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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지난 5월 20일은 본 카페(cafe)에서 숭의전(崇義殿)을 마지막으로, 기고(寄稿)한 전국 팔전(全國八殿)의 글이 모두 완성된 날이었습니다. 2월 13일부터 본 카페에 기고했으니까, 총 98일이 걸렸습니다. 비록 오래 걸린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 재건회(再建會) 입장에서는 우리의 지난 오천년(五千年)의 장구(長久)한 역사를 전국 팔전의 소개로 정리(整理)하고, 또 우리의 빛나는 오랜 역사를 실제 경영하며 국가를 훌륭하게 통치하셨던 위대한 각 황실 성씨(皇室姓氏)들의 각고정려(刻苦精勵)와 수많은 우리 열성조(列聖朝) 및 선조(先祖)들의 피땀어린 노력을 다른 곳도 아닌 이곳, 가장 신성(神聖)스럽고 자랑스러운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의 카페에 수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저희에게 큰 자부심이며, 매우 큰 성과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지난 1910년 멸망과 함께 전국 팔전으로 끝난 제국의 열성조 숭조사업(崇祖事業)이 지금까지 팔전(八殿)으로만 머물러 있기는 합니다만, 이것을 저희 재건회는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의 재건 이후에 크게 더욱 전국 구전(九殿)으로 확대하여 명실공히 중국(中國)의 구룡벽(九龍壁)에 비견(比肩)되는 승승장구(乘勝長驅) 구룡(九龍)으로써 신성 동이족(東夷族)의 최후 제국(最後帝國)으로 재건된 제3제국(Drittes Reich)과 같은 대한제국을 영구히 보호(保護)하고 보장(保障)할 수 있는 근원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제3제국은 우리 민족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고조선(古朝鮮),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중조선(中朝鮮),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신조선(新朝鮮)으로 정의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일은 숭력전(崇力殿)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숭력전은 안타깝게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 전각이며, 대신 현재는 임의로 단군교(檀君敎)에서 발해에 대한 시조 제사(始祖祭祀)로 사적으로 편액(扁額)하여 사우(祠宇)로 쓰고 있는 임시 사시 전각(私諡殿閣)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련하여 첨언(添言)한다면 단군교(檀君敎)를 처음으로 중광(重光)하신 백봉신형대종사(白峯神兄大宗師)께서는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되기 6년전, 그리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기 1년전이었던 1904년에 단군교를 처음 세상에 반포(頒布)하셨을 때 정전으로 삼으셨던 전각의 이름이 바로 대숭전(大崇殿)이었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하여 본다면, 바로 대숭전은 전체 전국 팔전(全國八殿)과 숭력전까지 모두 합친 전국 구전(全國九殿)을 포괄하는 전체 숭(崇)자 전각을 합친 동이족 전체 숭조사업의 대정전(大正殿)이라고 호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또 참고로 숭력전과 관련한 숭정전(崇政殿)에 대해 특별히 본 카페에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 숭정전은 경희궁(慶熙宮)의 정전(正殿)으로 알려져 있으며, 숭(崇)자가 붙은 궁궐 전각 중에서는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각이 바로 숭정전입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특히, 숭정전이라는 편제(扁題)가 중국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후금(後金)이 중국 명나라(大明國)로 입관(入關)하기 전, 수도(首都)였던 성경(盛京)의 정궁이었던 선양 고궁(瀋陽故宮)에 청나라(大淸國) 시대 별궁(別宮)으로 남아 있는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중로의 청태종 시대(淸太宗時代)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 바로 숭정전인 것입니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이 선양 고궁에 오게 되면 임시로 정무를 보시던 곳이 숭정전일 정도로 선양 고궁(瀋陽故宮) 중로의 숭정전, 청녕궁(淸寧宮), 봉황루(鳳凰樓)의 중심이 되는 세 개의 건축물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며 특히, 숭정전은 청태종 폐하(淸太宗陛下)의 집무실(執務室)이며, 동시에 바로 선양 고궁의 정전(正殿)이라는 점에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남다릅니다.
