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오늘 의의깊고 장엄한 이 법法(법회)의 자리에는 월인(月印, 1910~1999) 노덕스님도 계십니다. 또는 여러군데서 참여해 주신 우리 대덕大德스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제가 이 법당에 올라 앉은 것은 사실은 저의 분수에 넘는 일입니다. 그러나 부득이한 이유 때문에 노덕스님(월인 큰스님)께서 연로年老하시고, 그래서 연령年齡상으로 가장 연장자인 관계로 이와 같은 높은 법좌에 앉게 된 것을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실상사 복원 법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실상사와 인연이 있는 모든 그런 여러분들, 여러 관계하신 분들께서, 여러가지로 직접으로, 간접으로 수고하신 그러한 결정된 하나의 소중한 열매가 오늘 이와같이 복원법회가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되어서 거기 관여하신 모든 인연 있는 분들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이 실상사實相寺는 여기(변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도 저쪽 지리산 남원 실상사 거기도 아주 유수깊은 그런 고찰입니다. 따라서 그 작은 걸로 해서 실상사라는 이름이 더러는 있었지만, 적어도 큰절로 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남원 지리산 실상사 이쪽 부안 변산 실상사, 이 두 실상사實相寺가 쌍벽을 이루어서, 이른바 부처님 법의 가장 그러한 정수인 실상묘법實相妙法을 폈다는 것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법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해서, 여러 가지로 그때그때 인연따라서 표현이 되겠지만, 그러는 가운데도 실상묘법實相妙法이라, 또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렇게(실상묘법, 중도실상) 말씀한 것은 바로 부처님 법의 참다운 본 성품性品자리 그 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로 혼란을 겪고 있고, 또 우리 민족 국가적으로도 가지가지의 고난을 지금 당면해 있습니다.(IMF시절) 경제적으로 보나 또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그런 것을 본다고 한다 할지라도 그런 모든 불안스러운 사회현상이 과연 어떠한 데서 이루어진 것인가. 어떤 것이 근원根源이 되어서 우리 사회상이나 우리 개인적인 불안이 재래在來가 되는 것인가. 이런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참다운 그런 철학이 불문하고 또 바른 가치관이 확립이 못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 법 같은 실상묘법實相妙法이라, 우주의 본 바탕이 참 모습을 그대로 밝히신 가르침이 미처 제대로 보급이 못 되었기 때문에 우리 개인도 그때그때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실상사라는 이름 밑에서 이루어지는 부처님의 법문의 가장 정수가 되는 실상묘법實相妙法을 밝힌다는 것은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로 보나, 우리 개인적으로 보나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실상사 고지에는 저도 7년 전인가 몇년 전인가 제가 여기와서 한번 답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아까 (실상사)회주되시는 대화상께서 말씀하시는 저도 안타깝게 절감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모든 인연因緣이 모아져서 이와 같이 앞으로 꼭 실상사가 복원이 되리라는 밝은 전망밑에 여기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깊은 환희에 충만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마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가장 신비神秘하고도 가장 긴요緊要(꼭 필요)한 존재가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 마음을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가지가지의 그런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이고, 또는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로 폐단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상황을 헤아려 본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마음을 잘 못 쓴데서 그러한 원인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마음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이라놔서, 마음을 잘못 쓰면 그때는 바로 그자리가 지옥 되는 것이고, 또는 장사도 역시 마음을 잘못 쓰는 그런 앙화殃禍로 해서 모든 그런 폐단이 거기에서 속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잘 쓰면은 한갖 선량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체존재의 근본자리인 그 부처님이라 하는 모든 진리의 본 고향인 부처님이라 하는, 그런 자리까지도 우리가 충분히 성취할 수가 잇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크고 작은 불사佛事를 많이 합니다만, 어느 불사佛事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다 그 마음의 가장 실상實相마음이 이른바 불성佛性이 아니겠습니까. 