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사단 전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입대(1972.10)한지 벌써 만 40년이 되었네요. 저는 인생의 황금기와 같은 젊은 시절인 3년간(1972.10∼1975.8)의 현역 시절에 복무하였던 제8사단에 대하여 무척 애착이 갑니다. 또한, ‘제8사단전우회 카페’와 ‘오뚜기 독수리’ 카페(제21여단 카페)를 통하여 아날로그의 구세대인 제가 40년 전에 군 복무할 때와는 달리 디지털의 신세대인 현역들의 밝은 모습과 좋은 근무여건의 부대환경, 그리고 발전된 부대모습을 보면서 무척 자랑스럽고 늠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와 함께 옛 생각이 나서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외람되지만, 저의 군입대 40주년을 맞이하여 제가 훈련소에 입대하여 제대하기까지의 경과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972.10.31. 步兵 第37師團(陸軍 第6818部隊 * 忠勇部隊, 충북 괴산군 증평읍 소재의 향토사단, 사단구호; “勝戰”) 新兵敎育隊 入隊 → 第3中隊 第3小隊 第2分隊(소대 庶務係)
1972.11.3. 軍番 64028488 받음
1972.12.15. 보병 제37사단 신병교육대 제3중대 제164기 수료
1972.12.16. 第101補充大隊(경기도 의정부시 소재) 대기
1972.12.20. 步兵 第8師團(육군 제3011부대 * 오뚝이부대) 補充中隊 대기 (보병 제8사단 사단구호; “忠誠” → “團結”)
1972.12.24. 보병 제8사단 新兵敎育隊 대기 (주특기; 280 無線整備兵)
1972.12.30. 步兵 第21聯隊 대기(軍郵 713-30, 육군 제5709부대,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수입리 소재)
1973.1.4. 本部隊 배치, 通信隊 복무시작(보직; 庶務係)
1973.2.1. Ⅱ급 비밀취급 인가(담당업무; 연대통신운용지시[SOI] 작성⋅관리, 암구호 관리 등의 군사Ⅲ급 비밀 취급)
1975.8.13. 轉役을 위한 전출 → 鄕土師團(보병 제37사단) 대기
1975.8.26. 滿期除隊 {37師 인명(병)196호에 의거하여 전역}
제8사단전우회카페 글쓰기의 댓글이나 답글
다음은 우리의 제8사단 전우회카페에 올린 "제21연대 참모 등의 장병명단과 복무당시의 추억(72.12-75.8)" 등의 관련 글쓰기에 대한 저의 댓글이나 답글을 모아서 정리한 글입니다(이름을 제시하지 않은 글은 저의 글). 하지만, 여러 전우님들의 댓글과
※ 제8사단전우회카페 글쓰기에 대한 저의 댓글과 답글은 저와 비슷한 시기에 제21연대에 복무하셨던 군수과 안익섭 전우님께서 제 글에 대해 계속하여 댓글을 달아주심에 따라 저도 또한 안 전우님의 댓글에 대하여 답글과 댓글로 답하다가 보니 군복무시절을 새롭게 떠올리게 되고 또한 그 동안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안 전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2012.08.25. 22:13 (김유석 [75FA 알파/84.7~87.1]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전우님께서 카페활동도 많이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는 군대체질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지만, 제8사단 전후카페를 통하여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역 때는 별로 느끼지 못 하였으나 제대하고 나니 제8사단에서 군복무를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되었으며, 더욱이 카페를 통하여 전우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 2012.09.02. 17:36 □ 인생의 황금기에 같이 군 복무하였던 많은 전우들을 기억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제가 제8사단에서 전출할 때에 같이 전출되는 사단전우들이 모여 부사단장(대령)님에게 전출신고를 한 기억이 납니다. 전역은 각 향토사단에서 하였지요. 저는 저와 같이 군 복무를 하였던 모든 통신대 후임병들의 사진을 갖고 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임병들과 타 소속(다른 처부나 다른 중대) 전우들의 당시 사진은 몇 장밖에 없습니다.
□ 2012.09.28. 16:56 (김승섭 [21R 지원/88∼90]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제21연대 전우님 반갑습니다. 전우카페를 통하여 전우님께서 매우 활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복무당시의 전투지원중대장님은 군인답고 인품이 있어 보이셨습니다. 오래 되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김시덕 인사계님은 알듯 말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 2012.08.25. 22:12 (문행원[직-통신/83.1~85.7]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8사단 전우회를 위하여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군복무 당시에 담당업무(통신대 서무계)상 사단통신대대 운용과(당시의 운용과에서는 운용과를 통신참모부의 약칭인 통신부라고 호칭)와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운용과(오래되어 보직은 기억나지 않음)와 업무상 전화통화를 자주 하고 문서를 주고받기만 하였지 대면하여 만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운용과에서 밤늦게 급작스런 자료요구도 많이 하였었지요. 당시에 업무적으로 자주 통화하였던 운용과의 담당자를 만나보고 싶군요. 연대에는 사단통신대대에서 마이크로웨이브통신(단말기) 병력 2∼3명이 파견을 나와 있었습니다.
┗ 2012.08.26. 22:35 □ 사단 통신대대에는 제가 초임병(제21연대통신대 서무계조수) 시절에 통신자재(주로 배터리)를 수령하러 가는 자재계(사수)를 따라 단 한 번 가봤습니다. 자재계는 사단통신대대에 업무상 자주 갔으나 서무계인 저는 운용과와 통화만 많이 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단통신대대 편제라든가 운용과 담당자 이름을 잊었습니다. 다른 연대의 기동훈련 시에 그 연대의 대대통신대장이 통신장비가 부족(현품이 장부상보다 적음 ?)하니까 군대동기인 우리 연대의 제2대대(?)통신대장에게 통신장비를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대에서도 빌려줄 여력이 없으므로 연대통신대 기재계에게 빌려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보좌관을 통하여 거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 2012.08.18. 09:31 (김병구[16-2-5,7/84,1~86.7]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김 전우님 반갑습니다. 통일화는 발 냄새뿐만 아니라 새 것도 오래가지 않아 발가락 접히는 부분 위쪽에 금방 구멍이 났었지요. 양말과 내복도 초기에는 흰색(회색?)이었는데 양말은 일주일 내에 구멍이 났고 내복도 질이 좋지 않았지요. 그런데 1974년부터 양말과 내복이 국방색으로 바뀌면서 질이 좋아졌습니다.
□ 2012.09.28. 16:58 (김선권[21-2-7/73.6∼76.5]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반갑습니다. 저의 연대전입 직전인 1972년 말에 실시된 RCT에서 우리 연대(연대장 노태우)가 크게 이겼다고 합니다. 노태우 연대장님은 1973년 초기에 제21연대 연병장에서 성대하게 이임식(공수여단장으로 영전)을 한 기억이 납니다(별은 이듬해에 공수여단장하면서 달은 것 같습니다). 그 후임 연대장님의 경우는 이임식을 하였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4성 장군)을 하신 박노영 사단장님께서는 안타깝게도 금년 2월에 별세(향년 82세)하셨다고 합니다. 저보다 꼭 20년 빠른 1930년생이더군요. 저는 2010년에 환갑을 넘겼습니다.
□ 2012.08.15. 00:00 (백일조[제21연대통신/80.10~83.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예. 제가 연대통신대 강달세 선임하사님께서는 통신대에 복무할 때(1972.12.30∼1975.8.13) 계속하여 통신대에서 근무하셨으며, 일동읍내(기산리)에 거주하셨습니다(고향은 경남 진양). 마음이 선하고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한참 빠른 고참들끼리 강 선임하사님을 방공포병 무선통신방송 호출부호에 빗대어 "OO새"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2012.08.11. 15:1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반갑습니다. 연대본부 유류고가 전투지원중대 부근에 있던 걸로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참인 1973년 1, 2월의 이른 아침에 통신대행정반 난로용 석유를 받으러 유류고에 거의 매일 갔던 기억이 납니다(석유통을 들고 연병장을 가로질러 통신대까지 오는데 손이 무척 시렸었지요). 당시(1973년 초)에 군수과의 담당 유류계(상병?)가 키가 크고 약간 덩치가 크며 마음씨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초임병시 절에는 군수과 서무계(김정문?)도 일일결산 관계로 매일 만났었지요. 1973년 겨울부터는 유류고에 거의 가지 않았으나 안익섭 전우님을 군수과나 식당 등에서 자주 뵈었었겠지요? 반갑습니다.
┗ 2012.08.13. 16:04 (제 댓글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반갑습니다. 1973년 초는 유류계가 백우열 씨였고 1973년 겨울부터 제가 유류계였습니다. 군수과 서무계는 이정문이었습니다, 저도 키는 큽니다. 통신대는 따로 있어서 자주보기는 힘들었지만 서로 마주친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통신대는 보안대 옆에 있었고 단말기차량도 있었으며 고교동창인 김용우가 파견 나왔습니다. 암호병 막사에 있던 사병과 친했습니다. 제대 후 이재천군수보급관(정승화 부관을 거쳐 준장제대), 병기관 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지금 연대본부는 산정호수 근처 아마도 3대대옆 으로 이사하였더군요. 반갑습니다. 38교 앞에 부대가 있을 때 겨울철에 연대본부에서 지원중대근처로 우물에서 물 뜨러갈 적에 엄청 추워서 혼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73년에 유류파동이라 유류계가 주요보직이면서 국방부, 육본, 보안대는 상시검열이 많았지만 유류가지고 장난치지 않고 깨끗하게 하고 제대하였습니다. 사단유류보급창 사병이 남한산성으로가고 통신문 등에 나올 정도이었는데 전혀 관련 안 시키고 아주 클린하게 있다가 나왔습니다. 아직도 칠전팔기의 오뚝이 독수리연대 21연대가 기억에 많이 나고 유류고를 증축하고 나온게 기억에 삼삼합니다. 그때 연대주임상사님이 나이도 많으시고 인자하시면 본부대인사계상사는 좀 호랑이처럼 지독하고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 2012.08.15. 13:31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연대주임상사님은 제가 군복무 중일 때 전역하셨거나 전역하시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군수과 서무계의 이름이 이제 확실히 기억납니다. 이정문(부산출신?) 상병의 서무계 사수는 제가 초임병 시절에 제대하였는데 우(?) 병장이라고 기억납니다. 이재천 보급관은 전주고와 육사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그 후의 소식을 안 전우님께 듣게 되어 반갑습니다. 성격도 까다로운 1975년 초(?)까지의 본부대 인사계는 얼굴색이 검은 편이고 "……땀세(때문에)"라는 말을 많이 쓰셨는데 고참들이 부르던 별명과 존함은 가물가물 합니다. 어느 새벽 비상시에 부연대장실에서 이재천 중위가 인사계에게 하사관은 장교의 말을 따르라 말하였지요.
┗ 2012.08.14. 09:01 (제 댓글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서 선배님, 인사계를 똥싸계라 부르고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고 본부대장병 괴롭혔지요. 그 후 1대대로 전출되더니 맥 못쓰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재천 중위가 연대 있을 때 한 가닥을 하는 성깔이고 육사출신이라 그때는 대단했지요. 그 후 몇 년 전 만나보니 자기도 고생에 고생을 하고 별 못 다는 줄 알았는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부관이어서) 다행히 제21연대장(그 후 저의 제물포고 동기인 이영재 대령에게 넘김)한 후에 준장 달고 예편 후 자기 성격도 많이 고치고 컴퓨터전문가로 국방부관계 일하다가 지금은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렇게 옛 이야기하니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 2012.08.13. 15:10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서사범 선배님의 1973년 당시의 연대장부터 리스트를 올린 것보고 놀랬습니다. 저는 박훈규 소령∼장천덕 소령님과 군수과 근무하고 양부환 중사 김진선 소령 등 생각이 납니다. 특히 수송관과는 유류담당이라 자주 보고 급양계 장영철-권순경 이름이 생각나내요 기름으로 밥해야하니 이 사람들도 유류계와 접촉 많고 석탄까지 담당해서 식당 뒤 석탄창고 생각나며, 이정구부연대장님 정말 재미있으시고 가끔 와서 석유와 휘발유도 부탁하셨습니다. 장교식당 옆 이발소도 생각나고, 유류창고는 지원중대 앞이 맞습니다. 잣나무 묘목을 뒷산에 교회까지 심었는데 많이 자랐을 것 입니다. 교회 옆 무덤 있고 망루 있어서 본부대 각과에서 보초서고 관음산을 월미도로 착각도 하였습니다.
┗ 2012.08.13. 20:2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도 1974년(?) 경에 연대 뒷산에 잣나무를 심는데 여러 번 사역하였습니다. 잣나무가 전우님의 말씀대로 무척 많이 자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초임병 시절에 교회 옆 망루 밑의 초소와 교회와 통신대사이의 통신대암호실앞에서 보초를 선 기억이 납니다. 이정구 부연대장님은 일과 후에 병력을 동원하여 연대앞 도로(당시는 비포장)를 정리(자갈 고르기 등)한다든지, 일과 후에 식당부근(?)의 석탄저장고(페치카 난방용)에 석탄하역작업 등을 진두지휘(작업방법에 대해 손수 시범도 보이심)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부연대장님은 '전주고등학교' 출신으로 기억됩니다.
┗ 2012.08.14. 11:36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석탄창고가 식당부근이 맞습니다. 석탄도 유류계 관할이고 부연대장님이 여러모로 장병들 애로를 많이 봐주시고 중간역할에 다른 장교들보다 훨씬 병들에게 친하게 대하였지요. 목공병에게 연대장은 농 같은 것 만들게 하여서 완성되면 휴가 보내주는 것을 보았고 인사참모는 군수참모와 경쟁하느라고 중간에 낀 병들이 고생했습니다. 물 푸는 사역을 다니는 게 어려웠고 군수과선임하사의 돼지들을 돌보느라고 청소도하고 힘들었습니다. PX에 는 막걸리가 있는데 물을 너무 타서 이동막걸리일 텐데 별로 맛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떼 뜨기 등 사역이 일요일에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페치카당번은 폐가 나빠지고 얼굴이 허해진 것을 보았습니다.
┗ 2012.08.15. 13:0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의 경우는 저보다 약간 빠른 동기가 페치카 당번을 하다가 페치카 불을 잘못 관리(꺼뜨렸던가?)한다고 중고참에게 기합(빠따)받아 속된 말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 전우가 제대 후 몸이 회복되어 건강한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초임병 시절에는 통신대가 본부대행정반에서 연병장 쪽 내무반을 참모부와 같이 사용(연병장 쪽 입구 왼쪽이 인사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행정반 쪽이 통신대)하였으나 나중에 통신대는 별도로 행정반을 건너 중간 부분을 별도로 사용하였습니다(식당 쪽은 대기내무반). 제 기억으로는 통신대가 수송부 다음으로 군기가 세었습니다.
┗ 2012.08.15. 13:17 □ 제가 1972연말∼1973신년 초에 초임병으로 보병 제21연대 본부대에 배치되었을 때에 본부대내무반에 "연대장(노태우)님 하신 말씀, 막강한 인사과 말없이 수고했다"와 "통신은 휴전(休電) 없다"라는 2개의 플랭카드가 대각선으로 엇갈려 서로 마주보고 빼치카에 걸려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초임병 시절에 가끔 수송부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도르래로 물을 퍼서 운반하던 기억이 납니다(당시에 물이 귀했지요). 이발은 초임병 시절에는 전투지원중대원(본부대 파견?)이 해 준걸로 기억되고(이름은 기억이 안남), 제가 고참병 무렵에는 통신대자체 후임병에게 이발하였습니다.