광해군(光海君)이 경희궁(慶熙宮)을 세운 때가 광해군 9년인 1617년이고, 청태조 폐하(淸太祖陛下)께서 천명(天命) 10년인 1625년에 심양(瀋陽)에 성경(盛京)을 세우시면서 시작된 궁궐 건축이 청태종 폐하(淸太宗陛下)의 천총(天聰) 5년인 1631년부터 5년동안 다시 궁전을 개건(改建)하시고, 1636년인 숭덕(崇德) 1년에 청태종 폐하께서 황제 즉위식(皇帝卽位式)을 거행(擧行)을 하신 곳이니까, 경희궁의 숭정전은 후금의 숭정전보다 약 20년 전에 먼저 세운 정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태종 폐하께서 조선의 숭정전의 존재를 알았다면 경희궁을 본떠서 선양 고궁의 정전으로 숭정전을 삼았을 수도 있고, 몰랐다면 매우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례는 같은 뿌리를 가진 동일한 대동이(大東夷)의 동이족이니까 같은 DNA(deoxyribonucleic acid)에 의한 관념과 사고(思考)에 의해 동일하게 정전의 이름까지도 일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낙관(樂觀)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숭정전 자체가 갖는 의미는 역사(歷史) 뿐만 아니라 민족적(民族的) 의미에서도 매우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귀중하고 소중한 전각이 지금은 엉뚱하게 공화국하에서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불당(佛堂)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대한민국 공화국 국민이 몇이나 있습니까?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니라면 세상천지(世上天地) 무엇이 언어도단이겠습니까?
어떻게 이러한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심한 일입니다만, 이와 같이 숭정전이라는 이름은 국내뿐만 아니라, 같은 대동이족(大東夷族) 동포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민족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나라(大淸國)에게도 매우 중요한 전각으로 사용된 정전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개념없이 엉뚱한 불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알려진다면 매우 심각한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본 카페에서도 지난 글을 통해 몇 차례 숭정전 관련 글을 기고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유산청(Korea Heritage Service)에서는 전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국가의 문화재를 다루는 일은 단순히 옛날 유물의 관리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이고 고유한 주체성(主體性)과 존엄성(尊嚴性)을 동시에 관념(觀念)으로 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개념이 없고 졸속으로 만든 엉망인 나라가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궁궐의 정전을 일개 대학의 하찮은 불당으로 쓰고 있다는 점은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며, 분명 국가의 기본적 정신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심각한 대한민국 공화국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즘, 조선일보(朝鮮日報)사의 송재윤씨가 심심치 않게 계속 조선시대 노비(奴婢)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일삼고 있는데 재건회(再建會) 입장에서 덧붙여서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정작 현재 공화국 시대(the republic period)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심각하게 언어도단이 일어나고 있는 조선시대 유형적 국가유산과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라고 할 수 있는 대한 황실(大韓皇室)의 사적 재산(私的財産)과 관련한 공화국 차원의 국가 유린 문제(國家蹂躪問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오히려 과거의 전세계적인 시대적 배경(時代的背景)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대와의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유감스럽고 씁쓸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현대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과거 조선시대의 노비와 비교될 수 있는 건국 이후,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 임금 문제와 관련한 정의가 공화주의(republicanism) 차원에서 올바르게 실현되어 왔고, 또한 사법적 정의가 또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 왔다고 자부하시는지 우선 묻고 싶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불합리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 의식과 비평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의 전제조건(前提條件)은 현재의 상황이 과거에 비해 월등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일 때 과거를 비판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문제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과거의 이미 그것도 몇 백년 전에 국가 체제가 전혀 다른 시대에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행위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며,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에 기고한 내용들을 보면 노비들에 대한 빈번하고 상습적인 학대와 살인으로 엄청난 인원이 살상된 것처럼 묘사를 하고 있던데, 공교롭게도 비슷하게 같은 시대 조선시대 