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문학의 의미와 기능 이병훈 (한국낭송문학회장) 1. 시작하며 최근에는 ‘문학의 위기’ 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것은 문학이 갖는 문자매체적 한계를 지적하여 하는 말일 것이다. 사실 컴퓨터와 영상매체의 발달로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학이 문자매체적 한계를 넘어 독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는 없을까. 그 한 방법으로 문학의 낭송과 공연예술화라는 대안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아직까지 ‘문학의 낭송’과 ‘낭송 문학’의 용어정리가 분명치 않는 시점에서 먼저 낭송을 위한 문학작품을「낭송문학」이라고 규정한다. 「낭송문학」은 문학작품을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동시에 구사하며, 음율적인 감정을 불어넣어 소리 내어 읽거나 외우는 가장 효율적이고 복합적인 문학형식이다.「낭송문학」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위한 언어예술로서 낭송을 통하여 문학이 독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성숙시키는 의미 있는 문학예술행위이다. 최근의 문학경향은 시, 수필, 시조낭송, 시노래, 시극, 시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양태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음악이나 미술 등 다른 영역의 예술과 결합하여 연출됨으로써 단순한 낭송 차원을 넘어 무대예술로의 길을 모색하는 실험적 공연문학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종합예술의 전문성을 추구하며 독자(관객)에게 문학의 감동을 주기위한 「낭송문학」의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문단 일부에서 「낭송문학」이 문학의 본질에 부합하느냐를 놓고 여러 가지 주장이 있고 논란도 없진 않지만 이미 경향 각지에서 시, 수필 등의 낭송공연과 낭송문학회가 결성되어「낭송문학」의 창작 및 연구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추세다. 2. 낭송문학의 기원 문자이전의 이야기는 음성언어(말)에 의해 전승되다가 문자의 발생과 더불어 서서히 구조화 되어 갔다. 말하자면 인간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감정이나 생각, 경험 등을 표출하고 전달하는데 음성언어와 구전(口傳)을 이용해 왔다. 제의(祭儀)에서 비롯된 서사문학은 고대사회에 와서는 흥미와 놀이적 양식이 추가되어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로 낭송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구술문화의 신성성과 다양한 상상력이 감정에 활력을 불어 넣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낭송되거나 구전된 이야기가 문자 발생과 더불어 문학(文學)이라는 용어로 정리된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의 전통은 주술적인 음성언어에서 그 근간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을 낭송하는 행위는 문학(이야기)을 전달하는 본질적 행위로 볼 수 있다. 흔히 서양의 서사시의 전형(典型)으로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작품『일리아드』와『오디세이아』도 사실은 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나 전설 등을 문학적 재능으로 다듬고 재창조하여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의 원형비평(archetypal criticism)에서는 전승된 이야기의 기본구조를 설화(說話: 신화, 전설, 민담)의 모티프를 차용한 것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설화가 노래로 또는 고대소설로, 근대소설로 그 형식은 변형되지만 서사적 구조 내에서는 그 원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요즘 희곡에서 구전문학(口傳文學)이 문자화 되거나 재창조되어 새롭게 쓴 것들이 적지 않다. 이런 구전문학이 갖는 신성성은 바로 음성언어가 갖는 마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낭송문학의 의미와 기능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몸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행위에는 음성언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음성언어가 75%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것은 입과 귀를 통한 말이 인간의 보편적 의사체계를 담고 있음을 의미 한다 동화(童話)의 예를 들어 보겠다. 할머니 무릎에서 듣는 이야기는 바로 상상 그 자체다. 음성에 실려진 이야기는 줄거리를 넘어 마법적 언어로 확장되면서 성스러움까지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음성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음성이 갖는 무한의 창조성이다. 흔히들 음악(성악)이 가장 직접적인 예술이라고 정의한 것이나 사람들이 연극을 보며 전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음성이 갖는 신성성은 문자언어의 해석적인 느낌을 뛰어 넘는다 할 수 있다. 괴테는 자신이 가장 귀중한 것을 배운 것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이 아니라 어머니가 읽어 준 동화였다고 한다. 위에서 음성이 갖는 기능적 측면을 살펴 본 바와 같이 문학에서 음성매체의 역할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살아있는 문학의 매체로서 낭송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낭송문학」은 기존의 문자매체를 통한 문학작품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낭송문학」은 작품의 가치와 의미전달을 활성화시키며 작품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도와주고 보다 큰 감동과 공감대를 엮어주는 기능까지 한다. 또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통한 정신적 환기성도 높여 준다. 특히「낭송문학」은 문학작품을 단지 눈으로 읽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귀로 들으며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낭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학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공유할 수 있다. 낭송을 통한 문학의 심미적 기능이 독자들 사이에서 동시에 어우러진다면 문학을 접하는 독자들의 즐거움과 행복감은 배가 될 것이고 그 의미나 가치는 더욱 클 것이다. 4. 낭송문학의 갈래와 영역 필자가 처음 수필낭송을 시작하니 ‘산문은 운문보다 길어서 낭송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는 ‘장편소설이 단편소설보다 길어서 잘 보겠느냐’와 ‘소설이 시보다 길어서 쓰기가 더 어렵다’라는 질문과 다를 바가 없다. 