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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술은 어떤가?
예술은 문명과 관계되는가 아니면 문화와 관계되는가?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답변할 수 있다.
예술은 진보와 계몽주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사회 계약, 요컨대 인류의 문명화에 내적으로 관심이 없다.
예술의 휴머니즘은 전적으로 비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예술의 성장은 국가 형태나 사회 형태와 무관하다.
광신주의와 미신은 문화의 번성을 도와주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확실히 예술은 이성과 정신보다 열정이나 자연과 훨씬 친밀한 관계에 있다.
예술이 혁명적인 몸짓을 보인다면 진보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러는 것이다.
예술은 보존하고 형태를 부여하는 힘이지 해체하는 힘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술이 종교나 인류애와 유사하다고 생각해 예술을 존중해왔다.
예술은 지구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전쟁 같은 삶의 다른 원초적인 힘이나 근원적 힘에 필적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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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개념들을 가지고 치장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감정일지라도 작아진다.
사람들끼리 나누는 조그만 선의가 인간성에 대한 어떤 사랑보다도 더 낫다."
이건 분명 옳은 말이리라! 수사학적이고 정치적인 인류애는 꽤 말초적인 사랑의 방식이어서 중추부가 부실할 때는 무척 감미롭게 들리곤 한다.
네가 박애주의자 역을 하기 전에 오히려 덜 가혹하고, 덜 독선적이고 덜 거만하며, 덜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라…
"나는 신을 사랑한다!"라고 아주 멋있게 말할 줄 아는 자는 커다란 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면에 그가 '자기의 형제’를 증오한다면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문학에 불과하고, 피어오르지 않는 제단 위의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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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럽의 지식인'(형 하인리히 만을 지칭)이 그러한 꿈을 꿀 자격이 내게 있는지 시비를 걸까 봐 두렵다.
나는 스스로 알았던 것 이상으로 나 자신이 민족주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난 물론 민족주의자 '향토 예술가'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전쟁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전쟁이 문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과감한 주장에 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채, 감정의 불이 지퍼져, 무자비한 도전에 직면하여, 소용돌이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을 논쟁적으로 방어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이 다시 정치로부터 정화되어 삶과 인간의 본성을 관조하게 된다면 내가 더 행복해질 것임을 신은 알고 있다.
평화를 되찾은 국경선 뒤에서 여러 민족이 서로의 위엄과 명예를 존중하고 살아가면서 그들이 가장 아끼는 재물을 서로 교환한다면 나의 존재는 지금보다 더 잘 진가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영국인, 세련된 프랑스인, 인간적인 러시아인과 학식 있는 독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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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예술은 그토록 사랑스럽고, 할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
예술이 청량제인 동시에 징벌이며, 삶을 즐겁게 모방함으로써 삶에 대한 찬양이자 칭송인 동시에 삶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도덕적인 부정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모순이다.
혹은 예술이 양심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모순이다.
외교적으로 말하면 예술이 삶이나 순수 정신과 좋은 관계를 견지한다는 점에 예술의 사명이 있 다.
예술은 보수적인 동시에 급진적이기도 하다.
예술은 삶과 정신 사이의 중간적, 중개적 위치에 있다.
아이러니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예술이 정치와 친근하고 유사한 점이 있다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정치도 나름대로 순수 정신과 삶 사이에서 중개적 위치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보수적이거나 급진적• 파괴적이라면 정치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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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신경이 예민한 예외적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자부심이자 겸허함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볼 때 예술가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자 겸허함이다.
예술을 통한 삶의 비판을 개량적 선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불충분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학교도 삶도 고도의 윤리적 • 심미적인 감성을 지닐 수 없으며, 감수성과 정신은 거기에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현실을 개선하는 정치적 작용을 한다면, 사실 이러한 민감한 예외적 경우가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데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이 예외적 경우가 인류의 양심을 나타내주고, 좀 더 고상하고 민감한 심미적•도덕적 의미에서, 양심의 의지에 반한다 할지라도 인류의 고뇌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사실 예술적인 삶의 비판이 개선시키고, 순화시키고, 도덕화시키며 행복하게 하는 작용을 해온 것이다.
이젠 사정이 달라져서 예술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
예술이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해서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규정하여, 예술가를 정치가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특수하고 아이로니컬한 지도력을 곧장 정치적으로 이해하여 이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할
정도로 이러한 지도력을 오해하는 예술가 정신은 독선과 윤리적 안일, 참기 어려운 도덕군자 연하는 태도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건은 번지르르한 속물근성과 민중 계도 근성의 시작일지 도 모른다.
이 결과 필연코 예술적 파멸이 뒤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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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교육받은 유대인 사회이론가의 발명품인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적인 문화 경건주의에 의해 늘 낯선 것으로, 민족과 상충하는 것으로, 순전히 악마적인 것으로 느껴졌으며 저주를 받아 왔다.
이러한 사실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사회 계급을 통한 문화적이고 비사회적인 민족 이념과 공동체 이념의 해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해체 과정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 민족과 공동체라는 문화적인 이념 복합체를 사람들은 오늘날 단순히 낭만주의라고 일컬을 정도이며, 현재와 미래라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삶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회주의 쪽에 기울어져 있는 형편이다.
삶 지향적인 의식은 시민적인 문화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형태를 띤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죽음과 결부된 낭만적인 본질을 따르지 않고 단지 윤리적이고 의도적인 성질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개인주의적 이상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정신적인 것이 원래는 문화 사상과 결부되어 있지만, 반면에 사회적인 계급 이념은 순전히 경제적인 유래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유래는 시민적으로 민족적 낭만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정신과 훨씬 친근한 관계들을 유지한다.
