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몽구 시인>>
<<박몽구 시인의 양력>>
* 1956. 광주에서 남
* 전남대 영문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 1977년 월간 『대화』지 시 당선으로 등단
* 시집 : 『개리 카를 들으며』, 『마음의 귀』, 『봉긋하게 부푼 빵』, 『수종사 무료찻집』, 『라이더가 그은 직선』 등.
* 연구서 : 『모더니즘과 비판의 시학』, 『한국 현대시와 욕망의 시학』 등.
*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수상.
* 계간 《시와문화》 주간.
* 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
<<박몽구 시인의 시>>
선운사 상사화/박몽구
온 뿌리의 힘 모아
봄물을 만인루의 하늘로 올리기로
저 푸른 빛 다 갚겠다는 뜻 아니다
내 피와 살 아낌없이 녹여
동백숲 푸르름 부끄럽잖게
청청한 잎 올곧게 피워 냄은
그대의 봄밤 하얗게 밝힐 뜻 아니다
불면 꺼질 듯 글썽이는 이슬과
멀리 보는 눈 가진 별빛 합방시켜
세상의 어느 꽃 견줄 수 없는
향기를 지닌 꽃 피워올리는 것은
어제와 똑같은 새벽 맞겠다는 뜻 아니다
이제껏 쌓은 살 다 비움으로
완강하게 매인 밧줄의 미련 버림으로
그대 무성한 가시뿐인 가슴에 안겨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포옹!
도림천 위에 뜬 인공위성/박몽구
기적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대로 흩어질 수 없다는 듯
축축한 탄가루들이 비말을 이루어 몰려다니며
행인들을 금세 검둥이로 만들던
신도림역 건너 연탄공장 부지에
무뚝뚝한 증인처럼 키 머쓱한 주상복합이
한 뼘이면 하늘에 닿도록 서있다
겨울밤을 뎁혀줄 연탄을 떼러 가던 길 사라지고
오늘은 연결통로를 통해 드림시티에 간다
거친 파도에 떠밀리듯 관객이 몰려드는
뮤지컬 맘마미아 표를 끊기 위해
세 시간이나 일찍 서둘러 나오느라
식당 하나 제대로 봐둔 게 없어 두리번거리자
엘이디조명 핑핑 돌아가는 전광 안내판이
걱정하지 말라며 드림시티 안으로 등을 떠민다
1층에 들어선 수입 브랜드 옷가게는
새빨간 루즈를 바른 채
시베리아 한파 아무리 매섭게 발톱을 움켜쥐어도
걱정하지 말라며 오리털 파카를 입혀준다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 올라서자
가슴이 푹 패인 겉옷을 걸친 둥 만 둥
늘어선 마네킹들이 동침하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껏 만지라며 샅을 반쯤 열어 보인 끝에
늘어선 옷에 얼마든지 몸을 맞춰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몇 시간이고 붙들어줄 놀이터에 풀어 놓았다
빙빙 도돌이표를 따라 돌다 지치면
아무리 부엌에 붙박혀 살아도 싫은 내색 한번 비치지 않는
계약결혼한 아내가 기다리는 듯
산해진미 가득한 5층 식당가에 가 이른 점심을 먹는다
식곤증 죽이며 드림시어터에 가
뮤지컬 맘마미아로 오후를 죽도록 즐기고
맞는 저녁노을은 얼마나 따뜻한가
귀가하기 전에 길 건너 홈플러스에 들러
질긴 내장이며 지느러미 다 발라내고
양념 넉넉하게 뿌려진 찌갯거리를 사들고
콜택시 불러 타고 돌아오는 길
신도림 디큐브시티에 버리고 온 건
죽도록 즐겨도 모자라는 시간만이 아니다
결제일이면 혼곤한 머리를 맑혀주는
신용카드 청구서의 발은 좀처럼 땅에 붙지 않아
한 번도 제 길로 가지 못 한 채
백화점 가득 쌓인 물건에 끌려다닌 것도
모르는 망각의 늪
그 깊이를 누구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위성이 되어
원심력에 따라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노량진 바디샵에 들러/박몽구
지하철 1호선과 9호선이 어긋나게 교차하는 노량진역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바디샵 곤혹스런 향기를 풍만하게 담은 불빛이 그만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으라 한다.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마네킹이 속눈썹을 갈아 끼우며 철길 건너 수산시장에서 데불고 온 생선 비린내 퀴퀴한 청바지 벗어던지라 한다. 극장이라도 파한 듯 쏟아지는 인파를 가까스로 피해 역사를 나서자마자 사육신공원까지 늘어선 공무원 고시학원 간판들이 도망갈 생각을 말라며 똬리를 푼 비단뱀처럼 후끈하게 밀어붙인다. 밤 이슥토록 마른 잉크 빽빽한 페이지들 넘겨도 합격자 공고판에는 좁은 낭떠러지만 널려 있다. 원룸텔로 돌아가는 산동네 어두운 길을 지키던 수은등 누가 다 떼어갔나 했더니 바디샵에 다 모여 있다. 굳이 지방 흡입술 쓰지 않아도 바르기만 하면 두 달 안에 허리 잘록해지고, 기미를 말끔히 감춰주어 면접에도 쑥쑥 붙는다고 갈길 먼 친구들의 흐린 눈을 붙들어 놓고 있다. 바늘구멍같이 좁은 취업 문 앞에 기약 없이 줄 서지 말고 미끈하게 몸매 다듬어 맞선시장에 내놓으라고 붉은 루즈 짙게 바른 입술을 부벼 온다. 힘들여 페이지들을 넘기지 않아도 몸 하나로 얼마든지 사막을 건널 수 있다고 술기운보다 독하게 끌어당긴다. 대학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세상으로 돌아오는 문은 멱살을 움켜쥔 듯 좁게 만든 매서운 손은 보이지 않는다. 환한 바디샵 불빛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들 고시학원 문으로 달려들지만 끝내 출구는 보이지 않아 수북이 제 죽음을 딛고 넘어간다. 사육신묘로 가는 길 인파들에 떠밀려 흐지부지 사라지고 낮보다 훤한 밤이 흐린 눈 비비며 떠돌고 있다.