□ 2012.07.05. 08:17 김병구[16-2-5,7/84,1~86.7] 전우님의 글쓰기[신교대 제1기는 없으신가요…] □ 1978년에 사단신교대가 제16연대 제1대대에서 창설 되었다는데……. 제306보충대는 1979년 창설되었고 23으로 시작되는 군번 탄생…
┗ 2012.07.05. 21:31 (김병구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김 전우님이 말씀하시는 부대편제(및 성격)와는 다르겠지만, 제가 군 복무할 당시에도'제8사단 신병교육대'가 있었는데, 훈련소(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 또는 후방의 향토사단 신병교육대-대대급)의 신병훈련 이후(또는 각 병과학교 등의 교육 후)에 의정부의 '제101보충대대'(현재의 망월사역 옆)를 거쳐 저와 같이 제8사단 배치되는 신병은 사단 '보충중대'에서 4일간 대기하였으며, 사단 '신병교육대'(대장 소령, 중대장 중위)에서는 교육을 받지 않고 6일간 대기하였다가 사단예하부대로 재배치되었습니다. 군번은 논산 군번이 1로, 향토사단 군번은 6으로 시작(두 번째 자리 수는 사단마다 다름)되는 8자리 숫자(하사는 8로 시작?)이었습니다.
┗ 2012.07.05. 21:38 □ 참고로 제가 예비사단(각 도마다 1개씩의 향토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때 등의 왕고참들의 논산 군번은 11** ****으로 와리바시 군번이라고 하였고, 저와 비슷한 시기(1972년 10월)에 입대한 논산 군번은 1299 **** 내지는 1230 ****이며, 1973년3월(?) 무렵에 입대한 1234 5678이란 군번의 훈련병은 대구의 '군의학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를 후임병에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 2012.07.06 (홍기세[75FA본/75,1~77,10] 전우님의 댓글) □ 12345678군번의 동기(군의학교)가 제 사수여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향토사단 군번은 서울 조치원 전주가 6***으로 시작하고 대구와 창원은 5***로 시작, 광주는 3,***으로, 장기하사는80**으로, 단기하사는 84**로, 국비장기(5년)는 89**번으로 시작된 걸로 기억됩니다, 약 수령하여 투약하는 과정에 처방전에 군번 필히 기재하다보니, 지금도 돌 환자 군번이 기억나니 군 체질?
┗ 2012.08.19. 10:46 (상기의 홍기세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홍기세 전우님께서 향토사단 군번을 다시 기억나게 하시고 하사군번을 자세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연대본부대에는 단기하사가 2명(군수과 소속)밖에 없어서(1명의 통신대 장기하사도 제가 초임병 때 전출) 잘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 2012.05.15. 15:47 (사단 공보장교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작전 부사단장(준장)님의 제8사단 전입을 축하드립니다. 또한, 공보장교님으로부터 막강한 제8사단의 소식을 듣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현역복무 당시(1972∼1975년)보다 훨씬 발전된 부대의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8사단에서 현역으로 복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복무(보병 제8사단 예하 보병 제21연대) 시에 사단장님은 준장, 부사단장(1인)님은 대령이었으며(사단장, 부사단장 유고시 사단장 직무대리는 포병단장, 보병연대장 건제순), 제가 1975.8.13에 제대할 때는 사단의 제대병력 대략 20명이 사단사령부에 집합하여 사단장님 대신에 부사단장님께 '전역을 위한 사단전출' 신고를 하였습니다.
┗ 2012.05.15. 09:57 (상기의 사단 공보장교의 글쓰기에 대한 문행원[직-통신/83.1~85.7] 전우님의 댓글) □ 작전부사단장님에 취임과 8사단에 위상이 한층 높아짐을 환영합니다. 예비사단엔 작전 부사단장님이 안계시고 행정 부사단장님만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계화사단 되면서 부사단장님도 작전・행정으로 분리되고 사단에 별이 하나 추가된 건 대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차후엔 여단장님들도 별들로 채워지지 않을까하고 기대하여 봅니다.
□ 2012.05.02. 17:40 (노승일[16-3-12/90.1∼92.7]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잘 봤습니다. 제가 군 복무할 때도 보-전-포 협동훈련과 공군과의 합동훈련이 있었으나 저는 기술행정중대에 근무하였던 관계로 이러한 훈련에 직접 참가해 본 적이 없으므로 전우께서 올린 동영상으로 협동훈련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사단가를 들으면서 제8사단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또한 많이 발전된 부대의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 2012.08.19. 09:39 (백일조[21연대통신/80.10~83.6] 전우님의 글쓰기[제21연대 본부중대 통신소대 하사 복무]에 대한 제 댓글) □ 제가 통신대에서 1972.12∼1975.8 근무 시에 통신대(대장; 대위)는 연대참모로서의 역할이고 본부대(대장; 소령・대위)는 인적자원을 관리하는 단위부대의 개념이었습니다. 제가 제21연대에 전입되기 직전에는 본부중대에서 정보과, 작전과, 통신대 근무 병력을 관리하였고, 인사과, 군수과 등의 병력을 근무지원중대에서 관리했으나 이들 2개 중대를 본부대로 통합하였습니다. 즉, 일과시간에 근무하는 곳은 통신대이었고, 일과시간 외의 내무생활이나 급식, 휴가. 승진 등 병력을 관리하는 곳은 본부대였습니다. 연대직할부대로는 본부대 외에 전투지원중대와 의무중대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 당시에 본부대에는 소대장, 분대장이란 직책이 없고 하사도 적었습니다(본부대전체 2명-군수과).
□ 2012.03.08. 19:00 (김병구[16-2-5,7/84,1~86.7] 전우님의 글쓰기[자리 잡은 제8 기계화보병사단]에 대한 제 댓글) □ 잘 보았습니다. 직할부대 일부와 포병단을 제외하고 3개의 보병연대는 부대가 완전히 바뀌었군요. 제가 1972.12∼1975.8에 근무하였던 보병 제21연대본부(일명, 육군 제5709부대)는 포천군 일동면 수입리의 삼팔교 인근(현재 일동 사이판 앞)에 있었으나 산정호수로 옮기었네요. (산정호수근처에는 제3대대가 있었고 제1대대는 연대본부근처의 수입리, 제2대대는 노곡리에 소재하였었으며, 1973년 말경에 경기도 김포지구로 이동하면서 다른 직할여단에 편입된 제4대대는 일동면 기산리 근처에 소재). 제가 군복무 시의 사단직할대로는 공병대대, 수색대대, 통신대대, 군수지원단(병참, 병기, 의무중대), 헌병중대, 보충중대, 항공대, 신병교육대, 전차중대가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 2012.03.08 □ 제5군단에는 보병 제3사단(보병 제19연대, 보병 제22연대, 보병 제23연대 및 포병단), 보병 제6사단(보병 제3연대, 보병 제15연대, 보병 제20연대 및 포병단) 등의 최전방(휴전선 경계) 사단과 함께 우리 사단(당시 제5군단 예비사단으로 보병 제10연대, 보병 제16연대, 보병 제21연대 및 포병단 배속)과 공병 제5여단, 군단포병사령부 등이 있었지요. 인근의 작전부대로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약칭 수기사; 제1기계화보병여단, 제1기갑보병여단, 제16기갑보병여단)과 기갑 제1여단(여단장 김종찬 준장; 제5전차대대, 제15전차대대, 제105기갑보병대대)가 있었습니다.
┗ 2012.03.08 □ 보병 제21연대에는 연대본부대와 직할대(전투지원중대, 의무중대), 제1대대(본부중대, 제1중대, 제2중대, 제3중대, 제4중대), 제2대대(본부중대, 제5중대, 제6중대, 제7중대, 제8중대), 제3대대(본부중대, 제9중대, 제10중대, 제11중대, 제12중대), 제4대대(본부중대, 제13중대, 제14중대, 제15중대, 제16중대)가 있었으며 각 대대의 마지막 중대(제4, 제8, 제12, 제16중대)는 중화기 중대(그 외는 소총중대)였습니다.
┗ 2012.03.08 □ 당시에 각 소총중대(4개 소대)의 마지막 소대는 화기소대이었습니다. 또한, 소총소대의 마지막 분대는 기관총분대(나머지 3개 분대는 소총분대)라고 기억됩니다. 제가 군복무 시에 보병 제8사단의 포병단에는 포병 제50대대, 포병 제73대대, 포병 제75대대(이상 105mm), 포병 제95대대(155mm)가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연대를 지원하는 포병은 제75포병대대였습니다.
┗ 2012.05.19. 18:22 (이유구[21-4-16/76,2~78,12] 전우님의 댓글) □ 제21연대 제4대대는 어디 소속이에요? 1976년 당시는 후반기교육 및 하사관보수교육대대여요. 수입리에 주둔했어요.
┗ 2012.05.19. 19:31 (김병구[16-2-5,7/84,1~ 86.7] 전우님의 답글) □선배님이 근무하시던 부대는 제16연대 제1대대 간부교욱대로 바뀌었다가 수색중대였다가 지금은 잘... 제21연대 제4대대는 사단본부 옆으로 옮겨서 신병교육대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사단 직할소속이 되었습니다. 각 연대 제4대대는 부대개편으로 86…87년경에 모두 해체되고 3개 대대 편제로 바뀌었습니다.
┗ 2012.10.03. 11:21 (이유구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댓글) □ 제21연대 제4대대(기산리와 수입리 중간정도에 주둔)는 제가 연대에 전입되었을 때에 있었으나 1974년 전반기(?)에 김포지구가 취약하다고 여단급 부대를 신설하면서 차출되어 그 때부터 제가 제대할 때까지 제21연대는 3개 대대 편제였습니다(제10연대, 제16연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기억). 수색중대는 제가 전입하기 전에는 각 연대에 있었으나 제가 전입하였을 때는 이미 이를 통합하여 사단 수색대대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사단신병교육대(훈련소기능이 아닌 후반기교육 성격)에서 6일간 대기할 때 보니 수색대원들이 무척 강도 높게 훈련을 받더군요. 나중(저의 제대 후)에 각 연대에 제4대대와 수색중대가 다시 배치되었던 모양이지요?
□ 2012.03.04. 19:15 (이주식[21본/71.01∼73.12]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저는 1972.12∼1975.8에 통신대 서무계로 근무한 서사범입니다. 오래되어 선배님 존함은 가물가물하지만, 얼굴은 희미한 기억이나마 인자하신 모습이었다고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정훈장교의 존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계급은 소령이라고 기억되는데 맞나요? 정훈부는 연대장관사로 올라가는 테니스장과 장교식당 근처에 있었지요? 제가 일병일 때 노태우 연대장이었고 본부대내무반과 수송부내무반(및 의무중대) 사이에 있는 공터에서 아침점호 때에 밴드부가 가끔씩 공연(?)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 2012.08.14. 13:21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인사장교 조규서 준위는 조규서 중위. 인사과에는 준위가 없었음, 김진선 소령은 살집 좋은 ROTC 출신이 아닌지요. 백우열 병장은 선임 유류계로 연대 근무 못하고 대대에서 제대함, 강달세 선임하사님 마음 좋으신 분 기억납니다. 통신대와는 아침 조회 시에 봤을 것입니다.
┗ 2012.08.18. 09:4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께서 가물가물한 40여 년 전의 기억을 보다 밝게 해주시어 고맙습니다. 혹 또 다른 오류가 있을지 모르며, 이에 관계되시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기억으로는 김진선 작전과장은 정통육사 출신으로 날씬하셨습니다(당시에도 육사출신 이재천 중위 등과 ROTC출신 김재민 중위님 등은 나름대로 특색이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김진선(충북 괴산? 출신) 소령님에 관한 1212와 그 후의 소식은 언론을 통해서, 육사 제11기(4년제 정규육사 최초 졸업생)와 그전의 구분은 현역 시 강달세 선임하사님 등의 대화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글쓰기에서 언급한 성함은 생각이 나지 않으나 키가 크다고 한 유류계가 백우열 병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2.08.15. 13:46 □ 병기과 선임하사님은 얼굴이 둥글하다고 기억되는데, 주번사관 담당 시에 '625 전에 구보나 행군 훈련을 많이 하였던 부대가 625시에 효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수송부 선임하사님은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고 하셨는데 죄송하게도 통신대를 제외한 선임하사님들의 존함은 모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초임병 시절에 일과 후에 정보과 업무를 조력(사역? 문서정리)하다가 서류표지용품이 부족하여 이를 사러 정보과 선임하사(중사?)를 따라서 부대 앞(정문에서 왼쪽? 가게)으로 그냥 나가다가 정문근무 중인 김재민 중위에게 걸려 “신고가 없이 부대 밖으로 나간다”고 주의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 2012.08.15. 13:24 □ 노승무 작전과장님은 제가 초임병 때에 정보과장(대위)으로 계시다가 광주보병학교(?) 교육수료 후에 제가 제대 무렵에 소령으로 진급하시어 제21연대 작전과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제가 통신대서무계로서 통신관련 비밀문서를 취급하였는데 초임병 시절에 이와 관련하여 노숭무 정보과장님에게 주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키가 크셨다고 기억됩니다. 수송관(준위)님은 존함이 기억나지 않으나 덩치가 크고 풍체가 좋으셨다고 기억됩니다(목소리도 크고 걸걸).
┗ 2012.09.02. 18:28 □ 관과 군은 문서방식이 약간 다릅니다. 관에서는 대외문서 하단에 기관장 명칭만 명시하고 직인을 찍는데 군에서는 부대장 성명까지 명시하고 아래 줄에 서명관이 서명(사인)하지요. 예를 들어, "보병 제21연대장 대령 000" 아래 줄에 "서명관 인사장교 중위 000 (사인)"의 형이지요. 그래서 제가 초임병일 때는 대외문서를 발송할 때는 문서에다 인사장교의 서명을 받으러 인사과에 자주 들렀었지요. 그런데 제가 조수를 받고 나서는 조수가 인사장교 서명을 받으러 다녔으므로 저는 인사과를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게도 조규서 님의 계급을 착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2.09.02. 19:37 □ 제가 인사장교의 서명을 받을 때는 거의 지적이 없이 그대로 사인을 받았는데 김명철 중위(3사?)님에게 딱 한 번 지적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입대 전에 공무원이었는데 당시 공무원 기안방식대로 본문을 1, 2, 3 등의 번호를 매겨서 문서를 작성하였지요. 그런데 당해문서의 문단이 하나뿐인 문서인데도 1로 시작하여 본문을 끝맺음하였더니 인사장교가 사인을 하지 않고 1의 문항만 있고 2라는 문항이 없으므로 1이란 글자를 삭제하라고 지적하였지요. 당시에 인사장교의 지적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 2012.08.16. 14:16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서 선배님은 대충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저도 키가 180이고 아마도 같이 근무한 기간이 73.11∼75.8 간 겹치니 기억에 있을 것 같습니다. 노승무 작전과장님은 기억납니다. 정보과에 키 작은 상병이 주간지에 달통하여 연예계 등에 바싹한 분이 계셨습니다. 병기과 선임하사 분은 몸집 좋고 나이가 많으신 상사님(군수・병기과 같은 사무실)이시었고 병기관준위님이 재미있으시고 수송관준위님은 풍체가 좋고 수송부 군기 세우려고 힘 좀 쓰시는 편이었고 연료고에서 보이는 곳이 경비소대아래 감방. 감방장이 모래주머니 들고 사병들 오리걸음하게하고, 바로 연료고 앞 지원중 앞에 전투치장차 m602 트럭 앞에 운전 연습시키는 장애물코스가 있었습니다.
┗ 2012.08.18. 09:3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께서 키가 크시다니 제가 전임 유류계와 혼돈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우님이 이제 어렴풋이나마 기억납니다. 저는 병기관은 이상하게 잘 기억나지 않고(아마 뵐 기회가 적어서?) 수송관도 모습은 기억나지만(수송부우물에 오가다가 뵘) 관련추억은 없습니다. 정문 뒤쪽의 감방은 제가 초임병 때 야간보초서는 날 보초근무자들이 경비소대와 감방 앞 공터에 집합하여 점호(?)를 받았으므로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그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으나 쇠창살이 있었고, 통신대에서도 동료전우가 보초 잘 못 선다고 며칠 감방에 갔었습니다. 감방장은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궂었다고 기억됩니다. 장애물코스는 기억이 안 나네요.
