 숱하게 얘기했지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기하지 마라"는 말은 크게 들렸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입니다.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반짝 빛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발레리나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부터 잘랐습니다. 재기의 결심을 한 것이지요.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발레를 배운 뒤 1년 이상 쉰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일 겁니다. 인내심이 없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지만 완전히 주저앉히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것 같습니다.
마침내 저는 2000년 11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복귀했습니다. 첫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박수를 받는 순간 저는 블랙홀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제 몸에서 제가 가장 믿는 게 어딘 줄 아세요? 저를 블랙홀로 몰아넣은 왼쪽 정강이뼈입니다. 뼈가 더 강해졌는지 다시는 깨질 수 없는 곳처럼 느낄 정도입니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튼튼하지요. 견디면 더 강해진다는 믿음을 준 정강이뼈입니다. 그 시련은 제게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남았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도 경제가 안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게 마련이잖습니까. 시간이 약입니다. "포기하지 말자"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을 품고 있으면 블랙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1982년 중학교 때 유학을 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그랬고,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하고 적응하지 못해 울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고 저는 늘 말합니다. 발레와 삶은 다르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금 간 정강이뼈가 제게 알려준 작은 교훈을 이제 여러분께 드립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나를 붙잡던 두 살 민영이의 손
현정화·KRA 탁구팀 감독 |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이용해 어려운 이웃을 찾아 봉사활동을 나가게 된다. 때로는 선수시절의 동료들이, 때로는 내가 지도하는 KRA(한국마사회) 탁구선수들이 동반자가 된다. 독거 노인들을 찾기도 하고 불우한 아이들을 방문하기도 한다.
5년 전 선수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의 한 복지시설을 찾았을 때 두 살짜리 여자아이 민영(가명)이를 만났다. 아이는 심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다리가 굽어서 혼자 걸을 수 없었고 눈도 잘 맞추지 못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장난감과 먹을 것을 주자 그제서야 내게 기어서 오기 시작했다. 손도 정상이 아니었다. 품에 안고 점심과 간식을 떠먹였다. "이 아이는 커서도 혼자 살아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복지시설 사람들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갔다"고 말했다.
오후 6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이는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누워서 발을 구르며 떼를 쓰고 울음을 터뜨리다가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필사적인 그 손 힘이 얼마나 센지, 안타까운 그 자그마한 손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슷한 나이인 내 딸과 아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오겠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섰다.
충남 서산 지곡면에 홀로 살던 한동열(89) 할머니도 잊을 수 없다. 2006년 겨울, 할머니가 살던 야산 중턱 초가집은 눈 무게에 눌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천장도 아래로 휘청 휘어져 있었다. 보기에도 조마조마했다. 방은 한 명이 다리를 펴면 꽉 차는 크기였고 때묻은 그릇과 이불 몇 채가 살림의 전부였다.
반쯤 허물어진 아궁이에 군불을 때 드렸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연기로 모두 눈물만 흘렸다. 수돗물도 없었다. 우리는 눈을 녹여서 마실 물을 만들어 드렸다. 혼자 살면 위험하니 동네로 내려오시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웃으면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라고 했다. 그저 사람이 와줬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다시 올 테니 꼭 건강하시라"고 인사했다. 눈도 귀도 어두운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봉사가 끝나면 나는 분주한 현실로 복귀한다. 훈련장에 가면 선수들의 어설픈 드라이브와 백핸드 수비력이 먼저 눈에 거슬린다. 고함치고 질책하며 선수들을 독려한다. 다가오는 대회 준비에 온 신경을 쏟는다. 어느새 아이도 할머니도 잊는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나는 진정한 봉사를 했던 것일까? 추운 겨울을 맞아 아이와 할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내게 힘겹게 기어 오던 그 아이를, 힘없이 미소 짓던 할머니를 잊고 지냈다. 핑계는 하나, 바쁘다는 이유로. 마음속에서 "이런 일은 힘들고 시간이 없을수록 더욱 애써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메아리가 울린다. 나를 억세게 붙잡던 아이의 손길, 아쉽게 배웅하던 할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이번 겨울엔 양평으로, 서산으로 꼭 다시 가 봐야겠다.