마포도서관 가는 길/박몽구
입춘방 붙인 지 대엿새 지났는데도
시계바늘 거꾸로 돌린 듯
동장군이 더욱 매섭게 발톱을 벼린 날
책 빌릴 마련도 없이 마포도서관 간다
지난 시간 붓을 빼앗고
진실을 알리는 스피커를 빼앗은 무기 앞에서
책을 던지고 밥이 걸린 직장도 던졌던 사람들
꺼지던 촛불 되살려 다시 만나러 간다
부산 광안리에서 광주에서 제주 강정에서
짓무른 눈 안고 모여든 친구들에게
그리움을 풀어낼 시간은 넉넉지 않았다
온몸으로 날아들던 최루탄 함께 견디며
때로 붓을 빼앗기고 감옥 문을 열어야 했던
얼음의 밤을 꼬박 함께 밝히던 친구들
옆자리 비워 둔 채 기다렸지만
끝내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았다
끼리끼리 은밀하게 대를 물려 가며
가죽의자를 차지한 채 진골 성골들은
천릿길 달려온 친구들에게 묻지도 않은 채
다시 가죽의자를 물려주려 들고
서로 가슴속 묻어 둔 말 꺼내지도 못한 채
투표함도 없이 손을 들어 찬성표를 던지거나
마른 손으로 박수를 쳐야 했다
언 손 비비며 광화문에서 이리를 몰아냈더니
다시 숨어 있던 차가운 손
우리 가운데서 불쑥 솟아나
친구들을 다시 변방으로 몰아내려 들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 핀
적의의 꽃이 서로에게 비수 되어 꽂혔다
광화문 광장 매운바람 견디며
돌베개 벤 채 함께 새벽을 앞당기던 친구들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겨울 주말
표 하나와 술 한 잔 바꿀 수 없는 사람들
새로 집을 차지한 친구들에게
등 돌린 채 보이지 않는 황포돛배를 탄다
마음의 귀/박몽구
파르스름하게 타는 진공관 불빛을 보며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지천명을 턱걸이하면서
어두워진 눈이 책을 자꾸 밀어낸다
빈약한 진공관 소리를 더 모으느라
귀바퀴 말끔하게 닦으면서
문득 말년이 되어 사랑하는 이 보내고
어두워진 귀로 일궈낸
첼로의 선율 더욱 살가운 건 왜일까
다발성 경화증 딛고 일어선 뒤프레가
다리 놓은 베토벤의 선율 위에
문득 단풍나무 한 그루 놓여 있다
저렇듯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자랄까
방관자들의 어설픈 걱정을 딛고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핏빛 뿜어올린
단풍나무 한 그루
때 묻지 않은 저녁 놀 흩뿌린다
어두워진 귀 넘어 막힌 핏줄 넘어
맑고 깊은 영혼 눈 뜬다
마포 포구/박몽구
신촌이 멀지 않은 6호선 광흥창역에 내려
옛 구화학교가 있던 자리를 찾아간다
마포 포구가 그리 멀지 않은
구수동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빨래,
건어물 말리는 채반에 고인
햇살이 정겹다
서울에서 이런 동네가 아직 남아 있었다니
좁은 골목 곳곳 얼굴 내민
낮은 처마들 구수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런 수수동 한구석에 자리 잡은
구화학교 터에 서면
비록 언어는 잃었지만
맑은 눈빛으로 다가오던 친구들 모습
양짓발에 핀 파란 수련처럼 다가온다
개발 붐에 등 떠밀려
속엣말 시원하게 뱉어낼 수 없던 친구들
곰보처럼 얽은 책상 든 채
외곽으로 이사 가야 했지만
구수동 구불구불한 골목에는
아쉬운 봄볕 여전히 찰랑거리고 있다
구화학교 헐린 자리
좁은 땅이 제값 이상 받아내느라
반듯한 상자 켜켜이 포개놓은 듯한
연립주택들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나마 남은 공터에
엉덩이를 들이미느라 바쁜 자동차들
사람살이가 뭔지 캐묻고 있다
귀면 선인장/박몽구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마른 목 풀어줄 물 한 모금 보이지 않는데도
코브라처럼 곧추세운 허리 숙이지 않는다
