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오늘 모처럼 친구를 만났다
그가 나를 기다리는 곳은 주로
장막 저편이나 종점
이글거리는 모닥불이 춤추며 하늘로 올라
북두성으로 박히는 신비한 축제의 마당
너는 오늘도 검정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
여전히 말이 없구나
말없는 언어로 말보다 진한 진실을 말하는 너는
막다른 곳으로 나를 몰아세우곤 말없이 돌아선다
두려움이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밤을 건너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서 긴 들숨으로 겨우 가위눌림을 벗어나지만
아직도 우리의 아침은 차가운 쇠붙이로
서로에게 시린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친구는 언제나 먼저 이별을 말한다.
돌아서는 친구의 아련한 뒷모습은
은은한 유백색 향연
그 익숙한 향내만큼이나 우리의 삶은
길들여진 몸짓으로 낯선 거리를 걷는 것이냐
나는 가끔 사람이다가 사람이 아니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나는 가끔 사람이다가 사람이 아니다 오늘밤에도 저렇게 별빛은 푸르건만 손에 든 서느런 묵직함만큼만의 희망을 움켜쥐고 저 무원의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나는 가끔 사람이다가 사람이 아니다 깔깔대던 아이들과 정다웠던 이웃들과 친구들과 가축들 그리고 넉넉하고 다소곳하던 곡식들을 저 아래 평원에 팽개쳐 버린 나는 가끔 사람이다가 사람이 아니다 정다운 친구들은 하나 둘 바람 따라 별빛처럼 스러지고 사악한 칼바람에 찢기운 채 펄럭대는 명분이 되고자 하는 나는 가끔 사람이다가 사람이 아니다.
해질녘
청무밭 가에서 노닐던
산 그리메
지쳐 돌아간
저녁 어스름
너를 보내고
굴뚝새 낮게 날아
돌담을 넘는데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진 길
버겁다 가르치는 바람
강변을 스쳐 목쉰
사슴의 울음으로
산억새 머리채
풀어 헤치네
농사꾼 영구
초등학교 졸업이 최고 학력인 영구
여남은 해쯤 노가다 벽돌공으로 도회지 떠돌다
스물 댓 어스름 고향으로 돌아왔네
마을 앞 논다랑이에 축사를 짓고
아내만큼이나 듬직한 누렁소 댓 마리 들여 놓더니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농협빚으로 들여와
마을 앞 들판 자기 논인 양 갈고 다니네
뜨거운 장천 숯검댕이 얼굴 되었지만
새벽부터 토해대는 트랙터 가래기침 소리에
앞산도 어절씨구
틈틈이 벽돌공으로 도회지 나대지만
마을 어르신네 돌아가실라치면
만사를 제쳐놓고 두 팔을 걷어붙인다네
한 때는 한스러워 한 삼일씩 술을 마시고
한 삼일씩 밥상마저 물리고 방구석에 죽어지냈네
같은 고을서 시집 온 순박하고 일 잘 하는 아내
참고 참다 집 나간 적 있네
마을 어르신네 하관식 하던 날
노래인 듯 통공인 듯 대매꾼 소리
하늘 향해 크게 한번 토해 놓더니
베트남 필리핀 처녀 사다가 장가들다니.....
니들은 이 지긋지긋한 땅 파먹는 일일랑 말아라
식모살이 하더라도 서울살이 낫다
고무신 공장 다니더라도 부산살이 낫다
자식 교육 잘 못한 부모가 잘못이다
난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 하지 않네
쉬엄쉬엄 공부하다 안될 성싶거든 애비와 함께 농사를 짓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나 죽으면
이 땅이며 짐승들 다 무슨 소용이여
그리하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릴 적부터 농사일 조금씩 가르친단다
순진하여 세상 탓이라 하지 않고 부모 탓이라 하네
목격자를 찾습니다
너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하도
날처럼 예리한 눈매의 들고양이였는지
아니면 갖은 아양과 교태를 부리던
암너구리였는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지금
햇살 빗긴 호젓한 아스팔트 위
진저리나게 검붉은 속살을 대로에
질펀히 풀어 놓다니
쾌속 질주라던가
생체 방지턱이
그렇게 부끄러운 속살까지 내보이며 거꾸러져 절규하는 현장을 보았다
꽃이 진 자리
어느 시인이 열매는 꽃이 남긴 상처라 했다.
내 손바닥에 새겨진 흉터에서는 뒷집 순옥이 누나에게서 나던 댓잎 냄새가 난다.
풋내 나는 열여섯 살 순옥이 누나는 서울 부잣집으로 식모살이 간다고 좋아라 했다.
신작로에 안개 같은 흙먼지 일으키며 서울로 갔다.
가끔씩 명절 때나 볼 수 있던 누나는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구로공단에 취직했다는 소식 들은 지 삼년 나던 설 명절 누나는 분홍치마 남색저고리 입고 고향마을 부모님께로 왔다.
