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 가는 “뿌리공원(Root Park)”-2
與隨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乙支文德 作/을지문덕 작
수(隋)나라는 30만의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은 압록강 에 진을치고 있다가 적진에 스스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적군의 군량, 군사,작전, 정보를 정탐한뒤 적진에서 탈출하였다.
이를 눈치챈 적군이 추격하자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 패하는척 하는 교란전술로
적군의 군사력을 소모시키면서 적을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 하였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조롱하은 내용을 담은 위와 같은 시(詩) 한수를 보낸다.
우중문은 시를 읽어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리고 회군 하려했으나
군사들이 피로하고 굶주려 싸울 기력을 일어버린 뒤였다.
이때를 놓치지않고 공격하여 살수에서 대승을 거두니 리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노산 이선승지 以善勝之
의령(宣寧)옥씨
의령옥씨(宜寧玉氏)의 시조 옥진서(玉眞瑞)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파견된 8재사(八才士)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멸망후 신라로 들어가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였는데
그 공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로 한다.
한편,『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 1389년(고려창왕1년)기사(己巳) 동진사(同進士) 1위로
문과에 급제한 왕사온(王斯溫)이라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조선씨족통보』에는 의령옥씨편에 옥사온(玉斯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후 麗末鮮初에 개성왕씨(王氏)에서 옥씨(玉氏)로 바꾸었을수도 있을것 이다.
옥고(玉沽)의 문과 방목을 보면 아버지는 옥사미(玉斯美)이다.
옥사온 은 옥사미의 동생이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옥고는 반성 옥씨(班城玉氏) 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형 옥사미는 반성 옥씨로, 동생 옥사온은 의령 옥씨로 분적한 것 같다.
현재는 의령 옥씨로 합보하였다.
1918년에 발행된 개성 왕씨 족보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부가 왕(王)씨로 환성하였다고 한다.
죽산박씨
신라54대 경명왕의 8대군중 죽성대군을 시조로 하는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박기오(朴奇悟)가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태보(太保)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 지므로 죽주(竹州=현재竹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죽산(竹州=竹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시대 죽주(竹州)지역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안성시 지역을 말하며 고려시대 죽주박씨竹州朴氏는 현재,
죽산박씨竹山朴氏라 부른다.
양주조씨
양주조씨 의 시조는 조잠 으로 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내고 후일 판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않아 선대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조잠은 고려시대 사람인 조군우(趙君祐)의
손자이며 조경질(趙景質)의 아들이라고 한다
동래정씨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 유리왕 때 임금으로부터 정씨의 성을 받은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였으나 계대가 전해지지 않게되어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고 있다.
『을미보(乙未譜)』에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하였으나 『병신보(丙申譜)』 이후부터는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비가 발견된
이후 묘지문 에 의해 그로부터 3세를 소급하여 정지원을 시조로 하여 기세하고 있다.
아산장씨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중국 송나라에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금이 송을 침입하자 이강(李綱)과 함께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자
배를타고 망명해 경기도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 에 표착하였다.
당시 좌복야 박인량(朴寅亮)과 재보 위계정(魏繼廷)이 장서가 아산에 와 있는 사실을
고려예종에게 알렸고 왕이 장서를 아산군(牙山君)에 봉하고 후손들이 본관을 아산으로 하였다.
함창김씨
“김씨 분관록”·“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김균(金勻)
또는 김균(金鈞)은 의성김씨 시조 김용비 의 큰아들인 전례좌랑(典禮佐郞) 김의(金宜)의
후손으로 검교(檢校)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하고, 함창(咸昌)으로 분적(分籍)하였다고 하였다.
청주이씨
청주이씨(淸州李氏)의 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시조이하 대대로 청주(淸州)에 세거(世居)하였고, 또 10세손 이계감(李季瑊)이
고려조에서 낭성군(琅城郡)옛 청주 지금의 청원군 낭성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한양조씨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중기에 조순대부(朝順大夫)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고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조인재(趙麟才), 둘째는 쌍성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이다.
하양허씨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허황후((許黃玉)의 33세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高麗)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하주(河州) 척리(刺吏)가 되었다.
함열남궁씨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이 고려성종때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낸 공으로
문하시중 평장사에 임명되었다.
남궁씨(南宮氏)의 유래(由來)는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서 비롯된다.
본래(本來) 황족(皇族)인 희성(姬姓)이었다.
