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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묵상글 들 ( 연중 제25주일. - 어려울 때의 나의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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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려울 때의 나의 기도
지난주에 이어 연중 25주일도 그리스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합니다.
복음은 오늘 첫 번째 독서 지혜서의 의인처럼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것임을 얘기하는데 지혜서에서 의인은 악인들에게
성가시게 하는 자요 죄지었다고 나무라기만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악인들은 덫을 놓아 죽이자고 하며 최후가 어찌 될지 보자고도 하고,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이렇게 시험을 해보면 의인이 진짜 하느님의 아들인지,
온유와 인내력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생각에 최후에 대한 예측 외에 다른 것은 악인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시험은 모욕과 고통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그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잘 드러나지 않고,
특히 얼마나 약한지 또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없지요.
좋을 때는 온유의 한계와 인내력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인내력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도록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보자는 그들의 말은 맞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권고 13번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자기가 만족스러워할 때에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때에 지니고 있는 만큼의
인내와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인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이 돕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실 리 없고, 그러므로
적대자의 손에서 죽는다면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적대자의 손에서 구해 주심이 뭐냐가 다릅니다.
지난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정체는 베드로가 맞게 알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가 수난받으시고 권력자들의 손에 돌아가서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사탄의 말을 들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도우심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시거나 적대자들의 손에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모욕을 당하되 끝까지 잘 견뎌내게 하시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적대자들의 손에서 최후를 맞게 하시는 겁니다.
이는 박해시대에 하느님이 순교자를 돕는 것은 온갖 형벌과 회유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도록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주시는 것과 같지요.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라는 시가 여기에 딱 맞습니다.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그러니 의인과 악인이 다른 것은 최후에 대한 생각입니다.
의인들의 최후는 하느님께 가는 것인데
악인들의 최후는 이 세상 끝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처럼
하느님께 갈 때까지 어떤 십자가의 길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갈 힘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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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연중 제2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습니다.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역사적, 법률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 무엇이든 간에 어원적으로 ‘증거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순교자’라는 명칭은 피로써 증거하는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적용되어 왔습니다. 순교자는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온전한 맘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입니다(사도 7,55-60).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느님을 위한 순교자의 으뜸이며 순교자의 표본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전부를 바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참되고 온전하게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죽음을 아버지께 바쳐진 온전한 존경의 표시와 순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요한 10,18).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형선고 받으신 순간에 당신의 신원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루가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참된 순교자 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다시말해 그분께서 보여주신 참된 순교자의 모습은 심적으로 고통스런 순간에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을 통한 위로와 힘(루가 22,43), 고발과 모욕 앞에서의 침묵과 인내(루가 23,9),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이의 고통을 먼저 생각함(루가 23,28),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참회하는 죄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임(23,43), 당신을 해치려는 박해자들에 대한 용서(루가 22,51; 23,34) 등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전체는 예수님 안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고통받은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의 수난은 당신의 사명에 대한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죽음을 당해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수난당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수난과 죽음을 통한 영광스러운 순교로써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제 교회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피와 증거를 하느님께 비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미 유다인 공동체는 특히 마카베오 시대에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마카 6-7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순교는 주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아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바친 우리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우리 또한 일상 안에서 매순간 순교의 정신으로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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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은 연주 2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 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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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대의 순교>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고 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케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고 은총과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라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몸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천주교는 초기에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 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옛 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굣ㄴ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평화롭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쳐지지 않으니 어떻게 신자가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9,23-24)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랑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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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반기에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후반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주로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는 일에 주력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예고와 함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도 그 중의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러주신 가르침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 진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어주는 커다란 전환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첫째가 되려고 다투게 되어 세상에는 혼란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이 진리를 반대하는 악인들은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의인을 시기하여 덫을 놓는 악행까지 저지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핵심으로 삼아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고자 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의회의 쇄신 의지를 담아서 2014년에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라는 문서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황은 서로 섬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느님의 진리로 믿는 신앙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직자들은 가르치고 능동적으로 행한다거나, 평신도들은 배워야 하고 수동적으로 행한다는, 기존의 잘못된 교회관을 배격하였으며, 모든 세례 받은 이가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이라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에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평신도들의 신앙 감각을 높이 샀던 비오 9세와 비오 12세 교황 시절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이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설이는 교황청 관료들과 반대하는 신학자들을 무릅쓰고 각각 1854년과 1950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와 몽소승천 교리가 확정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었는데, 이 두 교리는 초대교회 시절 이래로 근 2천 년 동안이나 평신도들 사이에서 신앙 감각으로 확신되어 오던 신심이었습니다. 동정녀의 처지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올곧게 예수님의 길을 가신 성모 마리아이시라면, 하느님께서 잉태와 죽음의 순간에 특별히 보호하셨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평신도들의 소박하지만 확신에 찬 신앙 감각의 발로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신하는 평신도들의 신앙 감각은 어려운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능동적인 능력이자 감수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교회헌장에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으로 이룩하는 당신의 직무를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수행하시며,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복음의 힘이 빛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신도들은 성사 생활로 그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여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귀중한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5항). 또한 계시헌장에서도 사도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예수님의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활성화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첫째, 마음 깊이 진리를 새겨 간직하는 명상과 공부, 둘째 영적인 식별로 실천하며 겪는 체험, 셋째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주교들의 설교”라는 것입니다(8항).