파란 하늘 향해 뻗은 직선에 매혹되어
손으로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온통 가시 돋친 몸 내밀어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만다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품는
서릿발 같은 앙심이려니 했더니
가시 아래 간직한 보석 같은 이슬 한 방울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란다
땅값이 비싼 자리에 이웃들 제치고
서둘러 뿌리를 내리느라 안간힘 쓰지 않고
어느 누구도 꺼리는 변방에 뿌리내리고
누구한테 물 한 모금 신세 지지 않아도
밤하늘 별빛을 닦은 이슬
제 몸을 찌르며 빚어낸 성성한 가시로 지키는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맹독을 쏘듯 머리꼭지에
빨간 꽃 하나 앉는 순간
거친 세상 향해 내민 귀면鬼面
더없이 넉넉한 어머니의 얼굴로 바뀌는 걸
본 사람은 없다
어릴 적 불장난하다가
귀 해진 책들 까맣게 태워먹은 날
매섭게 회초리 드시던 아버지의 귀면 안쪽
보이지 않게 흐르던 눈물
그 보석같이 빛나던 것 놓치듯···
겨울 파종/박몽구
겨울 콩은 결코 따뜻한 데서 잠재우지 않는다
소설 값 하느라 찬 서리 내린 섣달 초입
가을걷이 끝난 주말농장 밭두렁에
아버지는 아깝지도 않은지 콩을 파종한다
머리채 풍성한 무도 서리 앞에 시들고
아침이면 파랗게 실핏줄 끝까지
푸르름을 길어 올리던 기억 지운 채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
무표정하게 드러난 밭두렁에 콩씨 심는다
겨우내 땅거죽 얼어붙어
부드러운 흙가슴 한번 만지지 않고
새푸른 떡잎 하나 볼 수 없지만
타임 캡슐이라도 된 듯
얼음의 도가니에 작은 콩알 앉힌다
찬바람 겹겹이 둘러막고
때로 굽은 등도 곧게 펴지도록
군불 뜨끈뜨끈 지핀 방에 위리안치한
감귤이며 홍시 분에 넘쳐 썩어가지만
얼음 도가니에 든 콩알들
제 살 조금씩 내주며 언 흙 녹인다
봄물 스며들 때까지 어린싹 지킨다
온몸으로 겨울에 맞서서
스스로 겨울 빗장 푼다
한 사람 앞에만 비단옷 산처럼 쌓이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방망이 쥐게 해서는 안 된다고
독방에 앉아 겨울과 맞선 그 사람
마침내 빙벽 녹여 봄 맞듯
작은 콩알 얼음의 도가니에 심는다
겨울 복판에 아낌없이 저를 던져
깊은 상처로 깨끗한 봄 맞는다
달항아리/박몽구
그리운 것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
만삭의 임부를 닮은
달항아리에 귀를 댄 채 김환기가 견딘 것은
뉴욕의 화랑가를 순례할수록
더욱 강도를 띠어가는 푸대접
객지 밥 깊어지면서 등이 붙는 배고픔
빈처와 함께 견디는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며
다섯 남매를 낳고도
다시 거뜬히 고구마밭에 나가고
다시 불룩 불러오는 어머니의 배 앞에서
그가 눈에 담은 것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시 넘치는
신안 앞바다의 해돋이
땅거미 짙어 오면 한낱 시궁창이지만
먼 바다에서 아침 해 돋을 때면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른
밝고 따스한 백합들의 집이 되는
가거도 개펄
모진 발에 짓이겨질 때면
그대로 으깨어지는 모래성이지만
크게 팽팽한 바다의 품에 안기면
거친 파도가 결코 꺾을 수 없는
두텁고 푸근한 둥지가 되는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을수록 큰힘이 된다
낡은 책들의 귀는 따뜻하다/박몽구
섣달 그믐 앞두고 이삿짐을 싼다
산 공기로 낡아가는 폐를 씻어내자고
도봉산 아래로 옮긴 지 12년
집 늘려 가는 대신 아내의 늘어난 주름...