그러한 보수주의는 생기 있는 정신과의 접촉, 보수주의적인 삶의 요구와의 공감을 누가 보아도 명백할 정도로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잊어버렸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인물들이 이미 도달하여, 내적으로 실현된 인식의 상태인 정신과, 현실 속에서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인 물질적 현실 사이에 조성된 병적이고 위험스러운 긴장 관 계에 대해 최근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스럽고 위험스러운 괴리를 되도록 없애기 위해, 사회주의 계급인 노동자 계층은 자신의 문화적 상대방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더 낫고 더 생기발랄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입법, 국가 생활의 합리화, 유럽의 국제 헌법 등 등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급은 문화적인 민족성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경제 이론에 따라 정신과 소원한 관계에 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정신과 친근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사정에서 볼 때 이러한 점이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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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하건대, 형제들이여, 지상에 충실하십시오.
더 이상 머리를 하늘에 있는 모래에 처박지 말고 지상에 참뜻을 부여해주는 지상의 머리를 자유
롭게 들고 다니십시오!…
여러분이 보내는 사랑과 인식을 지상의 참뜻에 도움이 되게 하십시오!
나처럼 사라진 덕을 지상에 되돌리십시오.
그렇습니다, 사랑과 삶에 되돌리십시오.
지상에 의미,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말입니다!”
이는 정신의 유물론이며 종교적인 인간을, 우리에게 우주적인 것을 대변하는 지상으로 방향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물질적 사회적• 집단적인 삶의 절박한 요구 앞에서 머리를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의 모래에 처박지 않고 지상에 의미,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의무감에 따른 결단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말한 모순, 실제 모습과 당위 사이의 모순에 대한 양심의 민감성이고, 조정 국면이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긴장을 조정하려는 의지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배후에 있는 현실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으며 그 배후에서 현실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에 신경을 쓰면서, 정신이 더 이상 자신의 길만을 가지 말고 실제 모습과 당위 사이의 간격이 결국 인간적으로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도록 애쓰라는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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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복고주의는 어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고 사람들은 내게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전의 사회주의적 정부들이 복고주의의 길을 가로막았다면 복고주의는 권력을 잡을 수 없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나에게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방금 말한 것에 반대하는 논거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주의적인 정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평화, 자유, 국제적 합의에 따라 국민의 의사를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인 공화국이 결코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독일에서 공화국이 탄생한 상황 탓임을,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국이 탄생한 것에 대한 적대감 탓임을 우리는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대감 때문에 공화국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정부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부는 실제적인 혁명이 아닌 혁명을 한 후 학교, 대학, 법원, 관청에 미래의 정신을 불어넣는 대신 기존의 정신이 계속 영향을 끼치도록 했습니다.
이 정부는 과거의 세력에 압력을 받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그 세력에 계속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는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에서 계속 양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세력이 전 세계에서 위대한 사회주의 원칙에 반대하는 세력, 나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모든 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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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가적'이라는 단어, 이 으뜸가는 단어이자 공포를 주는 단어, 이로 인해 독일공화국이 겁먹고 위축되고 있는 이 단어를 남용하는 것에는 이성도 논리도 모두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에 계속 양보를 함으로써 독일공화국은 거의 붕괴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국가적이라는 단어가 극히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전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은 상태가 좋을 수 있는 국가 통화에 관해 말합니다.
사람들은 국가 문학에 관해 말합니다. 관련되는 국가가 산출한 저작에 관해 말입니다.
이럴 적에 이 저작의 가치나 무가치는 전혀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국가적 결점과 국가적 장점에 관해 말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절반은 국가적일 수 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태도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의 생활 형식과 삶의 중대 관심사에 우리 모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러한 관심사에 어떻게 하면 가장 도움이 될까에 대해 견해가 나누어질 뿐입니다.
저는 14년 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옛것을 회복하려는 생각만 하는 대신 독일이 평화운동과 군축 운동에 앞장섰더라면, 독일이 새로운 것과 미래적인 것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사회적 세계로 나아가는 세계 지도권을 떠맡았더라면 말할 수 없는 국가적 자부심을 느꼈을 어떤 독일인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탁월함으로뿐만 아니라 배타성으로도 국가적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이 비국가적이고 반국가적이라고 저주하는 견해가 바로 이것입니다.
현재 겉보기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이를 둘러싼 다툼은 해결되지 않고 결말지어지지 않은 다툼입니다.
사회적 공화국의 이념은 현재 독일에서 쑥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 반대 이념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공화국 자신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제가 암시 했습니다.
정치적 좌익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의 영향력은 현재 의심의 여지 없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대신 현 순간을 다스리고 혼란을 억제하도록 온건 우익이 역사적인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순응해야 합니다.
이 우익은 독일 민족에게 시간을 벌어줘 각성하고 인식하도록 하는 비상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쑥 들어간 좌익의 임무는 그저 현재 통치 세력이 비교적 미미한 이러한 소명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국민이 쟁취한 기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독일은 현재 상황이 일시적인 것이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미래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독일의 것임을 믿어도 좋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적 열정의 광분은 벌써 꺼진 불이 뒤늦게 마지막으로 나 풀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새로운 삶의 열정으로 오해하고 죽어가면서 다시 불타오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 다.