파도가 가르쳐준 교훈 "견뎌내라"
유강호·극작가·미국 서니베일 거주 |
두 아들과 함께 미국 LA에 살 때, 남편이 한국에서 주식투자를 했다가 쫄딱 망했다. 1원도 남지 않고 폭삭 망했다. IMF로 세상이 지옥처럼 변해버린 1998년이었다. 그 충격을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던 나는 무작정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물에 빠져 죽어야겠다."
오아후섬 북쪽에 터틀베이라는 해변이 있었다.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한 바다다. 밤이 이슥할 무렵 정신을 놓아버리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죽는다, 나는.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 울컥한 일이 벌어졌다. 한 걸음을 바다로 들어가면 파도가 나를 뒤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온몸이 멍이 들 정도였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다니, 화가 났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는 백사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그 바다가 나더러 살라고 격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치 나를 세상으로 떠밀어주며 살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기력이 빠진 몸과 황홀한 부활의 의지를 안고 터틀베이를 떠났다.
며칠 뒤 푸나후스쿨이라는 학교를 찾았다. 한 해 수업료가 1만달러가 넘는 좋은 사립학교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다닌 학교다. 해마다 봄이면 푸나후스쿨에서는 축제가 벌어진다. 축제 마지막 날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1달러를 주고 커다란 대봉투를 사면 시장에 나온 모든 것을 욕심껏 봉투에 담아갈 수 있다.
숟가락, 신발, 옷, 냄비, 밥솥, 프라이팬에 아보카도와 파인애플까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자들이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은 것들이다. 가난한 나는 거기에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그 속에는 희망도 들어 있었다. 이제 다시 사는 거다.
그리고 무작정 하와이의 한 방송국을 찾아갔다. 한국에서 20년 동안 방송작가로 일한 경력을 보고 일자리를 줬다. 마침 한류 열풍이 하와이에 상륙한 때라, 하와이대학에서 드라마 강의도 맡았다. 그때 한 교수가 하와이에 온 이유를 물었다.
"너무 절망해서 죽으려고 왔다"고 했더니 그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보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하라"고. "절망의 밑바닥, 그거 언제 가보겠는가.
게다가 당신은 작가가 아닌가. 인생의 밑창을 경험해야 좋은 글도 나오는 것이다"라고.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찔렀다.
죽으러 갔던 섬에서 나는 5년을 더 살게 되었다. 아들들은 LA에서 공부를 마치고 성인이 되었고, 나는 제2의 생을 하와이에서 창조하며 살았다. 지금은 실리콘밸리 IT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큰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혹독한 비바람 지나고 나면 절망도 추억이 된다.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축복이고, 한없이 고맙다.
역경이 오면 역전을 노려라
김성근·프로야구 SK 감독 |
나는 일본에서 18년을, 한국에서 48년을 살았다. 섭섭하게도 '반(半) 쪽발이', '일본식', '재일교포'라는 꼬리표가 지금까지 붙어 다닌다.
일본에 살 때는 가난했다.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보탰다. 고3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처음 새 옷이란 걸 입어봤다.
그 가난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홀로 조국 땅을 찾았지만, 선수생활 3년 만에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생명이 끝나버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모국 생활 48년은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세월이 흘러 올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지난해에 이어 2연패다. 구단에서도 3년간 감독 계약을 연장해 줬다. 어느 틈에 나는 "이만하면 김성근이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인정받았구나" 하는 자기 만족에 빠져 살게 되었다.