은(殷)나라에 이르러 남(南)쪽 궁(宮)에 살았다하여 남궁(南宮)으로 씨(氏)를 정하였다고 한다.
홍주이씨
홍주이씨(洪州李氏)는 충청남도 홍성군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홍주이씨(洪州李氏)의 시조 이유성(李維城)은 고려시대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이간(李幹)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의종·명종·신종·희종 대에 걸쳐 활동하였는데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와
정당문학(政當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이유성의 4대손인 이연수(李延壽)는 고려 고종 3년 요(遼)의 침입 때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또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文下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올랐다.
기계유씨
기계유씨(杞溪 兪氏)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기계유씨(杞溪 兪氏)의 시조 유삼재(兪三宰)는 신라 아찬(阿飡)을 역임하였다.
유삼재(兪三宰)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 멸망 후 고려 왕조에 불복하자,
고려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으로 삼으니 이후로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칭관하게 되었다.
지금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고현에 시조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시조 이래 상계의 세거지라 전해지고 있다.
청도김씨
청도김씨(淸道金氏)는 경상북도 청도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김지대(金之岱)는 경순왕의 후예로 초명이 김중룡(金仲龍)이다.
거란(契丹)군이 침입하자「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詩)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에 나가 큰 공(功)을 세웠다.
이듬해 12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안찰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치사(致仕)하였다.
오산군(鰲山君: 鰲山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에 봉해지고 영헌공(英憲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결쳐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떨쳤다.
남양전씨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남양전씨 종중에 소장된 유학서 “종가유물”. 보물제727호
내용은 임진왜란 이전의것으로 1416년(태종 16)·1417년의 왕지(王旨)2통, 1434년(세종16)·1463년(세조9)·
1505년(연산군11)·1515년(중종10) 등의 교지(敎旨)5통, 1565년(명종20)의 유서(遺書)1통 등 8통의 문서가 있다.
탐진최씨
탐진 최씨는 영암에 세거하는 여러 성씨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 인물인 최사전을 시조로 하고 있다.
영암 입향조는 조선후기 수군절도사를 지냈던 최원립(崔元立)[1618~1690]의 양아들 최대천 이다.
탐진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속한 옛 지명이다.
1417년(태종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에 옮기고 탐진현과 도강현을 합하여
강진으로 개칭한후 치소는 탐진현에 두었다.
창원김씨
시조 김을진은 신라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중 17세손으로 처음 이름은 김광준 이다.
고려에서 벼슬은금지광록대부 태자첨사 로 동궁의 시무를 관장하였고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회원군(창원)에
봉해 짐으로서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강
해남윤씨
해남윤씨(海南尹氏)는 전라남도 해남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윤존부(尹存富)는 고려 문종때 살았던 사람이다.
중시조인 8세손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윤광전(尹光琠)이 고려 공민왕 때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고 강진에 터전을 마련하면서 본관을 해남으로 하였다.
오우가(五友歌) / 작 윤선도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허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로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날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무삼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야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다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영양남씨
영양남씨(英陽南氏)는 경상북도 영양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남민(南敏)은 본명이 김충(金忠)이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신라경덕왕14)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에서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갔다가 귀로에 태풍을 만나서 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죽도(竹島)
에 표착하여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에 경덕왕은 그가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를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남민의 7세손 대장군(大將軍)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분관 되었다.
장남 남홍보(南洪輔)가 선조의 대를 이어 영양(英陽)을 본관으로 하고, 차남 남군보(南君甫)는 의령 남씨,
삼남 남광보(南匡甫)는 고성 남씨로 분관하여 각 본관의 1세조가 되었다.
나주나씨
나주 나씨(羅州 羅氏)는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나부(羅富)는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해 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
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함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여황(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정착하였는데, 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부(羅富)는 고려조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란 무관직(武官職)을 지냈다.
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中央軍)의 일부로서 궁성(宮城)의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는
부서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部署)의 책임자로서 품계는 정삼품(正三品)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 시조의 중국 행적은 사료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선계를 고증 할수없어 고려시대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나득규(羅得虬)를 1세조로 한다
교동인씨
교동 인씨(喬桐 印氏)는 강화군 교동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진(晉)나라 풍익대부(馮翊大夫) 인서(印瑞)가 300년(신라기림왕3년)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였다. 33세손인 인빈(印份)이 고려인종 치세기 시절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졌다.
