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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신유빈-전지희·장우진-임종훈, 세계탁구 은메달
36년 만의 탁구 세계선수권 여자복식 금메달에 도전했던 신유빈-전지희 조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신유빈-전지희 조는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여자복식 결승에서 중국의 첸멍-왕이디 조에 0대 3으로 졌다. 남자복식 결승에 출전한 장우진-임종훈 조도 중국의 판전동-왕추친 조에 패해 2회 연속 은메달을 차지했다.
2016 오바마 미대통령 원폭투하 71년 만에 현직대통령으론 처음 일본 히로시마 방문
2015년 TV아사히 구로야나기씨, 토크쇼 혼자 1만회 진행… 세계 신기록
일본 여배우 겸 작가인 구로야나기 데쓰코(黑柳徹子·81·사진)씨가 세계 최초로 단일 사회자가 단일 프로그램을 1만회 진행하는 기록을 세웠다.
구로야나기씨는 1976년 2월 2일 TV아사히에서 ‘데쓰코의 방’이라는 40분 분량의 토크쇼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39년 3개월 25일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월~금요일 낮이면 카메라 앞에 섰다. 처음 20년은 오후 1시 15분에 했고, 이후 두 차례 시간대를 옮겨 작년부터는 정오에 시청자를 만나고 있다. 이미 2011년 ‘단일 사회자, 단일 프로그램, 최장 기간 진행’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이번에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27일 구로야나기씨가 1만회 방송을 달성하자, 1980년대 일본을 풍미한 아이돌가수 곤도 마사히코(近藤真彦·51)씨와 히가시야마 노리유키(東山紀之·49)씨가 게스트로 출연해 박수를 쳤다. 구로야나기씨가 “아흔 살에도 여기 찾아오긴 힘들 것 같은데 괜찮을까”라고 묻자, 게스트들이 “아흔 살에도 쭉 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격려했다.
구로야나기씨는 일본에서만 1000만부 가까이 팔린 성장소설 ‘창가의 토토’를 쓴 작가다. 말썽꾸러기 꼬마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유쾌하고도 가슴 찡하게 그려서 30여 개국에서 출간됐다. 구로야나기씨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정치인부터 개그맨까지 다양한 게스트가 1만명 이상 출연했다.
2015년 영국 옥스퍼드대 785년만에 첫 여성 총장 지명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1230년 총장 제도를 도입한 지 78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총장이 탄생했다. 이 대학 창학은 1096년으로 알려져 있다.
27일(현지 시각) 옥스퍼드대 총장선출위원회는 테러리즘을 전공한 정치학자인 루이스 리처드슨(57·사진) 세인트앤드루스대 총장을 임기 7년의 새 총장으로 지명했다. 리처드슨은 외국인(아일랜드인)이고, 과거 옥스퍼드대와 아무 인연이 없다는 점에서도 파격적 인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년 1월 취임한다.
미국에서 대학 총장을 ‘프레지던트(president)’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바이스 챈슬러(vice chancellor)’라고 한다. ‘챈슬러’는 재단 이사장 격으로서 명예직에 가깝다. 리처드슨은 옥스퍼드대의 제297대 ‘바이스 챈슬러’이다. 296대까지는 예외 없이 남성이었다.
2011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297책) 모두 돌려받음
2009 방글라데시와 인도 초대형 사이클론 아일라 사망 123명 이재민 수십만 명2009년 한국 철학계의 태두(泰斗) 김태길 전(前)학술원회장 별세
김태길 전 회장은 윤리학 연구와 윤리 운동에 평생을 바친 실천적 철학자였다. 일제 말기 도쿄대 법대를 다니던 그는 1947년 서울대에 편입하면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9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그는 1962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후진 양성과 윤리학 연구에 힘썼다. 1970년대 이후에는 존 롤스, 허버트 마르쿠제의 학문을 토대로 사회윤리학과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저서 '변혁시대의 사회철학'을 펴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윤리의 재정립' '직업윤리와 한국인의 가치관' '일상 속의 철학' 등이 있다.
김 전 회장은 한국철학회 회장과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 상임공동대표를 지냈으며 2004년부터 작년까지 학술원 회장을 맡았다.
2007년 전도연, 한국 여배우 사상 첫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2007년 5월28일 오전(한국 시각) 막을 내린 제60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 배우 전도연(34세)이 ‘밀양’(이창동 감독)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배우가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아시아 여배우로는 2004년 중국의 장만옥 이후 두 번째다.