문학은 각 갈래마다 특성을 갖고 있고 그 양식과 기능이 다르듯이 산문도 낭송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환경과 조건에 따른 적합성의 여부와 낭송으로 작품의 가치를 증가시킬 수 있는가라는 효율성을 따져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시, 수필, 소설, 희곡, 시조, 동시, 동화, 문학평론, 콩트, 논설, 칼럼, 등 모든 갈래의 문학이 「낭송문학」으로 가능하다. 「낭송문학」의 영역에서 공연문학으로서 종합 예술적 장치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찌 보면 문학작품은 원석에 불과하고 원숙한 제련의 솜씨가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학작품에 맞는 연출이 작품감상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다양한 예술의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낭송문학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예술의 종합적인 운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하자면 작가, 낭송자, 연출자가 일체가 되어야만 제대로 된「낭송문학」이 탄생한다고 할 수 있다. 「낭송문학」이 예술의 한 갈래로서 새로운 영역을 자리 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다양한 형태로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5. 낭송문학의 활성화 : 수필중심으로 일반적으로 시(詩)가 「낭송문학」으로서 적합하다는 이유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시 다음으로는 수필이 낭송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대개 원고지 12매 정도의 분량이므로 소요시간으로 볼 때 「낭송문학」으로 매우 적합하다. 특히 최근에는 짧은 수필(원고지5매 수필, 3분 낭송 수필) 등의 창작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다. 전통수필의 긴 내용은 독자의 기억을 둔화시켜 지루한 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낭송의 효과를 반감시킨다 할 수 있다. 낭송에 적합한 수필의 특성이란 짧은 길이로서 작가의 사상이나 의도가 잘 정제 되어 있고, 구성이 치밀해야 하며, 문장은 간결하고 함축성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작품 속에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 신선한 언어 등 독자의 감동과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요소를 충분히 갖춘 수필이라면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낭송문학」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필은 픽션이 거의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납되더라도 부득이한 경우에 극히 일부만 허용된 특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나 소재가 우리의 삶에서 흔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요소가 독자에게 진실성과 일체감, 더 나아가 감정이입을 느끼게 하여 카타르시스를 불러오게 한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문학이 갖는 치유적기능(주술적 기능)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수필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문학이고 호소력이 높은 문학이다. 더군다나 일시에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어 문학의 대중화를 이끌 수 있는 한 방편이 되므로「낭송문학」에서 수필은 더욱 좋은 대상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상징성과 비약성이 많은 시보다도 훨씬 쉽게 이해되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이밖에도 희곡이나 문학평론, 콩트, 논설이나 칼럼 등도 그 낭송 방법이나 진행을 적절히 한다면 얼마든지「낭송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흔히 이러한 것들은「낭송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시도로서 보다 새로운 것을 위한 창조적 행위인 만큼「낭송문학」도 이 같은 노력과 시도가 필요하다. 정통성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또한 시도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로 단정하는 것은 문학의 발전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제 실험정신으로서「낭송문학」을 받아들일 때이다. 6. 마치며 : 실험정신으로서의「낭송문학」 문단 일부에서는 ‘문학이면 문학이지 낭송문학은 또 무엇인가’라는 문학 갈래의 정통성문제와 더불어 문자를 절대시하여 ‘글 쓰는 이는 글이나 쓰지 낭송은 무슨 낭송이냐. 글이나 잘 쓰라’며 낭송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어찌 보면 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을 문자언어로만 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이야기는 음성이었으며 입과 귀를 통해서 전해왔다. 신에게 드리는 탄원의 서사적 구조가 노래화 되고 이야기화 된 것이다. 여기에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몸짓도 함께 어우러졌다. 어찌 보면 낭송은 그 표현에서 원시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역동적인 세계를 경험토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대구문인협회에서 주관한 <책을 뛰쳐나온 문학>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다양한「낭송문학공연」의 묘미를 참석자 모두가 공유한 적이 있다. 문자의 영역을 뛰어 넘은 공연문학은 공감각의 울림으로 다가와 더 큰 감동적 세계로의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말하자면 문학이 갖는 아이스테시스 (aisthesis)적 기능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한 계기가 아닌가 한다. 요즈음 문학비평도 독자반응비평에서 그 해석을 모색하는바 다양한 표현을 통한 문학적 경험만이 독자로 하여금 의미의 그물망을 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문학도 다양한 갈래의 예술(미술, 음악, 춤, 연극 등)과 결합하여 문학의 공연예술화로 발전되어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처음엔 경험과 전문성의 부족으로 체계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이긴 어렵겠지만 창의적인 활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진정한「낭송문학」의 길을 모색하고 문학의 발전을 위해 문학인들의 힘과 지혜가 모아지길 기대하며 부단한 연구만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본다. |
첫댓글 2005년 '대구문학'지에 발표한 글입니다. 차후 많이 보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