그 실상묘법實相妙法인 실상마음(佛性)을 그 자리를 우리가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도 가장 소중한 이른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우리 인생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생사해탈生死解脫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생사해탈生死解脫의 문제라던가, 모든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가지가지의 폐단들이라던가, 또는 그 반대로 최상의 행복이라던가, 이런 것도 역시 우리 마음을 잘 써서 마음을 본 바탕을 깨닫는데 비로소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의 그런 공황 또는 도덕의 문란스러운 무질서한 퇴폐 이런 것을 우리는 절실하게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역시 다른데 가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그 부사의不思議한 성품공덕性品功德이 있는 본래 마음자리는 분명히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인데, 그런 마음 자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그냥 우리 그 업습業習대로 업의 습관대로 우리가 아무렇게 생활하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그러한 우리들의 경제공황이나 도덕적인 그런 퇴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그 근본 마음자리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상묘법자리를 깨달아야 할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실상묘법實相妙法을 깨닫는 그런 말씀을, 제 말씀의 요점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 종교가 참 너무나 갈래가 많고, 또 한 종교내에서도 여러 가지로 해서 또 분열시비가 심한 것이 지금 세계적인 상황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은 그 가운데도 마치 종교박람회 같은 그런 혼란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불교 기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종교인구가 상당히 많다고들 합니다. 말 들어보면 기독교와 불교 신도 수만 본다 하더라도 우리 한국 인구의 반 수를 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은 그런 종교가 바로만 선다면 꼭 우리 민족이 조금도 방황이 없이 참다운 진리로 갈 것인데, 예수나 또는 석가나 그러한 성자의 가르침대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인데 어째서 우리가 그렇게 못 나가고 있는가. 이렇게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교학적으로는 조금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 실천이 따르지 못한다 말입니다. 실천이 못따르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가(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서 음미를 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수행이 너무나 가짓수가 많으니깐 이렇게 하다보면 또 다른 스님은 저렇게 말하고, 그러면 그쪽으로 마음을 돌려서 그렇게도 수행을 해보고,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기 때문에 각기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그런 법문이 갈래가 굉장히 많습니다. 또는 현대에 있어서도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똑같이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법문을 하시면 모르겠지만, 그분들이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닦은 대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천차만별이 됩니다.
따라서 출가승이 되어서 10년이나 몇십 년 공부한다 하더라도 정말로 확고부동確固不動하니, 확고부동하니 부처님의 그런 정법을 간직하고서 공부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물며 재가불자님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의 염불念佛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란 염불을 배워서, 관세음보살을 자나 깨나 염불을 헤아리면서 많이 하신 분도 또 지장보살님을 보다 더 숭상하는 그런 스님들을 만나가지고서, 법문을 들으면은, 그런 법문도, 역시 그분들도 그 스님께서도 상당히 수련을 겪고(하고) 경험을 많이 하신지라 아주 합리적인 말씀을 하셨겠지요. 그러면은 (관세음보살 보다) 그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러면은 한 10년 동안이나 부르던 그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바꾼다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의 그런 여러 가지 방법이, 근본성품자리를 깨달으면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만, 근본성품자리를 깨닫지 못하는 일반 분들로 해서는 그런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바꾸는데 있어서도 우리한테 굉장히 지장이 초래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참선參禪이고, 염불念佛이고, 교학敎學이고 여러 가지 (공부)방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선參禪은 최상법最上法이다. 이런 말씀들을 우리 불자님들은 다 하십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가 다 이제 막 출가한 분들이나 또는 재가불자님들이나 또 시중에도 참선방이나 이른바 시민선방이 생겨가지고서 참선 기도도 합니다.
그렇게 상당히 성황을 이룬 것도 같지만은 정작 참선은 어떠한 것인가. 참선하고 염불차이는 어떠한 것인가 일반 교敎와 참선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확실한 개념정립이 미처 안 되고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노력에 당해서 효과적인 것은 반감되고, 또는 더러는 갈등때문에 상기上氣가 되어서 공부를 중도에 피폐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 말씀도 그런 쪽으로 여러분께 몇 말씀을 드리고자 생각을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업業에 가려서,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서, 깨닫고 느끼고 얘기도 하고 또 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 반대로 모든 존재의 현상의 근본성품을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하는 말씀은 현상도 충분히 헤아리지만은 하나 하나의 말을 하나, 생각을 하나, 모두가 다 근본성품자리, 다시 바꿔서 말씀을 드리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또는 법성法性자리..