이 같은 섬김의 진리를 실제 사목에서 구현한 인물은 올해로 탄생 백 주년을 맞아 그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초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입니다. 그는 신생 교구로서 교세가 빈약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을 늘리려고 하기보다도 교구가 관할해야 하는 지역 내에 가난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을 직시하고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사목하고자 오늘날 사회사목이라 일컬어지는 통합적 인간발전을 위한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와 상황을 깨닫게 하는 의식화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민 자조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지 주교가 보여준 섬김의 사목은 첫째,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인간 발전을 위한 노력, 둘째 협동조합 운동을 통한 참여적 대안 경제 설립과 독점과 독재에 저항하려는 정치개혁 요구, 셋째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산업 문명을 좇아가지 않고 모든 생태계가 협동적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모색하려는 노력 등 선구적인 모범이었습니다.
원주 교구와 그 모태가 된 춘천 교구는 지금도 이 강원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된 풍수원에서 성체 현양 대회를 1920년부터 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이자 신앙생활의 맥이 된 교우촌이 한국에서 최초로 형성된 풍수원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섬김의 진리를 성체성사의 영성으로 생활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가 첫째가 되려고 다투는 세상과는 정반대로 서로 꼴찌가 되어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섬김의 진리에 대한 신앙 감각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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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있습니다. 1929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프란 세락’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좋은 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차가 탈선해서 한겨울 차가운 강에 빠져서 17명이 사망했지만, 그는 팔이 부러지는 상처만 입었습니다.
2) 처음 타 본 비행기가 추락해서 19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건초더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구했습니다.
3) 그 후에도 버스가 강에서 떨어지거나, 운전하던 승용차가 폭발하는 등 다섯 번의 사고가 있었어도 매번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4) 자신의 다섯 번째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되었습니다.
진짜로 운 좋은 사람일까요? 교통사고를 아예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운 좋은 것이 아닐까요? 또 다섯 번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네 번의 이별을 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액 복권 당첨자의 불행이 자주 소개되는 것을 보면, 복권 당첨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무 일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운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왜 특별한 행복을 찾을까요?
세상의 관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함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수난을 당하시고, 또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는 권력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이 담긴 주님의 관점을 따를 때,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각종 조건이 많습니다.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또 운을 비롯한 그 밖의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세상의 첫째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첫째 자리는 딱 하나,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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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순간이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 묻는 순간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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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지 마세요.
올해는 아직 못하고 있지만, 매년 국내외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순례 중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성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성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 순례객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 문이 자물쇠로 닫혀 있어요.”
몇 차례 방문했었던 곳인데, 이곳을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늘 문이 열려 있었던 곳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순례객들과 함께 내려갈까 했는데,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문 앞까지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혼자 올라갔습니다.
정보를 알려 준 순례객의 말처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는 생각으로 자세히 보니, 자물쇠가 걸려는 있지만 문이 움직이지 못하게만 했을 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앞선 순례객은 문에 자물쇠가 끼워져 있는 것만 보고서 그냥 포기했었던 것이지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돼’라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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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개의 분단국가가 생겼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로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분단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면서 1955년 통일하였습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1976년 통일하였습니다. 독일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1950년 시작되었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정전상태입니다. 우리는 1945년 이후 76년 째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군사분계선은 생태계가 잘 보존된 평화공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평양으로, 백두산으로 소풍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아이들도 서울로, 설악산으로 소풍 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출품은 멀리 배로 돌아가지 않고, 기차로 빠르게 유럽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이 남한의 기술과 조직이 만나면 더욱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다른 나라들은 분단의 장애를 이겨내고 통일을 이루었는데 대한민국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요? 물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시에 분단되었던 나라들은 모두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종전협정을 맺지 못하고,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민족의 통일보다는 이념의 통합을 이루려했던 내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이 또다시 강대국들에 의해서 일정기간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한 대한민국은 결국 남과 북이 각자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대한민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강대국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념의 벽을 넘어, 분담의 담장을 허물려는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북한에는 조만식, 남한에는 김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통일된 조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덫에 걸려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기억하듯이,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던 분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공동체 분열의 원인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이기심 그리고 부당한 욕정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도 없이 수용소에 가두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검사는 사건을 조작하였고, 판사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인권운동은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었고, 언론은 정권의 뜻에 따라서 보도하였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야만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통일된 나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갈등과 분열의 바람이 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가 대립과 분열을 겪고 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통일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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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
- 지혜, 섬김, 환대 -
첩첩산중疊疊山中이란 표현이 어울립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의 삶은 나름대로 길게 뻗어있는 살아있는 산맥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평전을 쓴 분 고백이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큰 산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수 차례 만나 인터뷰 하니 하나의 산山이 아닌 살아있는 거대한 산맥山脈같은 대통령의 생애였습니다.”