□ 2012.08.16. 15:39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병기관 고해주 준위, 이충근 2.4종계, 김선양 후임, 주종락, 양부환 중사; 군수선임하사, 김광원 단기하사(군수과) 이돈희 군수과 서무계, 손재갑 연대 주임상사(포천 일동 기산리 정도에 사신다는 것을 이재천 준장에게 들음)
┗ 2012.09.02. 18:0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이 알려주신 전우들에 대하여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이 매치가 잘 안 되고, 죄송하게도 일부는 성함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오래된 약 40년 전의 일이라?). 이정문 서무계의 조수는 중간에 한 번 바뀐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돈희 서무계는 바뀐 전임인지 후임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제 기억으로는 제의 초임병 때는 통신대에 장기하사가 있었으나 73년 중반에 전출된 후로는 1974년경(?)에 군수과에 전입된 단기하사 2명 외에 본부대에는 하사가 없던 걸로 생각나는데 혹시 제가 몰랐던 단기하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2.09.03 11:46 □ 군수과 선임하사님이 이제 생각났습니다. 제가 착각하는지 몰라도 1974년 추석 때에 주번사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마 키는 보통 키이거나 작은 키였고 경상도 말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1973년 여름경에 무슨 훈련이 있어 연대본부의 절반 내지 2/3(3/4?)가 출동하고 저는 잔류하였는데 그 분이 출동직후 잔류자들에게 연병장에서 총검술 연습을 시켜 저는 "웬 총검술?"이라고 속으로 생각하였지요. 연습은 금방 중지했습니다.
┗ 2012.10.03. 16:51 □ 연대주임상사님이 1973년 3월경 노태우 연대장님 전임 시에 인사과에 부탁하여 사진설명 타이프를 치고 제목을 써서 연대장 재직기념 앨범을 만드신 것을 문서취급소에서 보았습니다. 주임상사님은 주로 지휘부 건물(CP)이나 연대장 숙소에서 근무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졸병시절에 부연대장실에 자주 들어갔으나(고참 시는 뜸하게) 연대장실에는 연대장님이 안 계실 때 단 한 번만 들어가 봤습니다. 부연대장실은 야간에 상활실로도 이용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역대 연대장(?)*부연대장님들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습니다, 제가 말년 무렵에는 무전병이 상황실근무를 자청하여 상황실에서 대기하였습니다(대신에 보초*점호 등은 열외).
□ 2012.08.20. 22:27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저는 담당업무상 매일 오전오후에 문서수발 관계로 인사과 문서취급병(문취병은 원래는 통신대 소속), 비밀문서의 반출(오전)과 반납(오후) 관계로 정보과 보안담당사병(비밀문서는 일과 후는 정보과에서 집중보관), 일일결산 관계로 군수과 서무계를 매일 오후에 각각 만났지요(조수가 생긴 뒤로는 가끔씩). 또한 암구호전파 관계로 의무중대 서무계와 전투지원중대 통신병을 매일 오후에 만났습니다. 하지만, 병기과나 수송부와는 업무적으로 관련이 없으므로 관련 기억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다만, 차량 6대(? )는 통신대 소관이지만 차량(및 병력)을 수송부에서 집중 관리하였지요.
┗ 2012.09.04. 21:53 □ 매일 비밀문서를 열람할 때는 항상 열람자가 비밀문서 열람전에다 직・성명을 기록하고 사인하도록 되어 있었지요. 비밀문서 반출 시도 매번 대장에다 기록했습니다. 연대의 모든 통신망(연대의 각 통신망에서 최일선의 각 소대∼분대까지를 포함하여 무선통신 주파수 할당, 각 통신망별 구성부대 무선통신호칭 배열)을 구성하는 '통신운용지시'는 제가 매달 작성하였는데, 연대장님의 명의(하단에 통신대장 직・성명 병기하고 서명)로 발행(일반문서와 다름)하였지요. 이에 따라 매달 비밀문서열람전에 주민등록번호와 직・성명을 기록하고 사인을 하게 됨에 따라 연대장님들과 통신대장님의 구 주민등록번호를 달달 외웠는데 제대하면서 완전히 반납하였습니다. 다만, 주민등록번호가 75년(?)에 바뀌었지만, 제 舊주민등록번호(150401-******) 만큼은 지금도 기억합니다. 또한 심종수 통신대장님의 싸인도 현재까지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 2012.09.04. 21:51 □ 제가 비밀문서를 취급하면서 초임병 때 조그만 실수를 한 번 하였지요. 당시에 암구호는 韓美 제1군단에서 반 달분씩(?) 작성하여 사단을 통해 연대에 5부씩 배부되면 1부는 통신대에서 관리하며 매일 각 직할대에 전파하고 4부는 각 대대로 송부했다가 기간이 만료되면 회수하여 사단으로 반납했지요. 다른 비밀문서는 유효기간 만료 후에 자체적으로 폐기하고 기록유지. 그런데 제2대대에서 반납한 것을 제3대대가 반납한 것으로 착각하여 기록함에 따라 "모두 반납을 받았는데도 반납기간에 1부가 모자라다"고 선임하사와 함께 큰 걱정을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제3대대에서 반납하여 제 때에 모두 사단으로 반납하였습니다.
┗ 2012.09.02. 22:07 □ 제3대대에서 암구호를 늦게 반납한 것은 제3대대 전령이 몸이 아파서 연대에 들리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데도 반납한 대대를 제가 오기하는 바람에 비문을 분실하였다고 착각하여 마음고생을 무척 심하게 하였던 것이었지요. 그 후로는 실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통신은 상급부대에서 하급부대로 연결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당시에 연대∼대대 간의 전령은 대대통신대에서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사단∼연대간의 문서전달은 사단에서 차량을 이용하여 행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 2012.09.08 □ 비밀문서의 상하단에는 적색으로 "군사Ⅲ급비밀 confidential"이란 글씨를 씁니다. 또한 예고문(파기예정일자)을 표시하고 기간이 되면 파기하고 기록 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비밀문서를 열람할 때는 반드시 비밀문서열람기록전에다 열람날짜와 시간, 주민등록번호와 직성명을 기록하여야 합니다. 비밀문서를 보낼 때는 2중 봉투에 넣어 보내면서 겉 봉투는 제목을 비문표시가 안되도록 가명을 쓰지요. 그리고 비밀문서 송부 시에는 비밀문서 수령증(한 장의 상반부-하반부에 똑같은 내용을 같이 기록하여 중간부에 사인하고 중간부를 절단한 하반부)을 송부하면 수신처에서 비밀문서를 수령하면서 수령증(상기의 하단부)에다 수령사실을 기록하고 반송하지요. 그러면 발신처에서 이것을 원래대로 상반부와 연결하여 두지요(사인 절단부가 일치하는지 확인).
□ 2012.08.18. 13:14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1974년 봄(?)에 정보과 김남현(?) 상병과 함께 사단사령부로 비밀문서 취급관련 서류를 갖고 가서 보안사령부로부터 사단예하부대 비밀문서수발 관련 보안점검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이는 제 3년간의 군복무중 유일한 경험으로서 사단예하 모든 부대의 비밀문서 취급자를 소집하여 비밀문서 발신부대의 발송대장과 수신부대의 접수대장을 직접 대조하면서 비밀문서 수발의 누락이나 분실여부 등을 일제히 점검하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제21연대는 지적받지 않았지요. 그 때 사단에서 유일한 탱크부대인 '전차중대'(운천의 제21연대 제3대대 옆에 주둔)의 서무계도 만났었습니다.
□ 2012.08.19. 21:25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안 전우님의 말씀대로 통신대 바로 아래쪽에 보안대가 있었지요(제8사단 담당 보안대인 제208보안대의 제5709부대 분견대. 제5군단 담당은 제105보안대). 연대에 신임병이 오면 보안대로 불러 보안교육(?)을 시켰지요. 보안대원은 새로 온 초임병도 우리 연대 사병들의 기를 죽이려고 병장 계급장(마이가리)을 달고 우쭐대었지요. 분견대장은 제가 초임병 때는 젊잖은 대위(?)였는데 도중에 중사로 바뀌었지요. 이 분견대장(중사)이 너무 티가 나게 거들먹거려(?) 연대간부들이 싫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2012.08.19. 21:27 □ 보안대에서 연대와 각 대대의 비밀문서취급자를 소집하여 보안교육을 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보안대의 요구로 통신보안 관련 자료를 가끔 제출하였지요. 날자는 확실하지 않지만 1974년 가을의 오후로 생각되는데 통신대에서 내무반을 정리하기 위해 소총(캘빈)을 내무반 위쪽 공터에 열을 지어 정렬시켜 놓았다가 저녁 무렵에 내무반으로 옮기면서 소총(캘빈) 1정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어 그날 밤에 영외거주 장교와 하사관이 비상 소집되는 등 연대본부에 비상이 걸렸었지요. 나중에 보안대 하사가 '보초 없이 총을 정렬시켜 놓았다'고 보안대에 감춘 것이 밝혀져 그 하사는 곧바로 다른 부대로 전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 2012.10.03. 06:53 □ 통신대 강달세 선임하사(상사)님은 행정반에서 스스로 음어(우리말과 한글 대신에 숫자로 의사표현)연습을 가끔씩 하셨는데 하루는 보안반장(중사)이 들어와서 그 모습을 보더니 '통신보안'을 잘 하라면서 연습한 종이를 잘 폐기하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강 상사님께서 기분이 나쁘다고 음어연습을 중단하시더군요. 보안반장은 좋은 뜻으로 말하였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졸병도 아니고 기분이 나쁘셨을 겁니다. 잘 나갈수록 조심하여야겠지요. 보안반장을 싫어한 이유 중에는 아마 더 깊숙한 배경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태도에서도 간부들이 싫어할만한 타입이었습니다.
□ 2012.08.20. 16:51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중사가 보안반장이라고 연대장과 같은 급으로 놀라고 하면서 뒤에서 캐묻고 행정반에 있는 권총도 훔쳐가고 너무 티가 나게 거들먹거리고 새까만 마이가리병장과 비파 보안대요원들이 웃기는 행동 많이 했지요. 보안대하사가 그 후 다른 하사가 왔는데 전화로 유류현황 물으면서 그 하사는 저에게 목소리 좋다고 하면서 좋지 않은 행동은 안 하고 그 밑에 병들이 좀 까불었고, 매일 기름 팔아먹나 조사하려도 안 팔아먹으니 할 것도 없고, 중사 오토바이에 기름 넣어 달라 하고 중사친구가 사제차 몰고 와서 기름 넣어 달라하여 버티다가 군수선임하사 통해서 압력 집어넣어서 어쩔 수 없이 집어넣주던기억납니다.장교들은보안대에서 고과 올라가 떨었던 것 기억납니다.
┗ 2012.08.20. 23:0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예. 중사가 연대장과 맞먹으려고 하였지요. 통신대가 통신보안과 직접 관련되어 보안반장이 행정반에 횟수는 적지만 가끔 들렀었지요. 통신대에도 저보다 15개월 정도 빠른 선임병이 보안대 비파로 근무 중에 연대장숙소를 지나치게 심하게 이 잡듯 점검(?)하여 연대장이 화가 나서 원복을 시키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보안대 요청으로 원래부대(소총중대?) 대신에 통신대로 배치되었다는 이야기를 선임병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안 전우님 보직이 보안대에서 찝쩍거릴 소지가 있는 업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 전우님께서 잘 하셨군요.
┗ 2012.10.03. 07:19 □ 보안대에서 행정반 권총을 훔쳐간 얘기도 있었군요. 통신대장은 권총이 지급된 일반참모와는 달리 사병들과 같이 캘빈소총이 지급되어 행정반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야외기동훈련 외에 평상시에 통신대장이 소총을 만져보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보안대의 후임하사가 가물가물합니다. 보안대는 군특성상 필요악이었던 셈이었지요. 하지만, 본연의 임무 대신에 월권행위를 하려고 하고, 이권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이 항상 문제였지요. 마치 제사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던 셈이지요.
□ 2012.08.20. 17:04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1974년경에 아마도 군수과만 하사 두 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1명은 단기하사, 1명은 병에서 장기 신청한 장기하사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중・상사들이 이들 두 명을 하사관으로 취급해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무반에서 지내다보니 서로가 병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정보과 김남현 상병이 생각납니다. 김명종 전령은 생각납니다. 일본춘화도를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다니었지요. 제대 후 복학해 대학졸업 후 해운센터에서 직장생활시 인사과병을 만나서 인사과는 그 후도 계속적으로 모임 갔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이름은 잊었는데 상업은행본점 근무하는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군수과에 있던 이돈희 서무병-청주에서 미술선생 과는 연락이 됩니다.
┗ 2012.08.22. 19:17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군수과 하사들은 저와 같이 근무하지 않아 잘 모르지만 내무반에서 보았을 때에는 하사티를 내지 않고 순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인사과 김명종의 문서취급병 사수는 차주상 병장이었는데(73.10 전역) 통신대 소속이었지요. 그래서 야간의 통신대 단체기합 때도 같이 받았습니다. 김명종 병장도 신병 때는 통신대 소속이었지만 문서취급소가 인사과 사무실에 있었으므로 얼마 안 되어 인사과에 소속되었습니다(본인도 희망). 제 기억으로 마음이 착하였던 김명종 병장은 경북 봉화, 김남현 병장은 전북 이리(현 익산)라고 기억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 2012.09.04. 10:06 □ 제 기억으로는 이정문(매일 접함) 서무계의 조수(거의 접하지 않음)가 바뀌었으며(확실치 않음) 전임조수가 부산출신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이돈희 전우가 청주출신인지는 모르지만 헷갈리네요. 저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송추 근처의 노고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서울 종로구, 중구, 용산구 등)에서 직장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인사과 출신 전우 2∼3명(주로 저보다 후임병)을 가끔씩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공무원소속 예비군이었지만, 그 전우들은 대기업 직장예비군으로 왔더군요. 정보과 이부호 병장은 예전에 같은 직장(근무지역은 다르지만)이라 가끔씩 만났었고 지금도 유사 직종에 종사하는 관계로 우연찮게 가끔 만나게 됩니다.
┗ 2012.09.03. 18:0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서무계 조수는 김영철 씨였고 부산출신인 것 같습니다. 키가 조그마하고 차드를 잘 쓴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돈희는 한참 후에 김영철 조수로 들어왔습니다. 정보과 이부호 병장은 생각납니다.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마른 편이 아니었든가요. 인사과에 인재들이 많이 있고 인원이 많고 진급을 빨리들 했던 것 같습니다. 김명종 병장은 문서수발병이라 기억이 잘납니다. 사람이 상당히 좋은 편이고 재미있었습니다.
┗ 2012.09.07. 22:10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제가 기억하는 서무계 조수는 김영철 씨인 것 같습니다. 이부호 씨는 얌전하고 예쁘장한(?) 편이지요(이부호 님 죄송합니다). 충북 충주 출신으로 김진선 작전과장에게 줄이 닿아 정보과로 배치되었다는 이야기를 그 당시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분의 애인이 면회를 와서 외박을 자주 나갔다고 기억됩니다. 그래서 통신대보좌관님이 통신대 기재계 등에게 "조그마한 사병도 애인이 면회를 오는데 너희들은 애인도 없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전우님 말씀처럼 인사과는 사병도 많고 인재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저보다 입대일이 늦은 인사과원도 더러 생각나지만 저보다 입대일이 빠른 인사과원들의 얼굴이 더 많이 떠오르네요.
┗ 2012.09.04. 10:04 □ 인사과에서는 인사과서무계를 연대서무계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제가 1972년 말에 연대에 막 전입되어 대기(연말연시라 5일? 대기)할 때(당시 대기병 내무반은 식당 쪽의 북쪽 끝)부터 1973년 초반까지 인사과원의 대부분은 내무반에서 "人事"라는 글이 가슴에 세로로 새겨진 보라색 추리닝 상의를 입고 다녔는데 아마도 연대인사과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같습니다. 인사과원들은 대기병내무반에 아무 볼 일이 없는데도 연말연시 휴일에 들락날락하였지요. 다른 처부사병은 추리닝을 입지 않았고 대기병내무반에 별로 들어오지 않았지요. 노태우 연대장님이 운동을 좋아하셔서 제가 전입되기 전에는 부대대항 운동시합을 많이 하였던 것 같습니다.