우리 실상사, 앞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실상사 이름 대로 하면, 중도실상中道實相자리, 그 자리에서 봐야 할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에서 보지를 못하고, 자기 버릇 대로 보기 때문에,비록 기독교를 믿고, 불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행동은, 행동은 자기 버릇 대로 거기에 다 묻혀 버리고 만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인구가 우리 인구의 반 이상을 점유한다고 하지만은 우리 실제 사회현상은 부당이라던가, 갈등이나 모순이나 부조리를 제거가 못되는 이유가 그런데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나가 다 행복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원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진리가 전제가 돼야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이고 참다운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 즉 바른 진리가 없이 우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바른 가치관, 바른 가치관은 불법佛法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또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뜻은 똑같고, 표현은 다르습니다.(다릅니다) 중도실상, 또는 반야바라밀, 또는 참 지혜, 또는 참 자기의 지혜 또는 무상대도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다 똑같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도리로 봐야 자기 참 모습도 보이는 것이고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참 모습도 보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의 경제를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실상實相, 참 모습에서부터서 경제를 운영하면 그때는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또는 지나친 욕심을 낼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참다운 지혜, 이른바 실상묘법實相妙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것이 모두가 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다운 '나'가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와 다른 교敎(종교)의 가르침은 차이가 어디가 있는가 하면 우리 불교는 이른바 무아無我라, 바른 지혜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본래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욕심을 내니깐, 그 성인들께서 욕심을 좀 절제를 하기 위해서 중생은 본래는 다 무아無我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곧이곧대로 무아無我입니다.
내 몸뚱이도 잠시간 각 원소가 합해서 이 몸뚱이 같은 하나의 상相이 생겼고, 내 마음도 우리가 생각하고 감수하고 또는 상상하고 분별하고 이런 것이 모여서, 이런 습관성習慣性이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나'라는 것은 퍽 귀합니다. ('나'라는 것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금쪽같은 내 몸뚱이와 '나'라고 생각하는 제한된 생각, 제한된 분별 이것이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오온법五蘊法은 이것은 우리 몸뚱이와 이른바 우리 의식의 사고와 모든 것을 합해서 오온五蘊이고, 또 확장을 시키면 천지우주가 다 오온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몸이나 내 마음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다 몽땅 비어있으니깐 제법諸法이 공空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자임을 자인하기 위해서는 설사 불자가 아니더라도, 성자의 가르침에서 깊이 생각한다고 할때는, 기독교나 또는 유교나 도교나 힌두교나 모두가 다 자기라는 것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다 그림자 같은 것이다, 또는 수중월水中月이라 마치 물 속에 비친 달 같이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우리 불교의 성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나 또는 세인트Saint 프란치스코(Franciscus,1182~1226)나 말입니다. 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라든가 또는 힌두교의 위대한 사람이라던가 힌두교의 백년 전에 왔다 가신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1836~1886) 그런 분들도 위대한 성인인데, 그런 분들 견해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자기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이나 몸이나 텅텅 비어있는 것이고 원래에서는, 다른 물질도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런 소식을 미처 증명證明을 못했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욕심을 내다가도, 이것이 참말이 아닌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빗나가는데 이렇게 반성이 되겠습니다만은
부처님 법을 닦을 때는 꼭 우리가 먼저 부처님 법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우리 행동을 철저하니 도덕적으로 휴대携帶를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역시 우리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서 부처님한테로 우리 마음을 모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통일統一이 됩니다. 통일統一이 돼야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은 바로 부처인지라, 부처님한테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서 오기傲氣만 가지고, 많이 안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 마음이 통일이 안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불성佛性까지 들어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불성佛性하고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때는 우리 행동으로 옮겨지지가 못한다 말입니다.