침대 대신 안방 천정 넘어
바닥까지 가득 쌓인 책들을 보며
보지 않는 책나부랭이만 줄여도
이삿짐 한 트럭 분 줄일 수 있다며 성화다
책을 사들이고 쌓느라
남들은 몇 번 뒤집을 동안
이사 한번 갈 수 없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아내 곁에 쌓인
보이지 않는 성을 본다
IMF로 잡지사를 버리고 대학들을 떠도느라
한 학기를 넘길 때마다 빚이 늘어갔지만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동안에도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 주었던
책들은 때로 피붙이보다 더 따스했다
서울에서 쫓겨나 더 좁은 집으로 옮기려면
책짐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아내의 말 구멍난 물꼬처럼 흘려 들으며
주워온 라면박스들에
입주처를 갖지 못한 책들을 담는다
언젠가는 갑갑한 박스에서 꺼내
금싸라기처럼 반질거리는 햇살을 쬐어주리라
약속하며 구겨진 시집들의 귀를
신혼 때 이부자리 펴듯 조심스레 편다
태안사에 가서/박몽구
시인 조태일 형의 탯자리가 있는
곡성 태안사 산그늘에 서서
생전 그와의 만남을 떠올려 본다
돌아보면 그는 내게
따스한 품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약관에 열망하던 시인이 되어 찾았을 때도
대뜸 지하실에 내려가 문선공이 되라 했다
박석무 형의 소개장 너머 매끈한 책상을 꿈꾸던 나는
납 먼지가 폐결핵을 덧낼까 겁나
일주일도 못 채우고 추석 떡값을 챙겨
고향으로 내려온 뒤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오일팔로 책도 강의실도 빼앗긴 채
시인사로 형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서지에서 돌아온 후배의 안부를 묻기는커녕
모처럼 얻은 출판사의 조판비만
빨리 결제해 달라는 말만 몇 마디 건넸다
시인사에서 돌아오던 저물녘
마포강변 노을이 눈물처럼 번졌다
곡성읍에서도 몇 십리 되는 길
꾸불꾸불 달려와
태일형 탯자리 둘러싼 동리산 자락을 본다
가파른 가운데 빈 틈 없이 어깨를 감싼
연봉들을 보며
비로소 그가 생전에 삼킨 말을 알겠다
몇 차례 전화가 휩쓸어가고
좌우로 갈린 사람들 서로 갈린 전란에도
저 아스라한 산자락 아래 솔숲으로 덮듯
형의 속뜰이 엿보였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말고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큰 길을 보라며
금방이라도 두터운 손 내밀 듯
영정 속에서 허이허이 웃고 있었다
송정리 국밥집/박몽구
멀리 남아 있는 찻시간도 토막낼 겸
오랜만에 시장통 국밥집에서 장국을 만다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던 어린 나그네의 겨울
복어 알로 허기를 달래던 낭인 죽어서
손댈 수 없는 동태로 발견된
그 자리에 꿈쩍 않고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고향 국밥집에서 술국으로
녹이 슨 시간의 켜를 헤집는다
벼랑 같은 짐을 지다 온 일꾼들이며
떠돌이 장돌뱅이들이 지친 얼굴로 찾을 때마다
뜨거운 김 솟아오르는 술국에
내장이랑 비계를 가득 담아주던
손 큰 주모는 저 세상으로 가고
대를 이은 딸이 말아주는 국물 맛은 여전한데
좁은 읍내 길은 엉덩이부터 들이민 차들로 북적거리고
계단이 유난히 삐걱거리던 다방이 헐린 자리에는
네온사인 서글픈 모텔이 머쓱하게 서 있지만
아무 데도 마음 둘 자리 없다
유채꽃 향기 코끝 간질이던 논밭은
외지인들에게 팔려간 지 오래
아파트 창마다 얼굴을 내민 객지 바람은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금 고향을 지키는 것이라곤
시장통 국밥집 술국 내음과
신나게 겨울바람을 끌어안은 채
휘파람 소리를 내는 낡은 처마뿐
서울로 가는 기차 시간을 밀쳐놓은 채
술국에 비친 고향의 얼굴 뭉클하게 건진다
바흐를 들으며/박몽구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의
티 없이 맑은 얼굴이다
그 여자의 손으로 빚어서
봉긋하게 부푼 빵이다
지친 어깨를 눅눅하게 덮쳐오던
피로 간수 빠지듯 사라지고
구상나무에 기대어 바라보는 저녁놀이다
프라하 여행 때 신새벽에
체코 여자가 레이스를 들치며
창턱에 내놓던 빨간 사르비아 화분
값비싼 장신구 같은 거
다 버리고
귀밑머리에 숨은 늙은 진주 한 알
모든 화려한 빛을 버린 광목에 입힌
쪽물 속으로 휘감겨 오는
감포 앞바다의 투명한 파도 소리
다섯 살때부터 고사리손으로 익힌
요요마의 활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듣는다
아름다움은 결코 화려하거나
누군가를 밀치고
내세워진 게 아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업고 안고 움켜쥔 채