사료들을 보면 조선 초기에 비해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인구 증가율(人口增加率)이 거의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조선시대 당시 인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비들에 대한 국가(國家)와 사대부(士大夫)의 빈번한 살인이 광범위하게, 그리고 상습적으로 있었다면 조선시대 인구가 급격하게 늘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지나치게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로 가득차 있는 기독교적(the Christian) 사고를 지닌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 지나친 자기 합리화적인 판단이 아닐까 싶고, 비단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결코 아니라 처음 국가가 세워지는 고조선시대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전쟁의 여파와 신분적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노비의 발생과 더불어,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있었던 당시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일인 것처럼 문제제기 범위를 한정(限定)짓고 특정(特定)지어서 언급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학문의 범위에 드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숭정전의 경우를 보면 과거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를 거치며, 동국대학교 측에 매각되어 현재 경내에 존재하게 된 일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숭정전이 일반 사가(一般私家)의 건물이 아닌 바로 궁궐의 정전 건축물이며, 바로 국보(國寶)와 보물(寶物)의 준하는 국가 유산임에도 일본제국 통치기(日本帝國統治期)였던 1926년에 조계사(曹溪寺)로 매각되어 무려 98년 이상, 100년 가까이 일개 대학인 동국대학교에서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국가 모독(國家冒瀆)에 준하는 기이(奇異)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는 불교(佛敎)에 대해 직접적으로 탄압(彈壓)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어떻게 망했습니까? 당시 불교(佛敎)의 말도 못하게 많은 폐해(弊害)로 고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을 인식하여, 조선왕조는 스스로 불교와 많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매우 이성적(理性的)이며, 오히려 숭조사상(崇祖思想)이 매우 높았던 대표적 유교 국가(儒敎國家)였습니다. 유교(儒敎)를 통치 이념으로 하고 있던 왕실(王室)의 정전을 마치 조롱(嘲弄)하고 희롱(戱弄)하듯 공화국 정부가 건국 80년이 되어가도록 불당으로 전용하여 쓰고 있다는 것은 조선(朝鮮)이라는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아닌, 일본제국(日本帝國)의 합방(韓日合邦) 이상의 반인륜적 범죄(反人倫的犯罪)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희궁의 숭정전이 현재 오대 궁궐(五大宮闕) 중 칠조룡(七爪龍)의 용문(龍紋) 그려진 궁궐 중에서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다음으로 경희궁 숭정전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정전이라는 것을 아는 공화국 국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방치(放置)하지도 않았겠습니다만,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고 이러한 문제나 모순점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노비 제도에 대해서만 무비판적(無批判的)인 비판(批判)만 일삼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다는 생각만 갖게 합니다.
하루속히, 대한민국 공화국의 국가유산청은 동국대학교에서 악질적 불당으로 전용하여 쓰고 있는 숭정전을 지금의 경희궁으로 모셔서 다시 복원하고 말뿐인 국가유산(國家遺産)이 아닌 실질적인 국가유산으로 소중하게, 공화국 정부(government of republic)가 정식으로 다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본론인 숭력전 내용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발해(渤海). 우리가 발해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06년 9월 16일부터 2007년 12월 23일까지 총 134부작으로 제작되었던 드라마(drama) 대조영(大祚榮)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평균 시청률이 26%가 넘는 매우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KBS의 대표적이면서 굉장히 유명했던 대하드라마로 알려져 있으며, 바로 발해의 건국 과정을 드라마로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해에 대해 많은 분들이 몰랐던 사실과 진실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매우 정성들여 만든 고도의 영상(映像)은 많은 국민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준 매우 소중한 우리 민족의 드라마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발해는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망하게 된 것일까?