39세손 인공수(印公秀)가 대장군과 필도치(必者赤)를 역임하고, 41세손 인당(印璫)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무안유씨
무안 유씨(務安 兪氏)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무안유씨(務安兪氏)의 시조(始祖) 유순직(兪舜稷)은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역임하고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장사(長沙)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안동장씨
안동장씨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더불어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의 하나로 시조 장정필(張貞弼) 이후 안동을 근거지로 세거해온 성씨이다.
시조 장정필의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로 원래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재의 중국 절강성
에서 태어났다. 9세기 말 경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와서 강릉과 안동에
머물렀고 만년에는 안동에 정착하였다.
젊었을 때는 다시 당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를 지내기도 했다.
진주형씨
형씨(邢氏)의 유래(由來)는 서주(BC1057–BC771년)무왕(武王)의 동생 휘(諱) 단(旦)의
건국호(建國號)는 주(周)이며 넷째 아들인 휘(諱) 정연(靖淵)시호 붕숙(朋淑)을 형후(邢候)에
봉(封)한 것이 근본이다
경주김씨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고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1세조(世祖)로 하며
김자양(金自養)과 김함(金緘)을 입향조로 하는 영천 지역의 세거성씨 이다.
경주지역 시림(始林)[계림(鷄林)]의 금궤짝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신라 탈해왕이 성을
김(金)이라 지어 준 김알지(金閼智)가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시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한 마의태자고, 둘째는 울산 김씨[그 손자가 나주 김씨,
셋째는 경주 김씨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는 경주 김씨 은열공파(殷說公派),
다섯째는 의성김씨, 여섯째는 강릉김씨, 일곱째는 언양김씨, 여덟째는 삼척김씨의 1세조가 되었다.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1세(世)로 하고 14세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현손 6형제를 각각 파조(派祖)로 하는데, 영천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 김씨는 셋째 김을진(金乙軫)의 장령공파(掌令公派)와 다섯째 김을초(金乙軺)의
규정공파(糾正公派)가 주류를 이룬다.
안산김씨
안산김씨(安山金氏)는 경기도 시흥군 안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김긍필(金肯弼)은 신라 태보공(太輔公)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 현종 후비 원성태후의
조부로 1024년(현종15)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상주국(上柱國) 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에 추증(追贈)되고 식읍 1,500호를 받았다.
아들 김은부(金殷傅)가 고려 성종때 견관승(甄官丞)을 지내고 목종(穆宗)때 어주사(御廚使)
가 되었다가 현종(顯宗)초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는데 1010년(고려현종원년)
거란(契丹)의 침입때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가 1011년(현종2) 거란군이 퇴각하여
되돌아오면서 공주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첫째딸 에게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여
이런 인연으로 고려 현종이 그녀의 첫째 딸을 왕비로 책봉하니 고려현종의 제3비 원성왕후(元成王后)가 되었다.
이후 둘째딸도 고려현종의 제4비 인 원혜왕후(元惠王后)가 되고 세째딸도 고려현종의
제7비 원평왕후(元平王后)가 되었다.
이후 김은부(金殷傅)는 국구(國舅)가 되고 형부시랑(刑部侍郞) 호부상서(戶部尙書) 지중추사
(知中樞事) 중추사상호군(中樞使上護軍)에 임명되었다.
1017년(현종8년)에 사망하였다. 그후 시중(侍中)에 추증되었다.
청안이씨
청안(淸安)은 충청북도 괴산군에있는 지명으로 도안(道安)과 청당(淸塘)이 합쳐진 지명이다.
청안이씨(淸安李氏)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은 시호가 충원(忠元)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檢校侍郞)·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역임하였다.
왕에게 직간하여 노여움을 사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내려갔다가 1361년(공민왕5) 10월
가을적홀고탁(加乙赤忽古托)의 난 때에 순절하여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영남파(嶺南派)의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또한 충간공파(忠簡公派)의 시조 이한번(李漢藩)은 시호가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검열관(國史院檢閱官)
을 지낸뒤 1363년(공민왕7) 홍건적을 막은공으로 추성보리공신삼중대광(推誠補理功臣三重大匡)에
책록되고 청안백(淸安伯)에 봉해졌다.
이한번의 아들 이광경(李光慶)은 조선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후 호남파(湖南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원주이씨
원주이씨(李椿桂)의 선조는 중국 고대 한고조 서기전 200년경 진란(秦亂)을 피해 절서지역
현 절강성에서 고조선 으로와서 씨족사회를 이루었다.