매년 5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인 칸에서 열리는 칸 국제영화제는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며, 예술성과 정치색이 짙은 작품에 높은 점수를 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은 것은 1987년 베니스영화제의 강수연(‘씨받이’) 이후 20년 만이다.
시상대에 오른 전도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며 “ 작품에서 열연한 많은 여배우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설 자격과 영광을 주신 칸과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006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족자카르타시 부근 리히터 규모 6.3의 강진 발생.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섬의 족자카르타시 부근에서 27일 오전 5시 54분(현지시각) 리히터 규모 6.3의 강진이 발생, 28일 오후까지 사망자가 4600명을 넘어섰다. 이번 참사는 2004년 말 쓰나미(지진해일)로 아체 지역에서만 13만명이 사망한 이래 인도네시아가 겪은 또 하나의 대재앙이었다.
지진이 새벽시간에 발생한 데다, 주택들이 내진 설계를 갖추지 않은 벽돌 건물이어서 피해가 컸다. 28일 오후까지 부상자는 1만5000여명, 이재민은 20만명에 달했다.
4600여 명으로 파악된 이번 지진 희생자의 91%는 반툴 지역에서 발생했다.
2006년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피트가 드디어 결혼식
2명의 아이 입양, 브래드 피트의 청혼 거절, 양성애 공개 등으로 수많은 뉴스를 뿌리고 다니는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31)가 딸을 출산했다.
AP통신은 “졸리와 피트가 27일 저녁(현지시각)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딸 실로 누벨 졸리-피트를 얻었다”고 보도했다. 딸에 관한 더 이상의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2년 전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를 함께 촬영하면서 사귀기 시작한 ‘브란젤리나’ 커플은 지구상 가장 유명한 연인으로 떠올랐다. 출산 전 파파라치를 피해 아프리카로 떠난 그들을 쫓아간 취재진만 200여명. 이들 딸의 사진은 태어나기도 전에 한 잡지에 독점 공개를 단서로 260만 파운드(약 46억원)에 팔렸다.
졸리는 현재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아들 매독스와 딸 자하라를 키우고 있다.
2005년 김용덕 신임 건설교통부 차관 취임식
2005년 한,중,일 중앙은행 총재 통화스와프 계약체결식
2005년 국보 1호인 숭례문 주변에 조성된 숭례문광장 준공
서울 남대문(숭례문) 주변에 녹색광장 2480평을 조성하는 공사가 완공돼 27일 개장했다.
또 남대문 주변 도로에 횡단보도가 5곳 만들어져, 걸어서 이 광장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시는 25일 잔디와 나무를 심어 만든 이 광장을 ‘숭례문 광장’으로 이름짓고, 27일 개방한다고 밝혔다. 5곳의 횡단보도는 숭례문 광장에서 남대문시장, 북창동, 염천교 쪽으로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작년 5월 시청 앞 서울광장 조성, 올해 4월 20일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 신설에 이어 숭례문 광장이 만들어짐으로써 서울의 중심 가로인 광화문~서울광장~숭례문~서울역에 이르는 보행벨트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건조된 숭례문은 서울에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1899년 전차(電車) 노선공사로 주변 성곽이 철거되고, 일제시대 도시계획에 따라 주변이 훼손된 이후 도로 한가운데에서 섬처럼 고립돼 접근이 차단돼 왔다.
서울시는 개방에 맞춰 숭례문의 야간 조명시설을 개선, 더욱 또렷한 단청과 용마루 등을 볼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한국 슬로바키아 정상회담
2004년 호세 모리뉴 감독의 FC 포르투,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우승
49회째를 맞은 UEFA 챔피언스리그는 공수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연출한 FC 포르투(포르투갈)의 우승으로 일단락됐다.
호세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FC 포르투는 27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독일 겔젠키르헨 아레나 아우프살케 구장에서 벌어진 대회 결승전에서 카를로스 알베르투와 데코, 알레니체프의 연속골에 힘입어 AS 모나코를 3-0으로 완파했다.
올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등을 연파하며 유럽축구의 기존판도를 뒤흔들었던 포르투는, 이로써 지난해 UEFA컵 우승에 이어 유럽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챔피언스리그까지 석권, 유럽 무대 최정상에 등극하는 영예를 안았다.
