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우리들은 아버지 직장 따라 광주에서 살았다. 내가 3살 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지긋지긋한 시골로 들어왔다. 효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며 절대 들어가기 싫다는 엄마를 설득하여 들어왔다. 다행히 내가 터를 잘 팔아 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 시집살이도 덜하고 나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공부만 하신 분이라 시골일은 전혀 못하셨다. 대신 평생 직장인이셨다. 면사무소 면서기. 수리조합등 우리 집은 항상 아버지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엄마는 월급을 타오셨다. 월급봉투를 영전에 놓고 서럽게 우셨다. 우리 집에는 일본에서 사 오신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었다. 연속극 할 시간만 되면 언니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어릴 때 나는 라디오 속에 사람이 들어있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만 드시면 기분이 무척 좋으셨다. 술친구만 있으면 누구든지 사주셨다. 오죽하면 엄마는 "당신은 날아가는 까마귀도 내 술 한잔 먹고 가시오" 하실 분이라고 했다. 언니들은 공부를 잘했다. 선생님이 오죽하면 전남여중 시험지를 구해와서 한쪽에 가서 풀어보라고 했다. 선생님은 100점을 맞았다며 교탁을 치시며 안타까워하셨다고 했다. 그즈음 아버지는 수리조합에 다니셨다. 사정하는 친구를 거절 못하고 보증을 서 줬는데 부도가 났다. 아버지가 빚을 다 갚아야 했다. 엄마는 1년 농사지으면 식구들 먹을 것만 놔두고 다 빚을 갚았다. 그렇게 몇 년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우리에게 죄인이었다. 모든 살림은 엄마가 했다. 농한기 때 엄마는 보따리 비단장사 옷장사도 했다. 고생해서 돈을 벌어 빚 갚는데 올인했다. 엄마는 나중에야 후회했다. 딸들 가르치면서 천천히 갚아도 될 것을 왜 그렇게 빨리만 갚으려고 애썼는지 바보 같았다고 하셨다. 언니들을 가르쳐 놓으면 직장 들어가 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 하시면서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당시 엄마는 사람 좋은 아버지가 밉고 오직 늦게 낳은 아들들을 못 가르칠까 봐 걱정이 됐다고 했다. 내가 중학교 갈 무렵엔 빚을 다 청산했다. 나는 느낌으로 알았다.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니들도 못 갔으니 나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교복 입은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친구 중에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 둘은 뜻이 맞아서 학생들 등교하고 나면 10리 길을 걸어서 몰래 뒤따라갔다. 하루종일 배고픔도 잊고 학교밑 문방구점 앞에 있다가 친구들 파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돌아왔다. 그러기를 두 달. 친구가 먼저 포기하자고 했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도저히 안될 것 같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드러 누워서 3일을 굶었다. 학교 안 보내주면 굶어 죽어버리겠다고 엄마를 협박했다. 엄마는 결국 손을 들었다. 아버지께 "저년 데리고 학교 가시오"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버지가 더 좋아하셨다. 어느새 하얀 두루마기를 갖춰 입으시고"네 엄마 맘 변하기 전에 얼른 가자"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렇게 5월달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항상 미안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번 치신적 없고 남들에게도 존경받는 학자였다. 내가 국민학교 때 아버지는 혈압으로 몇 번 떨어지시더니 결국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중학교 때 언니들이 빌려온 책을 촛불 켜놓고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 깜짝 놀라 촛불 생각이 났다. 더듬어보니 초가 넘어져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해서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카락이 꼬들거렸다. 한쪽이 탔다. 엄마는 혀를 내두르셨다. 타 죽을 뻔했다고.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리 집은 광주로 이사했다. 귀한 내 동생은 5학년때부터 둘째 언니를 묶어 광주로 학교를 보냈었다. 이사 오면서 자취방을 없애고 단독주택을 얻었다. 엄마는 아모레 화장품 방문판매 사원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아버지도 안 계시니 고생하시는 엄마에게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신문사 경리로 들어갔다. 내가 벌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