┗ 2012.09.04. 15:2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그 시절에 보면 작전. 정보과장님들이 군수, 인사과장님들보다 더 너그러우시고 장교라고 사병을 하대하시지 않고 지도 보러 (훈련 나가는 곳 유류사용량 예상 위해서) 가면 항상 웃으시면서 맞아 주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부호 병장이 체격이 상당히 작은 편이고 주간지를 두루 섭렵한 것 생각납니다. 애인이 면회 많이 온 것은 몰랐습니다. 제3대대에서 위병장교가 면회 온 애인을 가로채서 문제가되어서 연대까지 소식이 들렸습니다. 연대본부나 제1, 제2, 제4대대는 다 가까이 있지만 제3대대만 멀리 운천에 있어서 탈영사고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수시로 유류불출로 돌아다니다보니 제3대대도 자주 찿아 갔습니다. 다른 전우들이 95년 이전한 연대본부 사진 올렸습니다.
┗ 2012.09.05. 10:4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저는 그 당시에 제3대대 위병장교와 탈영관련 이야기를 듣고도 잊었는지, 못 들었는지 전혀 기억되지 않습니다. 저는 인사, 군수과의 당담 사병이나 인사장교는 자주 접하였지만, 과장님들은 그다지 접해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정보, 작전과장님은 가끔씩 접하였고 두 분이 같이 쓰시는 과장실도 가끔 들어갔었습니다(저는 초임병 시절에 양 과의 일도 많이 조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사, 군수과장님들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고 초임병 시절의 정보, 작전과장님들은 비교적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안 전우님 말씀대로 그 분들이 너그러우셨다고 생각됩니다.
┗ 2012.09.05. 17:0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여기에다 쓰다 보니 기억이 새롭게 납니다. 그때 그 시절은 거의 육군은 자급자족하는 편(군수과에 있던 사람이 이야기하면 어불성설이지만요)으로 누구나 후방이 아니고 전방이면 고생 많이했 습니다. 유류파동이 73년부터이라 특히 예하대대나, 중대, 격고지 부대들은 고생하고 수송부는 군기도 세고 사고병(남한산성 출신 등)이 많아서 내무반생활등이 어려웠던 것이 기억납니다. 실제 가동되는 차는 찦차 빼고 부식트럭과 구난트럭 2대이므로 보병연대에서 일반병들은 트럭도 타기 힘들었습니다. 부식트럭에 드럼을 20개 들어가게 하려면 요령이 있어야하고 혼자 소유류 창고에 기름들은 드럼통을 발로차서 맞추고 2단적으로 올리고 세웠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그런 것 하라하면 허리 부러지고 못합니다. 하여간 사단보충대에서 변도 퍼보고, 연대시절 선임하사 돼지우리도 치우고 후임이 거의 1년 정도 안 들어와서 4,5개월 빠른 선임들이 4명 있고 졸병시절 선착순 사역, 물푸기, 눈치우기 고생 좀 했습니다. 선임들이 잘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후임들에게 때리지도 않고 회식 시는 대대보급관에게 피엑스 차용증 받아서 같이먹 고 잘 지냈습니다. 조그마한 군수선임하사님이 창고에 집합시켜 줄빳다를 초임병 시절 가끔 맞았는데 후임들은 유신군대라 하면서 그런 것이 없어졌습니다.
┗ 2012.09.05. 21:42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유류파동(오일쇼크)의 여파로 군에서는 대규모 훈련도 크게 줄어들었지요. 그래서 저는 야외기동훈련은 1973년 3월경에 군단 FTX 훈련 등 두 번 한 것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연대본부는 처부별?로 차량으로 이동. 처부별로 텐트설치). 그 이후 소규모 훈련은 아주 드물게 가끔씩 있었지요. 연대 RCT훈련은 제가 연대 전입직전인 1972년 말에 하였다는데(눈 때문에 고생했다 함) 제가 전입한 후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야전삽 등(철모는 미국산?)을 그 전에는 마음대로 사용했는데 유류파동 후에는 사용을 금지하고 신주 모시듯이 하였지요(대신에 공병삽을 이용).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무슨 날(자급자족 경제의 날?)이라 하여 내무반에서 야전삽이나 철모, 소총 등을 손질(수입?)하였지요.
┗ 2012.09.05. 22:02 □ 제 기억으로 1973년 초중반 경에는 명문대 출신과 사고병의 연대전입이 많았는데 명문대 출신이 워낙 많으니까 인사과에서 거의 대부분을 각 대대(중대)로 보내고 사고병도 식당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각 대대로 배치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통신대에서는 하사관이 병에게 기합을 준 적이 없었고 대신에 고참병들에게 기합을 많이 받았습니다(특히 1973년 상반기에 집합이 많았음). 1973년 중반 무렵에 딱 한번 통신대장에게 통신대 일반병 전원이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기합을 20분 가량(?)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유는 통신선(구리선?) 에 관련된 가설반 장기하사의 불미스러운 일(사고 후에 타 부대로 전출)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 2012.09.07. 22:17 □ 저도 군대생활에서 딱 한 번 화장실 푸기 작업을 하였습니다. 1974년(?) 경의 오후 일과시간에 땀세 인사계가 내무반 옆-식당 앞의 창고 앞에 참모부와 통신대원을 갑자기 집합시켰지요. 그래서 본부대의 절반정도(?) 인원이 집합을 하였는데 별다른 내용도 없는 훈시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서무계들이 화장실을 푸라고 하더군요. 그 때 하필이면 서무계는 저 밖에 없어서 사역에 동원되었지요(땀세 인사계의 전략?). 본부대 출퇴근 방위병(어쩐 일이지는 모르나 상병계급장을 봍이고 있었음)과 통신대원 1명과 함께 작업하였습니다. 작업 시는 그러려니 하였지만, 작업 후에 계곡에 가서 목욕도 하고 옷도 세탁하였는데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 2012.08.20. 22:54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안 전우님 글 읽고 이재천 보급장교에 대한 그 후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초임병 때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본부대에서 단체구보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지요. 그런데 자주 구보하니 조금씩 적응이 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구보나 행군할 때 선두에서면 힘이 들이 않고 뒤따라가면 힘도 들고 처지게 되잖아요. 그래서 짭밥수가 조금 늘었을 때는 선두에서 구보도 해보았지요. 구보할 때는 대개 김진선 소령님 등 장교들이 지휘(?)하였으며, 왕복 후 연병장에 도착하여 연병장을 몇 차례 더 돌았지요. 그런데 제가 요령이 생겨 선두에서 구보하던 어느 날은 이재천 중위님이 통솔(?)하였는데 연병장을 돌 때에 구보거리를 줄이려고 최대한 안쪽으로 원을 작게 그리면서 돌았더니 이 중위께서 작게 돈다고 저에게 펀치를 한 방 날리더군요. 이재천 중위님은 구보시에 대개 유도복의 검은 띠를 매었는데 띠에 '육군사관학교'라는 흰색 글이 새겨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김진선 소령님은 구보시에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손뼉을 치며 구보하도록 이끌었지요(어께 위로 손뼉을 치면서 무슨 구호도 외쳤는데 그 내용은 기억이 안 납니다). 구보는 초임병 때 처음에 힘들었으나 자주 하니 약간 익숙해지더군요. 고참이 되어 구보한 적은 없었습니다.
□ 2012.08.21. 15:08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이재천 중위(준장진급)님은 그때 기개가 대단하였지요, 군수참모들은 소령인데 육사중위한테 기가 제압된 것 같습니다. 장천덕 군수참모(서천출신)는 육대가려고 공부하느라 약간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인사과에 키 크고 나이에 비해 일찍 상사 달은 인사선임하사님이 마음 좋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참모부는 인사과 중간 군수과(병기과 같이), 작전정보 반대편사무실 이용하고 뒤에 장교식당과 테니스장이 있어서 겨울철에 군수과부분은 혼자 눈 치느라고 혼난 기억 있습니다. 뒤로 가면 연대장, 부연대장숙소 근처에 수영장 있는데 여기서 수영하는 것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대장숙소 당번병, 운전병, 부연대장 당번병, 운전병 등과는 친하게 지냈습니다.
┗ 2012.09.02. 18:07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의 글을 읽고 이재천 중위님 관련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212 당시 상황(부상)을 묘사한 글이 많더군요. 인사과 선임하사님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인사과, 군수과(병기과), 정보・작전과 사무실과 각 과장실은 눈에 선하네요. 특히 정보・작전과장님은 같은 방 좌우측에서 근무하셨지요. 테니스장은 운동을 좋아하시는 노태우 연대장님이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가 연대전입 시에 "체력은 국력"이란 입간판 등이 세워져 있었지요. 저도 1973∼1974 겨울에 때 통신대에서 CP 뒤로 테니스장까지 가는 길의 눈을 치운 기억이 있습니다. 수영장은 1975년(?)에 만든 것으로 기억되는데 제 후임병들이 풀장 개장 직후 물에서 찍은 사진을 갖고 있습니다.
┗ 2012.08.21. 21:22 □ 연대장・부연대장 당번병과 운전병은 희미하나마 기억납니다. 1973년 초중반경에 전입된 부연대장 당번은 훤칠하고 미남이며, 운전병들도 잘 생겼었지요. 제가 1972년 말에 연대에 전입하여 본부대의 북쪽 끝(식당 쪽) 내무반에서 대기할 때에 운동복 차림의 대대병력 1명(고향이 제주도)이 스케이트 연습한다고 같이 있었습니다. 연대 정문 앞쪽의 논에 임시로 만든 스케이트장에서 1972년 말에 대대별 스케이트 시합에서 우승하여 연대대표로 사단시합에 나가려고 연습한다고 하더군요. 그 후의 성적 등은 듣지 못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기병들도 스케이트장에 가 보았습니다(타지는 못하였지만). 본부대의 영선병 2명을 대기병 때에 처음 봤는데 그들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네요.
┗ 2012.09.01. 15:47 □ 장교식당은 장교와 하사관들이 이용하였지요. 장교식당에 근무하였던 병사(1명만 근무?)는 얼굴이 예쁘장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른 병사와 착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얼굴모습이 비교적 선명히 생각납니다. 제가 초임병 때에 한 번은 통신대장이 점심시간에 통신대에서 식사하시겠다고 하여 통신대원이 장교식당에 가서 점심음식(짜장면)을 사병용 식판에 가져왔지만 통신대장이 부대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시었으므로 고참들과 짜장면을 아주 맛있게 조금씩 나눠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장교식당의 음식을 먹은 것은 그것이 유일하였습니다.
□ 2012.08.21.15:17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군악대는 아니고 연예대 비슷한 막사가 있어서 놀러가서 그곳에 안병장이라고 음악에 심취해서 드럼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하고 대대 등에서 행군하면 나가서 사기진작연예대로 알고 있습니다. 이 연예대에 KBS 탤런트 출신이 전입해서 인천출신이고 후배 뻘이라 제가 잘 보살펴준 기억이 납니다. 부연대장님이 각별히 이 친구를 아꼈습니다. 통일화라는 운동화 비슷한 것을 신어서 무좀이 걸려서 제대 후 고생하고 제대 전에 정글화가 나오더군요. 워커신고 다니면 나중인사계가 뭐라고 했지만 제대 5∼6개월 나두고는 워커 신고 다녔습니다. 제3대대장님이 통역장교출신에 키가 작으신 분인데 휘발유 오버 사용해 제1대대(이월 안 됨) 연료 더 주었다고 항의하러 왔었습니다.
┗ 2012.09.02. 15:4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밴드부는 정훈과의 이주식(71∼73.12) 선배가 쓴 "제21연대본부대 글쓰기 1탄 발사" 등에도 언급되었습니다. 제가 연대에 전입 시에 밴드부는 행정반 옆 중간내무반(나중에 통신대내무반)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의 초임병 시절에 본부대내무반과 수송부내무반(의무중대와 같이 쓰는 건물) 중간공터의 창고슬래브 위에서 아침점호 때에 가끔씩 공연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공터에서 본부대내무반 쪽에 붙어있던 창고는 1974년(?)에 불탔는데 화재사고 문책이 없이 무사히 넘어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밴드부원 중에 저보다 고참들은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저보다 늦은 밴드부원은 생각이 나지 않네요. 아마도 밴드부가 연대본부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지 줄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2012.09.02. 08:29 □ 저는 3년 내내 통일화만 신었습니다. 워커는 훈련소에서 지급한 쎄무 워커를 훈련소에서 자대배치까지와 휴가를 갈 때만 신었습니다. 쎄무 워커는 원래 해병대용이었는데 광을 낼 수 없었지요. 제가 현역 시는 정글화가 정식보급품은 아니지만, 극소수의 사병들이 사적으로 구입하여 신었었습니다. 제가 아직 신참일 때인 1974년 무렵에 우리나라 군대가 월남에서 철수하면서 졸병들은 후방으로 고참들은 전방으로 배치되었는데 우리 연대에 전입된 1∼2개 소대병력(?)쯤 되는 고참 사병들이 정글화를 신고 왔지요. 본부대의 어느 고참이 이들 월남병력들이 대기하는 내무반에서 정글화를 몰래 슬쩍 가져다가 신고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 2012.09.04. 21:46 □ 월남애기가 나와서 부연하자면, 월남전에는 제 동갑들도 참전하였고(저는 늦게 입대하여 기회가 없었음), 제가 복무한 통신대에서도 이전에 차출되거나 지원한 병력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제21연대에 배치되었을 때에 어디선가 "제1야전군"이란 포스터(?)를 보고 전방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는데 (제101보충대대에서 사단전입 시에 만세교∼일동 간에서 트럭호로의 뒤쪽 장막을 열고 먼지가 펄펄 나는 비포장도로를 보고서도 전방 실감) 나중에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철수하여 제3군사령부로 되어 우리 사단 등 경기도지역을 새로 관할하였습니다. 초대 제3군사령관 이세호 대장의 지시로 모든 부대가 행군 시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란 구호를 외쳤지요.
┗ 2012.09.04. 21:45 □ 저는 대대장님들하고는 접할 기회가 없어서 현역 시에도 존함이나 얼굴을 잘 몰랐습니다. 다만, 1973년경에 연대본부 인근의 제1대대장님은 가끔씩 연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신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나며, 그 당시의 제1대대장님이 아마도 이진삼(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역임) 중령님으로 생각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각 대대의 통신대장님들은 사병들과 함께 연대통신대에 가끔씩 왔으므로 희미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굴은 대부분 모르나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제 담당업무상 각 대대의 통신대원 및 전투지원중대와 각 대대예하 중대의 통신병(2∼3명 내외?)까지 연대 내의 모든 통신병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였었죠.
□ 2012.08.22. 14:27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인사과의 이동하 병장이 제대 후 상업은행본점에 근무할 적에 본적이 있습니다. 안경을 짙은 뿔테로쓴 사병도 생각나고 인사과와는 내무반에서 건너편침상이라 자주 보면서 같이 지냈고 프린트실에서 등사하러 자주 갔었습니다. 창고가 불났던 시절도 기억이 납니다. 산정호수에 겨울이 되면 빙상경기가 열리고 사단선수로 차출되어서 훈련을 하러 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삼팔교 건너서 성동검문소 가 는길로 구보를 하고 오곤 하였지요. 숯가마들이 많이 있고 이 길로 차가 별로 안 다녀서 겨울에는 차도가 얼어서 운전병들이 조심스럽게 운전했는데 지금은 팬션이 들어서고 파주골이라고 순두부 등을 해서 파는 음식촌이 생겨서 몇 번 들려봤습니다.