끝나지 않은 살아있는 산맥같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들입니다.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시도 이런 점을 고백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첩첩산중 하루하루 넘어야 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할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다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지혜서가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이 말한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현실이자 우리가 겪는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흡사 삶의 여정은 모욕과 고통의 ‘장애물 경기’와도 같고 온유와 인내력의 시험장試驗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같은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는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 부활을 체험하기 전이라 당황했고 두려워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주님 파스카의 삶이 무엇인지 배워 익히 압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부활의 희망으로 열린 하늘 나라가 궁극의 답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 하늘나라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위에서 오는 주님의 지혜 은총이 이런 파스카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며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속에서 얻어집니다.”
바로 이런 위로부터의 지혜 은총이 하루하루 파스카의 삶을, 내적 평화와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첩첩산중의 산을 넘게 합니다. 참된 자기비움의 겸손과 섬김도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다투던 동상이몽의 오합지졸의 제자들 공동체에 대한 주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파스카의 영성은 자발적 꼴찌의 겸손의 영성이자, 종과 섬김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파스카 은총입니다. 종들의 종이라 정의되는 교황님의 신원이 또한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섬김의 영성에 이어 환대의 영성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내적으로 한계를 지닌 약한 어린이들입니다. 그러니 환대의 정신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듯 만나는 모든 이들을 환대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파스카 영성의 진위는 환대의 영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 역시 이를 분명히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깊고 건강한,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듯 만나는 모든 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대할 때,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사람환대를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평생 배워 살아야 할 파스카의 삶, 의인의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위로부터 하사되는 주님 지혜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지혜와 섬김과 환대의 삶을, 늘 새롭게 시작하는 영적 승리의 파스카 삶을 살게 합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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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9월 20일 경축이동).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한국 교회에 신앙의 초석을 놓은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경축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의인이 받을 몫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사람이 가장 직면하길 어려워하는 주제가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항상 이 죽음이 끼어듭니다. 당신의 신원과 소명을 말씀하실 때에도 수난과 죽음이 늘 언급되고,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와 그 죽음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이르시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존재는 어쩌면 참 당연합니다. 죽음이 없다면 지상의 유한한 생명에서 무한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이나 경계가 부재하는 것이니까요.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더 나은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건너야만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보통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의인들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
물질과 현세적 안위를 행복의 척도로 보는 사람들 눈에 의인들은 꽤나 기구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의인들이 신앙과 신념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사실 세상에서 많은 편의를 보장해주니까요. 세상은 의인의 삶을 "죽음, 고난, 파멸"이라 여겨 조롱하거나 업신여깁니다. 육적인 세상의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은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세속적 자기 영광과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 이 둘을 다 움켜쥘 수 없음은 명백하지요. 육적인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치듯이, 자기 영광이 죽어야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이를 감행한 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영광 때문에 지금 누리는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당장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며, 익숙해진 풍요와 안락과 우월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죽음이 두려워 아직도 선택의 언저리에서 미적대고 서성이는 이들을 일깨웁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죽음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들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아니,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분과 우리를 더 가까이 밀착시켜 주지요. 박해와 순교의 시대에 뜨겁게 타오르던 신앙과 열정이 안정이나 풍요와 더불어 오히려 무뎌지고 온도를 잃어 간 역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영성체송)
주님은 세상에서도 실컷 누리다가 죽음 너머의 영원한 행복까지도 얻고 싶은 탐욕스런 속내를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영적 삶에 발을 들여놓은 이에게는 "증언"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보상까지 마련해 놓으셨지요.
그분께 "제가 당신을 압니다." 한 이는, "나도 너를 안단다." 하는 사랑의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 이는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는 성자의 증언을 들을 것입니다. 변호하고 보증하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니, 이 "앎"의 증언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의 유입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가 듣게 될 "내가 그대를 압니다."라는 주님의 증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찬사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겁니다. 이 증언이 바로 잠시 지나는 세상의 쾌락, 안위, 명예와 흔연히 맞바꾸어 얻게 될 몫입니다.