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위대한 제국이었던 고구려(高句麗)의 후신(後身) 발해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이며,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조상과 선조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해를 주목하지 않고 있으며, 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발해 영토의 대부분이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에 소재하고 있고 그만큼, 자주 가서 확인할 수 없고, 또 중국 정부가 허용하지 않는 분명한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표면적으로는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살아있는 역사임에도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가 무시하며 그냥 눈물의 역사로 흔적도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것으로 사라지게 하고 있는 것은 분명 많은 우려와 걱정을 낳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바로, 하루빨리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복원과 함께 남북통일(南北統一)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우선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유적 발굴 및 복원에 예산을 지원하는 방향에 대해 우선 협력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우려스러운 것은 현재 지속적으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역사의 왜곡과 분열, 삭제를 조장하고 주도적으로 만주(滿洲)의 역사를 심각하게 붕괴시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정부가 대책이나 관심이 없이 무방비로 방치하고 마치 격안관화(隔岸觀火)하듯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친일파(親日派) 이상의 상당히 매국적(賣國賊)인 행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the Republic of Korea government)와 공무원(government employee)들이 할 일 없이 놀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관련 학자들과 단체를 발굴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동북공정에 대응하고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의를 함께 드리는 바입니다. 과연, 대한민국 공화국이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구심(疑懼心)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우리 민족의 진정한 독립된 국가인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감(懷疑感)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단군교(檀君敎)의 유래는 바로 발해로부터 시작되며, 대한제국 재건의 모든 동기와 용기 또한 발해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 국민이 알아주셨으면 바라고 함께 역사를 복원하고 죽음의 공화주의(republicanism)와 망신적 기독교(Christianity)로부터 인식을 탈피하는 것의 필요성도 우리는 본 카페(cafe)인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를 통해서도 설명을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훗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1910년 멸망 후 120년이 되는 2030년에 헌법 개정(憲法改正)을 통한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으로의 전환을 또한 제안하는 바입니다.
입헌군주국으로의 개헌(改憲)과 함께 대한제국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단순히 한국의 변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며 변화시키는 큰 물결이 될 것이며, 이것은 과거 동이족이 새롭게 21세기(the twenty-first century)에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근거와 본거지(本據地)가 될 것은 매우 자명합니다. 언제까지 공화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능력도 안되는 대통령(president)들이 탄핵(彈劾)까지 되는 상황에서 국가를 통치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문제라고 사료되는 바 많은 공화국 국민의 동참과 협력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또한, 다시 제국이 복원이 되고 재건이 된다면, 지난 3월 25일 숭혜전(崇惠殿)과 5월 20일의 숭의전(崇義殿)의 글에서 이미 제기한 글처럼 화백회의(和白會議)를 통해 전국 팔대 황실성씨가 중요한 국가 안건에 대한 의결을 통한 공동 국가경영(共同國家經營)을 이룰 수 있다면, 반드시 대한제국의 복원은 매우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음은 역대 왕조(歷代王朝)의 국성(國姓)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단군(檀君)이십니다. 바로, 대동이(大東夷)의 전체 민족적 시조(民族的始祖)이신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바로 해씨(解氏)이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현재 국내에서 해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人口住宅總調査)에서 단 9명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희귀성(稀貴姓)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바로 해모수(解慕漱)를 시조로 하고 계시는 성씨입니다만, 현재 본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큰 궁금증은 과거 백제 시대(百濟時代)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매우 큰 왕실 성씨로 알려져 있던 성씨였음에도, 어떻게 모두 사라졌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한가지 추측되는 점은, 백제 멸망 당시 중국 당나라(唐國)로 끌려간 이후 모두 해씨의 왕족들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수 