포르투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지난 86~87시즌 이후 통산 두번째. 또한 포르투는 전대미문의 2년 연속 트레블(3관왕)에는 아쉽게 실패했지만 76~77시즌 리버풀이 이룩했던 UEFA컵-챔피언스리그 2년 연속우승의 진기록을 수립하면서 유럽축구의 신흥강호로 우뚝 섰다.
2003년 러,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창건 300주년
5월 27일로 시(市) 창건 300주년을 맞은 러시아 제2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소요 예산만 15억달러(약 1조8000억원)가 투입됐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주(州) 주정부 주도 하에 지난달 23일 축제개막 선언과 더불어 공식행사는 6월 1일까지 열흘 동안 펼쳤지만, 시(市)는 연중 축하공연과 다채로운 행사로 국민 축제를 만들어 갔다. 각종 행사들은 2003년 1월 1일부터 시작됐으며 12월 31일까지 계속 되었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1703년 5월 27일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다.
2000년 출판계 원로 조상원씨 별세
2000년 5월 27일 별세한 현암 조상원(87)씨는 반세기 넘게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현암사를 창립, 우리나라 최초의 법령집인 `법전`을 출간한 것을 비롯, 지난 50여년 동안 스스로를 `책바치`라 부르며 출판 인생을 걸어왔다.
"양서가 아니면 활자화할 수 없다"는 소신으로, 평소 베스트셀러로 돈을 벌면 출판계의 미답지를 개척하는 기획물에 쏟아 부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미수(米壽)를 앞두고 펴낸 회고록 `그래도 길이 있었다`에서 "내가 해온 일은,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반듯하고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1999년, 광복 이후 어려운 환경을 딛고 한국 출판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20세기 한국의 출판인` 중 한사람으로 현암을 꼽았다
1999년 새 플라스틱 주민증 갱신
1983년 일제히 갱신된 현행 주민등록증을 대체하는 새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이 1999년 5월 27일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됐다. 새 주민등록증 발급 대상자는 1999년 기준 17세 이상의 기존 주민등록증 소지자 3554만9000명과 일제 발급 기간에 새로 17세가 되는 신규자 63만8000명 등 총 3618만7000명이었다.
새 주민등록증은 가로 85.6mm, 세로 54mm, 두께 0.82mm의 신용카드 크기의 형태이다. 수록되는 항목은 사진,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발급일자, 발급기관장 등 7개로, 호주, 본적, 병역사항, 특기번호 등이 없어졌다. 종이 주민등록증은 2000년 6월 1일부터 사용이 중지됐다.
1993년 남북학자, 발해유적 첫 공동발굴
남북한의 역사-고고학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나, 분단 후 처음으로 잃어버린 우리 민족사 발굴에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1천년 전 발해 유적지에서 잃어버린 민족사의 고리를 연결해 줄 중요 문화재를 발굴, 첫 개가를 올렸다.
조선일보와 대륙연구소, 문화방송 발해유적 발굴조사단은 1993년 5월 27일 러시아 우스리스크시 교외의 코르사콥카 발해사원에서 불황과 연꽃문양이 새겨진 발해 수막새기와의 완형을 발굴했다. 발굴된 수막새의 문양은 고구려의 수막새 문양을 대표하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배치를 그대로 전수받고 있어,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발전한 우리민족 국가임을 입증하는 실물 사료가 되고 있다. 발굴조사단은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막새모양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통을 이었으며, 또한 통일신라와 친연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한 발해지역 공동발굴작업으로 기록된 이번 만남은 러시아 극동역사 고고민속학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남북한 발굴단이 연해주 발해유적지에서 별도 지역을 선정, 발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991년 북한 외교부 유엔가입결정 성명 발표
1991년 한국-체코 체육교류협정 체결
1990년 세자르 가비리아 콜롬비아 대통령으로 당선
1990년 5월 27일 바르힐리오 바르코 대통령의 후임선출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집권자유당의 세사르 가비리아 트루히요가 콜롬비아의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세자르 가비리아는 “테러에 양보하는 국가는 영원히 테러에 휩싸이게 된다” 는 지론을 갖고, 콜롬비아 내에 60만명의 방대한 세력을 가진 코카인 밀매조직에 강경 대처를 강조해 왔다. 때문에 그는 이들 코카인 밀매 조직들로부터 암살대상 1호로 지목돼, 지난 3월 13일 집권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이후에 대중 유세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투표일인 이날에도 그는 방탄조끼를 입고서도 14대의 경찰차량과 1백20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여 투표를 했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서 그가 차점자보다 2배의 득표를 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집권자유당이 좌익 게릴라들의 준동에 대처하는 노력의 하나로, 1886년 제정된 헌법을 처음 민주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1947년 커피 생산지인 페레이라시에서 태어난 그는 안데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정치에 입문, 페레이라시의원-시장-지역구의원 등을 거쳐 1983년 콜롬비아 하원의장에 취임했다. 그 뒤 현 바르코 대통령 정권에서 경제장관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특히 내무장관 재직 중에는 바르코 대통령의 외유 때마다 대통령 집무를 대행했다.