┗ 2012.08.31. 13:57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는 이상하게 성동검문소 쪽 길로 구보하였던 기억은 나지 않고 일동 근처나 이동 부근까지 구보한 기억만 납니다. 성동검문소로 가는 길은 제가 초임병 시절의 겨울철에 연대본부 병사들이 눈을 치웠던 경험이 두 세 차례 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저도 15여년 전에 가족과 순두부 먹으러 갔다가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교통이 막혀 시간도 엄청 걸리고(명절 때 고향 가는 길과 버금갈 정도), 겨우 도착하니 순두부집에 사람들도 엄청 많더군요. 저도 매달 '통신운용지시(SOI)'(3급 비밀)를 작성하느라 가리방을 많이 긁었지요. 이것을 연대예하의 각 대대와 상급부대인 사단・군단(제5군단), 그리고 인접 연대(제10연대, 제16연대)・사단(제3사단. 제6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갑여단) 등으로 보내느라 프린트도 꽤 많이 하였습니다.
┗ 2012.09.02. 15:38 □ 제가 초임병 때에 통신대가 참모부와 같은 내무반을 이용(통신대는 행정반 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침상, 맞은편이 병기과, 빼치카를 기준으로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쪽, 즉 연병장 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침상이 인사과)할 때에 이상하게도 양말 등의 개인 소지품이 잘 없어졌으며, 또한 모포 등의 숫자가 적다고 야간에 통신대 집합도 가끔씩 하였죠. 모포 등은 고참들이 술집에 적선? 부대이동? 그러나 이런 일은 본부대 행정반 북쪽의 내무반을 통신대만 별도로 사용하고부터는 없어졌습니다.
┗ 2012.08.29. 09:1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이제 생각이 납니다. 군수과는 연병장 쪽 왼쪽에 있었고 건너편 인사과가 있어 군수과의 a급 모포(군수과라 많음)를 가져가서 신참시 숫자 맞추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통신대가 같이 썼던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병기과의 고 하사(실제 만년상병의 꼴통)라고 있어서 후임병중 나의가 많은 분이 있었는데 여러모로 괴롭힌 것이 기억납니다. 또한 본부대행정서무병중 성질이 좋지 않은 병장이 기억이 납니다. 특히 휴가 건에서 여러모로 만용을 부리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정기휴가를 두 번만 찿아 먹은 것 같습니다.
┗ 2012.09.01. 16:06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제가 초임병 때 통신대는 야간에 집합과 기합이 많았습니다. 본부대 서무계 사수와 조수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나는데(특히 사수) 이름은 생각이 날 듯 말듯 하네요. 사수는 얼굴이 약간 검었는데 인사계보다는 덜 검었지요. 사수와 조수가 다투어 제가 말린 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수가 제대(1974년?)하여 조수가 사수가 되었는데 후임은 성질이 사납지는 않으나 만용을 가끔 부렸지요. 약간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엉큼한 이 친구의 장난 때문에 저도 휴가 등에서 골탕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 2012.09.17. 16:59 □ 안 전우님께서 말씀하시는 고 하사가 누구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병기과에 저보다 몇 개월 약간 빠른 전우가 있었는데 약간 뚱뚱하고 저보다 두세 살 정도 나이가 많았지요. 기혼자로서 애가 있고 국민학교 선생을 하다 군에 입대하였다고 합니다. 이 전우가 가끔씩 일석점호 후에 통신대 내무반(참모부내무반 3/5 정도의 크기?)에서 취침을 하였지요. 그런데 제가 불침번 서면서 보초 등의 교대근무를 위해 전우들을 깨울 때에 저처럼 마른 전우들은 어깨를 살짝 한 번 치면 금방 깨는데 병기과의 뚱뚱한 이 전우는 어깨를 세게 쳐도 안 깨고 몇 차례 마구 흔들어야 겨우 일어났지요. 아마도 그처럼 느긋하므로 살이 찌는 모양입니다.
┗ 2012.09.05. 17:2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병기과 이야기하는 분은 뚱뚱하고 옆에 구렛나루가 나고 나이가 많아서 들어왔는데 바로 위에 고 상병이라고 조그마하고 고약한 선임이 있어서 이 분을 많이 괴롭히는 것을 내무반이나 행정반에서 많이 보았지요. 아마도 탄약고로 나가서 괴롭혔을 것 같습니다. 뻬치카 당번들 기억나시는지요. 겨울이 되면 열외는 되지만 폐가 안 좋아져서 얼굴이 허해졌지요. 페치카에 라면 끓여 오라해서 반합 등으로 끄려오느라 힘들었습니다. 구명을 큰 쇠막대로 숭숭 뚫고 안 꺼지게 하는 것이 큰 기술이지요. 여름에 휴가 나갔다오면 벌써 가을. 쌀쌀한 겨울 포천추위 특히 심한 것 같습니다. 삼팔교 건너는 6.25전에는 적지이여서 그쪽주민들은 그때도 의심을 한다는 그쪽 출신병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 2012.09.07. 22:20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고 상병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내무반에서 많이 봤을 터이므로 언젠가 기억나겠지요. 통신대에는 인원이 많다보니 초임병 몇 명만이 페치카 당번을 하였는데 제가 전입된 1972연말∼1973연초 겨울에는 주로 가설병이 담당했습니다. 지난번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보다 3주 정도(?) 빠른 준동기가 페치카 당번하면서 선임병들에게 구타를 당해 골병이 들었습니다. 저도 빼치카에서 고참들 라면을 끓여 봤습니다. 언제든지 누구라도 고참 라면을 잘못 끓였다면 그날 밤에는 반드시 통신대 집합이 있었지요. 사병식당에도 운천(?)에 사는 취사병이 있었지요. 청주출신 인사과원 1명도 보안대의 사상검사(?)로 취사병으로 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 2012.09.06. 11:4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취사병중 한분은 체격이 크고 얼굴이 시커면 편이었고, 취사장 뒤편의 주막집으로 월담을 하여서 술을 먹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저는 그 술집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취사병은 체격이 조그만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내무반 생활보다 취사장에서 잠을 잔 것으로 알고 ㅇ;ㅆ습니다. 유류고에서 경유드럼을 주면 굴려서 취사장으로 가지고 갔지요. 도루묵국이 나오면 생선이 부스러져서 생선가루가 되고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한 번 황소 한마리를 연대에서 잡았는데 하사관들이 가져가고 장교식당행 등 사병에게 넘어오는 것은 없었지요. 자매결연인 서울정화여상인가가 오면 싸리 빗자루를 실어준 것도 기억납니다.
┗ 2012.09.06. 15:0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예. 취사병은 취사장에서 취침하였습니다. 취사장 뒷편 술집은 저보다 한참 빠른 왕고참들이 이용하였지요. 저와 비슷한 시기의 전우들은 (저를 제외하고) 대부분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으므로 월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졸병을 막 벗어나려 하던 때에 일석점호 후에 고참이 취사장 뒷집에서 술을 사오라고 하여 저는 월담한 적이 없어 거절하였더니 욕만 하더군요. 그 전의 고참이었다면 '집합'감이었는데 욕으로 끝났지요. 저는 고참이 되어 PX 막걸리를 마셨는데 PX술이 금방 떨어져 일주일에 며칠 밖에 팔지 않았지요. 저도 "말짱 도루묵"이란 말을 사회에서 들었는데 군대에서 그 말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 2012.09.07. 22:22 □ 너무 오래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연대에서 황소를 잡았다는 것이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서울 제기동에 있는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연대를 방문하게 되면 처부별로 학교에 선물할 싸리 빗자루를 할당하였으므로 그 숫자를 채우느라 졸병들이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통신대는 인원이 많아 할당수량이 많았지만, 숫자를 대부분 못 채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학생들이 방문하는 날에 어느 중대(제2대대 소속?) 전우들이 의장대처럼 집총사열시범(?)을 멋지게 보이기도 하였지요. 정화여상은 교련을 잘 하는 학교로 알려졌었죠. 여학생들이 연병장에서 통신대 앞을 거쳐 교회 쪽으로 올라갈 때에 후임병들이 손을 흔들고 환영하였습니다.
□ 2012.08.27. 22:30 (손희윤[16-4-14/79.4~82.2]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저는 625가 발발하였던 1950년생입니다. 당시는 단기(4283년)를 이용(1961년까지)하였는데 이 해를 삼팔(38)선이 이사(24)간 해라고 하였답니다(숫자를 거꾸로 말함). 저는 미군이 반격하기 위해 공습할 무렵인 8월의 밤에 태어났는데 공습 때문에 야간에 불을 켜지 못하여 탯줄을 제 때에 자르지 못하고 낮이 되어서야 잘랐다고 합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기인데도 공습 시의 폭발하는 굉음이 갑자기 들리면 움찔움찔하고 놀랬다(?)고 하네요.
┗ 2012.08.28. 11:50 □ 저의 할머니께서는 제가 몸이 허약한 것(건강하지만 몸이 말랐다는 뜻)이 탯줄을 제대로 자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의학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아버님은 625동란이 발발하였던 해에 경북 경산으로 피난을 가셨다가 이듬해에 입대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나서 할아버님이 대문에다 금줄을 치셨는데 어느 날 인민군이 마당으로 들어와서 할아버님이 인민군에게 금줄을 쳤는데 들어왔다고 야단을 치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인민군도 ‘아바이 동무’라고 하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 2012.08.27. 20:25 (이주환[포병여단장/현역]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여단장님 반갑습니다. 지금의 포병여단을 제가 현역일 때는 포병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향토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보병 제8사단에 전입되어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대기할 당시에 함께 대가하였던 포병학교 출신 포병들은 포병단을 '포사(포병사령부)'라고 부르더군요. 예하 포병대대(4개 대대)는 그 때도 지금과 같았으며, 보병 제21연대를 지원하는 포병은 제75포병대대이었습니다.
□ 2012.09.07. 12:59 (김승섭 [21R지원/88∼90] 전우님의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김 전우님 잘 봤습니다. 군 복부시절 기념 자료를 잘 간직하고 계시는군요. 오뚝이 부대 마크가 아주 멋있네요. 제가 복무 시는 제8사단이 오뚝이 부대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부대마크를 볼 별로 기회가 없었고(사단사령부에 가서만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 '오뚝이 부대'란 말자체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억됩니다. 단지, 고참병한테 '국군의 날' 행사 라디오 중계에서 "늠름한 오뚝이 부대'라고 하였다는 이야기 등 오뚝이 부대라는 말을 드물게 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전역하고 언제인가부터는 군복에 오뚝이 마크를 달은 후배들이 길거리에서 눈에 띄어 반가웠었습니다.
□ 2012.09.01. 08:52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의 이력이 훌륭하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저는 해운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제 동생이 IMF사태 전까지 00상선에 근무하였었고, 형님이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해양수산부에서 명퇴하셨습니다. 동생은 결혼 전까지 00전용선(주)에서 근무하였습니다. 2차원의 공간을 움직이는 해운(도로도 2차원. 항공은 3차원)은 1차원의 공간(고정된 통로)만을 움직이는 철도와는 수송 공간이 다르지만 대량교통수단이란 공통점이 있지요. 또한 해운과 철도는 일관수송, 협동수송의 대표적 사례이지요. 우리나라는 항공과 도로위주 미국대륙교통의 영향을 받은 교통정책(도로와 자동차)으로 과거에 철도가 발전되지 못하였었지요.
┗ 2012.09.01. 09:12 □ 요즈음은 항만시설을 개발(확충)하거나 내륙화물기지 등의 건설을 검토할 때에 철도와 도로를 함께 건설하도록 검토되고 있습니다. 미국철도는 여객수송보다는 화물수송위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긴 열차편성의 대량화물수송을 하지만 침목, 자갈 등의 철도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저는 운수(영업 및 운전), 차량, 시설(선로, 건물), 전기(및 신호) 등의 철도분야 중에서 철도선로의 건설과 유지보수를 하는 시설관련 업무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철도시설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는 약간 관심이 큽니다.
□ 2012.09.05. 22:5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 제21연대본부 자리는 어느 부대로 바뀌었나요? 산정호수는 제대 후에 비로소 처음 가보고 그 후로도 몇 번 가보았는데 삼팔교와 연대자리 쪽도 언제 가 보아야겠네요. 제가 현역 때 제1대대는 초임병 때 목욕하러가고(연대본부는 목욕탕이 없으므로) 제2대대는 기동훈련 전에 한 번 가봤고 제4대대는 도로 옆이라 지나가기만 하였는데, 제3대대는 운천에 있다는 애기만 들었지 전혀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현역당시 고참이 되어 여유가 생겼을 때에 가설병들을 따라서 다녀보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 2012.08.29. 09:2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제1대대 목욕탕은 기억납니다. 목욕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고 비오고 나면 연대 밖에 나가 물 흐르는 곳에서 빨래도 하고 반바지입고 물에 목욕도하고 밥도 해먹은 기억이 납니다. 제1대대 뒤쪽으로 물과 바위가 있는 곳에 군부대휴양지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2대대는 사단공병대 근처에 있었고, 제3대대만 멀리 운천에 있어는데 그때만 해도 미군이 운천에 있다 이동한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이 쓰던 콘세트 막사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연대본부가 옮긴 곳은 산정호수 들어가다가 보면 독수리동상이 밖으로 나와 있어 찾기 쉽습니다. 일반병과 달리 각 대대에 경유를 보급해 밥도 해먹고 기름난로를 때워야하므로 매주 각 대대를 다녀야하므로 많이 다닌 편입니다.
┗ 2012.08.29. 11:21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제가 자대배치 후에 부대목욕탕에서 목욕한 것은 신참 때 제1대대에서 한 차례 목욕한 것이 유일합니다. 선임병들도 목욕한지 몇 개월 되었다고 말하데요. 초임병 때는 연대 앞 하천에서 단체로 목욕과 세탁을 하였고 나중에는 개인적으로 연대 뒷산 계곡에서 하였습니다(물이 자주 말랐지요). 저는 제1대대 뒤쪽 휴양지가 기억이 안 나네요. 계곡얘기를 하다 보니 겨울철에 뒷산계곡에서 얼음을 깨고 세탁하던 기억이 나네요. 물이 무척 귀하고 돌이 많던 부대환경으로 생각됩니다. 몇 년 전에 산정호수에 몇 번 갔었는데 무심코 지나가다 부대를 보긴 보았으나 눈여겨보질 않았으므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보고 오겠습니다.
┗ 2012.09.28. 09:11 □ 제가 현역 시에 부대단체휴양은 1973년 여름에 단 한 번 갔었습니다. 삼팔교∼성동 간의 도로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중간(신장리) 쯤으로 연대본부가 3박4일로 휴양을 갔는데 휴양지에서 같은 시기에 휴양을 온 대대소속의 사단 신교대 대기동기(?)도 만났었습니다. 1973년 가을에는 연대본부 병력이 일동의 서북쪽(?) 제16연대의 제1대대까지 행군하여 그 대대의 자동화사격장에서 사격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1973년 3월(?) 쯤의 기동훈련 때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야외에서 본부대병력이 기마전을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때 키 큰 인사과 고참(서울용산 서계동 출신)이 저에게 사탕도 주었지요.
┗ 2012.09.05. 22:51 □ 1973년 가을에 통신대원 네댓 명이 수입리 북서쪽 산골마을로 농촌일손 돕기를 갔었지요. 주목적은 가을일손을 도아주고서 짚단을 얻어오는 것이었지요. 당시에 짚은 부대에서 요긴하게 쓰였죠. 후한 농촌인심이라 사제 하얀 쌀밥을 지어주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지요. 또 1973년에 통신대원 여러 명이 38교 부근으로 통신대 조경용 생나무를 캐러도 갔었는데 동네 어른들에게 생나무를 캤다고 욕도 먹었지요.