있는데, 당시 당나라의 탄압(彈壓)과 압살(壓殺)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본관도 알 수 없지만, 국내에 아홉 분이라도 계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번영하여 큰 성씨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고구려(高句麗)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원래 고씨(高氏)로 현재는 대한민국 공화국의 횡성 고씨(橫城高氏)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요양 고씨(遼陽高氏)와 일본의 고마씨(高麗氏)도 모두 고구려 왕조의 황실 성씨의 피를 이어받아 현재까지 족보관리를 하여 온 유서깊은 고구려의 국성 집안이십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기자(箕子)는 황실 성씨(皇室姓氏)로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가 현재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매우 유서깊은 황실 성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은 이성동본(異姓同本)으로 바로 태원 선우씨와 청주 한씨(淸州韓氏), 그리고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모두 같은 조상을 뿌리로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마한(馬韓) 8대 원왕(元王)이신 훈 폐하(勳陛下)의 아들로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의 세 아드님이 계셨는데, 우평은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그리고 우성은 행주 기씨(幸州奇氏)가 되었다고,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와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신 기준 폐하(箕準陛下)가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나라가 바뀌면서 마한(馬韓)으로 망명하시어 한왕(韓王)이 되셨다는 점이며, 이것이 곧 대한의 삼한 역사(三韓歷史)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후 8대 임금이 되시는 원왕(元王)의 세 아드님이 세 개의 성으로 각각 별도의 황실 성씨로 분화되었다는 설명은, 설명만 놓고 본다면 모두 황실의 성씨라고 칭할만 합니다만, 다소 아쉬운 부분은 다른 역사적 사료에는 관련된 내용이 없고 오직 한씨와 기씨 족보에만 나오는 내용이라는 점이 매우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다, 국가차원의 더 깊은 연구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이 매우 중요하겠다고 판단됩니다.
백제(百濟)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원래 부여씨(夫餘氏)로 현재는 부여 서씨(夫餘徐氏), 이천 서씨(利川徐氏), 의령 여씨(宜寧余氏)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고, 참고로 후백제(後百濟)의 황실성씨였던 견(甄)씨는 현재는 전주 견씨(全州甄氏)와 황간 견씨(黃磵甄氏)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백제(前百濟)의 부여씨 경우 백제 멸망 후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들이 중국 당나라(唐國)로 엄청나게 대규모로 많이 끌려갔고, 또 일부는 압송(押送)을 피해서 일본으로 왕족들이 망명하면서 점차 많은 백제 황실의 뿌리가 일본의 원조 성씨(元祖姓氏)로 뿌리 내려지면서 점차 광범위하게 정착되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중국에는 안타깝게도 후손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중국내 백제의 황실성씨가 완전히 멸족(滅族)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이라도 혹시 있을 지 모르는 중국내 백제 왕족들의 후손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저희 재건회는 간절합니다.
반면, 일본(日本)에는 현재까지도 상당히 많은 백제의 후손들과 함께 왕실 성씨들이 분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마쓰씨(三松氏), 스가노씨(菅野氏), 야마토씨(山都氏)인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일본의 성씨입니다. 원래는 쿠다라노코니키시씨 즉, 백제왕씨(百濟王氏)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지토 덴노(持統天皇)가 백제왕씨를 사성(賜姓)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는 백제왕씨 뿐만 아니라, 부여자신(夫餘自信)의 후손들 성씨라고 할 수 있는 다카노미야코(高野造)도 방계 백제왕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성씨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드님셨던 순타태자(純陀太子)를 조상으로 하는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순타태자의 증손자 화사우내라(和史宇奈羅)는 바로 일본의 화씨(和氏)와 고야씨(高野氏)의 시조가 되며, 화사우내라의 4대손인 화사을계(和史乙繼)는 다시 화씨에서 고야씨로 사성을 받으면서 원래 화신립(和新笠)으로 알려져 있는 딸의 이름이 고야신립(高野新笠)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러한 고야신립이라고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고닌 천황(光仁天皇)의 후궁이면서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인 화신립(和新笠)인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결국, 이러한 설명은 지난 2001년 12월 23일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明仁天皇)이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는 내용을 보도한 바가 있었는데, 위의 언급된 백제황실 성씨 관련 글이 바로,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는 사항인 것입니다.
