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열린 국제심판 휘장수여식에서의 정몽규 KFA 회장과 박세진 주심.
올해 처음으로 국제심판에 임명된 박세진(30) 주심은 이제 거대하고 새로운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 기분이다.
지난 8일 축구회관에서는 2019 FIFA(국제축구연맹) 국제심판 휘장수여식이 열렸다. 2019년 한 해 동안 국제무대에서 한국축구의 위상을 알릴 27명의 국제심판 중에는 올해 처음으로 국제심판에 임명된 박세진 주심도 있었다. 이번 국제심판 휘장수여식은 국제심판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화려하게 마련됐다. 국제심판들을 소개하는 다양한 영상이 준비됐고, KFA의 정몽규 회장과 조병득 부회장, 최영일 부회장, 김판곤 부회장, 홍명보 전무이사 등 임원진들도 대거 참석해 국제심판들을 격려했다.
첫 국제심판 휘장수여식을 경험한 박세진 주심은 당시의 소감을 한 마디로 “뭉클했다”고 표현했다. 심판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제심판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2019 금석배 전국 학생 축구대회가 한창인 군산에서 만난 박세진 주심은 “설레고 긴장도 많이 됐다. 그동안 심판으로 활동했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박세진 주심은 “또 다른 세계가 열린 기분이다. 그동안 차근차근 퍼즐을 맞춰왔는데, 이제 다시 새로운 퍼즐을 시작해야 한다. 당장 월드컵에서 뛰는 내 모습을 꿈꾸지는 않는다. 순리대로 묵묵히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뤄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국제심판으로서의 각오를 밝혔다.
선수에서 지도자, 지도자에서 심판
대구 출신인 박세진 주심은 지금 해체된 영진전문대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모두가 실업팀에 진출할 수는 없는 터라 졸업을 앞두고서 여러 가지 스포츠 관련 자격증을 준비했다. 2009년 9월 3급 심판 자격증을 딴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에는 지도자 자격증도 취득했다. 은사의 부름을 받아 대구에서 여자축구부 코치로 일하기도 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심판으로서 모두 그라운드를 누빈 박세진 주심은 각각의 매력이 다르다고 했다. 박세진 주심은 “지도자를 할 때는 가르치는 선수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거기서 오는 보람이 크다. 반면 심판은 내가 성장하는 느낌이다.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러내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차이는 결과적으로 박세진 주심이 심판의 길을 택한 이유가 됐다. 그는 “지도자 생활을 통해 얻는 보람이 간접적이라면 심판 생활을 통해 얻는 보람은 보다 직접적이다. 일찍 선수 생활을 마치고 또래 친구들이 선수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라운드를 직접 뛰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심판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지도자 생활을 했던 것이 심판 활동에 주는 도움도 있다. 경기 전체의 흐름을 읽고 전술을 이해하는 것, 선수들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 등이다. 선수들과 가까이서 소통하는 것에도 자신이 있다. 실제로 현재 W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중에는 박세진 주심의 제자도 있다. 박세진 주심은 “지도자를 해봤기 때문에 지도자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가끔 강한 항의를 받아도 어떤 의도인지 아니까 부드럽게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세진 주심은 지난해 W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주심을 맡았다.
잊지 못할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
박세진 주심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지난해 11월 5일 열렸던 인천현대제철과 경주한수원간의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을 꼽았다. 여자축구팬들에게 역시 역대급 명승부로 손꼽히는 경기다. 정규시간에 이은 연장전까지 총 8골이 터졌고, 이 중 페널티킥 골이 3골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경기는 인천현대제철의 승부차기 승리로 끝났다.
보는 사람들의 손을 땀을 쥐게 했던 이 경기를 관장했던 이가 박세진 주심이다. 우승을 가리는 경기였던 만큼 박세진 주심이 받는 중압감도 상당했다. 그는 “긴장을 안했다면 거짓말일 거다.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뛰지만, 그날은 정말 그랬다. 경기 전부터 양 팀 선수들이 뿜어내는 승리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 경기 중에는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관중도 많았고, 경기장 전체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대단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통합 6연패를 노리는 인천현대제철과 1차전 승리로 한껏 고무된 경주한수원 모두 날이 곤두선 경기였다. 자연스레 판정에 대한 양 팀 벤치의 항의도 잦았다. 박세진 주심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든 경기였지만 이런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언제 또 해보겠느냐는 생각으로 끝까지 뛰었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남지만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경기가 될 테다.
군산에서 금석배에 참가 중인 박세진 주심을 만났다.
돌고 돌아와 더 소중한 심판의 길
박세진 주심은 건강상의 이유로 심판 활동을 쉰 적이 있다. 몸을 회복해 2015년 5월부터 다시 2급 심판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체력 테스트에서 네 번이나 탈락하는 등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시 시작하면서는 정말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아프고 나니까 몸이 건강할 때 더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 활동을 더 잘하고 싶고, 더 큰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했다.
공백 뒤에 다시 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만큼 박세진 주심의 목표의식이 불타올랐다. 그는 “제자리에서 만족하지 말고 내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자고 마음먹었다. 국제심판에 대한 목표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겼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씩 밟아 올라오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밝혔다.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그저 선수 생활 이후의 진로 중 하나라고 여겼던 심판 활동이지만, 박세진 주심은 이제 심판이라는 직업의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져있다. 그는 “사실 심판은 많은 돈이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이 일이 너무나 재미있고 보람차기 때문에 계속 하게 되는 것 같다. 안하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마치 중독된 것 같다”며 웃었다.
국제심판의 목표를 이룬 첫해, 박세진 주심은 새롭게 열린 세계의 첫 계단을 밟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월드컵 무대에 선 자신을 그려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 과정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나”라며 되물었다. 박세진 주심은 “높은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을 잊으면 안 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몇 년씩 국제심판을 해온 선배 언니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더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며 마음을 다졌다.
글=권태정
사진=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