삶과 발전의 모든 사실, 경제적이고 기술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사실은 미래는 여러 민족이 진작부터 들어서려고 마음먹은 길에, 우리도 오늘 저녁 정신 속에서 추적한 길에, 평화와 자유의 길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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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어떤 주도적인 일간지와 가진 최근의 인터뷰에서 내가 "독일의 사회주의는 성장하고 있고 독일 대중은 민족주의보다 사회주의에 훨씬 깊이 공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인용되었다.
이러한 발언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발언은 어느 정도의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다.
내가 실제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어떤 부류에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사회주의적 경향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반동 세력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독일에는 러시아와 어느 정도 유사한 종류의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국가가 기업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자본주의와 동의어였던 개인주의는 집단 기업을 위해 사라져버렸다.
독일 정부가 가격을 조종하고 수출입의 가격 할당량을 정한다.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 사람들은 나치가 일종의 사회주의 형식을 도입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현재 독일에서 기업가의 불만은 여전히 대단하다.
그러한 사실은 정부가 자본주의에 전적으로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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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님, 제가 학장님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군요.
확실히 학장님이 진작부터 글을 읽지 않고 있을 거란 사실에 제가 위안을 받아도 되겠군요.
독일 사람들은 어떤 언어에 깜짝 놀라 몇 년 전부터는 그 언어에 익숙해진 습관을 버리고 있습니다.
감히 옛날처럼 자유롭게 독일어를 구사하는 것에 깜짝 놀라서이겠지요.
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제넘고 건방져서가 아니라 걱정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권력자들은 제가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라는 조처를 내렸지만 저는 그런 걱정과 고통, 심적 고통과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4년 동안 저는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에 맞서 매일 매일 예술 작업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고뇌가 큽니다.
종교적인 수치심 때문에 지고한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글로 쓰기를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 깊은 충격의 순간에 최종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 그 이름이 꼭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기에, 저는 이 답장을 짧은 기도로 끝내겠습니다.
신이시여, 황폐하고 남용된 우리나라를 도와주시고 세계 및 자기 자신과 화해하도록 가르쳐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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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자연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념은 특수하게 본래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념은 인간에게서 하나의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념적인 것에 인간적인 성질이 관여하고 있음을 중시하지 않는 자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파멸적인 실수를 지속적으로 저지릅니다.
폭력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정의'란 말은 이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면에 강력한 이름, 자연이 결여되지 않은, 오히려 섬뜩한 이름으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자유나 진리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선두에 내세워야 할지, 어떤 이름이 가장 위대한 이름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 모두 전체적으로 이념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름이 다른 이름을 대변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하면 자유와 정의도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와 정의를 말하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적인 성질과 본질적인 폭발력을 지닌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복합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 부릅니다.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몰라도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에 의무를 지고 있고 인간의 본질은 절대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고 자유를 반대하며 무법적인 폭력은 인간적인 영역을 깔보고 경멸합니다.
감정과 지성이 없는 폭력은 인간의 절대적인 것과의 연대감을 찬성하기 때문이고, 개념이 없는 폭력은 이러한 연대감 로 인간에게서 생겨나는 필수불가결한 위엄을 찬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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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모순되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분명 인생에서 모순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사실 정신 때문에(민주주의는 정신, 문학, 심리학적인 진리 인식이나 진리 탐구와 좋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나쁜 점을 죄다 의식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인간의 교육 가능성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모순됩니다.
독재정치는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을 양심으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에게 고상한 영웅적 행위를 가르칩니다(인간이 독재정치에 더 잘 쏠리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고 인간을 업신여기고, 노예화하고, 인간에게 다른 운명은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은 케케묵고 겉치레뿐인 잡담에 불과하다고 확인하는 점에서 독재정치는 모순됩니다.
양자는 비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비논리성이 더 바람직한 걸까요?
민주주의가 정신, 아름다운 정신, 문학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고 특징적입니다.
이러한 좋은 관계는 민주주의를 독재정치와 확연히 구분 짓습니다.
독재정치는 폭력을 신봉함으로써 자명하게도 정신과 떨어지고, 정신과 서먹서먹해지고, 정신과 적대적으로 됩니다.
이러한 확인은 우리가 정신의 개념을 일면적으로, 고립적으로, 추상적으로, 오만하고 삶에 낯설게 이해하지 않고, 그 개념을 삶과 결부되어 있고, 삶과 행동을 지향하는 정신으로 특징지을 때야 비로소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 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적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극복된 낡은 의미에서 주지주의적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사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이나 행동과 결부된 사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새롭고 현대적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최근 파리에서 열린 정신 연구자들 회의에
"사상가로 행동하고 행동가로 사유하라." 라는 정언 명령을 담은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철두철미 민주적인 구호입니다.
지금껏 행동을 생각한 사상가나, 자신의 사고를 실현할 행동이 어떤 작용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 사상가는 없었습니다.
비민주적인 나라들과 민주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나라들은 실상 현실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들 나라는 순전히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정신이 삶과 완전히 유리된 채 사유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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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귀족적인 찡그린 얼굴이 물론 이러한 퇴폐적인 모습입니다.
독재자들은 군주적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군중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궁색한 견해를 표명하며 군중을 경멸하는데, 이는 터무니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민중은 결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그 문화 연사가 말합니다.
민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빵과 놀이라는 겁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민중은 '토끼의 시야'를 가지고 있으며 민중의 대다수는 '연약한 속물'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 토끼의 시야를 가지고 민중은 결정에 참여합니다.
통치하고 있는 연사가 자신의 문화적 시각이 토끼의 시야나 연약한 속물근성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실로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를 사이비 귀족주의라고 부릅니다.