참고로, 화사우내라는 이후의 가계(家系)는 화사율승(和史栗勝), 화사정족(和史淨足), 화사무조(和史武助), 화사을계(和史乙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일본 천황가의 가계도(家系圖)가 백제 황실과 연결되며 하나의 한일 합본 황실(韓日合本 皇室)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매우 남다르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먼 훗날 일본과 한국의 한일합방(韓日合邦)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때는 한국 주도의 일본 병합(日本倂合)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기타 그리고 상세한 일본의 성씨를 연구해보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대다수 백제 유민의 성씨가 변하여 일본의 현재 성씨로 정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사례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결코 우리의 한국과 절대 다르지 않은 바로 우리나라 자체이며 바로, 같은 종족이면서 동시에 동이족의 민족임을 증명하는 사료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저희 재건회에서는 일본내 백제 황실성씨를 모두 게재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에 일본의 성씨와 관련한 글을 별도로 기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또한 신라(新羅)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박씨(朴氏), 김씨(金氏), 석씨(昔氏)로 알려져 있는데, 참고로 박씨는 본관(本貫)에 상관없이 모든 박씨가 해당되는 사안이며, 특히 밀양 박씨(密陽朴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함양 박씨(咸陽朴氏), 순천 박씨(順天朴氏), 무안 박씨(務安朴氏), 죽산 박씨(竹山朴氏), 고령 박씨(高靈朴氏),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여덟개 박씨가 전체 박씨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박씨의 본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씨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그리고 석씨는 경주 석씨(慶州昔氏)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야(伽倻)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육가야(六伽倻)로 알려져 있는 가야에서 왜 황실 성씨는 하나밖에 없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재 사료의 부족으로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오가야(五伽倻)의 황실 성씨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이른바 구지봉(龜旨峯)라는 가야의 성지(聖地)에서 태어난 6개의 알(金卵)에서 가야의 시조분들이 나오셨고, 사료는 비록 부족하다고 하지만 가야의 각 시조들이 모두 김씨(金氏) 성(姓)을 사용하고 있었던 점을 본다면, 가야의 시조들이 모두 김해 김씨라고 보는 것은 타당한 이론이라고 사료됩니다.
고려(高麗)는 황실 성씨(皇室姓氏)가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왕조(高麗王朝)는 역대 왕조와 다르게 태자(太子)를 제외한 왕자(王子)들을 승려(僧侶)로 출가시키거나 또는 모친(母親)의 성(姓)을 따르게 해서 왕권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고려 태조 폐하(高麗太祖陛下)의 고려 초기 혼인정책과는 많이 다른 정책이라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매우 지나칠 정도로 왕실의 자체적 억압 정책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역대 어떤 왕조도 국성의 번성을 바라지 않은 사례가 없습니다만, 고려왕조에서 특별히 왕실의 큰 확대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추가적 관련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실제로 고려 성원록(高麗聖源錄)에 의하면 유씨(柳氏), 임씨(林氏), 이씨(李氏) 등 외가의 성을 따른 왕자들이 많은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는 고려 멸망 후 조선 조정(朝鮮朝廷)에서 내린 명령에 의해 고려 왕조에서 사성된 일족(一族)들은 모두 본성(本姓)으로 환성(換姓)하게 하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고려 시대 당시에도 국성의 지나친 확대를 바라지 않았던 고려왕조가 이후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왕실 성씨조차 모두 환성하거나 모친의 성씨를 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매우 충격적이며, 조선왕조에서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가혹할 정도로 개성 왕씨의 성씨를 멸족시키려고 하였는지는 매우 큰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고려의 황실 성씨라고 할 수 있는 개성 왕씨가 결론적으로는 사실 대부분 원래 성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게 모두 다른 성씨로 환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지금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약 2만명 정도의 개성 왕씨 인구를 가진 성씨로 현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훗날 대한제국의 복원과 재건을 통한다면, 개성 왕씨가 황실의 성씨로서 크게 제국의 존칭을 받는 위대한 황실 가문으로 다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발해(渤海)의 황실 성씨(皇室姓氏)는 밀양 대씨(密陽大氏), 협계 태씨(俠溪太氏), 영순 태씨(永順太氏)가 전하고 있습니다. 태씨가 대씨가 아닌 태씨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시조에 따른 성씨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밀양 대씨의 경우는 발해의 마지막 임금이셨던 대인선 폐하(大諲譔陛下)의 아드님이신 대탁(大鐸)께서 유민을 이끌고 밀양(密陽)으로 내려와 정착하시면서 밀양 대씨가 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반면, 협계 태씨의 경우는 발해 멸망 후 세자였던 대광현 전하(大光顯殿下)가 발해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 폐하께서 태씨 성을 사성했다는 설명이 있고, 영순 태씨의 경우는 중시조(中始祖)라고 할 수 있는 태금취(太金就)께서 대중상(大仲象) 장군의 18세손인데,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대조영 폐하(大祚榮陛下)를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모두 태씨를 칭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 및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실 성씨입니다. 