신앙의 초창기에 신앙적 돌봄과 양성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음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한 순교자들께,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십사 청합시다. 우리도 그들처럼 지금 여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정신과 결단을 꽃피워 주님을 잘 안다고 증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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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김대건안드레아와 정하상바오로와동료순교자들 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이겨내자!'
103위 순교성인 대축일은 9.20(월) 내일입니다.
이 큰 대축일을 오늘로 경축 이동하여 지냅니다.
먼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회장님과 동료 순교자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과 103위 순교 성인들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 곧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른 분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이 죽은 사람처럼 보이고, 파멸로 여겨지지만, 순교자들은 역설의 신앙처럼 '살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놓은 분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8)
우리도 이겨냅시다!
화를 이겨내고, 분노를 이겨내고, 유혹을 이겨내고,
시기와 질투와 이기심과 교만을 이겨냅시다!
이 '이겨냄'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은 장한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이 믿음을 청하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도 장하게 순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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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은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피로 심은 교회의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자들의 믿음과 일상 속 신앙의 증언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은 살아서는 부끄럽지 않은 삶, 그리고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우리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의 은총을 청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큰 신앙의 걸림돌을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으로 보셨습니다.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은 우리에게 좀 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요즘 시대에 이 정도는 괜찮아!’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나의 사고와 맞지 않으면, 합리적, 이성적, 일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나의 하느님’을 만들고 추종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 옳은 길,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을 갈 때, 가장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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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한국 순교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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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작은 들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짜가 되는
첫째보다는
꼴찌가 되는
진짜가
더 아름답다.
복음의 기본은
언제나
진실함과
겸손에 있다.
낮아지는
섬김과
우리자신을
제대로 아는
겸손이
예수님을
만나는 참된
기쁨이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알아가는
겸손의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왼편과
오른편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 중요하다.
건강한 믿음은
낮아지는
겸손에 있다.
낮아질수록
깊어지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낮아지면
모든 것은
은총이다.
십자가의
겸손이다.
낮아질수록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다.
하느님을
가리는
장본인이
우리자신임을
알게된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에서
참된 사랑이
겸손임을
다시 만난다.
실패와
아픔을 통해
다시 일어나는
꼴찌들과 함께
꼴찌가 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낮아지는
기쁨에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깨닫는
은총가득한
가을 주일이다.
낮아져야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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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순교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다보면, 그분들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너무 ‘초인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에는 보통 사람들이 그분들을 따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순교자들이, 보통 사람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대단히 높은 차원의 위인들이라면,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은 해도 본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본받는 것은,
그 일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본받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본받을 수도 없고, 그저 부러워하기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던,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고,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을 한 분들이고,
누구든지 걸어가려고만 하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걸어간 분들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순교자들은 생각만 한 분들이 아니라, ‘실행’한 분들입니다.
믿는 대로 살고, 믿는 대로 죽은 분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에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어떤 특정인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희망하고,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는 너무 쉽고, 누구에게는 너무 힘들고...
그런 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이니,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위대한 성인 성녀들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방해되는 것들은,
또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욕심도 버려야 하고, 자존심도 버려야 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부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루카 18,23).”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부자의 경우에, 그가 가진 재물은 곧 그 자신과 같았습니다.
(재물의 소유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일이 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일은 어쩌다 한 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변함없이 꾸준히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가 ‘날마다’ 주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마음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가,
조금 힘들어지면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안 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 앞까지 간다고 해도,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문 앞까지 갔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순교자들은 육신의 목숨을 버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반대로 배교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고
육신의 목숨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배교자들은 박해받는 순간에는 육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지만,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모두 죽었으니,
배교자들은 육신의 목숨도, 영원한 생명도 모두 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박해받고 고문당할 때 순교자가 될지 배교자가 될지 잘 모릅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담하면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 라고 장담했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순교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또 배교자들은 무엇이 부족해서 순교자가 되지 못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배교자들은 ‘뿌리’가 없었던 사람들이고, 순교자들은 ‘뿌리’를 잘 내린 분들입니다.
‘뿌리’는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 또는 그 실행으로 해석됩니다(마태 7,21).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 곧 뿌리를 잘 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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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지혜 2,12.17-20)는 악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인들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면서(창세 1,26-27)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지혜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의로움을 실천할 때 누리게 되는 행복이라고 합니다(3,1-9). 그런데 악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의인들과 자기들의 삶이 비교되기 때문에 의인들을 시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덫을 놓으면서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괴롭히면서 인내력을 시험하고, 의인들이 겪어내는 아픔을 보면서 즐기는 가운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극도의 고통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침략자들에게 부화뇌동하는 악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의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될 때 최후가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의인들은 하느님 앞에 환하게 드러날 것이며, “의인을 무시하고 주님을 거역한 악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것에 따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3,10) 그래서 제1독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으로도 이해됩니다.