1988년 미국상원,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 비준
1988년 평화의 댐 1단계 준공
평화의 댐은 대한민국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의 북한강에 위치한 댐이다.
2차 완공 후의 현재 길이는 601 m, 높이는 125 m이며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t이다.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른 수공(水攻)과 홍수 예방을 위해 1987년 2월에 착공하여 1989년 1월에 1차 완공(당시 높이 80 m)된 뒤, 2002년부터 2단계 증축 공사를 하여 2005년 10월에 최종 완공되었다.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댐으로 운영되고 있다. 댐 위로는 지방도 제460호선이 지나간다.
건설 과정에서 제5공화국이 북한의 수공 위협을 과장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여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이후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증언과 감사원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다. 이 때문에 제6공화국 이후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평화의 댐의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은 금강산댐의 저수량보다 1천만 톤이 더 많으며, 소양강 댐(29억 톤), 충주댐(27.5억 톤)에 이어 셋째로 많은 저수량을 가지며, 댐 높이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다.
1987년 미국-베트남, 관계정상화 합의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1987년5월27일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위해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1월14일 발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반독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모든 개헌논의를 중단하고 간접 선거제를 규정한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민주항쟁을 성공적으로 주도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85년 12년 만에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 참석차 북한적십자 대표 서울 도착
1981년 정부 한국선원의 베트남 기항 허용
1980년 계엄군 광주 진입, 광주 민주화운동이 완전히 진압되다.
198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 2.1이 출시.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개방 선언
1976년 레소토왕국의 레아부아 조나탄 수상 방한
1974년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내란 예비음모-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기소(2차 인혁당 사건)
1973년 소련, 한국인에 첫 입국 허가
1972 프랑스 1377년(고려 우왕 3) 제작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공개, 세계최초 금속활자 사용국 공인
1971년 축구 골키퍼 레프 야신 은퇴
야신은 골키퍼의 대명사이자 전설이었다. 신의 손, 거미손, 문어발 등 뛰어난 골키퍼를 칭찬하는 수많은 별명들이 야신으로부터 비롯됐다.
야신은 1953년 23세의 늦은 나이에 모스크바 다이나모팀 골키퍼로 데뷔했다. 같은 클럽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야신을 눈여겨보던 선배 골키퍼의 권유가 축구입문의 계기가 됐다. 야신이 지키는 골 문은 이때부터 철옹성으로 변했다. 야신은 축구 골키퍼로서 완벽한 신체조건을 구비했다. 1m 88의 키에 팔과 손가락이 유달리 길었고 반사신경이 뛰어났다. 여기에 차분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은 팀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데뷔 1년 뒤 국가대표로 뽑힌 야신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 금메달과 1960년 유럽선수권 우승컵을 소련에 바쳤다. 1963년엔 골키퍼로선 유일무이하게 `올해의 유럽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도 1958년 스웨덴대회, 1966년 영국대회, 1970년 멕시코대회에 3연속 출전하며 수많은 명장면을 남겼다. 이런 야신에게 소련 정부는 최고의 훈장인 레닌상을 수여했다. 야신은 현역 시절 150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냈고, 국가대표로 뛴 78경기에서 70골만을 허용했다.
야신은 199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월드컵과 함께 영원한 전설로 살아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94년 미국월드컵부터 최고의 골키퍼에게는 ‘야신상’을 수여하고 있다. 야신은 1999년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체육인`에 뽑히기도 했다.
1969년 티우 월남대통령 방한
1968년 제1차 한국-미국 국방장관 회담 워싱턴서 개최
1968년 일본 전공투 결성
1967년 경인고속도로 기공
1966년 일본, 우리 문화재 1,325점을 반환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문화재가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문화협력협정`에 따라 한국으로 반환됐다. 1905년 이후 망국의 치욕을 안고 남의 땅에 넘어갔던 문화재 1천3백24점은 61년 만인 1966년 5월 27일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수리를 위한 삼국신라시대의 칼2점을 제외하한 나머지 문화재들은 43개의 상자에 담겨 이날 오후3시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옮겨졌다. 일반에게는 7월에 공개됐다.