┗ 2012.09.02. 16:22 □ 제가 고참이었던 1975년 초여름에는 통신대 고참들끼리 연대 북서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계곡으로 놀러도 갔었는데 그 곳에는 작은 폭포도 있더군요. 이 때 통신대에 막 전입을 온 중사 분도 같이 갔는데 그 분은 술을 별로 안 마시고 제가 제일 많이 마셨었습니다. 그 분은 공수부대 출신으로 훈련이 너무 세기 때문에 중사인데도 견딜 수가 없으므로 칭병을 하여 군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하였다가 퇴원하면서 우리 보병연대로 전입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통신대 전입 2∼3개월 후에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지요. 저와 비슷하거나 약간 빠른 연배인데 키가 약간 크고 마음이 순하신 분이었습니다. 김정옥 보좌관과 강달세 선임하사님 댁으로 각각 다른 시기에 일동의 자택으로 통신대원 몇 명이 초대받아 사제 밥을 먹어도 보았지요. 김 보좌관님은 사모님에게도 깍듯이 존댓말을 쓰시더군요.
┗ 2012.09.02. 16:46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 가설병들은 각 대대와의 유선연결을 위해 바깥에서 생활했으므로 부대출입이 자유로웠지요. 그래서 가설병들은 인근지리를 잘 알았으며, 저도 바깥에 나갈 때는 가설병과 함께 나갔습니다. 제 서무계사수의 제대환송회는 1974.1월에 고참들이 일동읍내에서 하였는데 저는 졸병인데도 조수라고 고참들이 참석시켜 주었습니다. 입대시기가 저와 비슷한 통신대 사병들보다 1973∼1974초에 제대한 고참들이 크게 놀고 빠따도 많이 쳤다고 생각됩니다. 이 분들에게 줄빠따도 맞아보았습니다. 1974∼1975년에는 빠따와 집합이 현저히 줄어들었지요. 저의 제대환송회는 한여름이라 더우므로 통신대 내의 무선통신차량 주차장 옆 야외 공터에서 하였지요.
┗ 2012.09.04. 15:3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기억납니다. 사단측정을 위해서 가설병들이 가상전봇대를 열심히 오르던 모습과 전선을 가설하던 모습이 선합니다. 보좌관님도 사람 좋으시죠. 기술병과이시라 다들 일반병과 준위, 선임하사들보다 사람들이 좋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송부의 두 선임하사분과 수송관님도 군수과에서 배차하고 유류, 각종 잡종유 보급해주므로 자주 접촉했는데 일반선임하사님들보다 사람들이 좋으신 것은 확실합니다. 1호차가 제일 광도 잘나고 차가 깨끗하고 운전병도 꽤 영리한 사병을 배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대장운전병도 연대에서 배치하는데 일병운전병을 무시하는 어느 대대장이 있었는데 운전병이 화가 나서 강가에 바짝 차를 몰고 가니 사색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 2012.09.05. 10:4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에서는 가설병이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이 드는 편이었지요. 전우님 말씀대로 전봇대에 오르내리는 연습을 가끔씩 하였지요. 저도 막 전입되어 한 달 못되게 빨리 입대한 가설병(준동기라고 여김)을 따라 한 번 시도해 보았는데 도저히 올라갈 수 가 없었습니다. 가설병들은 대대와의 유선연결을 위해 가끔씩 삐삐선을 감은 무거운 통을 둘러메고 다녔지요. 하지만 가설병은 부대외부 출입이 자유로웠습니다. 통신대뿐만 아니라 수송부의 선임하사도 저와 업무적으로 관련은 없었으나 마음씨가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에도 전우님 말씀대로 1호차 운전병은 우수한 사병을 배치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대대장 운전병 일화도 있었군요.
┗ 2012.09.05. 11:44 □ 통신대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설병과 무전병은 전시에 각각 삐삐통과 무전기를 매야 하므로 개인화기는 무거운 M1 소총 대신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캘빈소총이 지급되었지요. 그러나 행정반과 교환대 근무자와 암호병 등은 M1소총이 지급되었죠. 그러나 1974년 중반에 모두 캘빈소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1974년 1월까지 보초를 섰는데(그 후는 땀세 인사계가 각 서무계는 보초에서 제외시킴에 따라 보초를 서지 않음) 1973년 말경의 겨울철에 보초를 서고 난 후에 M1소총을 손질하지 않아 내무반의 따뜻한 온기 때문에 총구에 녹이 약간 슬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땀세 인사계에게 걸려 3∼4명이 호되게 기합을 받았습니다.
┗ 2012.10.02. 12:56 □ 제가 초임병 때에 제3대대(?)와의 유선통신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고참 가설병 한 분이 중계를 위하여 정확한 위치는 모르나 삼팔교 북쪽의 높은 산으로 장기 파견을 나갔습니다. 제가 통신대 전입 전부터 그 분의 전역 시까지 그곳에서 거주했으며, 부대에는 부식 등을 수령하러 한 달에 1∼2회 꼴로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개를 기르는 등으로 돈을 조금 모았다는 이야기도 다른 분에게 들었습니다. 1975년 초여름에는 연대 뒷산 뒤쪽의 꼭대기로도 유선중계를 위해 1개월 못되게 빠른 준동기가 1주 이상 파견(텐트를 치고 거주)을 간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후 늦게 파견근무위문 차원에서 소주를 사들고 그곳에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파견자와 같이 소주를 마시고 저는 한밤중에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귀대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후임병 애기가 제 노래 소리가 부대까지 들렸다고 하더군요.
□ 2012.09.05. 10:40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도 몇 번 포천 쪽이나 철원 쪽을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안 전우님이 알려주신 코스대로 시간을 내서 다시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몇 년 전 언젠가 집사람과 운천(?) 부근을 지나가다 보니 우리 연대 후배들로 보이는 병력이 도로 양옆으로 열을 지어 행군하는 것을 보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늠름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에 업무차 원주에 갔다 고속버스로 오는데 원주∼양평 중간에서 우리 오뚝이부대 마크를 단 탱크들이 지방도로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일부 병사는 도로에서 교통통제). 아마도 기동훈련으로 생각되는데 오뚝이 마크를 보니 늠름하고 반가웠습니다.
□ 2012.09.04. 10:16 (eagles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eagles 전우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현역 당시에 일기를 쓴 것은 아니지만, 연대통신대 업무일지를 매일 쓴 것이 그 당시를 기억하는데 약간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 통신대의 일일업무를 상세히 기록하려고 노력하였지요. 하지만, 오래 되어 그 당시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업무일지에는 일일통신현황, 통신행정, 보급, 주요 유무선 통신 활동 등을 기록하였지요. 통신대의 다른 문서들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폐기하였는데, 이 업무일지만은 매년 육군본부의 '중앙문서관리단(중문단)'으로 이관하였습니다.
□ 2012.09.10. 15:59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통신대는 유격훈련을 안 다녔는지 모르는데 저희는 제3대대 앞 산정호수 들어가는 길 앞에 텐트치고 유격훈련을 받았습니다. 유격훈련 받을 때 피티 체조 끝나고 밖으로 나와서 개천으로 들어 갈 때 옆으로 관광객들 차가 지나가는데 코가 찡끝해지더군요. 훈련 중에 의무대 있던 사병이 뱀을 잡아와서 껍질을 벗긴 후 구워서 먹으라는데 정말 못 먹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평창식물원근 처의 낭유리 언덕으로 차량이 넘어오다가 사고가 났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연대차량은 아니고 다른 부대 차량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2012.09.10. 21:1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도 매년 유격훈련을 받았습니다. 다만, 저는 죄송하게도 훈련소에서만 간이유격훈련을 받았고 자대 배치 후는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교3학년 때에 신장염을 앓다가 완치되었으나 초임병인 1973년에도 현리병원에 가끔씩 진단 받으러 갔는데 선임하사가 작전과(유격훈련 담당?)에 부탁하여 유격훈련에서 제외되었고 1974년(?)에는 조 편성을 3개 조(?)로 편성하였는데 유격훈련 일정이 조금씩 지연되는 바람에 마지막 조는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1975년에도 무슨 사유가 있어서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격훈련 무용담(?)이 없습니다. 다만, 전우들이 유격훈련 휴식 시에 윗몸을 벌거벗고 담배피우는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 2012.09.10. 21:42 □ 유격훈련은 교육을 담당하는 작전과원들도 일단은 유격훈련장까지 형식적으로 갔다 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전투병과중대는 년2회, 기술행정(기행)중대는 년1회씩 받았습니다. 통신대도 일과시간이나 휴일에 전우들이 가끔씩 뱀을 잡은 적이 있었지요. 일부의 전우는 구워 먹기도 하였으나 저는 비위가 약하여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통신대 전우들이 뱀을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배를 칼로 째었더니 기생충이 뱃속에서 바글바글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다른 전우들도 뱀을 잡아 구워먹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 2012.09.27. 23:01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사단 유격훈련장을 저는 가보지 못 하였지만 전우들에게 산정호수 근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격훈련 받을 때에 산정호수로 관광버스가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묘한 감정이 들더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1973∼1975년의 유격훈련을 매년 산정호수 근처의 사단유격장에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고(군단유격장 등에서도 받음) 기억됩니다. 전우들이 유격훈련을 받고 오면 화제는 당연히 유격훈련 이야기이었지요.
┗ 2012.09.12. 22:16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지난 답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저는 서무계라 1974년 초까지만 보초를 섰는데 주간보초를 휴일에 암호실에서 가끔 서보았습니다. 야간보초는 1974년 초까지 주로 교회 옆의 망루 부근의 초소(?)에서 섰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통신대는 암호실과 망루 옆에서만 보초를 선 것 같습니다. 보초는 초번이 가장 좋고 말번이 그 다음으로 좋지요. 통신대 보초명단은 상기 2개소에 대해 통신대서무계가 작성하여 본부대서무계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제 사수가 보초명단을 작성할 때는 일정한 룰도 없이 임의대로 작성하였으나 제가 작성할 때는 초번, 말번 등을 감안하여 편중되지 않도록 제 나름대로 룰을 만들어 공평한 순번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 2012.09.26. 12:29 □ 그랬더니 공평하게는 되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순번을 조정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중고참들이 불평을 하더군요. 나름대로 공평하게 편성하였는데도 약간만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통신대에서는 저보다 1∼2개월 늦은 후임병이 야간에 암호실 보초를 서다가 졸았는데 주번사관이 총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 전우는 정문 옆 감방에 2∼3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초를 설 때는 전투지원중대 주번사관과 주번하사가 순찰을 가끔씩 돌았었습니다.
┗ 2012.09.14. 20:03 □ 교회 옆 망루에는 올라가 보았으나 보초는 그 옆의 돌담에서 섰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부대 앞으로 보이는 산이 관음봉이었군요. 저는 그 때 산의 이름을 잘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앞산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였지 관심이 있게 보지 않아 인천의 월미도를 떠올리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고향은 지방이지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므로(부천군 소사읍 심곡8리와 소사3리, 2리에서도 거주) 고등학교 때에 자유공원에 가서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는 등 군 입대 전까지 몇 번 갔었습니다.
□ 2012.09.10. 16:05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그 당시는 비포장에 상당한 고바위로서 힘없고 낡은 트럭이나 쓰리쿼터는 아마도 뒤로 밀리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차들이 많이 낡고 정비를 항상 하지 않으면 사고 나기 십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통신대차량에 기름을 주유한 기억이 없는데 사단에서 주유한것인가요? 통신대는 워낙 따로 자고 따로 생활하여서 같은 연대있더라도 다른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 2012.09.10. 21:26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용 쓰리쿼터는 호로를 씌우고 통신대에 2대가 항상 주차되어 있었으나 운전병은 거의 대부분 수송부에만 있었고 차량에는 잘 오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2개월 정도 빠른 운전병이 이 중 한 차량의 담당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자주 왔으므로 그 전우의 얼굴이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르나 나머지 전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주유를 어떻게 하였는지 확실하게는 모르나, 아마도 횟수는 극히 적었겠지만, 연대차량이니 안 전우님께 주유하지 않았을까요? 통신대에는 사단통신대대에서 마이크로웨이브 차량(대형 박스 카)과 2∼3명의 병력이 파견을 나와 있었습니다(연대 상주). 전우님이 이 차량을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2.09.10. 21:49 □ 2월말이나 3월초쯤에는 내무반 빼치카도 때지 않고 행정반 난로도 때지 않으므로 추웠지요. 그래서 추위를 막아주는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남향으로 주차한 차량의 운전석에 들어가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남향의 운전석은 온실효과가 있기 때문에 따뜻하였지요. 그렇습니다. 통신대는 건물이 멀리 따로 떨어져 있고 1873년 말경부터는 내무반조차 따로 썼으므로 다른 처부와 업무적으로 관련이 없으면, 점호 시나 식당에서 마주치거나 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따로 있다 보니(인원도 많은 편이라) 집합(기합)이 많았지요.
┗ 2012.09.19. 21:42 □ 당시는 연대차량의 상태가 보통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나 낡은 차량이므로 기름을 많이 소비하였군요. 저는 다른 부대에 가 본 것이 적은 편이고 수송부와도 업무상 관련이 거의 없으므로 차량 등에 대하여는 잘 몰랐었습니다. 저의 초임병 시절인 1973년에 군단FTX훈련이 있었고, 다른 일로도 가끔씩 트럭으로 이동하였는데(1974년 이후는 거의 없음) 차량에 지장이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차량은 낡았지만 아마도 수송부에서 정비를 잘 했던 모양입니다. 초임병 시절에 수송부 우물로 물을 뜨러 갔을 때 정비고에서 차량을 열심히 정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통신대는 수송부 마당에 있는 우물(상당히 깊음)을 이용하였습니다.
┗ 2012.09.18. 20:22 □ 그 당시는 물이 귀해서 통신대졸병들은 아침저녁으로 본부대내무반과 수송부내무반(의무중대 공동사용)을 거쳐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수송부마당의 우물에서 물을 퍼서 운반하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수송부 정비고는 매일 보았지요. 참모부는 식기를 각자 닦았는지 모르지만 통신대는 식기 닦는 것도 졸병들의 몫이었습니다. 저도 항상 같이 식기를 닦았는데 제 사수에게 서무계가 식기를 닦는다고 욕을 매우 많이 먹었습니다(사수가 서무계는 통신대의 거울이니 식기를 닦지 말라고 하였지만, 저는 졸병으로서 식기 닦는데 동참하였으므로). 전투지원중대와 참모부가 있는 남쪽 외에 통신대, 본부대・내무반, 의무중대・수송부가 있는 북쪽에서는 우물이 수송부 하나뿐이었습니다. 물통(스페아 깡)은 둘이 들었는데 키 작은 전우와 들면 힘이 들고, 키 큰 전우와 들면 힘이 적게 들었지요.
┗ 2012.09.20. 13:0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께서 유류보급에 수고가 많으셨군요. 통신대는 인원이 많아 식기를 졸병 5∼8명 정도가 함께 닦았습니다. 식기를 닦고 나서 잘 헹구지 않으면 자국이 남는데 집합 시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도 더러 나왔지요. 당시에 숫가락과 젓가락은 군용을 안 쓰고 사제를 썼는데 분실되어 가끔씩 숫자가 모자랐으므로 눈치가 있는 졸병은 첫 휴가 후에 귀대하면서 젓가락과 숫가락을 여벌로 사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통신대 식기대는 원래 통신대 쓰리쿼터 주차장 위쪽에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1975년경에 내무반 북쪽 끝 창고 옆(?)옮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각 처부의 식기대도 이곳으로 통합(?)하였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 2012.09.20. 17:28 □ 저는 졸병 때 오전 일과 전에 통신대행정반을 청소하면서 난로 위 물통의 물로 걸레를 빨기 전에 고양이 세수하듯 최대한 빠른 시간에 눈곱만 떼는 정도로 세수하였습니다. 문제는 세탁이었는데 겨울철에는 양말 외의 세탁은 한두 번밖에 하지 않은 걸로 기억됩니다. 저는 1972년 겨울에는 내복을 계속 입었으나 1973년의 겨울에는 취침 시에 내복을 벗고 잤으며(벗고 자면 오히려 더 따뜻함), 1974년 겨울에는 아예 겨울 내내 내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초임병 때 겨울세탁은 휴일에 교회망루 옆 계곡에서 얼음물로 하였는데 손이 너무 시려 대충대충 한 것으로 기억 됩니다. 다행히 고참들이 자기 세탁물을 졸병에게 세탁시키는 일은 없었지요.
