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투데이]
내가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가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농구가 좋아서 할 뿐이다. 앞으로도 부담 없이 나만의 플레이를 코트 위에서 펼쳐나가고 싶다.
난 원래 축구선수였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말이다. 4학년 겨울방학 때 인천 산곡북초등학교로 전학갔는데 그곳에는 축구부가 없었다. 그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게 한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됐다. 그 선생님은 농구부 코치였다.
사실 난 그전에 농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농구하는 법도 몰랐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번 해보니 무척이나 재미있는 스포츠였다. 난 순식간에 농구의 맛에 푹 빠져들었고 이후 명가드를 많이 배출한 농구명문인 송도중·고에 진학하게 됐다.
송도중학교 당시 나는 ‘농구-공부-집’만 아는 모범생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내게 “농구만 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강조하셨다. 사실 난 농구 못한다고 맞은 적은 없는데 공부 못한다고 맞은 적은 있을 정도였다. 엄한 할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중학교 내내 농구와 공부 모두 열심히 했다.
송도고 2학년 때부터 경기에 자주 출전하게 됐다. 그러면서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고 대학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보통 남들이 가려고 하는 대학을 고집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자율농구’를 강조하신 강식선 감독님 밑에서 배운 나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대학을 가고 싶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동국대였다. 그리고 전혀 후회는 없었다.
동국대에서는 4년 내내 체벌이 없었다. 최성오 감독님은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그 결과 난 창의적인 플레이를 개발할 수 있었다. 키도 작고 그저 빠른 가드였던 나는 최감독님 덕택에 대학 때 많이 성장한 것 같다.
2001년 KBL드래프트 당시 1순위는 중앙대를 나온 센터 겸 포워드 송영진이 차지했다. 그리고 당시 여수 골드뱅크는 2순위에서 전형수를 지명했다. 난 3순위였다. 날 지명해준 오리온스에 무척이나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2004년 여름 난 미국에서 본토농구를 배우게 됐다. 이때 난 다시 데뷔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농구의 본고장에서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느꼈다. 얼마나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했는지 숟가락을 들기 힘들 정도였다.
P.S 항상 전 강동희 선배님(현 LG 코치)의 플레이를 존경했죠. 앞으로도 더욱 ‘나만의 농구’를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