자궁에 부끄러운 꽃을 품고 왔다.
그 아이의 아버지 될 사람과 함께 왔다.
그러나 꼬박꼬박 보내주는 큰딸의 월급을 받아들고 좋아라하던 누나의 아버지는 용납치 않았다.
누나는 눈물을 훔치며 고향마을 모퉁이를 채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리 준비해 간 농약병을 입에 물었다.
누나는 그렇게 갔다.
꽃이 진 자리에 상처는 남지 않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도 그날 밤으로 마을을 떠났다.
냇가에서 멱을 감다 유리병 조작에 갈라진 내 손바닥 상처를 헝겊허리띠 풀어 싸매주던 풋풋한 향내가 나던 누나는 그렇게 갔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록해야 할 상처자국이다.
꽃이 진 자리에는 상처가 남는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서른한 살 지아비와 서른세 살 지어미에 곧 태어날 소생까지를 모두 오십 냥에 판다는 내용이 적힌 누렇게 빛바랜 문서에는 깔끔한 해서체 붓글씨 밑에 내 손바닥만 한 손바닥 도장이 생생히 찍혀 있었다. 내 나이 서른한 살에 스물네 살 신부를 맞아 태어날 소생을 꿈꾸며 호적등본 떼어 제일 큰 옥도장 꾹꾹 눌러 찍고 하늘을 우러러 지아비 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유리 진열장 너머에 슬픈 표정으로 박제되어 있던 젊은 친구가 갑자기 내 멱살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것이었다.
난 어찌되어도 좋다 난 어찌되어도 좋다 아내마저 어찌되어도 좋다 그러나 그러나......
그땐 몰랐네 미처 몰랐네 도장 찍어 갈음한다는 것의 참다운 의미를
다시 늑대가 된 들개
- 서인환 선생님을 그리며
처음에는 늑대였다.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면서 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화라 부른다.
늑대가 낳은 새끼는 늑대 새끼다.
개가 낳은 새끼는 개새끼다.
늑대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한 무리의 들개가 있다.
사람들의 마을을 떠나온…….
그 중 어느 들개가 말했다.
우리는 본래 늑대였다.
사람들에 의해 개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다시 늑대가 되기 위해 들개가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어. 우리 스스로를 위해,”
떨리는 듯도 하고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목소리 들린다.
지금도 나지막하게 들린다.
우리의 우두머리가 우리 들개무리가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린 명예로운 결단을 두고 모두가 비난할 때 그가 한 말이다.
우리 무리는 정의롭고 용맹했으나 상대편보다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한 판의 피비린내 나는 시간이 지나고 치명적 상처로 운명의 갈림길에 선 예의 들개가 말했다.
이것이 곪은 상처를 치유하는 아주 좋은 약이다.
꿀풀을 가리키며…….
떨리는 듯도 하고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목소리 들린다.
지금도 나지막하게 들린다.
몇 해 전 그와 나 또 몇몇이 따사로운 오월 어느 날 산야초가 어우러진 산비탈로 난 길을 함께 걸으며 그가 한 말이다.
도른도른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또 얼마간 시간이 흘러간 뒤 그를 만났다.
외로운 모습으로 들길을 걷고 있는…….
몹시 지치고 허물어진 모습에서 지난한 과거를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원시의 숲이 숨 쉬는 시베리아에 가면 나을 수 있겠지! 다시 늑대가 될 수 있겠지!”
지금 그는 떠나고 없다.
사랑할 날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어디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한 마리 새가 내게로 날아왔다.
아득한 거리로부터 들과 강을 건너 날아왔다.
꿈속에선지 아니면 우주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것은 내 몸 구석구석을 들쑤셔 불덩이로 이글거리게 하는가 하면 조각조각 해체하여 헝클어 놓는다.
퀴퀴하던 공기를 순식간에 정화하여 사각사각 쏟아지게도 한다.
때로는 생명수처럼 메마른 세포들을 깨워 설레게 하고 도솔천의 강물이 되어 요동치게도 한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제 희디흰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바람이 인다.
어린 시절 하염없이 소망하고 동경했으나 지금까지 아스라이 잃어버렸던 아련한 꿈이 되살아난다.
아! 이제 새로운 세상이 처음 열리고 나는 그 위로 난 최초의 길을 걷는다.
이 새가 언제 날아가 버릴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날까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권태
꽃이 아름답다는 말은 권태로운 인간이 지어낸 거짓말
본래부터 아름다운 것이란 없었다
다만 신이 빛과 조화로움이 있으라 했을 뿐
의지와 목적은 인간의 특권 인간의 욕망
인간의 오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권태로움을 정의로 치환해본다
나는 권태로움을 열정으로 치환해본다
나는 권태로움을 우정으로 치환해본다
나는 권태로움을 쾌락으로 치환해본다
나는 권태로움을 사랑으로 치환해본다
아아 참을 수 없는 이 사피엔스의 조화로운 권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