교회의 성가대 및 셋방을 옮겨다니며
얼마나 반질거리는 햇볕을 갈망했을까
백여 년을 민들레 꽃씨처럼 눌려 지내다
비로소 한 줌 햇볕을 쬔 악보 위에
황인종의 크고 슬픈 눈을 겹쳐 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듣는 저녁은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풍성하다
턴테입블/박몽구
예리한 것에 푹 찔려야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는 친구
불과 일 분 동안
서른세 바퀴나 제자리를 핑핑 돌아도
흔들리는 낌새라곤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몸값이 높은 가수라 해도
바닥에 구깃구깃 눌린 목소리
겨우 남길 뿐
그럴듯한 무대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온몸을 쥐어짜는 빌리 할리데이의 슬픈 재즈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탐침 단단히 박힌 혀 하나로
먼지 켜켜이 쌓인 검은 바닥을
남김없이 핥아야 한다
깊고 가파른 소리골 극점까지 닿느라
피멍 성성하게 맺힐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소리의 성 한 채
황홀하게 허공에 세워진다
바닥에서 꺼낸 피멍 그득한 혀
모름지기 시는 밀실에서 듣기 좋은
자음과 모음을 짜 맞추는 게 아니라고
온갖 음모로 꼭 막혀 있는
저 거리로 뛰쳐나가야 한다고
뜨겁게 한마디 귀띔해 준다
프레스 아래 청춘을 짓이기는
공단동 친구가 끝내 뱉지 못한 말
질긴 종이의 살결을 헤집어서라도
그대로 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탐침 하나에 기대어
장애물 가득한 바닥
꼬부라진 혀 내리깐 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훑어 나가면서…
광대들/박몽구
아무리 꺼내기 어려운 말일지라도
그의 굽은 등을 빌린다면
싣지 못할 게 없다
아무리 앞뒤가 잘 맞는 문장일지라도
그의 비뚤어진 입술에 올려지는 순간
뒤죽박죽 의미를 종잡을 수 없다
맨살이 군데군데 드러난 찢어진 옷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돋보기라도 댄 듯 시선을 모으고
세상의 모든 혀 위에
달디 단 밑반찬으로 올려진다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숭숭 구멍 뚫린 어수룩함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가지만
그의 손바닥 깊이 숨겨진
예리한 칼을 본 사람은 없다
좌우가 다르게 무너지는 입술에 담는
깊은 슬픔을 숨긴 웃음으로
세상의 눈 슬쩍슬쩍 피하는
그의 배후를 본 사람은 없다
위험한 완장을 찬 채
관객들을 망각의 늪으로 끌고 가지만
지레 발을 헛딛어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박수갈채에 가려져 허물어지는
그의 뒷모습
누구도 돌려본 적 없는…
박수근의 새/박몽구
덕수궁 현대미술관 전시회를 둘러보다
천장까지 캔버스가 닿는 대작들 사이
좁은 틈새 비집고 박혀있는
손바닥만 한 소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숨 쉴 곳 한 군데 없이
메워져 있는 시멘트 바닥
깨진 틈 마당 삼아 핀
제비꽃 맑은 향기 맡아진다
엽서 크기만 한 그림판에
무수하게 찍힌 검은 점들 사이
여윈 기러기 두 마리
배동정 빛 무구한 날개 접은 채
부리를 따스하게 맞부비고 있다
눈이 옆으로 달린 새들
서로를 바로 보지 못한 채 서 있는 모습
창신동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힘겹게 아이들을 키워온 부부 같다
무구하고 따스한 새벽빛
한 자락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어둡고 긴 터널을 건너야 하는지 아느냐고
흰옷 한 벌 걸치기까지
밤새 뜨거운 몸을 달구는 19공탄,
꼬박 뜬눈으로 밝히며 꿰는 인형 눈,
헹궈내도 헹궈내도 가시지 않는 땀 냄새들
퀴퀴하게 배어
아무리 씻어도 빠지지 않는 게
보이지 않느냐고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말한다
그림은 고상하고 부드러운 붓질이 아니라
땀 범벅으로 꼬박 긴 밤
터널을 통과해
마침내 깨끗한 새벽을 열어가는 사람들
무너진 가슴을 담는 그릇이라고
검게 그을린 그림 저 너머
깊은 밤에도 붓질 그치지 않는
노화가 푹 들어간 눈으로 일러준다
주상절리/박몽구
어느 조각가가 숨어 있어
이어도 훤히 보이는 산마루까지
잘 마름된 바위 기둥들을 세웠을까
가지런히 파란 하늘까지 올라간
주상절리들을 보면
피둥피둥 거푸집 부푼 내 정신도
솜씨 좋은 조각가에 맡겨