□ 2012.09.11. 10:07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통신대 대기 쓰리쿼터는 생각납니다. 유류파동이라 항시대기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 기억이 납니다. 거의 6.25부터 쓰던 미군불하차량으로 휘발유를 많이 소모하는 쓰리쿼터이었지만 다목적으로 이용하기는 좋았지요, 물탱크 싣고서 물 푸러 다닌 시절 기억납니다. 사단에서 온 대형차량 저는 단말기차량이라 불렀지요. 암호병 막사 옆에 주차하고 있었지요. 이 차는 사단소속이라 연대에 유류할당이 안 되어서 주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은 모든 차량에 할당된 유류가 있어서 최대한 절약하고 거의 안 움직이고 m602트럭은 시운전 한 번하는데 휘발유 1 갤론이 들어갑니다.
┗ 20112.09.27. 23:0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용 차량은 전우님 말씀대로 군단 FTX 훈련, 제21전투단훈련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통신대 주차 차량은 무전통신용 차량이었고 그 중 한 대는 CW통신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어 CW병이 거의 상주했습니다. 통신대에는 유선가설용 2-1/2톤 트럭 등도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 차량은 수송부에 주차하면서 관리하였지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통신대대에서 연대에 파견된 전우(하사 포함)들의 얼굴은 기억납니다. 그들은 차량뿐만 아니라 통신대건물의 작은 방에서도 기거하였지요. 쓰리쿼터가 거의 미군 불하이었군요.
□ 2012.09.12.10:45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경유로 다니는 2-1/2 트럭은 구난차와 부식차만 연대에 있고 나머지 큰 트럭들 (m602 -전투치장차량)은 휘발유로 움직이고 전투대비차량이고 연료소모가 많아서 거의 대기시키고 1년에 한번정도 시운전을 합니다. 연대 내에 지원중대 앞에 연료고 바라보던 곳에 있었던 큰 트럭이 이런 트럭입니다. 휘발유 한 드럼이 탱크에 들어가고 항시 만탱크를 유지해야 합니다. 비상시나 전투 시 출동하여야하므로 아마도 수송부인원 많지만 운전거의 안하고 제대한 병이 많을 것입니다. 이 차량도 미군불하차량인데 신형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차량이 교체되고 한국차량으로 운행될 것입니다. 이 큰 트럭아래를 여름에 들어가 있으면 시원했습니다.
┗ 2012.09.17. 20:14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배치 차량의 종류와 숫자는 매달 사단에 보고하는 통신 병력과 통신장비현황보고에 포함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통신대에 상시 주차되어 있는 3/4톤 차량 밑에서 딱 한 번 자 보았습니다. 저의 전역환송회에서 술을 많이 마셨는데 환송회가 끝나고 나서도 후임들이 술을 더 마시자고 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혼자 몰래 차 밑에서 잤는데 시원하더군요. 저는 통일화를 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양말이 말목에서 내려와 발바닥에 뭉치므로 수시로 양말을 말목으로 끌어 올리느라 불편하였습니다. 아마도 양말의 고무줄이 좋지 않거나 통일화가 나쁘거나 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양말도 통일화도 빨리 헤지는 편이었지요.
┗ 2012.09.12. 23:17 □ 한창 젊은 나이에 건빵은 없어서 못 먹었지요. 훈련소에서부터 느낀 것인데 농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온 전우들은 더 배고파하는 것 같았습니다. 통신대는 1974년 중반까지 야간에 집합이 많았습니다. 특히 1973년 초반에는 살벌하였지요. 그래서 자유시간은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통신대는 야간집합을 통신대에서 상대적으로 공간이 가장 큰 가설반에서 하였습니다. 제가 초임병 시절이기도 하지만 73년 초반은 집합하는 횟수가 많았는데 1974년에는 1973년보다는 많이 줄고 75년에는 대폭 줄어 거의 없었지요. 제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제가 군 복무하는 동안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고참들의 기합이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 2012.09.12. 12:16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피엑스의 막걸리가 이동막걸리인 것 같은데 워낙 물을 많이 타고 양을 늘리다보니 막걸리의 진정한 맛은 알 수 없었습니다. 파는 물건들도 별로 없었지요. 제가 제대할 즈음에 맥주가 군대에도 들어와서 피엑스 병의 호의로 좀 사다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대 후 이동막걸리가 팩으로도 나오고 이동막걸리 명성이 자자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백운계곡, 백운산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힘든 군대 생활한 셈들이지만 그때 고생한경험이 사회에서 까다로운 상사들 아래서 직장생활시 인내하고 견디어낼 수 있는 원천이 되고, 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가져다주었기에 길은 3년 복무이었지만 나름대로 배운 것도 있고 고생을 해본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 2012.09.13. 21:47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예, 저도 기억납니다. 75년에 맥주가 군용으로도 보급되고 그 값도 막걸리나 소주 값과 거의 비슷하였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일부 선임병의 전역환송회 때에 맥주를 마신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군대나 사회나 막걸리에 물을 탔었지요. 제 기억으로 PX 막걸리는 일주일에 한 번 사단의 보급차량이 배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며칠 못 가서 동이 났었지요. 초임병 때는 고참들이 졸병에게 막걸리를 작은 수통 컵에다 한 잔씩 주었는데 매우 작은 양이지만 그것으로도 감지덕지하였지요. 통신대의 선임하사나 장교들은 모두 다 좋은 분들이었지만 통신대 인원이 많다 보니 고참 중의 일부가 성질이 까다롭고 독한 면이 있었습니다.
┗ 2012.09.13. 21:46 □ 저는 초임병 때에 군대가 체질에 맞지 않고 게다가 통신대는 살벌한 야간집합이 많은 편이었으므로 정신적으로 힘든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용어로 짬밥수가 늘어가니 조금씩 차차 적응도 되고 또한 야간집합횟수도 조금씩 줄어들면서 살벌하였던 통신대 분위기도 조금씩 낳아졌습니다. 그래서 군대의 군기도 강약의 사이클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현역시에 백운산이란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지만(?) 제대 후 대략 20년 후에 3사 장교 출신 직장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백운계곡에 가봤는데 좋더군요. 1973년(?)에 단체(연대트럭으로 이동)로 이동읍내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연병장에서도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 2012.09.14. 09:5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이동읍내로 영화 보러 간 것이 아마도73년 때인 것 같습니다. 연병장에서 영화본 것도 기억납니다. 그때 서울의 3류 쇼걸들이 위문공연이라고 와서 야한 춤을 춘 것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공연계 등에 의무적으로 위문공연 가야하는 규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간집합이 73년 74년도는 많다가 유신군대라고 하면서 강압적인 분위기가 낳아지고 전에 병력자원보다 나은 사람들이 들어옴으로써 순화된 것도 영향 미친 것 같습니다. 서 선배님의 이야기처럼 저는 선임들에게 구타를 많이 받았지만, 후임들에게는 구타안하였고 구타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제 생각 속에서는 없었습니다. 우연히 구타 많이 한 선임 나이도 같은데 몇 개월 빠르다고 괴롭히기 많이 한 부산출신선임에게 몇 년 전 이제천 중위님 부탁으로 전화통화하니 깜짝 놀라면서 그때의 심한구타는 군대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더군요. 생각이 짧은 것이지요. 위치가 바꾸어서 조그만 파워가 주어지면 남용하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나중에 생각하여보면 씁쓸한 추억이고 때린 사람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랬다 생각되고 너무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몇 개월 빨리 들어오는 사람들이 텃새를 부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것이 쌓여서 최근에도 군대 등에서 사고가 나는 것 같습니다.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사고방식이지요. 군대나 사회나 또 같이 사람들 모여 사는 조직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 2012.09.20. 13:0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는 연병장에서 본 영화는 김창숙 등 배우와 줄거리가 대강 기억나는데 이동의 극장에서 본 영화는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연대에서 쇼를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고, 1975년 봄에 사단에 가서 본 것은 기억납니다(행군으로 왕복. 사단의 다른 부대도 참석). 통신대장님께서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정훈희 등 일류가수 등이 출연하는 좋은 쇼이니 꼭 보라고 하셨고, 또한 그 때는 제가 통신대에서 고참에 속하는 편이고 대부분의 업무를 조수가 보고 있어 시간도 나서 일부러 보러 갔으나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지 쇼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많이 동원하도록 간부들에게 지시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2012.09.14. 20:13 □ 아마도 연대본부에서는 수송부 다음으로 통신대가 군기가 세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통신대에 전입된 직후에 교환실에서 5∼6명(?)의 중고참들(상병)에게 호된 신고식을 하였습니다. 연대에 전입되어 대기하면서 군수과(이정문 상병)와 작전과를 들락날락 오락가락하였다는 구실로 고참들이 밉게 보았던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온갖 트집을 잡으며 구타를 하였지요. 약간 과장되게 말하여 아마도 제가 통신대 사상(?) 가장 호된 신고식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신고식 때는 정신없이 맞느라 이것이 군대라는 생각밖에 없었으나 며칠 후에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짬밥수가 늘어나며 잊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약인 셈이었지요.
┗ 2012.09.15. 07:23 □ 통신대가 군기가 세다고 하였는데, 제가 초임병 때 중고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졸병일 때는 훨씬 더 기합이 세었고, 자주 받았다고 하더군요.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기합의 강도는 아마도 더 세었던 것 같기는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월남파견 병력을 차출하였던 시기였으므로 아마 그것도 군기와 관련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합니다. 저는 졸병단계를 막 벗어나려고 할 때에 고참들이 신병을 신고를 시키라고 하여 신고는 시킨 적이 있지만 말로만 하고 폭력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 2012.09.21.13:29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제가 초임병일 때(1973년)의 이야기입니다. 저보다 15개월가량 빠른 가설병 고참이 저에게 행정반 서류함(시건장치함)에다 자기의 현금을 보관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원칙은 안 되는 일이지만 고참이라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간 보관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또 다른 가설병 고참(위의 고참과 비슷한 동기로 이들은 각기 영・호남 출신이며 서로 알력이 약간 있었음)이 저에게 그 돈 일부를 빌려달라고 하여 애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행정반에다 돈을 보관할 수도 없고 보관도 하지 않는다고 잡아떼면서 빌려주지 않기는 하였지만, 그 고참에게 무척 시달렸습니다(다만, 폭력은 쓰지 않음).
┗ 2012.09.21.18:09 □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상기의 가설병 고참들과 입대시기가 비슷한 가설병 고참 중에는 고향의 애인에게서 주기적으로 편지를 받는 고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전입 전부터 이 사실을 안 상기의 고참들이 편지를 전해주기 전(당시에 개인편지는 제가 인사과 문서취급병에게 수령하여 개인에게 전달)에 통신대 행정반에서 미리 개봉하여 읽어보고 다시 봉해서(원상복구) 전해 준 적이 가끔씩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참들이 편지를 읽어보고 다시 밀봉하는 과정에서 잘못하여 원상복구가 안 되었는데 그대로 전해주면 그 고참이 편지를 다른 고참들이 읽어 본다는 것이 들통이 나므로 편지를 폐기하고 전해주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참에게 편지를 전해 주지 않는다고 시달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향애인이 편지를 보낼 때에 일련번호를 매기므로 중간에 편지가 전달되지 않으면,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고참에게는 편지를 모두 전해 주었다고 시치미를 떼었지만, 지금까지도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그 고참의 동기들이 남의 편지를 중간에 개봉하여 읽어 보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지만, 편지를 전하지 못 한 것은 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고참들이 남의 편지를 전달하기 전에 몰래 읽어 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OOO 고참님 죄송합니다.
┗ 2012.09.21. 14:57 (제 댓글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서 선배님이 편지 건으로 고충을 받으셨군요. 통신대가 따로 있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군요. 인사과도 따로 사무실 쓰는데 등사실에서 퍽퍽 소리 나는 것을 군수참모 방이 바로 붙어서 들었습니다. 인사과도 군기가 세고 자존심이 제일 강해서 아마도 전체집합구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사무실을 병기과와 같이 쓰고, 작전정보도 같이 써서 우편물 개봉 같은 일은 없고 아마도 애인편지가 오는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돈관계도 보관하거나 그런 일도 없고 서무계만 내근이고 다들 바깥으로 많이 다니는 편이라 다른 참모부와는 좀 다른 형태의 근무이었습니다. 일과시간 중 1종은 부식보급 나가고 , 2.4종은 2.4종 창고에 가 있고 3종 유류계는 유류창고에 있었고 일과 끝나기 전에 모여들어서 시끌시끌해졌죠. 통신대는 아마도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수송통신도 군기가 센 편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저도 애인 없이 군 입대하고 여동생과 여동생친구가 두 번인가 놀러오고 어머님이 한번인가오고 면회는 3년 근무 중 3번온 기억만 납니다. 면회가 자주 오는 사람은 자주 외출외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박 나가면 일동읍내 가는 것이라 별 재미없는 것 같고 편하다고 매일이야기 하니 어머님이나 가족들은 그런 줄 알았다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감내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 속이 편하지 남에게 자신 있는 곳 불평불만 한다고 나아지지 않고 자신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 2012.09.21. 23:4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고참들 중에서 가설병들이 상대적으로 드센 편이었지요(고참님들 죄송합니다). 통신대는 남쪽으로 행정반(대장, 보좌관, 선임하사, 서무계, 기재계 등의 공동 사무실 및 기재창고)과 그 옆에 크기가 비슷한 교환실(교환대와 5∼6명 취침가능한 방), 중간에는 각기 작은 TT실, 사단파견자 방, 정비실, 무전실(가설반을 거침)이 있었고, 북쪽으로 통신대에서 가장 큰 편인 가설반이 있었습니다. 바쁜 업무수행 중에는 서로 만나는 일이 약간 적은 편이었으나(가설병은 부대 밖, 무전병도 통신대를 벗어나는 일이 많았음) 한가한 시간이면 모여서 잡담했지요. 암호실은 별도의 작은 건물로서 건물 둘레의 철조망 안에서 24시간 보초를 섰고 암호병은 그 안에서 거주했습니다.
┗ 2012.09.21. 23:44 □ 상기의 편지 건은 일과 후의 일로서 편지가 올 때를 안 고참들이 일과시간에 제게 강압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게 하고 행정반이 비는 야간에 본 것이지요. 따라서 고참들이 편지를 보는 경우(서너 번으로 기억됨)에는 하루 늦게 전달되게 되었지요(2주에 한 번 꼴로 편지가 온 것으로 기억됨). 저는 군복무시 형님이 두 번 면회 왔는데 졸병 때에 군 복무 중인 형(4살 차이지만 군대를 늦게 가서 저보다 1년 7개월 전에 입대하여 서울소재 보안대에 근무)이 스스로 면회를 왔었고 제가 고참이 되어 술도 조금 마시다보니 군대월급으로는 조금 부족하여 제대한 형에게 면회를 부탁해서 왔었습니다. 통신대에는 애인이 있는 전우가 적지만 더러 있었습니다.
┗ 2012.09.24. 13:27 □ 인사과 군기는 잊고 있었는데 비교적 세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인사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문서취급소가 있고 오른쪽 책상열 끝에 서무계가 있었죠. 통신대는 일과시간에는 집합이 없었고 야간에 가설반에서 집합하였습니다. 당시에 집합은 구타와 동의시되었지요. 통신대는 인원이 많다 보니 신참 때는 무척 힘들지만 이에 반하여 고참으로 될수록 어려움이 줄어들었지요. 교환병은 24시간 교대근무(교환병은 내무반생활을 안 하고 교환실에서 취침)하였는데 점호 시의 근무자는 점호가 열외였지요. 저는 교환병은 아니지만 고참이 되어서는 점호시간에 교환대에 근무하고 잠도 교환실에서 주로 잤습니다. 일과 후에는 교환 량이 적었으므로 교환업무가 쉬운 편이었습니다.
