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봅니다.
전 사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 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따기 였습니다.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 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사장도 돈이 부족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 씨를 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집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 했답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사장은 묘조(明星) 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 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 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 주었다고합니다
면과 수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제작의 전 공정을 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 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애국자들의 덕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세계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하고 배고픔을 벗어났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라면 한 봉지가 25원이었으며, 라면이 귀하니까 국수랑 함께 삶아서 먹곤 했는데 아들이라고 유독 꼬불꼬불한 라면을 나한테 많이 담아주곤 했지요. 당시 라면으로는 유일했던 삼양라면에 대하여 노래처럼 흥얼거리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모두들 기억 하실란가 모르지만, 제 뇌리속에는 또렸하게 기억이 나네요.
1. 일반 여러분 2. 이것은 3. 삼양라면입니다 4. 사람마다 5. 오들오들 떨지말고 6. 육류 수프를 넣고 7. 칠칠하게 끓이지 마시고 8. 팔팔 끓여서 9. 구수하게 배불리 잡수시고 10. 십원짜리 두 장 반만 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