바로 전주 이씨(全州李氏)인데,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매우 큰 인구를 자랑하며 대한민국 공화국 내에서 현재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큰 인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인 점은 매우 훌륭한 황실 성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왜 왕정(王政)보다는 공화정(Republic)을 선택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물론, 과거 대한제국과 조선왕조가 불운하게 멸망한 부분에 대한 자책 또는 회의감에서 비롯된 비판으로 왕정복귀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 공화국의 정치 현황이나 경제 및 사회의 모든 면을 살펴봤을 때, 과연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과 비교하여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지 한번 자문해보길 권합니다.
경제적으로 왕조시대보다 좋아졌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화국의 자체적인 경제적 능력보다는 원론적으로는 한미동맹(South Korea-United States alliance)에 의한 미국 원조(United States aid)로 과거 경제 활성화가 주된 이유로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비록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무역으로 무역의 구조가 다소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근본적인 무역 구조는 절대 바뀌지 않은 채, 미국과의 경제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거나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저희 재건회가 특별히 본 카페를 통해 언급드리고 싶은 부분은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매우 짧다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풍족하고 풍요롭게 부족함없이 경제적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주어진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바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뜻있는 일을 남기고 가는 것 역시 하나의 인간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국가를 위한 일이며, 후손을 위한 일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대한민국 공화국이 건국된지 8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통일은 못하고 있으며 전쟁까지 남북이 과거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공화국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낙관적 미래가 있으며, 경제적으로 더 번영하며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국민이 깊은 고민을 해주시길 바라며, 이미 대한민국 공화국은 외국의 학계에서도 우려할 정도로 출산율의 저하로 인한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고갈되어가는 국민연금(National Pension System)만 바라보며 미래를 낙관할 생각이십니까? 혁명에 가까운 혁신적인 국가의 대전환과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또다시 불행했던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깊이 고찰해주시길 바랍니다.
현재 미국 정부(the United States of America government)는 유럽(Europe)에는 영국(the United Kingdom)을, 그리고 아시아(Asia)에서는 일본(日本)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同盟國)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 공화국과 같은 극단적 정치체제 변화로 인한 혼란한 이념지향적 국가보다는, 입헌군주국으로 정치의 급격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국가체제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미국 정부 입장에서 일본과 대한민국 중 어느 나라를 더 강한 동맹국으로 점수를 줄 것인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국민의 생활과 안전, 국가 보위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대통령의 탄핵과 아니면 좀스러운 일로 매일 시끄럽게 국민적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국가는 지구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국이 한가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글에서 언급하였던 송재윤씨의 경우도 물론 과거 조선왕조에 있었던 불합리한 노비제도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린 대한민국 공화국의 총체적인 난맥상(亂脈相)과 문제점(問題點)들에 대해 먼저 문제 제기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 올바른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쌓여있는 문제만 해도 태산(泰山)같은데, 엉뚱하게 수백년 전 사건을 가지고 지금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정상적인 학자로서의 자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깊은 성찰을 바라며, 오직 국가의 올바른 길에 대한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고 체계를 갖출 것인가에 대한 깊은 논의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황실 성씨이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도 아울러, 무엇이 앞으로 종가(宗家)를 위한 일이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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