파쇼 독재정치에서는 모든 게 '사이비'입니다.
민중에 대한 문화 연사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주의도 사이비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경멸하는 사회주의이며, 게다가 소시민에게 문화적으로 테러를 가하는 사회주의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사회적인 독트린보다 훨씬 끔찍하게 위험한 일종의 속물적 볼셰비즘입니다.
볼셰비즘의 위험한 독트린 때문에 대다수의 유산 시민 계층은 파쇼 독재정치의 품에 안기거나 그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들은 파쇼 독재정치가 러시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색채가 가미된 볼셰비즘과 사회주의를 막아주는 방호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재 국가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방호벽이라고 자처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볼셰비즘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보호 해주는 구원자 역할을 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볼셰비즘의 전 단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인위적으로 배양한 불안을 먹고 산다고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불안으로 그들은 국내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볼셰비즘 이데올로기가 지칠 줄 모르게 유포되어 외부적으로도 세계적인 승리를 거두
리라는 것을 그들은 자신합니다.
하지만 시민 계층이 이러한 기만적인 선전에 넘어갈 때 예상 되는 끔찍한 환멸, 심각한 실망에 대해 미리 경고해주어야 합니다.
파시즘에 넘어간 나라의 시민 계층은 이미 이러한 환멸을 맛 보았습니다.
사유 재산과 개인주의적 경제 형식을 보존하는 것이 파시즘, 특히 가령 나치의 기능이자 의도라는 것은 완전 오류입니다.
바로 경제적인 관계에서 볼 때 나치는 결정적으로 다름 아닌 볼셰비즘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적대적인 형제들입니다.
동생인 나치가 형인 러시아의 볼셰비즘으로부터 도덕적인 것만은 제외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배웠습니다.
나치는 도덕적으로 기만적이고 부정직하며 인간을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효과 면에서 볼 때 나치는 볼셰비즘과 동일한 것을 추구합니다.
사실 나치 정권 밑에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했고 노조는 폐기 되었으며 모든 사회주의적 조직들이 붕괴했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기업의 황금 시절이 도래할 거라는 티센 씨와 히틀러 정당의 다른 재정적 후원자들의 꿈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이 아름다웠는지, 그 꿈과 정반대되는 것이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오늘날 소위 제3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전시 했다는 경제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회주의의 형식이지만, 이는 사실 사회주의의 한 형식이기도 합니다.
전시 경제는 국가 자본주의나 국가 사회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경제에 대해 국가가 군사적으로 규정한 독재정치입니다.
이는 기업가 주도권을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고, 사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미심쩍은 몰락입니다.
세계의 시민 계층은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파시즘을 선택하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파쇼적인 사회주의가 현실적인 사회주의를 도덕적으로 망치는 것이며, 젊음과 장래성을 선전하기 위한 도덕적• 인문적 이념의 표절 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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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개인주의적인 경제 행태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파쇼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된다는 사실이 독일식으로 변종된 '국가 사회주의'라는 명칭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단어 연결은 전체 사상과 마찬가지로 어설픈 사기입니다.
국가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립적 요소입니다.
양자를 결합해 당의 강령을 만든다는 것은 정신적인 행패입니다.
사회주의란 전적으로 도덕적인, 즉 내부를 지향하는 추진력, 양심의 추진력입니다.
시민적 개인주의자로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것이 평화적이란 점을, 위험할 정도로 평화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본래 권력욕이 별로 없습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다면 바로 이 점이 부족해서 그럴 겁니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일공화국이 유혈 사태, 내란에 대한 평화적인 두려움 때문에 살인자들에게 항복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평화주의가 어쩔 수 없이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비 증강을 하기까지 공격적이
고 호전적인 세력 측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사실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제가 사회주의를 도덕적인 자극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국제 정치가 아니라 국내 정치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의 열정은 권력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프 랑스에서 레옹 블링의 사회주의적 개혁은 국제 정치를 거의 범죄적으로 소홀히 하는 가운데 행해졌습니다.
국내에서 더 고귀하고 더 정의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나라가 자연히 강해진다는 이상주의적인 신념, 도덕에 대한 신념을 갖고 행해졌습니다.
그것의 이상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념이 언제까지나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내부를 지향하고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며 주변 환경을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사는 사람이 그렇듯이, 이러한 신념은 생존 경쟁에서 대단히 취약하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국내 정치적인 실례를 나쁘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현실 사회주의의 도덕적인 천성이 러시아의 경우에도 확증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평화 애호국으로 인정하고 그 자체로 러시아가 민주주의의 강화를 의미함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고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미국, 체코 등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옆에서 자신을 평화 애호국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평화가 문제가 되는 한에는 사회주의와 시민 민주주의가 서로 짝을 이룹니다.
평화의 의미는 내적인 과제이고, 단어의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미에서 일, 여러 민족 자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전쟁은 도덕적인 나태, 방종한 모험, 시대의 커다랗고 절박한 개선 과제를 외면하고 학교 뒤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평화가 제기하는 그러한 과제들은 평화 시에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에 의해 자본주의적 시민적 삶의 질서가 위협받는 것에 별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본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 견해로는 러시아가 평화를 위험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1차 세계 대전 후 20년 동안 평화를 위해 엄청난 물자를 동원하고 군비 증강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파쇼이고, 그리고 파쇼의 소위 역동성입니다.