신라 16대 흘해왕조 에 득사위한 진민(眞民)이 원시조(元始祖)이고 공의 27세손인 도균(道均)의
차남인 이춘계(椿桂)가 시조이다.
고려 17대인종과 18대의종(1122~1170)에 병부상서 평장사 안일호장을 지냈다.
시조이하 7대까지 실전한곳이 대부분 광주 온정동이다.
중시조인 8세이희백(希伯)은 남부 부령을 지냈고, 9세 녹규(祿圭)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로
원주를 중심으로 중흥 번영하였다.
녹규는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임(琳)이 봉어동정으로 동정공파시조 삼남 침(琛)이
병사공파시조 차남 인(璘)이 중정대부종부시령을 인의 자(子)가 재령현령 십일세 방진(邦珍)
이고 공은 형제를 두어 장남 완(玩)이 주부공파시조 차남 거(봉례랑공)가 육형제에 장남 기(起)가
은사공, 차남 추(趨)가 교도공, 삼남 월(越)이 사용공, 사남 부(赴)가 사직공, 오남 필(䟆)이
갈촌공, 육남 진(趂)이 평천공, 육파의 파시조이며 총 일원(一源) 구파(九派)를 이룬다.
가평간씨
중국(中國) 범양(范陽) 간백(簡伯)의 후손(後孫)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대한민국(大韓民國) 간씨(簡씨)의 자세한 연원(淵源)은 알수가 없다.
시조(始祖) 고려목종(高麗穆宗)때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지내었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 고려현종(高麗 顯宗)때 거란과 맞서 싸우다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한 간영언(簡英彦)을
시조(始祖)로 하는 씨족이다.
부여서씨
부여서씨(扶餘 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시조는 백제의자왕의 첫째(혹은셋째 아들 이라고도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 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 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후 세계는 알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선산곽씨
곽우현을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구미 지역의 세거 성씨 이다.
선산은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라 칭하였고 614년(진평왕 36) 주(州)로 승격
되었지만 687년(신문왕7)에 폐지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숭선군(崇善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995년(성종14)에 다시 선주(善州)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주가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지선주군사(知善州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이 되었고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치 성 송 씨
<송씨유래>
본관은 문헌에 172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현존하는 것은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
연안(延安)·야성(冶城)·청주(淸州)·신평(新平:洪州)·김해(金海)·남양(南陽)·복흥(福興)등 10여본이다.
그 중 여산송씨· 은진송씨· 진천송씨가 전체 송씨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그 밖의 송씨는
이들 3본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도시조는 당(唐)나라의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인데, 한국에 귀화한 내력은분명하지 않다.
그의 후손 자영(自英)의 세 아들 유익(惟翊)·천익(天翊)·문익(文翊) 3형제가 각각 여산송씨·은진송씨·
서산송씨의 시조이며, 진천송씨는 인(仁)이 1세(世)로 되어 있고, 은진송씨는 천익의 후손 대원(大原)이 1세로 되어 있다.
현존(現存)하는 모든 송씨(宋氏)는 도시조(都始祖)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임이 분명하며, 오늘날에
와서도 송씨 끼리는 이본(異本)이라도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조선시대에 총278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6만 968가구에
인구 34만94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중 제17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13만 189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1.3%로 순위는 274성 중 제17위였다.
개성김씨
신창노씨
신창노씨 대종회는 대전 대덕구 대전로1019번길 로 되어 있는데 자료가 없어서 언급하지 않는다.
합천이씨
이개를 시조로 하고 이석후·이시빈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이다.
합천 이씨는 합천을 본관으로 하고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며, 10세손인 이수전(李守全)
전서공파의 파시조 대에 이르러 15파로 분파하였다.
이 15파 가운데 하나인 전서공파가 가장 번성하였다.
하동 지역의 합천 이씨는 전서공파와 더불어 참지공파[파시조 이양진(李良眞)]의 후손들이
하동군 악양면·양보면·진교면·고전면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합천 이씨는 18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하동 지역에 상당한 정도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순천김씨
순천 김씨(順天 金氏)는 전라남도 순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김총(金摠)은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냈다.