말끔히 덜어내고 싶다
가지런히 어깨들 포갠 채 서서
차고 매운 겨울바람 너끈히 이겨
거문오름 아래 벌판에 유채꽃 피우는
주상절리처럼 굽은 데라곤 없이
곧게 서고 싶다
이어도에서 달려오는 거친 파도
온몸으로 들어 올려 따뜻한 저녁놀 펼치는
저 돌기둥들처럼
힘든 짐 지고 비계 오르는 친구
버거운 짐 들어주고 싶다
예리한 조각칼로 새겨진 상처 마다하지 않으며
허공에 다리를 놓아가는 주상절리
공사장 인부들 깨진 어깨를 딛으며
한층 한층 계단을 쌓아
파란 하늘로 올라가는 마천루 같다
멀리 이어도에서 사무쳐 몰려오는 파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거문오름에 깨끗한 해 들어 올리는 주상절리
두려움 없이 상처를 안으며
제자리를 지키는 자만이
저 바다를 거들 수 있다고 말한다
파도의 거친 갈기 온몸으로 들어 올려
깨끗한 저녁놀 한 폭 펼친다
슈베르트를 들으며/박몽구
협재 해수욕장이 바라다보이는
무인카페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를 듣는 동안
몇 번이고 덮친 파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퇴직한 교장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댈 등은 남아 있지 않아도
청춘의 상처인 매독과 밤이슬
무릎 위 깨진 기타 하나밖에 없어도
서른한 살의 팡세를
가로막을 벽은 어디에도 없다
음악은 가장 깊고 푸른 가난이 잉태하는 것이라고
밤을 새워 오선지를 메워 나간다
제주 바다 매서운 바위에 찢긴 파도
상처의 깊은 곳까지 다 만져
흉내 낼 수 없는 선율을 이루듯
음악은 깊고 푸른 상처
저 안쪽에서
꾸밈없는 소리를 건지는 것이라고
무인카페에 훤히 비치는 달빛 져다 부린다
첫눈을 딛듯
처녀의 파도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 들어간다
청해호반에서/박몽구
해발 3천미터 메마른 산들 사이에
맑은 눈 뜨고 있는 청해호에서 맞는 여름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별가족을 본다
20년 만에 갖는 북두칠성과의 해후
마음의 눈을 맑혀주는 것은
버려도 버려도 넘쳐나는 물질이 아니라
신이 내린 유리창을 깨끗하게 닦는 일이다
토끼풀의 가는 허리마저 덮으며
밤새 불어 젖히는 모래바람
지상에 쌓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으냐고 묻는
티벳 고원의 밤하늘 아래서
서울에 삼켜지면서 잃어버린 꿈을 헨다
오늘 살아갈 양식이 바닥을 드러낸 때
이리떼로부터 목숨같이 지켜온
어린 양을 하늘로 보내는
유목민 마을에 뜬 별이 유난히 곱다
사람이 만든 길을 벗어나
청해호에 잠긴 별을 한 줌 건진다
오이도에는 섬이 없다/박몽구
새 학기부터 안산에 출강하게 되었다
한가위를 훌쩍 넘기고도
불에 덴 사과처럼
뜨거운 가을의 이마가 만져지는 경영학부 강의실
이제 저자는 죽었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귀로 흘리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후끈 달아오를 때면
분필을 던지고 오이도로 달려간다
대부도로 잇닿은 시화호에
음울한 새떼의 울음처럼 낮고 검게 눌려 있는
서울 하늘을 냅다 던져 버린다
오이도를 서둘러 뭍 쪽으로 붙이면서
세발낙지, 도다리, 광어 풍년이어도
먹을 수 없는 불구의 바다
낚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낚시꾼들의 도로를 물끄러미 훔쳐보다 돌아온다
시화호 옆에 둔 바다에는 유람선 떠서
외지인들 객지 맛 자아내고
둑 위에선 밤새 가스등 켠 채 낚싯줄 드리운 사람들
광어 도다리 낚기에 여념 없지만
불임의 바다를 어쩌지 못한 채
김빠진 맥주를 마시며
밀려난 일터가 떠밀어준 시간을 모아 이루는 성시
유채꽃 알토란 다 걷어내고
들어선 강의실이 벽만 보일 때면
오이도 파시로 잃어버린 시간을 사러 간다
넓고 맑은 바다의 집 잃고
검붉은 시화호 숨가쁘게 돌아다니다
낚시꾼에게 걸린 물고기의 눈이
나만 같아 물끄러미 소금바람 쐬다가 돌아온다
뭍 쪽으로 붙으려 안간힘을 쓰다
다시 불임의 바다에 위험하게 떠밀려 들어가는
오이도에서 힘겹게 발을 뗀다
한밤의 다이얼/박몽구
숭숭 뚫린 대화방 벽 틈에 숨어
엿듣던 음란서생들도 잠들었나
사위가 기름에 축인 듯 고즈넉한 밤
내 나이보다 늙은 제니스 라디오를 듣는다
볼륨을 올리자마자 모래알을 삼킨 듯
사각거리는 소리가 쏟아지지만
거슬리기는커녕 왠지 방안이 따스해진다
어긋난 치열이 부딪친 듯
쉬고 서걱거리는 베시 스미스*의 목소리가
상처투성이 라디오에 딱 어울린다
카네기홀 아닌 뒷골목 밤무대라도
영혼의 불꽃은 더 치열하다고 말해 준다
왠지 낡은 스피커 뒤에서
눈물을 삼킨 베시 스미스가 달려 나올 것 같아
뒷덮개를 가까스로 열어보면
사랑을 배신당한 흑인 여가수 보이지 않고
낡은 진공관들에 걸쳐져 있는 거미줄 위에
