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적도의(明寂道義, 생몰연대미상)스님은 현재의 한국선이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실질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821년을 구산선문의 시작이자 한국선의 효시로 여긴다. 도의스님은 784년(선덕왕 5) 중국 당나라 강서(江西)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로 유학 가서 마조(馬祖)스님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스님으로부터 “진실로 법을 전할만 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는 말을 들으면서 법맥을 전수받는다. 뿐만 아니라 사숙인 백장회해(百丈懷海)스님으로부터도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라는 극찬을 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였지만, 당시 신라는 교학만을 숭상하고 선법을 무위(無爲)하다고 힐난하며 믿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느끼고는, 스님은 그 길로 강원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陣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산림에 은거하다가, 제자 염거(廉居)스님에게 남종선을 전수하고 입적한다.
도의스님의 가지산문은,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스님이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迦智寺)로 이주한 뒤, 김언경 등 신라 중앙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형성된 선종 9산문의 한 파이다. 체징스님은 웅진(충남 공주) 출신으로 어릴 때 출가해 도의의 법을 전해 받아 스승을 가르침을 펴고 있던 염거(廉居)스님을 찾아가 그의 인가를 받은 도의스님의 손제자다. 체징스님은 837년(희강왕 2)에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뵙고 840년(문성왕 2)에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개산하여 도의스님을 제1조로 하고 염거스님을 제2조로 자기를 제3조로 하여서 남종선법을 표방하면서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문을 일으켰다. 이후 보림사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까지 이어져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은 일연(一然, 1206∼1289)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한다.
마조문하 서당지장의 법맥잇고
귀국 후 염거에게 남종선 전수
교학만 숭상하던 신라불교에
가지산문 개창 한국선 기초 다져
현재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는 선종인 조계종이다. 도의(道義)스님의 가지산문(迦智山門, 821년)에서부터 긍양(兢讓)스님의 희양산문(曦陽山門, 935년)에 이르기까지 115년 동안 세워진 9개의 선문인‘구산선문(九山禪門)’은, 한국에서 선종이 확립되기 시작한 신라말 고려초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선문이자, 조계종의 원류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산문(山門)’이란 글자 그대로 산을 중심으로 하여 정의를 내린 말이다. 신라말 고려초에 형성된 새로운 선불교 사상이 경주 등 신라의 중심지가 아닌 지리산 줄기와 태백산 줄기 등 9 개의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문’이라는 용어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나말여초의 불교를 정의한다.
신라는 하대(809∼935)에 이르면 왕위쟁탈전과 사치. 부패 등으로 골품제가 와해되면서 통치력이 붕괴되고 지방 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등 왕조의 붕괴를 예언하는 조짐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불교계 역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왕실과 중앙 귀족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던 현학적이고 전통적인 교학불교를 고집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이미 개혁불교인 선종이 크게 발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던 신라의 승려들은, 선진사상인 선종을 배우기 위하여 당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배움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선종의 이론을 바탕으로,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며, 교종의 타락상을 질타하게 된다.
또한 이들 선사들은 수도 경주와는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산간 오지에 선문을 개산함으로써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귀의도 받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드높은 수도정신과 더불어, 선종 본래의 사원노동을 중시하고, 불성(佛性)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신분의 고하를 묻지 않는 선사들의 태도는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도 받게된다. 다시 말해서 구산선문은, 나말여초라는 격변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새로운‘시대정신’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는 것이다.
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
[불교신문 20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