불성佛性까지 하나가 되어서 불성하고 온전히 일치가 돼버려야 비로소 성자고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그와 같이 철저한 도덕적인 생활로 해서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켜야 하고, 도덕적인 생활이 확립이 안 되면은 절대로 우리 마음이 통일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종교宗敎나 다 계명誡命이 앞선단 말입니다. 불교의 오계五戒나 십계十誡(십선계)나 또는 (비구)250계나 (비구니)348계나 모두가 다 사실은 우리 중생의 그 오욕심五欲心, 중생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위를 다 제거하고서, 참다운 우리 마음의 본래로 돌아가는 하나의 소중한 그런 규범規範이란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현대 불교인들은 가장 성불의 지름길인 참선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날씨가) 좀 뜨거우시더라도 저도 지금 머리가 까까머리라서 조금 뜨겁습니다만은 조금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은 오늘 여기에 제가 나왔지만은, 여기 실상사 복원에 관해서 제가 꼭 무슨 소임을 한다거나 그런 거는 장담을 못합니다. 하여튼 회주스님 되시는 대우화상 또 주지스님인 지안스님 또 거기에 인연있는 모든 불자님들이 같이 협조해서 할 것이고, 저 같은 사람은 그때그때 제 힘이 닿는 그런 범위내에서 보조를 하겠습니다.
하여튼 그 참선공부, 참선공부가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참선공부를 하다가 상기上氣도 되고, 그때그때 하다가 방심이 되어서 그만둔 분도 많이 있고, 다 그렇습니다만 이 참선공부는 이것은 제일 쉽고, 또는 우리 불자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무슨 종교나 그 종교가 보다 더 발달되어 가면 종당에는 다 참선을 꼭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참선공부가 왜 제일 쉬운 것인고 하면 이것은 우리 나쁜 버릇에 따르지 않고, 우주의 공도公道, 우주의 법이자연한 우주의 천연적인 진리에 따른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우주의 궤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최상의 행복이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참선하는 것도 최상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공부인 것이고, 또는 참선공부는 우리 본래생명자리, 본래생명자리가 진여眞如요 또는 불성佛性이고 또는 불심佛心이고 또는 실상묘법實相妙法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그런 자리는 우리 생명에 따르는 본 질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본 질서에 따라야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몸도 건강한 것입니다. 꼭 기도를 모셔야만이 몸이 건강한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에만 따르면 모두가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기독교 바이블Bible도 있지 않습니까. 바이블도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경전입니다. 물론 비유나 여러 가지 인연담도 있지만은, 중요 핵심은 다 성자인지라 부처님 가르침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눈에 보이는 세계나, 안 보이는 세계나 완벽하니 다 갖추어진 것이고, 다른 종교는 부처님 가르침 같이 완벽하지를 못합니다. 그런 차이뿐인 것이지, 성자의 길은 다 영생의 해탈..
우리 범부의 그런 여러 가지 번뇌망상을 떠나서 참다운 행복으로 가는, 참다운 행복은 영생의 행복입니다. 낳지(나지)않고 죽지 않고 영생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로 간다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되는, 부처님한테로 가는 것이 우리 마음도 제일 편하고, 또 가기도 쉽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계행도 안 지키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훨썩 쉽습니다. 사실은 술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훨썩 더 쉽고 돈도 안 듭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남한테 욕을 하는 것보다 남을 칭찬하는 것이 훨썩 자기 마음도 개운하고, 또는 상대편한테도 그마만치 호감을 주는 것이고, 서로 화해되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계율戒律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천지天地의 공도公道이고, 우주의 참다운 진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 법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꼭 거기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 못따르면 자기 본인도 항시 불안스럽고, 몸도 안 좋고, 또 가정이나 사회도 절대로 화합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느님 뜻을 따라라, 그러면 모두는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마태복음 6:33) 먼저 하느님 뜻을 따라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이것은 우주의 진리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진리에 따르면 그때는 모두가 다 우리 복福이나, 뭣이나 화합이나 평화나 말입니다. 또는 평등이나 모두가 다 이루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원래 '나'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몸뚱이도 없는데, '나'라는 몸뚱이에 따르는 자기 재산이라던가 자기 권력이나 사실은 그런 것도 허무한 것입니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다투는 것은 모두가 다 '나'라는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있는 것은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만이 참다운 실상實相이요, 실존實存인 것이지, 다른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자기 몸도 허망하고, 자기 가족의 몸도 또 허망하고 자기 재산도 권력도 자기 보배도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뜬 구름같고, 그런 것은 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사실은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생명을 낭비할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도리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인간의 마음은 원래 부처입니다. 