수명 끊긴 말들 즐비하다
한번 바르기만 하면 주름살 활짝 펴져요
수입 화장품 모델의 달콤한 말
표를 찍어주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드립니다
선거 때마다 반짝 떠돌다
이내 유령처럼 사라지는 여의도의 공약들
묵은 먼지 흐북히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 밤에는 부푼 오줌보를 참으며
늙은 라디오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어두운 거리를 등진 채
화려한 말잔치로 밤을 낮같이 밝힌
디지털 종편 방송이 삼켜버린
잡음들을 찾아 다이얼을 천천히 돌린다
슬그머니 밤무대 뒤로 가
눈이 큰 흑인 재즈 가수가
슬픈 블루스 행간에 눌러둔 말들을 찾아
사각거리는 볼륨을 올린다
*베시 스미스(Beessie Smith) 블루스의 여제라 불리는 미국의 흑인 재즈 가수.
황학동 키드의 환생/박몽구
주말이면 황학동 만물시장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간다
변변한 비를 그을 전시대 하나 없이
담벼락에 상처투성이 몸들 다닥다닥 기대고 있는
엘피판이며 내장이 드러난 장전축들을 보면서
망각의 강 저편에 놓인 시간의 흉터를
숨은그림찾기 하듯 짜 맞춘다
시간의 버거운 부피를 견디느라 흐트러진 내장을
납땜인두로 외과 수술하듯 꿰매고
휴면에서 막 깨어난 진공관에 전기를 흘려주자
막힌 핏줄이 트이며 따스한 음악이
백목련 부신 목깃을 따라 봄볕 퍼지듯 울린다
문득 구경하고 있던 팔이 처진 헌옷더미, 혀를 빼문 카세트
이 빠진 그릇들이 덩달아 들썩거린다
아슬아슬 각선미 죽이는 모델이 골라주고
한 세트쯤 들여놓아야 중산층 축에 든다는
홈시어터 시스템 들여놓지 않아도
얼마든지 심금을 울리는 소리 낼 수 있다고
턴테이블 위를 묵묵히 돌며
녹슨 전축 바늘이 흘러간 노래를 들려준다
차갑게 굳어 있던 가슴이 녹으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장전축을 보고 있으면
잔혹한 시간을 이기고
왠지 그 안에 살아온 영혼이 들여다보인다
다발성 경화증을 딛고 힘차게 활을 부비던
뒤프레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손을 건넨다
음악대학 문턱이라곤 넘어본 적이 없이
산레모 가요제에서 입상한 빈민가 소녀 밀바가
노래는 결코 돈이 아니라며
에게해의 검푸른 파도를 닮은 저음을 들려준다
따뜻한 소리로 천막 안을 덥히는
낡은 것들이 간직한 시간의 켜 맑게 비친다
이태를 못 넘기고 유행에 뒤떨어져
멀쩡한 채 버려진 옷가지,
그리운 사람들끼리 이어줄 말이 많다며
잔뜩 벨소리를 장진하고 있는 휴대폰,
양주병에 거실 벽을 내준 문학전집들의
너무도 길게 남은 수명이 안타깝게 헤아려진다
어느덧 출가를 앞둔 큰아이보다 나이를 더 먹어
가슴 한쪽이 산발한 여자처럼 쥐어뜯긴
독수리표 장전축이라 하더라도
컬컬한 소리 걸러주는 부속 몇 개 갈고
공 들여 먼지를 닦아주면
질금질금 빌리 할리데이의 울음을 쏟아놓는 걸 보면
오래 가슴에 품은 사람 돌아올 것 같다
요란한 치장으로 가득 찬 백화점 너머
하늘과 키재기 하듯 올라가는 빌딩
저 그늘에 버려진 소리들이 보여
주말이면 야구장 가는 길 버리고
황학동 시장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사러 간다
그리운 것들의 싹둑 잘린 수명을 이으러 간다
국수리 가는 길/박몽구
4월의 끝 두물머리 정약용 생가에 들른 다음
남한강 건너 국수리를 찾았지만
출출한 속 달래줄 국수는 말지 못했다
춘천 가는 길 곧장 넓게 뚫리면서
빙빙 돌아가는 한강길 따라
느리게 걷는 소풍객들 줄어들고
오물을 수원지로 몰래 흘려보내느라 분주한
러브호텔들 가려운 뒤통수만 보았다
노른자위 땅 서울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
빈 축사를 넘보는 마을길만
퍼진 국숫발처럼 더 길어졌다
그런 날에는 한줌이 아까운 봄볕을 따라
다시 강 건너 운길산 수종사로 발길을 돌린다
약사암 뒤편에 무성한
국수나무 그늘에 나른한 봄날을 맡긴다
민통선 지뢰밭도 너끈히 넘어온
북한강 터 없는 바람으로
막힌 속을 풀어 내리면서
한 입에 말 수 없도록
국수 가락이 길어진 뜻을 헤아린다
문득 깊어진 등창을 떠메고 올라와
두물머리 맑은 물에 씻었던
세조의 상처투성이 시간을 여며
국수나무에 둘둘 말린 그늘을 편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다그치며
줄창 울어대는 휴대폰 벨소리
느리게 덮여오는 땅거미에 묻어 버린다
유령의 여자/박몽구
십수년 전 체코 여행길에 만났던 여자를
북적거리는 압구정 방면 전철 칸에서 다시 만났다
모나리자를 닮은 조브장한 귓불에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광고판 속에서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쟁취하는 것입니다!”