세계가 평온을 누리지 못하고 번영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닌 파쇼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주의와 정반대로 국가주의는 전적으로 공격적이고, 외부를 지향하는 추진력입니다. 국가주의의 문제는 양심이 아니라 권력이며, 일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선전적인 내용이 풍부한 단어인 사회주의 조차도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것에 넌더리를 냅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박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으로는 돌연 사회주의 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거기서는 프롤레타리아적, 가난, 소유, 정의가 갑자기 주도적 역할을 행사합니다.
국내에서는 거부되고, 기피되고, 미심쩍은 '민족 공동체'로 대체되는 계급투쟁이 대외적으로 모든 역사의 역동적인 엔진이 됩니다.
세상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로 분류됩니다.
가난으로 인해 역동적이고 영웅적으로 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공간, 태양, 행복을 동경하고
지상의 재화를 나누어 가지고자 합니다.
이러한 국가는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만 있습니다.
보물을 지키는 괴물처럼 자신의 재산에 의거하여 가난한 악마들을 지상의 행복과 부로부터 제외하려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배부르고 정적입니다.
정적인 국 가에 대항하는 역동적인 국가의 사회주의적인 정의와 품성이 여기서 요구됩니다.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존의 소유 관계의 변혁을 선전, 선동하고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해 프롤레타리아적인 전쟁을 일으킨다고 협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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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엇이 필요한지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개혁 입니다.
이는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시대, 시민적 자유주의의 시대의 자유방임적 자유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으로는 자유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제가 말하는 개혁은 사회적인 개혁, 사회적인 의미가 담긴 개혁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혁을 통해서만이 민주 주의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으며, 독재정치 의 일시적이고 기만적이지만 선전 효과가 있는 젊음의 우위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개혁은 정신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개혁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제 극단적인 자유 경제와 수동적인 자유주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자유주의는 자유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에서 자유주의를 몰아냈습니다.
자유는 배우고 익혔습니다.
인도주의는 더 이상 모든 것에, 인도주의를 살해하려고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에도 촉수를 뻗고 있는 인내를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광신주의와 맞대면한 채 순전히 선의와 인간적 회의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는 민주주의는 싸움에 지고 맙니다.
오늘날 자유에 필요한 것은 유약함의 인도주의와 회의에 빠진 인내가 아닙니다.
이리하여 민주주의는 사고의 창백함으로부터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는 폭력에 대한 신봉에 직면하여 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가련한 모습을 보입니다.
필요한 것은 의지의 인도주의이며, 자기 보존을 위한 전투적 결의를 다지는 인도주의입니다.
자유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발견해야 하고, 분노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급기야는 쓰디 쓴 경험을 한 후에 민주주의는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평화주의로는 전쟁을 추방하기는커녕 전쟁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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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사회적인 요소가 가미된 정치가라고 부릅니다.
그의 민주주의에는 사회적 요소가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자유를 사회주의적으로 제약하고 규율하며, 파시즘뿐만 아니라 볼셰비즘의 기선을 제압하는 곳에서도 그는 자유의 진정한 친구이자 정직한 공복입니다.
같은 이유로 저는 프랑스 인민전선의 노력을 그렇게 부르고, 가톨릭 대표자로 게다가 왕당주의자이기도 한 러 그랑-메종 같은 보수적 정치가와 그런 점에서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는 오늘 날 프랑스 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사회적인 신분에 따른 차별 없이 새로운 토대에서 서로 만나고, 프랑스와 자유를 위해 어떤 사람들이 구조 개혁이라고 부르고 저 자신이 평화로운 혁명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 을 프랑스인들이 성취할 날이 곧 밝아오기를 우리 희망합시다.
우리에게 비인간적인 사회 질서를 보존할 의무는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 모두는 가치의 진정한 위계질서를 세우고, 자금을 생산에 투입하고, 생산이 인간에 기여하고, 인간은 삶에 의미를 주는 이상에 기여하도록 하는 더 인간적인 질서가 들어서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사회적인 문제에 가장 예민한 나라의 기독교적이고 보수적인 대표자의 이러한 말은 새롭습니다.
그 말들은 새로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새로운 것은 프랑스의 정치적인 청년이 경제적인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럽이 장차 파쇼화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예언하면서 벨기에인 반 데 벨데는 최근 콘도티에레(용병대장)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새로운 것, 엄밀히 말해 정말 새로운 것은 사회적 민주주의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의 보고에서 되젊어진 자유를 독재정치가 호언장담하는 젊음의 요구에 맞서도록 하는 진리입니다.
민주주의의 사회적인 혁신은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해주는 '조건이자 보장'입니다.
그럼으로써 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질 겁니다.
이것은 파시즘이라는 허위의 구조물보다 평화 시나 전시에도 훨씬 월등한 모습을 보일 겁니다. 이 속에는 '모든 정치의 목표'인 공동체가 이미 살아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결국 지양되어 여러 민족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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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의 불행과 나치라는 문화적 재앙에 빠지게 된 그것도 정이 독일의 시민적 정신의 비정치성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정신적인 것과 '교양'이라는 높은 고지에서 정치적, 사회적 영역을 반민주적으로 내려다본 것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 나에게 새삼스럽게 의식된 것은 나의 청년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독일의 위대한 일급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아 르투어 쇼펜하우어를 얼마 전에 새로 접했을 때였다.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로, 반주지주의 면에서는 니체의 선구자이자 스승이며, 이성을 왕좌에서 밀어내 어두운 충동인 '의지'의 피조물로, 의지에 봉사하는 도구로 만든 그 혁명적인 반동가는 헤겔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그의 적수였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정치 신격화와 모든 노력의 정점으로서의 국가 양봉론을 가장 속물적인 이론이라 선언했다.