원래 부처님만이 실상實相인 것이고, 모든 물질,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또는 공기나 물이나 모두가 다 근본성품은 진여불성眞如佛性 일여一如의 도리입니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만유의 실상은 오직 법성뿐이고, 불성뿐이고 부처님뿐입니다. 다른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못 봐서 나를 보고 너를 보고 상相을 보고 뭣 보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현대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합시다. 우리가 지금 원자를 전자나 양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은 지금 전자나 양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의 모든 좋은 것, 다이아몬드나 모두가 다 원자로 보인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자의 눈은, 성자의 청정혜안淸淨慧眼 청정불안淸淨佛眼은 그때는 그 원자를 보는 현미경보다 더 훨썩 정밀하고 확실하단 말입니다.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너'나 '나'나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눈이 그렇게 안 보이면은 그냥 깊은 참회懺悔를 해야 됩니다. 내 공부는 아직 멀었구나.
요새 의식개혁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의식은 지금 안의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제 육식六識의 범위 내에서만 우리가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중생이 쓰는 그 육식六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그 밑에는 그런 자기 '아我'라 하는 에고ego의 근본인 제 7식이라.(말라식末那識) 또 그 근본은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아뢰야식은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나 아뢰야식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근본은 무엇인가. 그 근본은 제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암마라식은 백정식白淨識이라 또는 청정식淸淨識이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하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빙산의 일각 모양으로 겉에 뜬 그것만 우리 의식으로 판단한 것이지, 저 가장 밑에 있는 그런 진여불식(진여식眞如識) 청정식淸淨識이라, 청정식은 조금도 그때는 변질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청정식은 변질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식識은 지금 오염 돼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지만 우리 의식도 역시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것은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어놔서 오염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또는 잘못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봐서 선이요 악이요 오염되고 ?? 하는 것이지,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조금도 오염도 안 되고서, 사실 이대로 모두가 다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가 우리의식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쓰는 의식은 이것은 이른바 망식妄識이니깐 망식妄識이니깐 망령된 생각을 합니다. 꼭 그 식識(망식)을 버리고서 근본적인 청정불식淸淨佛識으로 돌이키는 것이 우리 인간된 도리입니다.
금생에 못하면 내생도 앞으로 몇 번을 돈다(윤회) 한더라도 꼭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 인간은 본래 부처니깐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안 되고 그대로 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다, 광범위로 모든 중생할 때에는 사람만이 모든 중생이 아닙니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일체존재一切存在 현상적인 모두가 다 중생에 해당합니다. 이런 것이 다 본래 성불자리는 불성이기 때문에 종당에는 더디고 빠르고 차이뿐인 것이지, 누구나가 다, 어느 것이나 다 꼭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
사바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는 허망무상해서 실상사의 그야말로 천년고찰이고, 이조李朝 세조 때까지는 여기서 굉장히 불법이 빛나고, 많은 중생을 제도했습니다만, 이조李朝 세조 때 그때 왜구로 해서 여기가 전소가 되고, 그 당시에 세조대왕이 특별히 본부를 해서 그때 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효령대군이 중창주, 세조, 양녕대군 등이 참여) 그러다가 6.25 사변을 만나서 여기가 완전히 소화가 되었습니다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무상합니다. 우리 몸도 다 허망해서 얼마 안 되면 사라질 것인데, 더구나 건물이라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 애쓰고 지었다 하더라도 인연因緣이 다하면 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황폐된 이 자리에서 다시 실상묘법을 헌양顯揚시킬 그런 거룩한 발원을 하셔서, 여러 스님네들이나 우리 불자님들이나 또 지역의 여러 어른들이나 합심하시는 것에 대해서 재삼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 복원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법을 어떻게 빛낼 것인가. 거기에 당면하는, 거기에 소위를 맡은 우리 스님네들이나 또는 재가불자님들이나 집안에 계시는 분들이 어떠한 자세로 해야 할 것인가. 그 문제도 역시 (복원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정말로 계자수?따라 하는 것은 이 변산하면 변산산신도 감동하고 또는 물도 감동하고, 나무 한 그루도 감동할만치 우리 행동이 정正발라야(바르게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비단 여기 실상사 복원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사도 다 그렇습니다. 더러는 내가 여간 애를 썼는데 무엇에 실패한다 그러지만, 실패 그것이 우리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패한 것이 도리어 기연機緣으로 해서 보다 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바로만 산다고 생각할 때는 이 유위법有爲法은 번뇌 내에서도 별로 실체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행동이나 자기 그런 소행이 별로 남한테 감동을 못준다 말입니다. 하나의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정말로 자기 행동이 정당해서 자기 행동이 하나하나가 모두가 다 다른 사람한테 감동을 주고 깊은 감명을 준다고 생각할 때는 그러면 다른 사람은 저절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도와주고 싶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연히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기적적으로 잘 된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그만치 복을 심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여기 실상사 이 산세가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로 산명수자山明水紫하고, 물은 돌아내리고, 또는 산세가 마치 호랑이가 웅크린 것 같이 굉장히 힘이 여기에 뭉쳐 있습니다. 과연 천자天子의 영지靈地입니다. 천자의 참 성지聖地입니다. 이런 데는 절대로 오래 그대로 방치가 안 됩니다.