빛바랜 늙은 진주를 떼어내고
이번에는 값비싼 장식을 단
압구정 성형외과의 모델이
수술 칼로 한껏 크고 맑게 만든 눈으로
금방이라도 핀업 광고판에서 뛰쳐나올 듯
상체를 내 쪽으로 돌리고 있다
흙수저도 얼마든지 갈고 닦아
반질반질한 금수저로 만들 수 있다고
너저분한 죄목도 전화 한 통화면
무죄로 세탁할 수 있고
무대 뒤에서, 입상자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서슴없이 어깨들을 겹치며
가슴을 드러낸 성추행범처럼 밀착해 오는
승객들의 어깨 너머로
광고판 속 무국적의 핀업걸이
가청 주파수를 넘어 들리지 않는 말
큰 눈으로 들려주고 있다
인디언 서머가 끝난 지도 모른 채
어깨를 하얗게 드러낸 광고판 속 여자
쿨룩거리면서도 거절할 수 없이 건네는
큰눈 만들기, 주걱턱 깎기, 뱃살 흡입술, 예쁜이수술……
성형 품목들을 한 아름 받아들고
인간 밀림을 가까스로 빠져 나간다
그렇게 삽시간에 퍼지는 바이러스를 피해
맥도날드 햄버거로 통하는
압구정 전철역 통로를 따라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들이
걷는 법을 까맣게 잊은 채
유령처럼 서로를 떠밀며 가고 있다
명자꽃 입술/박몽구
높은 담을 보면 왠지 넘어가고 싶다
관음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넘보지 못하도록 높게 올려진 벽돌담 위로
비쭉비쭉 솟은 가시철망을 보면
녹물이 든 하늘이 내려올 것 같다
그렇듯 억제하기 어렵던 관음의 유혹도
낮은 담장을 만나면
칼국수 풀리듯 슬그머니 허물어져 버린다
낡은 아파트 단지를 에워싼 반포천 둑길
무표정한 잿빛 벽돌담이 허물어진 자리에
키 작은 명자나무 울타리가 들어선 봄날
남쪽으로 열린 통유리창에
낡은 소파와 담백한 오디오가 놓인
맨살이 훤히 비치는 집들이
봄 햇살을 맞아 밝게 웃고 있었다
출근 시간에 대기 빠듯할 때에는
샐러리맨들이 무시로 질러가기도 하고
공터에서 차올린 아이들의 공이 넘어가도
훌쩍 넘어가 주워올 수 있게 되었다
밤이면 흡연 구역을 찾던 친구들이
슬쩍 젖히고 으슥한 곳을 찾기도 하였다
명자나무는 사람들을 가로막기는커녕
서둘러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치여
어느 새 발등이 뭉개지고 맨몸이 드러나
봄물 한 줌 올리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넘지 못할 벽도
금단의 경계선 구실도 못하는
볼품없는 난쟁이 나무
가시나무처럼 단호하게 화내지도 못하는
명자나무가 얼굴을 바꾼 적이 딱 한번 있다
산수유도 왕벚꽃도 다 져버린 봄날
비로소 흐드러지게 핀 명자꽃
빨간 루주를 바른 입술 앞에서
키 작은 울타리를 재빠르게 넘어
출근길을 서두르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가시들이 서슬 퍼렇게 솟아 있어야 자리에
맑은 향기 한줌 건네주는 명자꽃
차마 밀치고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한 바뀌 빙 돌아
아파트 출구를 지나서 전철역으로 갔다
그날만은 가방의 무게가 돌멩이 하나쯤 빠졌다
먼 길을 지치지 않도록
명자꽃 향기가 석등을 환히 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