복음(마르 9,30-37)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근처 마을에 가셨다가(8,27)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면서 군중들로부터 떨어져서 제자들에게만 “은밀하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제1독서가 말하는 의인처럼, 고통을 겪으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태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도 귀를 막고 눈도 감아버렸는지,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그토록 많이 들었고,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적들을 많이 보았을 텐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듯한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갈릴래아로 돌아오는 긴 여정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행동에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한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복음 선포의 근거지인 카파르나움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논쟁을 했느냐고 물으셨지만 제자들은 마치 죽은 이들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고, 제자들의 논쟁의 주제가 정말 한심스러웠지만, 그 때에는 제자들이 좋은 결론을 얻어낼 것을 기다리시면서 그 논쟁에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길에서” 왜 그랬는지, 그리고 논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에서 제자들은 사탄으로 돌변했지만, 두 번째 가르침에서는 자기들 가운데 누가 첫째고 누가 꼴찌인지 서열다툼을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9,19)라고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이 서열다툼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뒤에도 계속됩니다(10,35-41).
아무런 지혜가 없다는 듯이, 자기들 욕심만 채우려고 서열다툼을 하면서 본질적인 것은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먼저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하기(마태 23,11-12) 때문에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겸손(꼴찌)과 섬김(종)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굉장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나약한 어린아이를 껴안으시면서(사랑으로 보살피면서) 당신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고 낮은 자와 소외된 이들을 당신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꼴찌가 되고 종이 될 줄 모른다면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올바르게 교육하듯이, 제자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고쳐주는데 주저하지 말고(집회 30,1-13), 어린이처럼 어리석고 유치한 행동 때문에 공동체가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잠언 23,13-14). 결국 제자들끼리 서로 헐뜯고 모욕하거나, 시기질투로 모함하면서 상처를 주지 말고 순수해지고 겸손해지면서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이 있기”(야고 3,16) 때문입니다.
제2독서(야고 3,16-4,3)는 시기와 이기심으로 악행을 일삼지 말고 지혜를 청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의 공동체가 시기와 이기심 때문에 서로 다투면서 살인까지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처음부터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결코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느님께 청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나무라지 않고 주신다고 했습니다(1,5-6). 그런데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지혜는 청하지 않고 시기와 이기심과 욕정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혼란과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런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지혜를 청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욕정과 욕망과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면 편견과 위선 때문에 온갖 혼란과 악행으로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롭고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라서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합니다(1베드 2,11).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외면하는 이들은 악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호세 1,2). 시기와 이기심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 청원 자체가 정의와 평화가 아니라 자기 욕정을 채우는 데 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의인이 겪는 고통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마태 6,19-20). 시기질투와 이기심, 그리고 욕심 때문에 이웃을 혼란과 악행으로 몰고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분쟁을 일으킬 뿐이지 진정한 의로움과 평화는 얻어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찾는 이들은 비록 삶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스승의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뜻을 깨달으라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첫째인지 서열다툼에만 열중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하셨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으며, 악을 물리치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면서(3,14-15) 겸손해지고 섬기라고 하셨는데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기회만 되면 서열다툼을 일삼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성의 법이 아니라 다른 법을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합니다(로마 7,22-23).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욕심과 시기질투 때문에 쉽게 악에 물들게 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라고 심장을 두드리는데 머리는 그 소리를 외면하라고 재촉하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심에 젖어들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욕심이 많아질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이성의 법을 두고 기뻐하기 때문에 악법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버림과 작아짐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낮고 좁아서 겸손하게 어깨를 낮추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지만(루카 12,32) 교만하게 어깨에 힘을 주면서 으스대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가끔 하느님보다는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지키도록 이웃에게도 가르쳐주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마태 5,19). 하느님의 법이 새겨진 심장을 두드리는 양심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사는지,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한 주간 동안 돌아봅시다.
추석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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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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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1846년 9월 16일)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로 사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참수 전에 남긴 마지막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또한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년-1839년 9월 22일) 성인께서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에 순교합니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더 이상 사제가 없자 역관의 종으로 위장해서 북경에 가서 천주교 사제를 청하기도 했는데, 그동안 무려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정하상은 1825년 조선의 독립 교구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합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1931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교구를 설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합니다.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였습니다.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하여 정하상의 집을 숙소로 삼았고 순교하기까지 성인께서는 중국으로부터 성직자 영입을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습니다.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썼습니다. 이것은 당시 우의정(右議政)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낸 한국 최초의 천주교 호교론서(護敎論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의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샤를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루카는 자기 자신을 거절하는 의미로 '아르네사스토 에 헤아우톤 ἀρνησάσθω ἑαυτὸ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 '미워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병행으로 뒤 따라 오는 말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라또 똔 스따우론 아우또 ἀράτω 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우리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 다르게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이제까지 자기가 중심이었는데,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이라면 자기의 가치, 자신의 이익이 주축을 이루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이 자기 자신의 자리 대신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자기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없는 실존에서 오는 고통이겠지요.
