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는 선주(宣州) 안국현(安國縣)사람으로, 속성은 해(奚)씨이다. 13세에 학교에 들어가 유학을 배우다가 16세에 동산(東山) 자운원(慈雲院) 혜제(慧齊)선사에게 출가 삭발하고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스님이 살고있던 송대(北宋 960∼1127, 南宋 1127∼1279) 불교는 당대(唐代, 618∼906) 불교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창조적이며 풍부한 사회적 활력을 가지고 당대(唐代) 불교를 이끌었던 조사선은 북송 시대에 이르면 새로운 발전을 하지 못하고 당대 불교의 범주안에서 맴돌며 이전의 형식만을 답습하게 된다. 12세기의 남송은 선불교가 가장 활발하게 꽃피었던 당(唐)과 오대(五代, 907∼960)를 지나 성리학(性理學)이 시대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주희(朱熹, 1130∼1200)를 대표로 한 이 시대의 성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불교가 이미 시대를 이끌어 가는 힘을 상실해 가는 시대의 인물이다. 스님 자신도 시대적 주도권이 이미 성리학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양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님은 성리학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세계 내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포기하고, 송대(宋代) 불교의 한계 내에서 현실세계의 심지(心地)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장악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그의 이러한 의도는 여러 가지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우선 불교 외적으로는 첫째 성리학에 대해서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유교적 경향에 병립하는 불교를 사대부들을 통하여 펼치고자 한다. 둘째, 섣부르게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불교 정체성(正體性)의 차원에서 불교의 이론을 들어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유교와 다른 불교의 이론의 틀을 성리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지적 토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에게 설명한다. 넷째,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불교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강력하고 혁신적이고 생동감 있는 즉세간적(卽世間的)인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한다. 다섯째, 불교 내적으로는 묵묵(默默)히 반조(返照)하는 것만을 강조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이라고 생각되는 묵조선(默照禪)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자세를 나타내면서 체제 내의 선명성을 주장하고 있다.
송대 숭유억불 속의 종고 스님 성리학 주도의 현실 딛고
불교가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바로 깨닫는 간화선
주장스님은 설파한다. “요즈음 일종의 머리 깍은 외도(外道)가 있어서 자기(自己) 눈도 밝히지 못하면서, 다만 그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고 쉬라’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이 쉬어 간다면 모든 부처가 세상에 출현(出現)하더라도, 또한 쉴 수가 없어서 더욱 더 마음으로 하여금 미혹(迷惑)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세간(世間)을 떠나서 따로 불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 일상성(日常性)을 주로 하는 중국 조사선의 특징이었다고 보고, 스님은 이러한 본래적 입장을 묵조선(默照禪)이 멀리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스님에게 있어서 평상시에 도(道)를 배운다는 것은 다만 역순경계(逆順境界)에 맞닥뜨려서 쓰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그 해답으로서 스님이 한결같이 권하고 있는 방법이 곧 간화(看話)이다. 다만 화두(話頭)를 잡아 붙들되, 여러 가지 승묘(勝妙)한 경계(境界)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여러 가지 악업경계(惡業境界)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마음은 두려움이 없으며, 날로 씀에 인연(因緣)따라 방광(放曠)하여 마음대로 소요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간화선에서의 선(禪)의 의미는 상당히 확장되어 더 이상 몸의 좌선(坐禪)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주위 환경이나 자세에 구애받음 없이 다만 화두(話頭)를 붙잡아드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하게 된다. 따라서 스님의 간화선에서는 ‘몸의 좌선(坐禪)’에 국한되기 쉬운 ‘좌선(坐禪)’이라는 용어보다도, 오히려 화두를 참구한다는 의미에서 ‘참선(參禪)’이라는 용어가 보다 보편화되어진다.
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
[불교신문 19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