김총(金摠)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의 어가(御駕)를 인도한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평양(平陽)은 순천(順天)의 고호로, 후손들이 순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김씨 분관록 및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시조 김총(金摠)은 신라 종성(宗姓)으로 궁예(弓裔)
때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사후(死後) 향인(鄕人)들이
순천부(順天府)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하였다고 한다.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으로 김종서(金宗瑞)가 화를 입어 멸문지화를 당하여 선대의 문헌이
거의 소실되면서 고려말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여수(麗水) 출신으로 조선조에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가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으로 개봉된 김승주(金承霔)의 증조부인 김윤인(金允仁)
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김종서(金宗瑞)의 조부인 김태영(金台泳)을 1세조로 하는 계통 두 파가 있다.
도강김씨
도강김씨(道康金氏)는 고려때 도강(道康) 현재의 강진(康津)을 관향(貫鄕)으로 삼는 성씨다.
시조(始祖) 김희조(金希祖) 휘(諱) 공(恭) 1124生~1199卒, 호는 강성(康城), 시호는 문효(文孝)는
원조 김알지(金閼智)의 34대손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7대손으로 고려 19대 왕인 명종(明宗)에
병부상서(兵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하였으며 병부상서 재임시 장군 경대승과 함께
정권을 자행한 정중부를 제거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구호한 공훈으로 도성부원군(道城府院君)과
도강백(道康伯)에 봉작되고 식읍지(食邑地)로 도강현(道康縣)현재 강진을 하사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도강(道康)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동본(同本) 4파(4派)로 분파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함안조씨
함안조씨(咸安趙氏)는 경상남도 함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조선현종 5년(甲辰年:1664년)에 간행(刊行)된 함안조씨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인 갑진보(甲辰譜)에는
시조 조정(趙鼎)이 "신라원윤(新羅元尹)"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조14년 무오년(戊午年:1738년)에
간행된 무오보(戊午譜)에는 "고려 대장군 원윤(元尹)"으로 수정(修正)되었다.
백천조씨
배천조씨(白川趙氏)는 황해남도 배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조지린(趙之遴)이 고려 목종(穆宗)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 知銀臺事)로 임명되었고,
1011년(현종2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
양성이씨
양성이씨(陽城 李氏)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양성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 조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갑자보(甲子譜)세록(世錄)편에 따르면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고 그에 대해 양성(陽城)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양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주김씨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강원도 원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김거공(金巨公)은 고려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시조 김거공(金巨公)은 경순왕의 후예로 초명(初名)이 '김자표'(金子彪)이다.
그는 고려때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년(인종 20) 금(金)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의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거쳐, 고려 의종(毅宗)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원성(原城)의 식읍(食邑)은을 받고 원성백(原城伯)의 봉작(封爵)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원성(原城:원주)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함안이씨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시조(始祖) 이상(李尙)은 위위시주부동정(衛慰寺主簿同正)을 지낸
원조(遠祖) 이원서(李元敍)의 후손으로 고려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졌다.
그후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선조(先祖)
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함안(咸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강화노씨
강화 노씨(江華 魯氏)는 강화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노용신(魯龍臣)은 고려명종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고종때 몽골이 침입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할 때 강화현령(江華縣令)으로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졌다.
수원최씨
수원최씨(水原崔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수원최씨는 동성동본 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계통이 있다.
한 계통은 고려시대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최정(崔靖)을 시조로 하며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없어 알수가 없다.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제15대 예종때 수주(水州수원의 옛이름)의 호장(戶長) 최상저(崔尙翥)
를 시조로 한다.
수원(水原)의 옛 이름이 수성(隋城)이라 수원 최씨(水原 崔氏)와 수성 최씨(隋城 崔氏)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수원 최씨(水原 崔氏)는 원최(原崔)라 하고 수성 최씨(隋城 崔氏)는 내최(來崔)라고 부른다.
회덕황씨
회덕황씨(懷德黃氏)는 대전광역시 회덕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 황윤보(黃允寶)는 고려때 지문성부사(知文成府事)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졌다.
시조 황윤보(黃允寶)는 고려때 지문성부사(知文成府事)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졌다. 황윤보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있다.
4세손 황길신(黃吉臣)이 고려조에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냈다.
황길신의 8세손 황종해(黃宗海)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한후 연산(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의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목서흠(睦叙欽)·목장흠 등의 천거로 참봉(參奉) 등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였으며
저서로 ‘후천집(朽淺集)’을 남겼다.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황영남(黃穎男)의 아들 황덕윤(黃德潤)은 1618년(광해군10)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황덕윤의 아들 황세정(黃世楨)은 송준길의 수제자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황종해의 종증손(從曾孫)인 황찬(黃燦)은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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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돈종(崇祖敦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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