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포 압구정 그리고 잠실
우리가 잘 아는 반포, 압구정, 잠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한강에 가까운 공유수면. 한강대교 남단에서 영등포 입구에 이르는 너비 20m, 길이 3,720m의 제방도로가 착공된 것은 1967년 3월 17일이었고 그해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김현옥 시장은 옳다 싶었을 것이다. 이 제방도로는 바로 희한한 것을 낳았다. 즉 새로 생기는 제방도로와 기존의 제방 사이에 2만4천 평이라는 새로운 택지가 생긴 것이다. 경치도 그럴싸했다.
한강에 제방을 새로 쌓거나 제방을 안으로 들여쌓으면 대량의 택지가 조성된다는 사실, 즉 한강연안이 황금의 알을 낳은 거위라는 사실이 김현옥 시장에게 한강개발3개년계획, 여의도윤중제 공사를 결심하게 했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3, 186쪽. 그런 면에서 김현옥 시장은 탁월한 식견이 있기는 있었다. 강변 모래톱을 매립하여 택지를 조성하는 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강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공유수면 매립 공사가 진행되어 반포지구, 압구정지구, 잠실지구 등의 부지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지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공유수면 매립 사업은 비리의 복마전이었다. 매립 허가만 받으면 제방과 도로 용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을 통째로 확보할 수 있었고, 매립 부지는 공기업이나 정부 투자기관에 매도하거나 아파트를 지어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매립 면허를 따내기 위해 공기업과 건설사는 물론 예비역 장성과 종교단체가 혈안이 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인허가권을 미끼로 정치자금을 거둬들였다.
1974년 6월 19일 반포주공아파트(반포1단지, 구반포)가 완공됐다. 동작대교 남단 한강변을 매립하여 조성한 16만7000평(55만여㎡)의 부지에 반포1단지가 건설되면서 강남 개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242억원이 투입된 반포1단지는 초대형 아파트단지로 당시로서는 중대형 평수인 22평형, 42평형, 64평형으로 구성되었고, 중앙난방과 복층형이 처음 도입됐다.
복층으로 설계된 64평형의 경우 1,3,5층에만 현관이 있었고 내부 계단을 통해 2,4,6층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지어졌다. 아래층에는 부부침실과 식당을 겸한 13평 넓이의 거실과 손님을 위한 별도의 화장실이 배치되었고, 부엌 옆에는 가정부 방이 있었다. 위층에는 서재와 가족실, 아동전용욕실이 있는 구조였다. 단지 앞쪽으로는 상가(238개 점포 입주)가 들어섰고,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유치원, 동사무소, 전화국, 은행, 학교가 위치하였다. 이 형식은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구성이었고 이는 아파트의 전형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반포1단지는 높은 인기를 끌었다. 반포1단지의 일부인 반포차관아파트의 경우 1490가구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려 경쟁률이 5.6대1로 치솟았다. 무주택자를 대상으로 분양된 22평형(72㎡)의 경우 집을 가진 사람들이 친인척의 이름을 빌려 응모할 정도로 편법과 불법이 성행했다. 집이 있는데도 동사무소 직원에게 뒷돈을 주고 전월세를 사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 당첨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웃돈을 받고 입주권을 팔아버린 사람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렇게 편법과 불법이 횡행하는 가운데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요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청문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위장전입에 투기가 바로 이를 말한다. 반포 아니면 압구정동 출신들이 꽤 많다.
현대건설이 추진한 압구정 인근 공유수면 매립 공사는 1972년 2월 완료되었다. 이렇게 조성한 매립부지는 4만8072평이었고, 현대건설은 도로용지와 제방용지를 제외한 4만3000평을 택지로 확보하였다. 압구정지구는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강남의 노른자위 땅이었다. 현대건설은 1975년 3월 이곳에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여 1977년까지 23개동 1562가구의 아파트를 완공하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완공과 동시에 높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대부분의 아파트가 20~30평형인데 비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대형 평수(40~80평)로 지어졌다. 부동산 투기 열풍 속에 현대아파트는 명품 아파트로 이름이 자자했다.
강북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골몰하던 서울시로선 대성공을 한 셈이다. 1975년 8월 서울시는 건설부 도시계획과에 아파트지구 제도의 신설을 요청하는 한편, 영동지구 반포동과 잠원동 일대 262만㎡(79만3,936평)와 잠실지구 67만6천㎡(20만4,848평)를 아파트지구로 가지정하고 개인 건물의 신축을 불허했다.
1976년 1월 28일 아파트지구 제도가 신설(대통령령 제7963호)됐다. 아파트지구로 지정될 경우 아파트 말고는 다른 건물을 지을 수 없었고, 토지는 아파트 건설업체에게만 매각이 가능했다. 영동지구는 원래 논밭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작은 땅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필지는 더 작게 나누어져 100평, 200평 정도의 땅을 가진 지주들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영동지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할 부지 확보가 쉽지 않았다. 아파트지구는 이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군소 지주들에게는 재산권을 제약하는 초법적인 족쇄인데 반해 건설사들에게는 엄청난 특혜를 제공하는 근거였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한보그룹도 현대도 한양도 그 대열에 빠질리 없었다. 아마 내가 건설업을 하였다면 나 역시도 돈방석에 올라 이름을 달리 했을 테다.