다행히 성인연聖因緣(성스러운 인연)이 도래해서 회주 되시는 우리 대우화상님, 또 이번에 주지로 들어간 지안스님, 기타 여기에 직접 간접으로 관대하신 이 불자님들, 지방 어른들 대단히 감사해서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작불사大作佛事는 여러 가지 장애도 많습니다. 장애를 극복하고서 정말로 천년고찰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경제환란(IMF시절)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 '공空 무원'(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고, 또는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 가정에서도 더러는 부도도 나고 더러는 가족적으로 또는 불행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 저런 것 감안할 때 우리가 보통의 심상心相한 그런 마음으로 해서는 이 복원이 어려울 것입니다.
꼭 아까 제가 말씀드린대로 몸으로 마음으로 체현을 하셔서 이른바 실상묘법實相妙法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자리를 그대로 여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입니다.
참선공부를 앞서 말씀드린 바와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시고, 제일 쉽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다른 공부는 방편이 들어가지만 방편이 복잡해서 갑이라는 사람 방편 을이라는 사람 방편 또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참선공부는 방편을 제거한 핵심만 공부하기 때문에 참선공부는 누구나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다 불심佛心을 여의지 않는다 말입니다. 불심佛心을 여의지 않고 염불을 하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나 지장보살을 부르나 똑같이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또 화두를 들면 그때는 화두선話頭禪입니다. 또는 주문을 외이면 그때는 주문선呪文禪입니다.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설사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들도 지금은 신부나 수녀님들이나 모두가 다 참선방에 들어와서 같이 공부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기독교 하느님 믿는 분은 그러면 참선이 못 될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를 잘못 이해해서 하느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하느님과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고, 참다운 진리가 못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세기의 훌륭한 신학자라던가 또는 바이블에 있는 예수님의 본 뜻은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이나 어디나 우주의 도처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또는 내 몸이나 내 마음에도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이오,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불교와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사실은 성자의 길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한말로 말씀드리면 참다운 기독교인은 참다운 불교인이고, 참다운 불교인은 참다운 기독교입니다. 다만 그분들이 교조의 가르침을 잘못 믿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자기 몸과 부처님을 둘로 보고서 기도를 모시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기도도 못되고 참선도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모시건 또는 복을 비는 그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우리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근본생명자리인 그런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조리 참선參禪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도 자기 마음도 자기 사업도 불사도 순탄하게 순풍에 돛단배같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여러 가지로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만, 저는 지금 승려가 된지 올해로 50년입니다. 50년에, 그래저래 불경佛經도 나름대로 보기도 하고, 또는 다른 종교도 섭렵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 기독교 신학神學도 저 나름대로는 연구도 동서철학도 조금쯤은 제가 윤곽을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섭렵을 해온 뒤에 결론이 무엇인고 하면,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하고서 마음을 모으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을 모으기가 쉽지 않습니까. 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느님은 저가(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우리가 기도 모시면 우리한테 은총을 베푼다, 그러면 그것은 참다운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때는 불교하고 십만팔리로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정말로 하느님은 이것은 언제 어디나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오. 또는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우주생명이다.이렇게 하느님을 생각할때는 오! 주여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참선공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의심하는 선법禪法도 있고, 더러는 갖다가 묵조하는 다만 묵묵부답으로 관조하는 선법도 있고 선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럽니다.