며칠 전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은 이재원 선수 병문안을 위해 일본 도쿄에 갔다. 전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창밖에 어린 야구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던 단어가 스쳐갔다. 바로 '초심(初心)'이다. 나는 나의 원점이 어디였는지, 어떻게 야구를 하면서 굶주림을 견뎌왔는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창에 자만심 가득한 내 얼굴이 비쳤다. 그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 직업은 감독이다. 감독의 임무는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의무와 책임이요, 사명감이다. 감독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감독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든 싸움을 받아들이고 도전을 거듭해온 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10년 전 쌍방울 감독 시절, 나는 신장암 선고를 받았다. '선고'를 받던 날 나는 군산 구장에 가서 경기를 치렀다. 한 달 동안 아무 내색 없이 벤치를 지키다가 휴가를 내고 콩팥 제거 수술을 받았다. 마취 직전 간호사가 말했다. "어서 나아서 경기장에 돌아가셔야죠."
수술이 끝나고 나는 의사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실에서 일어나 걸어다녔다. 수술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기에서 패배하면 야구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으로 후유증을 이겨내고 구단으로 복귀했다.
지난 9월 프로야구 통산 1000승을 달성하던 날 이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10년 동안 사람들은 내가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줄 알고 있었다.
39년 감독 생활 동안 나는 패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야구인생 동안 10번이나 맡은 감독이지만, 그 중 7번은 불명예 퇴진이었다.
2002년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도 구단과 불화를 빚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패전과 실패는 감독의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 친구들이 토대가 되어 더 발전하는 법이다.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 대책을 강구하고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갖고 도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내가 잊고 있던 초심이었다.
역경과 고난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은 역전을 위한 좋은 찬스다. 세상이 힘든 때다. 나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어떤 고난이 와도 다시 기회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한다.
‘삶의 소중함 일깨워준 '봉사명령'
최강타·회사원 |
중소기업에서 일하다가 회사가 어려워져 사직을 하고 3개월 정도 실업자로 지냈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한 친구가 동업을 제안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일확천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불법 성인오락실을 열었다.
두 달도 못 돼 경찰 단속에 걸렸다. 졸지에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80시간까지 선고받은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 10월, 법무부 서울동부보호관찰소에 신고하고 2시간 정도 안내교육을 받은 후 강동구 성내동에 있는 성내복지관에 배치됐다. 짜증이 났다. 보호관찰소 직원에게 시비를 걸며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직원들과 함께 봉사를 나갔다. 서른 집을 돌며 독거노인, 어린 가장들, 장애인 가정을 찾아 도시락을 배달했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찾아가 목욕 봉사를 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볕도 들지 않는 지하 방에 혼자 사는 어르신 집이었다. 방문을 열기 전부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악취가 풍겨왔다. 불편한 몸에 부축해줄 사람도 없는 탓에 그만 방 안에 용변을 보신 것이다. 청소를 하고 준비해온 목욕 도구로 몸을 씻겨드리는데, 거죽밖에 없는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런 어르신께서 떠나는 우리에게 빵과 사탕을 쥐여주는 게 아닌가. 복지관에서 준 걸 아껴뒀다가 내놓은 것이다. 뭔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세상에 시비를 걸던 내 마음이 180도 바뀌었다. 이게 아니구나!
도시락을 받고서 고맙다고 웃던 5학년짜리 여자아이 은미(가명)의 웃음도 그랬다. 한 칸짜리 반지하 방에서 교통사고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6살, 4살짜리 동생을 보살피는 소녀 가장이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받으러 들른 은미는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다"며 씩씩하게 웃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박씨와 소아마비 장애인인 아내 부부도 반지하 방에 살았다. 폐지 수집과 공공근로로 생계를 꾸리는 가족이지만 두 분 모두 우리 손을 잡으며 활짝 웃었다.