내적인 고통은 고통인데 이제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교 성인성녀들께서 인간의 약함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져야하겠습니다. 때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의 큰 박해를 겪은 초대교회는 피와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끌려가는 모습은 대 죄인이요,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4,14)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요?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함께’해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사랑은 놀라운 힘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도살장에 끌려가며 순교자들이 겪었던 환난, 역경, 굶주림, 헐벗음, 칼이 아닙니다. 이제는 세상의 자유로움이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 놓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을 흩으러 놓는 것은 금전만능의 주인인 세상의 재물과 자유로움입니다. 여기에 대처하는 것은 세상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적당한 신심이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도 좋고 주님도 좋은 양다리 신앙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들도 배교할 수도 있고 주님을 부인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따른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고 편하고 좋은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십자가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로 매일 성실하게 노력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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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천주교 박해시대 당시 조선이란 땅은 동방 선교사들에게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이 확실한 사자굴과도 같은 선교지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서방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으로 입국했지요.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사들은 죽음 준비 작업을 하였습니다. 아쉽고 송구스런 마음을 겨우 달래며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작별 편지를 말입니다. 편지지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이윽고 떠나기 직전입니다. 동료사제들,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승에서는 마지막이 될 깊고 힘찬 형제적 포옹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만을 끄덕이며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습니다.
“먼저 떠납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래요. 먼저 가세요. 저도 준비되는 대로 뒤따르겠습니다. 꼭 뜻을(순교) 이루길 바랍니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자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선교사들의 조선행(朝鮮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무죄한 어린 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모든 선교사들의 길은 오직 처절한 십자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과 같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에게서 사제수업을 받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역시 동방 선교사들의 전통과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 입국 역시 목숨을 건 길, 일단 들어오면 100%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꿈결에서 조차 그리웠던 고국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 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 참으로 비극적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 뇌리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목자가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가운데로 한시라도 빨리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김대건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들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는 날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시대, 피를 요구하는 절박한 순교상황은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순교 기회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순교자 후예로서 어떤 방식으로 순교 영성을 살아야 할까요? 일상(日常)에서 순교입니다. 매일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견뎌내는 일입니다. 매일 좌절과 방황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병인박해나 기해박해와 같은 대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나 시련을 기쁘게 참아냄으로써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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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방향: 십자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구원의 표지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습관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하늘엔 죽어야 산다는 표지판이 있고, 땅엔 그저 이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 방향이 분명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땅을 보는 사람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길을 만든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공중에 달아놓는 법입니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길을 만들지 않아 방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는 그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표지판보다는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르려 합니다. 바닥만 보는 사람은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지금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고 강해지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며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보니 그 생존경쟁 안에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나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신경만 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과부처럼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어린이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걸음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런데 걸을 때 땅을 보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고 걸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어디를 보며 걸으라고 알려주었을까요?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난폭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출세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생존만을 위해 산 사람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도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분별 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며 컸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술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버지의 발걸음을 쫓아갑니다.
그 후 아버지의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르고 결국 독일 총통이 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히틀러가 군대에서 마치 아버지처럼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과의 충돌 때문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통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도 동물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늘을 보게 해야 합니다. 하늘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삶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이 표지판도 만듭니다. 그리고 표지판은 항상 공중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달에도 있고 별에도 있고 표지판도 그렇고 등대도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표지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와는 반대로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마더 데레사’의 부모님은 어땠을까요?
마더 데레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10살 때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에게 키워졌는데 그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아니면 치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코올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간에서 음식을 청할 때 자신이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시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 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선행하고 알리지 말라는 말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1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하루 동안 홀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해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표지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부모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합니까?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가 아니라 하늘에 방향을 표시합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자신의 아들 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지만을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지겠다.”라고 가르쳤습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을 어른들을 도와주다가 큰 사업가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학교에서 꼴찌들에게 공부 가르쳐 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창조의 법칙을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창조자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무엇을 바라보도록 교육합니까? 이웃의 행복입니까, 당장 나의 행복입니까? 많은 자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을 때 정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이웃과도 행복하게 지내며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만든 부모 자신의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상관이 두릅이 많다며 따러 들어가자고 해서 쫓아 들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밭이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눈을 들어 표지판을 보지 못하는 눈먼 자녀로 만듭니다. 땅은 생존을 위한 집착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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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자라났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이미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접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몇 번의 대 기근과
두 번의 큰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에서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했을 때,
천주교는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을 찾아 나섰고
두 눈을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발견합니다.
그 별의 이름은 희망이며
지금 주어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 었습니다.