우리 불자님들 굉장히 지금 혼란스러운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불안의 세대입니다. 앞으로는 정보화사회, 정보화시대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좋은데 한편은 세상이나 우리 마음을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우리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그때는 자동적으로 도덕은 퇴폐문란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을 모을 것인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될 것인가. 종교란 것은 안심입명이 돼야 됩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평상스러운 마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본래마음이 평상심 아닙니까. 달마스님 법문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마음이 안온하고 편안한 것은 우리가 진리의 틀에서 의담(의문)이 없이, 천지우주를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딱 통일을 시켜버려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저는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이시면서 공부를 하시는 것을 저는 권장을 드립니다. 그러나 모든 법法이 다 성자가 낸 법이기 때문에 어느 법이나 다 훌륭합니다. 본체에서는 하나지만, 그래도 우리 초심행자라던가, 우리 바쁜 불자님들이 또 이와 같이 혼란의 시대, 정보의 이 혼란한 와중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이시는 것이 가장 가장 손쉽습니다. 이른바 불교 말로 하면 이왕이수易往易修라, 쉬울 이易자, 하기 쉽고, 즉 깨닫기 쉽고 가기도 쉽단 말입니다. 이수易修라, 쉬울 이易자, 닦을 수修자 닦기가 쉽단 말입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 용수보살은 제2의 석가란 분 아닙니까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그와 같이 염불공부는 이왕이수易往易修라, 닦기 쉽고 깨닫기 쉬워서, 증도중證道中?. 우리가 그 어려운 현실의 그런 고난 가운데서 정말로 참 용이득력容易得力이라, 득력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전통적인 그런 위대한 선지식 치고서 염불念佛을 말씀을 안 하신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원효스님, 의상스님, 대각국사 또는 보조국사, 나옹대사, 태고대사 서산대사 또는 사명대사 그분들은 화두話頭와 더불어서 꼭 염불念佛 말씀을 해서 우리한테 권장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분들은 아. 염불은 근기根器 낮은 분이 하고 화두는 근기가 수승最勝한 분이 한다 이렇게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근기가 낮고 수승하고 그런 차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상相을 여의지 못하고 하면 그것은 화두를 드나 뭐를 드나 그건 참선이 아닙니다. 또는 참다운 염불도 아닙니다. 참다운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와 '나'와 원래 둘이 아니다.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 그렇게 염불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염불은 바로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따라서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자성自性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주의 본래면목자리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런 염불은 모두가 다 부처님 명호名號는 똑같습니다. 하나의 자리입니다. 하나의 여인도 자기 아들이 보면 어머니고 말입니다. 남편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내 아니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자리는 이것은 우주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또 그 자리는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래면목인 또는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자리 실상묘법자리는 그냥 그것이 논리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라, 일체만공덕一切萬功德을 갖춘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우주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주의 만덕萬德을 갖춘 그런 자리는 하나의 명호名號로 해서 다 포괄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을 해서도 다 포괄시킬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지장보살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깐 그때그때 공덕功德따라서 잠시간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부처님 자리는 모양이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형체를 떠나버린 상相을 떠나버린 자리이기 때문에 또는 우주에 충만한 자리이기 때문에 또는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 문수보살 또는 이 변산에 가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은 이 변산의 산신이고 말입니다. 물에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은 용왕입니다. 또는 지구에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은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 절대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지, 그런 보살자리, 그런 성자의 자리, 그런 자리는 모두가 다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알으시고서 염불도 하시고 참선도 하셔야 그래야 참선공덕도 속 빠르고, 염불공덕도 속 빠른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로 상기上氣가 안 될것입니다. 참선할 때 보통 상기가 많이 된다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별로 수승한 선근善根은 아닌데도 제 50년 동안에 상기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또는 이 자리에 더러 계시는 또는 기독교를 믿는 분들 우리 공부라는 것은 이것은 성자의 길에 따르기 때문에 성자의 길은 바로 우주의 청정무비한 아주 공정한 공도公道이기 때문에, 사실은 제일 쉽고 또는 종당에는 누구나가 다 따라야 됩니다. 못따르면 그때는 개인적으로 자기 비리도 오는 것이고, 가정은 화합도 못하고, 사회도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도덕의 회복이라, 또는 자아의 회복이지만 그 진리를 떠나서는 절대로 회복이 안 됩니다.