쇼펜하우어로서는 국가를 필요악이라 판정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족속인 인간을 다스리고, 그들 사이에서 법, 안정 및 질서를 유지하며, 가진 것이라곤 체력밖에 없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재산을 지닌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보람 없는 업무를 맡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비판적이고 관대한 불간섭 입장을 확약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국가에 헌신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반인간적이고 경악스러운 교의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절대화에 반기를 드는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면 국가의 절대화를 통해 "우리 인간 존재의 고상한 목표가 우리의 눈에서 아주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국가를 재산 보호자로 파악하는 입장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헤겔의 국가 신격화와 마찬 가지로 '속물근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가령 정치 적인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철학적인 중산층의 아이로니컬한 태도와 정신이 여하한 정치적 열정도 포기하겠다는 태도는 과연 인간적으로 옳은 것이고 삶에 유용한 것이었던가?
쇼펜하우어가 선언한 표어는 이것이었다.
"독일 신성로마제국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아침마다 신께 감사드린다."
그가 국가에 적용한 이 표어야말로 진짜 속물근성이고 비겁한 태도였다.
그리고 쇼펜하우어 같은 정신적 투사가 자신의 것으로 삼기에는 거의 이해가 안 되는 표어였다.
다시 말해 정신의 이러한 직무 유기는 잘못이며 자기기만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그것도 열정적으로 빠져들게 될 뿐이다.
비정치성, 그것은 그저 반 민주주의를 뜻할 뿐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고자 하는지, 그로써 정신이 얼마나 자멸적인 방식으로 모든 정신적인 것과 모순을 일으키는지는 어떤 특정한 긴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야 비로소 극명하게 드러난다.
쇼펜하우어가 1848년에 보여준 태도는 지독히 치사한 태도였고 희비극적인 태도였다.
그의 마음은, 열광적으로 당시 독일의 공적인 삶을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희망 했던 사람들에게 조금도 가 있지 않았다.
그 방향으로 갔더라면 오늘날까지의 유럽의 전 역사는 좀 더 행복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향은 모든 정신적인 인간의 관심사였다.
쇼펜하우어는 민중을 다름 아닌 '전제적인 천민’이라 불렀다.
자신의 집에서 밖을 내다보며 시위자들을 살펴보던 장교에게 그는 사격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오페라 관람용 안경을 과시하듯 빌려주었다.
이런 행동을 정치에 대한 고상한 태도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반동적 열정이며, 우리는 그것의 정신적 토양을 물론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반혁명주의가 그의 세계상에 어느 정도 논리적, 사유적으로 뿌리박고 있는지 논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벌써 심정적으로 반혁명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자신의 윤리적 비관주의인 십자가, 죽음 및 묘혈의 분위기에 따라 반혁명주의가 그의 기본 성향 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심리학적인 필연성에 따라 수사학, 자유에의 정열, 인간성 숭배를 꺼린다.
이 사상가는 삶에 회의적인 우울과 고통의 숭배 때문에, 진보를 운위하는 선동의 '점잖지 못한 낙관주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정치적으로 반혁명적이다.
모든 것을 통틀어 볼 때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고향적인 기분이 드는 독일의 정신적 시민성의 분위기가 그의 주위에 감돌고 있다.
여기서 독일적이라 함은 시민성이 정신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내면성, 보수적인 급진성, 민주적 실용주의에 대한 절대적 생소함, 순수한 천재성, 무모한 부자유, 깊은 비정치성이 독일 특유의 가능성이자 적법성이며 위험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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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신은 이렇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이게 사실임을 깨닫게 되면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치를 인간적 과제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이러한 끔찍한 정치적 사태, 권력에 대한 철저한 노예 상태, 전체주의적 국가로 끝맺음하게 된 것이다.
독일 정신의 심미주의적 문화 시민성이 거둔 열매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신조, 수단 및 목표의 야만성이다.
독일 정신이 살인마 같은 전복, 모든 서양의 미풍양속의 토대와 지주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적 혁명의 무정부적인 전복의 도구가 된 것은 모든 해방 전쟁을 얕잡아 본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혁명은 이전 시대의 훈족의 침공과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독일 정신이 반민주적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가 그러한 정신의 토대나 지주와 동일함을 몰랐기 때문이었고, 서양의 기독교 정신이 정치적으로 각인된 것이 민주주의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치란 정신의 도덕성 없이는 파멸하고 마는 정신의 도덕성 자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외적인 여러 민족의 생활에서는 문명 후퇴의 시대가, 계약 위반과 불법의 시대가, 신의와 신용이 무너진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반면 정신은 도덕적인 시대로, 선과 악을 단순하고 겸손하게 구별하는 시대로 돌입했음을 나는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야만스럽게 만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는 정신의 수법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 다시 알게 되었다.
악은 적나라하고 비열하게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선의 존엄성과 그 수수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어 선을 행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겠다고 고백하는 일이 우리의 섬세함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자유, 진리, 정의와 같은 말을 다시 감히 입에 올린다.
비열한 일을 많이 저지르다 보니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회의적인 소심함이 없어진 것이다.
언젠가 성가시게 구는 사탄에게 승려가 십자가를 들이댔듯이 우리는 인류의 적에게 이 말들을 들이댈 것이다.