한일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돌아온 문화재는 신라 고구려시대의 도자기가 90건 97점, 고고자료 84건 3백34점, 석조미술품이 2건 3점, 한말에 수집된 도서8백52책 그리고 체신자료 20건 36점들이며 이등박문이 명치천황에게 바친 고려자기 97점도 포함돼있다.
반환된 문화재 중 대표적인 것은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청자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고려 12세기)로 연꽃 위에 거북이 앉아 있는 모양으로 약탈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귀한 자료로 평가되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도 반환되었다.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준비확대대회에서 서민호대표 김일성과 면담용의 표명(6.3구속)
1964년 인도 초대 총리 네루 사망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전세계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자와할랄 네루 전 수상이 1964년 5월 27일 사망했다. 75세였다.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서 식물학과 지질학을 전공한 네루가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로 돌아온 때는 1912년, 23세 때였다. 네루는 인도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인도의 현실을 자각, 인도자치획득동맹과 인도국민회의파에 가입해 인도독립을 위해 애써왔다.
인도는 전쟁이 끝나면 인도에 자치를 부여하겠다는 영국의 권유에 1차대전에 참전했으나, 전쟁이 끝나도 영국이 당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 통치 강화법인 `롤럿 법안`을 제정하자 간디를 지도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불복종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때 네루는 전국을 순회하며 비참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인도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립할 때까지 9차례 9년간의 감옥생활을 한 네루는 마침내 1947년 8월15일 인도가 독립해 공화국이 되자, 신생 공화국의 수상 겸 외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옥중 생활을 하던 중 홀로 된 13세 외동딸 인디라 간디에게 3년 동안 편지를 보냈는데,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세계사와 조국의 독립에 눈을 뜬 그녀 역시 인도 최초의 여성 수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63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에 박정희 지명
1961년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
1961년 최고회의 비상계엄 해제하고 경비계엄 선포
1960년 터키 육군의 무혈쿠데타 성공, 카말 귀르셀이 터키 대통령에 취임.
1959년 서울 등 비상계엄 해제
1958년 미국 군표 갱신
1952년 파리서 구주방위공동체 조약 조인
1952년 EU EDC 창설 조약 체결했다.
1949년 칠레, 대한민국 승인
1946년 서울서 공창 폐지
1946년 군정법령 70호 인신매매 금지령 공포
1941년 독일 최대 전함 `비스마르크호` 연합군에 의해 침몰
1938년 스톡홀름서 북구 5개국 중립조약 조인
1937년 미국 금문교 개통
1937년 5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골든게이트를 가로지르는 금문교가 개통됐다. 금문교는 1964년 뉴욕의 베러자노내로스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토목기사 스트라우스의 감독아래 1933년 착공하여 이날 개통됐다. 금문교 공사는 빠른 물살, 폭풍과 안개 등으로 많은 어려움 끝에 완공됐다. 6차선의 자동차 전용 현수교인 금문교는 2줄의 케이블에 매달려 길이 2,825m이고, 다리위의 탑의 높이는 227.5m이며, 주탑과 주탑사이의 거리가 1,280m이다. 다리의 중앙부는 해수면으로부터 81m나 되는 높이여서 다리 밑을 대형선박과 비행기도 통과 할 정도이다. 금문교는 붉은색의 교량으로 주위의 경치와 장관을 이뤄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이탈리아) 개막
193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개막
1927년 여성운동단체 근우회 창립, 회장 김활란
1927년 5월 27일, 일제하 여성이 처한 현실을 타개할 목적으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임시 집행부 초대 회장은 김활란이 맡았다.
민족주의·사회주의 양파로 분열됐던 여성운동세력이 통합을 모색한 것은 3개월 전에 창립된 신간회가 자극제가 됐다. 창립후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뒤따랐지만 이들은 교육의 성차별 철폐, 여성에 대한 봉건적 인습 타파 등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조직을 키워나갔다. 특히 부녀자·아동의 야간작업 및 시간외 작업 금지와 탁아제도 도입 등은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주장이었다. 일본조차 이들을 “조선여성운동의 최고역량을 집중하고 진용을 정비한 최고 권위 있는 여성집단”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해마다 규모가 커져 한때는 전국에 60여개 지회에 회원도 수천명까지 늘어났으나 김활란 퇴진 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득세하고 광주학생사건으로 다수의 간부가 검거·투옥되면서 침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1925년 관서체육회 제1회 전국축구대회 개최
1920년 독립군 함북 함무봉에서 왜병과 접전
1917년 한강 인도교(구교) 기공식
1906년 의병해산조칙 내림
1905년 러일 전쟁: 쓰시마 전투에서 러시아가 패하다. 러시아 발트함대, 대한해협에서 궤멸.