밖에 나갔던 분들도 점심 무렵이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있었다. 우리가 배달한 도시락으로 세 끼를 때우는 분들도 많았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 일마다 왜 이리 안 풀리느냐고 세상을 원망하며 불평 불만을 일삼던 내가 한심했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어렵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분들을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점심 때가 되면 도시락을 기다리고 계실 이웃들을 생각하게 됐다. 특별한 것도 없는 도시락이지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라고, 봉사를 마치고 며칠 뒤 예전에 일하던 회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다시 일을 하게 됐다. 앞으로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
‘유리벽 사이에 둔 "사랑해"
김계용·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차장 |
내가 인천공항 출국장 내 통과여객 카운터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한 여자 승객이 입국 거부를 당했으니 선양(瀋陽)행 항공기로 강제출국시키라는 출입국사무소의 연락을 받았다. 입국장으로 내려가보니 중국교포로 보이는 50대 여자 승객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딸을 만나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서 노무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만나려고 입국하려다 거부당했던 것이다.
출입국 규정에 따르면 일본 비자가 있는 중국인은 한국 비자가 없어도 입국이 가능하다. 그러나 규정은 규정일 뿐, 최종 판단은 출입국 담당 직원이 하게 된다. 담당 직원은 그 아주머니의 불법체류를 염려했던 것 같다. 당시는 세계적인 테러 위험으로 공항 입국심사가 무척 엄격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허리를 다쳐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약을 사 들고, 몇 년 만의 부부상봉을 꿈꿔왔던 아내의 소망은 그렇게 꺾여버릴 판이었다.
다급해진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입국을 시켜달라고 애원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입국이 거절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선양행 항공 스케줄을 조정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는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중엔 "입국은 안 해도 좋으니 입국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 얼굴을 1초 만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흐느꼈다. 아픈 남편을 보기 위해 힘든 걸음을 한 아내가 쓸쓸히 되돌아가게 된 모습을 보자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한항공 라운지가 있는 공항 4층 복도 왼쪽 벽에는 큰 통유리가 설치돼 있다. 그 유리를 통해 보세구역 바깥쪽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아주머니 손을 잡고서 라운지가 있는 복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무전기로 다른 직원에게 "입국장 밖에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모시고 바깥쪽 4층 식당으로 오라"고 부탁했다.
몇 분 뒤 부부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휴대전화로 서로를 연결해드렸다. 마치 교도소에서 수화기로 대화하는 장면 같았다. 부부는 보자마자 눈물을 주르륵 쏟았다. 그들의 첫 마디는 "사랑해"였다. 지금 생각하면 몸에 닭살(?)이 돋는 대화였지만, 당시에는 그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슬프고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밥은 드셨어요?" "…." "허리는 어때요?" "…." 말없이 울기만 하던 남편이 대답했다. "… 내 걱정 마라." 옆에서 지켜보던 직원과 나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입맞춤도 포옹도 없이 20여분간 짧은 대화를 나누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그래도 얼굴을 봐서 위로가 되었다"며 우리에게 고마워했다. 그 고마움의 말에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가끔 두 분을 만날 수 있게 도와드린 4년 전의 일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어려움이 닥칠수록 부부란 참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두 분이 아직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면서 살고 계신지 궁금하다.
‘비켜라, 암(癌)!… 내가 간다
장형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
올해는 나의 안식년이다. 요즈음은 교수들이 '안식'하는 해가 아니라 연구에 더 집중해야 하는 해라고 '연구년'이라고 불린다. 2001년 첫 연구년을 보스턴에서 보낸 후 오래 전부터 난 두 번째 연구년을 준비했다.