그 별을 선택하고 어둠을 이겨냈던 이들이
비로 우리 선조들이며
참 행복을 향한 선조들의 선택은
후손들에게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전해주었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고통과 슬픔이 가득함을 알려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때
행복을 향한 여정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면,
그 삶은 이미 죽은 삶과 마찬가지이며
오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살아가려 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은 분명 해지지만
그만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의미와
그 의미를 실현하는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이 행복을 향한 여정이며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의 삶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정하상 바오로 성인.
그리고 이름 없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깨달았던 분들입니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요?라는 김대건 신부님의 질문.
순교자의 후손을 살아있다는 한 성지에서 발견한 문구.
그분들의 삶과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도 이어져 내려오며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줍니다.
곧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선택할 만큼
하느님 안에서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고 믿음을 굳건해야 함을,
예수님을 향해 자신을 봉헌할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얻음을,
그리하여 썩어 없어질 것들이 아닌
충만한 생명에 동참하는 길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순교 성인의 흔적을 찾아 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순교 성인의 유해를 통해 기도하며 전구를 청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여정을 걷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고
신앙의 선조들의 삶과 믿음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도 믿음의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희망이 빛이 되는
그런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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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김대군 형제님.
독서,복음서 주해
우리나라는 16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몇몇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름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히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를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천주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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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경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격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주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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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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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죽음도,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가?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헙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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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주해(해제.역주 박 영 식)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
8.31-39에서는 교리적 부분에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현세의 고난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또 어떠한 적대세력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까지 보내주고 편들어 주시며, 그리스도도 중개해 주신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그들은 결정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죄와 죽음과 죄의 지배를 받는 자아와 지상적 난관이나 우주의 부정적 세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이 삶이 그들의 삶을 결정한다.
32절
요한 3.16 참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까지 속죄의 희생으로 내어주신 하느님은 세말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34절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고”는 시편 110.1; 이사 63.10 참조.
“우리를 위해 중개하시는 분”은 히브 7.25; 9.24 참조.
35절
2코린5.5.14-15; 갈라 2.20 참조.
36절
시편 43.23.
38절
1코린 4.9; 6.3; 1ㅂ1.30; 1코린 11.14; 12.7; 콜로 2.18 참조.
“주권이나”는 1코린 15.24; 에페 6.12; 콜로 2.15 참조.
“현재나 미래나”는 에페 1.21 참조.
“권세들”은 1코린 15.24 참조.
39절
“높이나 깊이”라는 말은 우주의 세력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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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때문데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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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 양 모)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
이 단락은 네 가지 토막 말씀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이다. 이는 마르 8.34-38을 옮겨쓴 것이므로 단절어 하나하나에 유래와 내용에 관해서 그곳 주석을 보라.
23절
마르 8.34에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라 한다. “그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든 추종자 자신의 십자가를 가리키든간에 “그 십자가를 지고”는 박해 가운데서 순교를 각오하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루카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 고쳐썼다. 이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나날이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명령이다. “날마다”는 루카의 애용어.
24절
마르 8.35에서는 “(나와) 복음 때문에”라 한다. 루카 복음에 “복음 전하다”동사는 열 번이나 나오지만 “복음” 명사는 단 한 번도 없다.
25절
마르코에는 이 자리에 “사실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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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9. 연중 제25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 (지혜2,12.17-20)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리자." (18~20)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2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사상가인 필로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 윤리, 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대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대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서 유대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全知)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지혜서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지혜서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 자연, 우상, 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復活)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不死不滅)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시고 전능(全能)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惡)이 범람하는가? 전선(全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악(惡)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法)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죽는지? 하는 것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신(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신(神)의 공의(公義), 정의(正義)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신 하느님께서 악(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攝理)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지혜서 3장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永遠; 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點)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公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결코 불사불멸하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神)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 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義)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義)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來世)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믿음을 가진 의인들은 내세(來世)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2독서 (야고 3,16-4.3)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16-18)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6)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생산해 내는 해악의 결과들은 혼란과 온갖 악행이다. '혼란'으로 번역된 '아카타스타시아'(akatastasia)는 '무질서한 상태', '불안정', '혼동', '요란'이란 뜻의 명사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평정이 없으며, 일관된 언어가 없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혼란과 다툼을 초래한다.
'온갖 악행'에서 '악한'으로 번역된 '파울론'(phaulon)의 원형 '파울로스'(phaulos)는 '나쁜', '악한', '무가치한'이란 뜻을 가진 '카코스'(kakos)와 동일한 뜻으로, 여기서는 공동체의 조화와 평화를 깨트리는 악한 면을 지칭한다.
따라서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심지어 교회일지라도,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평화를 깨뜨리는 무질서와 파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7-18)
이제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와 대립되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지혜가 어떤 열매를 가져 오는지를 진술한다.