우리 실상사가 단시일 내에 훌륭한 선지식善知識들과 또는 우리 사부대중의 힘으로 해서 복원이 꼭 될 걸로 저는 확신이 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장애없이 세간법世間法은 꼭 장애가 있긴 마련입니다. 보다 장애없이 원만성취가 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부처님께서 감동하시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는 신장이라던가, 산신이나 또는 모든 그런 영혼들이나 또는 우리 중생들이 다, 비단 불교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종교일반宗敎一般이 모두가 다 훌륭한 진리 가르침을 꼭 전해야 되겠다는 그러한 선한 서원을 가지실 때, 더욱더 장애없이 가속도로 이 불사佛事가 완성 회향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영가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실상사가) 천년고찰인지라 많은 영가들이 이 자리에 다 천도를 받으셨겠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동안 6.25 사변 거쳐서 벌써 40년 남아도는 그런 세월이 흘렀지 않습니까. 그동안에 영가들이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셨습니까.
영가들이시여! 오늘 다행히 이 복원법회에서 영가천도를 하시게 되어서 그래서 여러분들 맞이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고 반갑게 생각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나'라는 상我相이나 '너'라는 상人相이나, 또는 중생이라는 상衆生相이나, 또는 시간적으로 짧고 길다는 상壽者相이나 이런 것은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중생이 지옥으로 아귀로 축생으로 조금 잘 살아서 사람으로, 더 살면 그때는 천상으로 이렇게 되나, 그러한 것은 모두가 다 윤회輪廻하는 중생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의 본래성품本來性品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헤매지 않고 꼭 다 부처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우리가 왕생往生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적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나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사바세계娑婆世界 이대로 극락세계입極樂世界니다만, 우리 중생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꼭 상相을 여의지 못하면 다시 또 지옥으로 축생으로 아귀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오늘의 그런 공덕으로 해서 부처님의 본래 무생無生의 도리道理 본래 낳고 죽음이 없다는 그런 무생의 도리를 깨달아서 방황하지 말고,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도 머물지 말고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되 저 하품下品이나 중품中品에도 머물지 말고서, 꼭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상품상생上品上生으로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시기를 간절히 합장기도해서 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더욱더 부처님 법 가운데서 무상행복無上幸福을 누리시면서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오늘 산승의 말씀을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1998.4.25 청화대선사 변산실상사 복원 대법회
첫댓글 큰스님의 중요법문인 실상사 복원 대법회 법문녹취가 없어, 유튜브 영상작업을 하기위해 녹취하였습니다.
자막본 영상은 아침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참다운 염불 염불선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불 불리불)
부처를 여의지 않고 하는 염불이다.
우리 자성 진여불성자리, 본래면목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 된다.
중도실상의 실상묘법인 부처님 법은
우주의 본바탕 참다운 본성품자리를 그대로 밝히신 가르침이다.
성자의 길은 우주의 청정무비한 아주 공정한 公道이다.
때문에 사실은 제일 쉽고 종당에는 누구나 다 따라야 하는 길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