공동 연구할 교수에게서 초청장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조건의 연구비까지 확보해 놓았다. 그래서 올 여름 난 미국에 가서, 지금쯤은 샌디에이고에서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보이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 유방암이 재발한 후 이제까지 수십 차례 받은 항암치료가 별 효과가 없어 다시 새로운 약제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말에 난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미국에 간들 '연구'는커녕 매일 백혈구 수치, 간 수치에 전전긍긍하면서 소중한 연구년을 허무하게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난 내내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미스터 김에게서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작년부터 가끔씩 내게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담을 청하는 독자인데, 지난 여름 실직 후 최근에 직장을 구했으나 다시 그만두게 되었고, 실연까지 당했다고 했다. 이번 이메일은 사뭇 심각하게 들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늘 제게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이제 저는 가망 없는 희망을 버리려고 합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비파를 타며 언젠가 배가 와서 구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녀가 타는 음악은 아름다운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차올라 섬이 잠기고, 급기야는 소녀가 앉아있는 곳까지 와서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
난 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이 차오른다면, 그럴 바엔 부르는 게 낫다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배가 올 수도 있고, 공중을 날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빠져 소녀가 죽지 않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이에 대해 미스터 김은 짧은 답을 보내왔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희망―다시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희망을 연구한다고? 낯선 표현이 문득 마음에 와 닿았다. 맞다, 나의 이번 연구년에는 희망을 연구해야지.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미스터 김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그래서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내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직’으로 빚은 동동주
황주홍 전남강진군수 |
강진군 병영(兵營)주조 김견식 대표는 올 71세 술공장 사장이다. 처음엔 '남의 집살이'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게 57년이었다. 주인의 권유로 1986년 주조장(酒造場)을 인수, 오늘에 이르렀다.
한평생 술 빚고 술 팔며 살아왔다. 경영, 마케팅, 홍보, 이런 거 몰랐다. 연간 매출은 늘 1000만, 2000만원이었다. 인동(隣洞)에 차츰 입소문이 나면서 3000만, 4000만, 마침내 5000만원대로 올라선 게 재재작년이었다. 재작년 8000만,
작년엔 1억원까지 돌파했다. 금년 말 예상은 1억8000만원이다.
별거 아닐 수도 있고 별거일 수도 있는 실적이다. 내용은 '섬싱 스페셜'이다. 유례없는 불경기라고 난리인 세상 아닌가.
병영주조는 오히려 유례없는 호경기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불경기라 해서 다 안되지 않고, 호경기라고 다 잘되는 것 아니다. 호경기에도 문닫는 식당 있고, 불경기에도 돈 버는 식당 있다. 소풍 간다고 다 보물 찾는 것 아니고, 장대비 쏟아진다고 다 옷 젖는 것 아니다. 세상은 저 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가 '전남에서 가장 순박한 분'으로 보인다. 속을지언정 속이지 못하는 성격 그대로 산다. 삶에 과장이 없다. 늘 같은 표정으로 소년처럼 웃는 게 전부다. 고스톱도 모르고, 고개 갸웃하게 하지만 술도 모른다. 오직 술 빚는 일 위해 평생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온 그다.
오늘 이 작은 성공의 가장 큰 성장동력이 바로 여기다. 거짓과 위선과 탐욕과 오만이 판치는 이 땅에서 그는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와 같은 존재다. 아닌 것 같지만, 정직과 성실 그리고 겸손이야말로 시장 감동의 핵심 원리다.
그는 한 번도 수입 쌀을 쓰지 않았다. 왜 강진 쌀만 썼느냐는 물음에 "처음부터 판매량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딱 맞지는 않지만 공명을 일으키는 말로 답변하는 그다.
대기업은 매출의 10% 내외를 연구개발(R&D)에 쏟는다. 그는 매해 30% 이상씩을 써왔다. 형언키 어려운 집념이자 열정이다. 불경기를 비웃는 성장의 비결이
또 여기다.
우량기업이라면 재(再)구매율이 70%를 넘어야 한다는데, 병영주조의 경우 한번 마셔본 사람이 또 구입해가는 비율이 70~80%쯤이라고 그는 짐작한다. 일본으로의 수출 길도 '김견식 동동주'에 대한 입소문이 일구어낸 개가였다. 지난달 복분자 막걸리와 동동주를 6000만원어치 선적했는데, 앞으로 연간 10억원 정도 수출을 예상하고 있다. 그쪽 소비자들 반응도 좋다는 소식이다.