자신에게 영원히 부여된 역할을 다시 찾은 요즈음의 정신의 행운은 시대가 우리에게 감내하도록 요구하는 모든 어려움을 압도하고 있으며, 정신의 이런 역할이야말로 골리앗에 맞서 싸운 다윗의 역할이자, 허위와 폭력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운 성 게오르크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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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히틀러와 그의 일당은 독일 금융 자본과 국제 금융 자본이 참고 묵인하는 가운데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시민 세계의 맹목적인 불안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뮌헨'이 죽지 않고, 이들의 은밀한 친구들이 연합국 측에서 계속 일하고, 서동 전선이 붕괴해서 자기들이 사회주의에 맞서는 맹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파시즘 사기꾼들의 사회주의, 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웃음거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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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불태워진 자들의 잔해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포장해서는 성스러운 땅인 독일 땅을 기름지게 하려고 독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은 그렇기에 적으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독일 땅을 방어해야 하고, 방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조만간 알게 될 사실들 중에서 몇몇 예만 알려 드렸습니다.
인질 총살, 포로 살해, 점령된 유럽에서 발견된 비밀 경찰의 고문실, 러시아 민간인들의 대학살, 모든 나라에서 자행된 나치의 끔찍한 주민 말살 정책, 이는 지배 인종이 수적으로 압도적인 다수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특히 폴란드에서 계획되고 초래된 아이들의 죽음.
나치 독일이 인간들에게, 인류에게 가한 일을 몇 분 만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조차 없습니다.
여러분, 독일인은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공포, 수치, 회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증오만이 필요합니다.
신과 전 세계에 독일인의 이름을 잔인하게 만든 그 악당들에 대한 증오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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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스러운 독일 땅을 위해 싸운다고 여러분은 말씀하십니까?
여러분, 독일 땅은 독일이 자신에 대해 결코 해서는 안 될 통치를 함으로써, 거짓말, 불의, 범죄를 통해 벌써 진작부터 너무나 더럽혀져 있고 훼손되어 있어 독일 땅을 방어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집불통의 반항이며 명예로운 용기가 아닙니다.
나쁜 것으로 증명된 것을 계속 옹호하는 용기는 사실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불안이며, 바로 죽어서 되어가는 민족에 걸맞은 비겁함입니다.
독일의 어떤 젊은 시인이 전쟁 중에 나치 치하에서 감히 이런 시를 썼습니 다.
‘그토록 오랫동안 거짓말에 길들여진 우리말, 이젠 성스러운 합창에 더는 쓸모없구나!’
독일 말이 이렇듯이 더럽혀진 독일의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스러운 존재로 남을 독일을 방어하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소용없는 짓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가 능하도록 독일을 내동댕이치고 끝장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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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실로 놀라운 성서 번역을 함으로써 괴테와 니체가 후에 완성한 독일어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스콜라 학파의 굴레를 타파하고 양심을 혁신함으로써 연구, 비판 및 철학 역사의 자유에 크나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신과 인간이 직접 만나는 길을 터놓으면서 유럽의 민주주의를 촉진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사제이다’라는 입장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관념 철학, 경건주의적 양심의 시험을 통한 심리학의 세련화, 마지막으로 극단적 진리의 엄격성과 도덕에 입각한 기독교 도덕의 자기 극복, 왜냐하면 이것이 니체의 행위(혹은 비행)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루터에게서 유래합니다.
루터는 영웅적인 자유의 투사였습니다만 독일적인 스타일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유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지금 저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 시민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치적 자유에 그는 냉담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운동과 요구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았습니 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후 사회 민주주의자로 독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혁명을 죄악 처럼 증오합니다.”
이 말은 진정 루터적이고 진정 독일적이었습 니다.
이런 식으로 부터는 신교로부터 영감을 받은 농민 봉기를 증오했습니다.
만약 그 봉기가 승리했더라면 전 독일 역사를 좀 더 행복한 쪽으로, 자유로 방향 전환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루터는 농민 봉기가 자신의 업적인 종교적 해방을 무참히 손상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행위라곤 그 봉기에 침을 뱉고 저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미친개들을 때려죽이듯 농부들을 때려죽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고는 이젠 짐승 같은 농민들을 도살하고 목 졸라 죽임으로써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제후들에게 외쳤습니다.
독일 혁명의 첫 시도가 슬픈 결말을 맺고 제후들이 승리함으로 인한 모든 제반 결과들에 대한 책 임의 상당 부분은 독일적인 민중적 인간인 루터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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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독일적인 것을 나타내는 자는 음악적인 신학자 루터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면에서 제후와 농민 양편에게 부당한 처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일은 결과적으로 그가, 농민들이 길길이 날뛰며 광분하게 할 정도로 농민들에게만 부당한 처사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내면성은 바울의 "너희를 다스리는 당국에 복종하라"라는 말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기독교라는 세계적 종교를 위한 전제이자 치적 공간이었던 로마라는 세계 제국의 권위와 관계되었습니다.
반면에 루터의 경우에는 독일 제후의 구석에 제한된 반동적 권위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음악적•독일적 내면성과 비세계성의 산물인 그의 반정치적 공손함은 수 세기 동안 독일인들이 제후와 모든 국가 당국에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게 만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공손함은 대담한 사색과 정치적 미성숙이라는 독일적 이중성을 한편으로는 조장하고, 조
성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공손함은 무엇보다도 '민족적'인 충동과 ‘정치적 자유' 이상의 독일적인 붕괴를 기념비적이고도 반항적인 방식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나중에 나폴레옹에 맞서 일어난 봉기처럼 '국수주의적' 자유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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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가능성의 예술’로 불려왔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정치가 예술처럼 정신과 삶, 이념과 현실, 소망스러운 것과 필연적인 것, 양심과 행위, 윤리성과 힘을 창조적으로 중개하는 한 정치는 예술과 흡사한 영역입니다.