우선 '위에서 오는'으로 번역된 '아노텐'(anothen)은 이 땅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요한3,3.7 ; 19,11 ; 야고1,17) 따라서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로서, 세상으로부터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이 지혜는 교회를 위한 축복의 열매를 맺도록 한다.
야고보는 바오로가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갈라5,22-23)와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난 지혜의 8가지 구체적인 특성을 나열하고 있다.
① 순수 ; '하그노스'(hagnos)는 '순결한', '순수한'(pure)이란 뜻으로,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음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을 왜곡없이 따르며, 하느님 앞에 항상 동일한 모습만을 견지한다.
② 평화 ; '에이레니코스'(eirenikos)는 '평온한', '평화로운'이란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기와 히브리서 12,11에서만 발견된다. '혼란'으로부터 나온 세상의 지혜와 대비된다.
③ 관대 ; '에피에이케스'(epieikes)는'온화한', '온순한', 공정한'이란 뜻으로, 세상의 지혜를 가진 독선적이며, 오만한 사람의 마음과 달리,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친절한 마음을 의미한다.
④ 유순 ; '유페이데스'(eupeides)는'복종하다'에서 유래되어, '쉽게 순종하는', '고분고분한'이란 뜻이다. 이것은 거칠고 완고한 것과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온당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⑤ 자비 ; '엘레오스'(eleos)는 고통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동정심'이란 뜻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와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다. 냉정과 냉랭함이 그 반대이다.
⑥ 좋은 열매 ; '자비'의 결과를 나타나는 '구제'(자선)로 이해할 수 있다.
⑦ 편견이 없는 ;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디아크리노'(diakr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별되지 않는'이란 뜻이다. 사람의 외관만을 보고 판단하거나 공정성을 잃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 위선이 없는 ; '아뉘포크리토스'(anipokrit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체하다'라는 뜻의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거짓없는', '진실한', '있는 그대로', '숨김없는'이란 뜻을 지닌다. 바리사인들처럼 위선을 행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8가지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한다.
우리 교우들이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지혜를 가까이 한다면, 이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지혜와 총명을 지닌 자로서, 교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8)
야고보는 17절의 지혜의 특성 가운데 '평화'(에이레네; eirene)의 덕목을 다시 강조하면서 본 장을 마무리한다. 이 평화는 다툼과 싸움과 분쟁과 요란이라는 세상적 지혜의 모습에 대조적인 속성이며, 그런 악의 열매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난 지혜의 여러 특징을 아우르는 덕이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의로움의 열매를 거둔다. '의로움의 열매'로 번역된 '카르포스'(열매) 디카이오쉬데스'(karpos dikaiosynes)의 개념은 17절의 위에서 오는 지혜에 속한 모든 특징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려 하는 자에 의해서 심겨진 평화의 씨로 만들어진다. 평화는 14절에서 언급된 시기와 이기심과 16절에서 언급된 혼란과 온갖 악행의 상태와 상반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소란한 일들이 가득하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열매, 즉 의로움의 열매인 평화가 감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마태5,9)
가진 자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사랑의 사회
과거 고대인들은 야생에서 식량과 땅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과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이익을 갖습니다. 반면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 때가 많지만 더 잃는 것이 두려워 불평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 전력 질주합니다.
누구나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누구나 가장 큰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전해야 할 대상,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지위를 가지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의 지위가 역전되는 혁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두머리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제일 끝에 앉아 밥을 먹고 가장 겸손한 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제일 나약한 사람이 가장 존중 받는 사람,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이 가장 존중 받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혈혁명, 사랑의 혁명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진정한 사랑의 사회로 변화되는 혁명입니다.
윗 사람이지만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습니다.
세계가 변화되려면 권리를 위한 투쟁보다는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새로운 문명, 진정한 평등의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서로가 경쟁 상대,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짓밟는 일 없이 사랑만이 존재하고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지 입니다.
강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을 이끌고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힐 것입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어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지만 스스로 순종하셨습니다. 스승이시지만 스스로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가장 존귀한 분이시지만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작고 나약한 어린아이 모습으로,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가장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약한 사람은 돌봄을 받아야 하는 관심의 대상이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충돌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형제애로 뭉친 사랑의 단결만이 있을 뿐입니다.
힘과 재산, 권한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짓밟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리더란 더 이상 권한을 가진 자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돌보아야만 하는 많은 짐을 진 자리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치심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고 아직도 나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주님의 자녀이면서도 아버지의 길과 다른 권력의 사회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과 멀어져 가고 있는 자녀들이 다시금 주님의 길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스스로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를 놓아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가지십시오. 이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이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번만 더 눈길을 주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 따뜻한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아버지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하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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