일본엔 100년 이상 된 기업이 1만개인 반면, 우린 50개도 안 된다. 수만 개미군단 장인(匠人)들의 묵묵함에 일본이 있다면, 10년 내리 한 우물 파는 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 우리가 있다.
대(아들 영희씨)를 이어 52년째 주조 외길을 걷는 그는 우리 시대 장인이다. '장인 김견식'은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한국사회에 작지만 뚜렷이 빛나는 별이다. 그의 정직이 빚은 동동주 맛은 대한민국 경제회생을 상징하는 견고한 희망이다.
"저도 빙판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울었죠" 김연아·피겨스케이팅 선수 |
안녕하세요, 김연아입니다. 저는 지금 전지훈련지인 캐나다 토론토에 와 있어요. 한국에서의 첫 국제대회(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를 마친 지 벌써 보름이 넘었네요. 2위를 하고 난 뒤에 '수고했다', '아쉽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왜 아무도 축하한다는 말은 안 하지? 2등은 축하받으면 안 돼?"라고 하자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네가 어떤 기분일지 모르니까 조심스러워서들 그러는 거지"라고 하셨어요.
사실 지난 여름 베이징올림픽을 보면서 부담이 많이 됐어요. 금메달 딴 선수들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뉴스엔 1등만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들이 연속해서 스쳐가더라고요. 이번 파이널을 준비하면서 '괜찮아. 여느 대회랑 똑같은 거야'라고 수없이 되뇌었는데, 생각보다 더 긴장했나 봐요.
하지만 막상 키스 앤 크라이 존(코치와 함께 점수를 기다리는 자리)을 빠져나오는 순간에는 실망이나 후회 같은 온갖 감정에 앞서 '또 하나 끝냈구나' 하는 생각뿐이더군요. 브라이언 오서 코치님은 아쉽지만 좋은 수업이 되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저는 스케이팅을 사랑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에요. 연습할 때는 힘들고 짜증나고 눈물 나는 시간이 더 많고, 대회 때는 소름 끼치는 듯한 긴장감에 빠져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연습 중에 깔끔하게 점프를 성공시키는 순간, 마음먹었던 대로 얼음 위를 활주하는 순간,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나왔다고 믿는 순간에는 비록 짧지만 훈련의 피로를 모두 날리고도 남을 만한 쾌감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 와요.
연기가 끝나고 '그래, 잘했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정말 날아갈 것 같죠.
그래서 솔직히 제가 1등을 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면 저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아요.
이번에도 2등이었잖아요. 1등을 위해서 스케이팅을 했다면 훨씬 전에 그만뒀을지도 몰라요. 다른 선수들처럼 저도 큰 부상이 있었고, 예전엔 부츠 문제로 선수 생활을 포기할 뻔한 일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꼭 1등을 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연기를 할 때 떠오르는 그 즐거움, 발끝의 느낌을 잊지 못해서 다시 얼음 위로 돌아갔던 것 같아요.
멀리 캐나다에서 훈련하다 보니 잘 몰랐는데,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어렵고 그래서 10여 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힘든 분들이 더 많아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속에서 저와 제가 하는 피겨스케이팅에서 많은 분들이 힘을 얻으신다니 더 보람이 느껴져요.
저도 요즘 TV나 인터넷으로 '김연아가 어려운 여건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뉴스나 캠페인 광고를 봤어요. 그걸 보면서 정말 경제가 어려워졌구나, 힘드신 분들이 많구나 하는 걸 깊이 느끼고 있어요.
우리 운동선수들이 경험하는 어려움과는 분명히 다르겠지만, 얼음판 위에 넘어져 눈물 흘렸던 시간들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예전의 제 마음처럼, 힘들어 하시는 분들의 어려움도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가 발끝의 희열을 맛봤던 것처럼 여러분들께도 힘든 시간 뒤에 맞을 기쁨이 어서 오기를 기도 드릴게요. 다음엔 더 아름답고 멋진 연기로 여러분께 또 힘을 드리고 싶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첫댓글 행복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