정치는 가혹한 것, 필연적인 것, 반도덕적인 것, '편의주의'와 물질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 저속한 성향의 것을 많이 포함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정치인이 드물었고, 자신을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도 드물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계에만 소속되는 것이 아니듯, 정치도 나쁜 영역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고는, 추한 얼굴로 인류의 공적이 되지 않고는 종종 인류의 창조성을 수치스럽고 범죄적인 비생산성으로 바꾸어 놓지 않고는, 정치는 이념적이고 정신적인 성분을 결코 완전히 포기할 수 없으며, 정치의 속성인 윤리적이고 인간다운 예의를 지닌 부분을 부인하여 자신을 완전히 비윤리적이고 저속한 것에, 거짓말, 살인, 사기, 폭력에 국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더 이상 예술이나 창조적으로 중개하며 실현하는 아이러니가 아니라 맹목적이고 비인간화된 행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행패는 실제적인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잠시 동안만 무시무시한 성공을 거둘 뿐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행패는 조금만 지속되어도 세계 파괴적으로, 허무주의적으로, 자기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완전히 비윤리적인 것은 삶에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적합하게 태어난 민족들은 본능적으로도 양심과 행위, 정신과 권력의 정치적 일치를 적어도 주관적으로 항시 유지할 줄 압니다.
그들은 삶과 권력의 예술로 정치를 수행합니다.
이러한 예술에는 생에 유익하고 악한 것, 너무 저속한 것의 요소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은 보다 높은 것, 이념, 인류적이고 예의 바른 것과 윤리적인 것에 결코 눈을 떼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그 민족들은 '정치적'이라고 느낍니다.
이러한 식으로 그들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다스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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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히틀러가 승리했더라면 그들 중 아무도 편지를 쓰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면 저의 기쁨은 반감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12년의 망명 생활이 아무것도 아니기라도 하는 양, 심지어 순진하게 직접 연결함
으로써 예상되는 무지와 냉담함으로도 기쁨이 반감됩니다.
어쩌면 오는 것들은 책들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책들을 즐겨 보지 않고 곧장 치워버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까요?
그것은 미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인쇄될 수 있었던 책들은 무가치하며 손 에 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피와 치욕의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폐기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독일에서 문화를 만드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고 불가능했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의 주위에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황폐함을 미화하는 것이었고 범죄를 치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정신과 독일 예술이 늘 절대적으로 소름 끼치는 것의 간판과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히틀러 바이로이트를 위한 것으로 바그너 훈장을 기획한 사실이 존경할 만한 사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모든 감정이 결여된 것 같습니다.
괴벨스의 허가로 헝가리나 그 밖의 독일적• 유럽적인 나라로 가는 것, 그리고 재치 있는 강연으로 제3국을 위해 문화 선전을 하는 것, 그것이 치욕적인 것이었다고 저는 말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으며 그런 것을 다시 본다는 것이 송구스럽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히틀러에 의해 파견되어 취리히, 파리나 부다페스트에서 베토벤 음악을 지휘한 악단장은 음악가라는 구실로 파렴치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음악을 지휘할 뿐 그게 전부라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국내의 음악도 거짓말이었습니다.
대체 베토벤의 ‘피델리오', 독일 해방의 날을 위해 태어난 이 축제 오페라가 어떻게 독일에서 12년 동안 금지되지 않았나요?
그것이 금지 되지 않고 아주 세련된 상연이 행해졌다는 사실, 가수들이 그것 부르고, 음악가들이그것을 연주하고, 관중들이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하나의 추문이었습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고 힘러의 독일에서 ‘피델리오'를 들으려면 얼마나 둔감해야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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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인 행위 덕택으로 예술의 초개인적인 위엄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는 예술가는 세속적인 명예와 성공의 장점에 대해, 성공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본능적이고 조소적으로 거부합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전적으로 무익하며 자유롭고 유희적인 예술의 초기 상태를 신봉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자기가 '예술'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비웃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술가는 그러면서 예술을 꼭 붙들고 있고 싶어합니다.
예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비웃기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예술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예술가 자신은 근엄한 얼굴로 명예와 위엄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거칠고 고독한 젊음에 대한 배신감에서 늘 자신을 비웃고 싶어합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에 위엄을 부여하는 일을 극도로 꺼립니다.
부끄러워서 말입니다.
그러한 일은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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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정신적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삶에 예술은 차가운 악마의 손을 내뻗지 않습니다.
예술은 선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선이며 지혜와 가까우며 사랑과는 더욱 가깝습니다.
예술은 인간들에게 자주 웃음을 안겨 주지만,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증오와 우둔함이 해소되는 명랑함이며 해방하고 합일시키는 명랑함입니다.
고독함에서 빠져나와 늘 새로이 태어나는 예술은 합일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운명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환상을 품는 최종적인 것입니다.
나쁜 것을 경멸하는 예술은 결코 악의 승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의미 부여에 매달린 나머지 피비린내 나는 불합리를 결코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예술은 힘이 아니라 하나의 위로일 뿐입니다.
하지만 깊디 깊은 진지함의 유희이며, 완성을 향한 갖은 노력의 본보기인 예술은 애당초부터 인류의 동반자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술은 죄에 의해 흐릿해진 눈으로 자신의 순진함을 결코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