파도 거칠고 안개 자욱했던 1905년 5월27일 새벽, 러시아 발트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가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에게 전해졌다.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를 가르는 마지막 일전, 전운이 감돌았다.
8개월 전, 중국 뤄순(旅順)을 향해 발트해 탈린을 출항한 발트함대가 대서양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월. 뤄순이 함락됐으니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는 전갈이 왔다. 한반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2만8800km나 되는 항해로 연료는 거의 떨어졌고 병사들의 몸도 지쳐있었다. 발트함대는 일본 함대가 진해만에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질러가기 위해 폭이 좁은 대한해협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하는 발트함대를 파견한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동아시아를 관할하는 태평양 함대가 있었지만 뤄순과 블라디보스톡으로 나눠져 있는데다 뤄순은 일본 함대에 포위돼 있었고,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흑해함대는 국제협정에 묶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다.
발트함대는 30여척도 넘는 함선으로 편성됐지만 함선은 구식이었고 병사들도 주로 농민들로 구성돼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이에비해 일본은 맹훈련을 거듭하며 다가올 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경, 포격전이 시작됐지만 속도ㆍ화력 어느것 하나 일본 함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침몰 19척에 나포 5척, 4800여명이 전사하고 6100여명이 포로가 됐다. 러시아 짜르체제 붕괴의 서막이었고 신흥 제국주의 국가 일본으로선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륙침략으로 이어지는 짧은 팽창시대의 출발이었다.
1883년 미국 브루클린 다리 개통
1871년 파리코뮌, 수립 2개월 만에 붕괴
1871년 3월 28일 사상 최초로 노동자 정부를 천명하며 파리에 수립된 파리코뮌이 2개월 만인 5월 27일 마침내 와해됐다.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부르조아 공화파의 정부군이 파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5월 21일부터 1주일이 지난 이날 페르라쉬즈 묘지에서 농성중이던 마지막 남은 200여명의 코뮌 수비대는 정부군의 총칼에 쓰러져 갔다.
블랑슈에서는 120명의 여성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다 전멸했으며 살아남은 수비대도 전원 총살당했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 동안 발생한 사망자수는 3만에 달했고 5만명이 체포됐다. 레닌은 코뮌을 가리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낭만적 질풍노도 시대가 맞이한 찬란한 절정이었다"고 평했다.
1865(조선 고종 2) 유앙, 브르트니에르, 볼류, 도리 신부 등 충청도 내포 상륙
1829년 프로이센, 헤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사이에 통상조약 체결. 훗날 관세동맹으로 발전.
1862년 美 남북전쟁, 포터 장군의 1사단이 하노버 코트 하우스의 남군을 공격. 북군 승리
1703년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탄생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1703년 5월 27일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가 됐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승리 후 발트해 진출을 위해 1712년 제정(帝政)러시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구 문명을 도입, 여느 유럽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1년 러시아 민주화 과정에서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 지명을 되찾았다. 레닌 혁명 다음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시민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로 기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900일 동안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바람에 8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564년 프랑스 종교개혁가 칼뱅 사망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1564년 5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무덤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추모객들을 위해 단지 `J.C`라는 약자만 새겨놓았을 뿐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사제를 지망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부했으나, 부친의 강권에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는 중세의 여느 부르조아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귀족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종교개혁운동에 본격 나선 그에게 최초의 시련이 닥쳐온 것은 24세 때인 1533년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니콜라스 콥의 이름으로 발표된 한 연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로 그에게 체포명령이 떨어졌다.
바젤에서 숨어 지내던 중 교회를 초기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것을 다짐하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며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박해와 도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내다가 제네바로 초빙돼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칼뱅은 제도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중심으로 바꾸었으며, 교회 안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다. 칼뱅의 사상은 제네바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프랑스의 위그노파, 네덜란드의 고이센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청교도 등 여러 파를 탄생시켰다.
1525년 독일 종교개혁가·농민전쟁 지도자 토마스 뮌처 처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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