1976년 8월 21일 건설부가 지정한 아파트지구는 모두 11곳으로 영동지구에는 반포, 압구정, 청담, 도곡지구가 지정되었다. 네 지구의 면적은 반포지구 550만8천㎡(167만평), 압구정지구 119만1천㎡(36만평), 청담지구 36만7천㎡(11만평), 도곡지구 72만8천㎡(22만평)였다. 이들 지구를 합친 면적은 779만4천㎡(236만평)로 영동지구 전체 면적의 1/4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건설사 특혜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건설부와 서울시는 아파트지구 지정과 함께 법적, 행정적 지원은 물론 금융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우후죽순처럼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됐다. 반포주공아파트(구반포)를 시작으로 반포동 일대에는 한신아파트(126개동, 1만1,429가구), 대림아파트(7개동, 632가구), 한양아파트(4개동, 367가구), 경남아파트(10개동, 1,056가구), 우성아파트(4개동 408가구) 등이 건설되면서 신반포라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졌다.
1977년 10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한국도시개발은 1512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여 952가구는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하고 나머지 560가구는 시민들에게 분양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도시개발은 아파트 분양권에 높은 프리미엄이 붙으며 인기를 끌자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해야 할 952가구 중 291가구만 분양하고 나머지 661가구를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현대그룹 임원들에게 불법적으로 분양하였다.
특혜분양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6월 30일이다. 청와대 사정특별보좌관실에서 특혜분양을 받은 600여 명의 명단을 검찰에 통보하였다. 1978년 7월 4일에는 특혜분양을 받은 고급공무원, 장성, 언론인 등 259명의 명단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공개된 명단에는 공직자 190명, 국회의원 6명, 언론인 34명, 법조인 7명, 예비역 장성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지검 특수부는 7월 14일 뇌물수수 혐의로 정몽구 한국도시개발 사장, 곽후섭 서울시 부시장, 주택은행 임원 등 5명을 구속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후에도 1987년 14차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15만평의 부지에 총 6,279가구가 입주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민들의 눈에는 강남의 특권을 상징하는 장소였고,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신분 상승의 종착역으로 비춰졌다. 이 이후 강남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은 아파트공화국으로 탈바꿈하는 입지를 굳건히 했다. 건설사가 아파트 신축허가를 받아 분양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높은 경쟁률 속에 분양이 이루어지면 계약금이 입금되었다. 계약금으로 건설사가 기초공사를 마치고 층수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몇 차례에 걸쳐 중도금이 입금되었다. 그리고 아파트가 완공되면 입주와 함께 잔금이 들어왔다. 아파트 건설사는 이 같은 실적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새로운 아파트를 지었다. 현대건설은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입지를 다졌고, 보일러를 생산하던 한신공영과 보도블록을 찍어 팔던 우성건설은 아파트 건설을 통해 손꼽히는 건설사로 성장했다.
이렇듯 대량의 아파트가 건설되는 가운데 주거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다. 1979년 12월 강남구 대치동에 도시가스 공장이 완공되어 1단계로 10만 가구에 공급을 시작했고, 중앙난방식 보일러와 도시가스의 공급으로 연탄을 쌓아두던 실내 공간이 사라졌다.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보급으로 식모라 불리던 입주 가정부가 사라지고 시간제 파출부가 일반화되면서 에어로빅강습소, 서예교실, 윤전교습소가 주부들로 붐볐다. 어느 새 아파트는 투기의 대상 1호가 되고 말았다.
경제성장에 따른 여유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아파트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었고, 덩달아 땅값이 뛰었다. 1976년 26%였던 전국의 평균 지가변동률은 1977년 34%, 1978년 49%로 가파르게 올랐다. 서울의 땅값은 1978년에만 135.7% 폭등했다. 그뿐이 아니다. 1970년대 실질임금이 두 배 상승하는 동안 전국의 땅값은 열다섯 배 올랐고, 강남의 땅값은 이백 배 폭등하면서 전 국토는 투기장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1978년 8월 8일 양도세 과세 강화와 토지거래 허가제 도입, 기준지가 고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 시행,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공한지세 부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8.8조치)을 발표하였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도 되풀이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압구정동은 강남발 부동산 불패 신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지금도 재개발을 목전에 두고서도 그 위용은 여전하다. '싸우면서 건설하자', '하면 된다'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구호 속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그릇된 욕망이 온 나라를 뒤덮기 시작한 이래 어느 누구도 이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이로써 정직하게 돈을 벌어 저축하는 사람과 부동산에 투기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의 간격은 비할 바 없이 커졌고, 사회 정의는 설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강남은 사시는 분 내지 사모님이 되었으며 영등포는 아저씨 아줌마란 명칭이 확실히 정착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