┗ 2012.09.24. 21:28 □ 당시는 통신기기상태가 좋지 않았었지요. 1973년에는 교환병이 상대방에게 전화를 빨리 연결해주지 않는다고 작전과 교육장교가 씩씩거리며 교환대로 올라와서 교환대 근무자에게 조인트를 깐 적도 있었습니다. 또 1974년 초반(?) 무렵에 어느 연대 RCT훈련 전에 예하대대의 무전기가 부족하다고 통신대장이 친구 간인 우리 연대 모 대대통신대장에게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알게된 통신대기재계가 통신대보좌관에게 보고하여 보좌관이 그 통신대장을 호출하여 항의하면서 제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 2012.09.24. 13:59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통신보안이 그때는 상당히 엄했던 것 같습니다. 감청을 통해서 말 잘못하다가 문책을 받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육군회보에도 통신보안위반사례가 올라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사과가 힘이 센 것은 경리, 자금 .인사 등 제반 살림살이를 도맡아하고, 진급 등에도 영향이 있고, 간부들 부식비 등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일중요한곳이 작전정보과인데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없어서 참모부중 춥고 배고프다(약간 설명이 어울리지 않지만)는 말이 있었지만 장교들은 진급에 영향 있는 부서이었지요. 군수과는 먹고 입고 때우는 등에서 다른 쪽보다 풍부한 면이 있었고, 통신대도 넉넉하지 않지만 따로 있어서 점호열외도 되고 막사를 따로 쓰는 장점도 많았을 겁니다.
┗ 2012.09.28. 16:53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보다 몇 달 빠른 선임병이 통신대에서 영등포에 있는 부대로 전출을 갔는데 그 부대에서 통신대의 옛 전우들이 생각나서 우리 부대로 전화하여 교환병과 통화하였으나 나중에 통신보안에 걸려 영창에 갔다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통신대는 선・후임병이 타 부대로 전출되거나 병원으로 후송되는 전우가 더러 있었습니다(사단통신대대와의 전출・입은 각 1명). 저는 군대서 "춥고 배고프다"는 말을 연대에 전입하여 대기하였을 때에 군수과 이정문 상병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당시는 자기 사수(우 병장)가 제대말년이라 조수를 받으려고 하던 무렵인데, 군수과는 "춥거나 배고프지가 않다"는 말을 하더군요.
┗ 2012.09.24. 21:09 □ 저는 타 부대의 대원과 통화한 것은 연대에 전입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서울의 보안대에서 근무하던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이며 그 후에 중고참 이후에 제1기갑여단 제105기갑보병대대 통신과에 근무하는 친구(중학교동기로 향토사단 훈련동기)와 몇 번 통화했습니다. 당시에 보병연대・대대는 통신대라고 불렀으나 기갑부대 등에서는 통신과라고 하더군요. 저는 향토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제101보충대대를 거쳐 사단에 전입된 훈련소 동기는 단 둘이었는데 그 전우는 제16연대로 배치되어 우리 연대는 저 혼자만 배치되었습니다. 연대에 보안학교출신 등 대략 20∼30명이 함께 전입되었으나 본부대는 저 혼자만 배치되어 동기가 없어 외로웠습니다.
┗ 2012.09.25. 08:44 □ 제가 본부대에 전입되니 작전과에는 성함이 신준호라고 기억되는 체격이 좋은 왕고참이 있었습니다. 작전장교는 1∼2년마다 자주 바뀌어서 그런지, 아니면 능력부족인지는 모르나 연대작전에 대하여 잘 모르고 연대작전은 그 분이 가장 정통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3년간 작전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연대에서 작전의 1인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분이 '후임병들을 집합시켜 기합을 주겠다'는 말을 'CPX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나중에 통용되었지요(그 전부터 사용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작전과는 야근을 많이 하므로 점호에서 열외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20112.09.25. 13:15 □ 통신대가 별도건물과 내무반을 이용하므로 일장일단이 있었던 셈이지요. 저는 단체기합을 많이 받고 바빴던 1973년이 1974년과 1975년의 1년 8개월보다 더 많은 추억이 기억납니다. 1973년에는 상대적으로 비상이 자주 걸려 군장을 꾸려 연병장에 집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통신대에 전입되고 얼마 안 되어 비상훈련이 있어 처음으로 군장을 꾸렸는데 서무계 조수라 내무반에서 제 것 말고도 행정반에서 통신대장, 보좌관, 선임하사(2), 4인분을 더 꾸려야 하므로 군장꾸리는 것도 서툰데다가 마음만 바빠서 허술하게 꾸리게 되어 다른 고참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저는 훈련소나 자대에서 군장 꾸리는 요령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 2012.09.25. 13:14 □ 그런데, 며칠 후에 사단에서 파견을 나온 단말기근무자(하사)가 군장을 꾸리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하사는 내복을 각이 지게 한 번 접어 둘둘 말면서 압착하여 배낭에 집어넣더군요. 군장꾸리는 것 때문에 곤혹을 당한 경험이 있는 저도 그렇게 한 번 해 보았더니 시간도 훨씬 적게 걸리면서 배낭에 잘 들어가고 배낭의 외모도 좋게 되던군요. 그래서 이후에 배낭꾸리는 것을 제일 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후임병들에게도 알려 주었고, 제대를 하고나서 등산갈 때도 써먹었지요,
┗ 2012.09.25. 17:1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대령은 연대장급인데 우리 같으면 하늘처럼 보았겠지요. 저는 대령과 악수한 것은 사단에서 가서 부사단장님께 전역을 위한 전출신고 시에 악수한 것이 유일합니다. 연대장님과는 악수해 본 적이 전혀 없었고, 얼굴도 이・취임식 때나 아주 드물게 연병장에 집합하여 훈시(?)하시거나 찦차로 이동하실 때에 뵌 기억밖에 없습니다. 이・취임식조차도 하지 않은 연대장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만큼 사병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지요. 다만, 부연대장님은 저의 초임병 시절에 사역 작업의 지휘를 자주 하셨습니다.
┗ 2012.09.25. 17:32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미군은 제도가 다르고 제 아들이 미2사단 치과병원중대 카추샤 근무하였는데 병원중대장이 대령의사이니 좀 다르겠지만 옛날 AFKN TV를 보면 항시 equal right 주장하고 계급에 우리처럼 연대장이 하늘과 같이 여기는 사이가 아니고 상사로서 직제상 상관이고 훈련이나 업무시 상관으로 깎듯하고 일과 후는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게 우리군대와 다른 것 같습니다. 군수과요원인데 군수참모소령과 따뜻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을 직접 보기 힘들고 제대할 적 신고 시 보는 것이지요. 한번은 연료고에 연대장님이 부연대장님과 방문하신다 해서 연료고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다 오셔서 경례하니 부연대장에게 누구냐 하니 연료계라고 하더군요.
┗ 2012.09.25. 17:01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그렇게 연료파동에 중요한 연료계가 일을 실제하는 것을 모르는 연대장이지요. 반면에 부연대장님이 사병들에게 연대장들의 부족한 점을 카버하고 사병측면에서서 입장반영도하고 따뜻하게 대하신 인간미 넘치는 중령이라 생각됩니다. 연료계라 특별히 필요해서 더 친절했다고 생각했지만 서 선배님 이야기 들으니 다른 사병에게도 따뜻하게 대하고 부대내 일이나 사역에 몸소 실천하면서 그냥 제대할 때까지 시간 때우는 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면이 대령이나 더 진급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할 수 있지요. 하여간 인사계,본부대장, 다른 선임하사들보다 우리를 진정으로 잘 생각하신 분이라는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 2012.09.26. 08:2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의 아드님이 좋은 부대에 근무하였군요. 제 큰아들은 남태령의 수도방위사령부 화학대에서 복무(2000년 입대)하였는데 그 때도 빠따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연대장님을 제대로 뵌 것은 연병장 훈화 시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3년 내내 한 번인가 두 번인가 밖에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군수과 전우님들께 죄송하고 제가 우물(통신대) 안 개구리인 격이지만, 저도 군수과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군수과사무실에서 문서 처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줄로 알았습니다. 잘 따져보니 이제 상황이 파악되네요. 제가 초임병 때 난로용 연료 수령 시에 연료계가 노천에 있는 드럼통에서 간이펌프로 석유통에 옮겨 담았으며, 저는 연료고 안에 들어 가 본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 2012.09.26. 22:03 □ 제가 초임병 때인 1973년(통신대가 참모부와 같은 내무반을 사용)에는 내무사열이 1974년 이후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생각되며, 내무사열은 실제 사열 시보다 준비과정이 훨씬 힘들었다고 생각됩니다(특히 졸병들이). 1973년에는 부연대장님께서 몇 차례 직접 내무사열을 하셨습니다. 초임병 시절이라 내무사열하시는 부연대장님이 무척 무서웠었지요. 1974년(1975년?) 내무사열 시에는 행정반까지 내무사열을 한 적도 있었지요. 그때 군수주임(인사주임?)이 새 옷을 입고 있다고 시비(?)하더군요.
┗ 2012.09.28. 13:06 □ 연대장님께서 부연대장님과 함께 연료고를 직접 방문하신 것을 보면 (연료파동 이후에 부대기동훈련도 제대로 못 하였으므로) 아마도 연료자체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아신 것 같으나 (제가 과문하여서 그런지는 모르나, 연대장님이 연대본부의 특정처부나 특정장소를 방문하였다는 이야기를 3년 동안 듣지 못하였습니다) 연료고를 방문하시면서도 연료취급 등 각 처부업무분담과 역할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네요. 그 만큼 부하들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안 전우님께서 연대의 원활한 연료보급에 크게 기여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 2012.09.27. 13:06 □ 저의 경우는 사실 본부대장님도 그다지 뵌 적이 없었고 4분의 본부대장님 중의 어떤 분은 뵌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다만, 최상렬 본부대장님은 털털하고 사병들과 거리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최 본부대장님이 일직사령을 하시던 어느 날 초저녁에 연병장에 보초근무자와 각 중대 주번하사(?)들을 모아놓고 군대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배식 이야기 나왔는데 전투지원중대 하사가 아직도 군대는 배고프다고 대답하더군요. 1973년 초 눈이 약간 왔을 때에 전투지원중대장님 인솔로 부대주변 산을 거쳐 행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전투지원중대장님은 군인다우시고 인품이 좋아 보였습니다.
┗ 2012.10.05 08:59 □ 제 사수가 1974년 1월에 제대할 때에 제대기념으로 통신대원 전원(통신대장, 보좌관, 선임하사 포함)이 통신대 뒤쪽 교회 앞의 비탈진 언덕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인근의 보안대원이 이것을 보고 통신보안을 위반했다고 사진병의 조인트를 까더군요. 통신대를 식별할 수 있는 배경이나 통신기기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 아마도 단지 보안대 티를 내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휴일이면 인근의 대대에서 소대병력 정도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통신대 앞길을 통해 연대교회로 올라가던 모습이 선하네요. 저는 말년(한여름)에 점심을 먹고 나서 졸음을 못 참으면 교회건물 밖 그늘진 곳으로 가서 존 적도 있습니다.
□ 2012.09.24. 14:10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내무반에 인사, 군수, 작전, 정보, 본부중대원등 여럿이 같은 내무반에 있다 보니 서로 물건도 왔다 갔다 하고 시끄럽고 단촐한 맛도 안나고 자기 과에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로 군대생활을 하다보니 지원중대등보면 중대・소대원은 합동심이 부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통신대는 이런 면에서 서로가 협동하는 힘이 강한 것이 장점이었을 수 있습니다. 같이 근무하면서도 통신대 소식이 옆 막사인데도 워낙 보안이 잘되어서 본부대참모요원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 2012.09.24. 21:3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가 남쪽 내무반을 참모부와 같이 쓸 때(1973말까지?)는 처부 간 물건이동이 심하였지요. 1973년 중반까지는 비상시 즉시 출동이 가능하도록 피복 등을 관물대에 정열하지 않고 더블백에 넣은 채로 더블백 바닥이 앞으로 보이도록 정열을 하였는데 저의 경우에 더블백에 넣어둔 양말 등을 여러 번 분실하였습니다. 당시 양말(흰색)은 질이 나빠 일주일도 안 되어 구멍이 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사제 양말을 사면 귀신같이 없어지더군요. 오히려 피복 등을 관물대에 정열하고부터는 분실이 크게 줄어들었고, 내무반을 통신대만 따로 쓰고부터는 처부간의 물건이동이나 개인소지품 분실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 2012.09.25. 13:14 □ 관물을 꺼내어 관물대에 정렬하지 않고 관물을 더블빽에 넣은 채로 더블빽만 관물대에 정렬한 것을 연대에 전입되어 처음 보고는 우리 사단이 전방부대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철책선 부대는 아니지만). 더블빽에는 계급과 성명을 부착하였고, 관물 정리할 필요가 없었지만, 오히려 상기처럼 물건은 더 잘 분실되었습니다. 연대본부는 처부중심의 생활이라 자기 처부의 고참은 무서워하였으나 다른 처부의 고참은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았었지요. 1973년에 본부대의 사역집합이 잘 안 되니까, 땀세 인사계가 꼭 식사시간 직전에 자주 집합시켰던 것이 기억납니다.
┗ 2012.09.28. 13:09 □ 통신대 정비병은 대대를 포함하여 연대의 모든 통신기기를 수리하였으므로 전자통신장비를 잘 알았지요(입대 전에 사회에서 전자제품수리). 그래서 1975년에 정비병이 앰프부품을 사다가 조립하여(레코드를 포함한 구입비는 대원들이 거출) 플레이어는 교환실에, 스피커는 내무반에 설치하여 반년 가량 매일 취침시간에 내무반에서 3∼4명의 희망 곡을 받아 교환반에 전화하면 교환병이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비록 흑백일지라도 TV가 대세였으므로 저도 제대하면서 제대기념으로 TV 구입비로 거금(?)을 찬조하였습니다. (제가 제대할 무렵에 참모부내무반에는 부대의 TV가 있었으나 통신대내무반에는 없었음)
┗ 2012.10.2. 22:45 □ 어제는 국군의 날이었지요. 1974년(?)의 국군의 날 행사 참가병력 차출이 있어 통신대에서는 저보다 몇 개월 빠른 선임병이 자진하여 차출된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저의 복무 시에 그 행사차출은 그 분이 유일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본부대의 다른 처부는 잘 모르지만 아마 없었겠지요). 무전병으로 키가 컸는데(아마도 차출조건?) 대략 2개월간의 행사연습에서 식사 하나는 잘 하고 왔다고 하더군요. 귀대 후에 수고했다고 휴가를 보내 준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전 행사의 라디오 중계방송에서 "늠름한 오뚝이 제8사단"이란 멘트가 나온 적이 있다고 다른 고참이 말하던군요. 시시껄렁한 얘기일지도 모르나 제가 복무하는 부대라서 관심이 가더군요.
┗ 2012.10.03. 09:57 □ 저는 국군의 날 행사에 제대 후 1980년대 초반에 공무원일 때에 한 번 참석하였습니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서 공무원들을 차출하여 관람객으로 동원하였는데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로 거행했지요. 행사 전에 대통령경호실에서 행사 장병들의 무기를 검색하더군요. 어떤 여자공무원(교사?)들은 애들도 데려왔는데 어린이들은 볼만하겠더군요. 저의 첫 휴가는 입대한지 대략 10개월 후인 1973년 추석 때였는데 귀대하기 하루 전이 10월 1일 국군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군인들에게 대중교통(시내버스)비가 무료였지만 저는 그걸 모르고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탔습니다. 서울 시내버스 안에서 양복을 입은 노신사 한 분이 저에게 "군인들이 나라를 지켜주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다.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시면서 근무 잘 하라고 격려하여 주시더군요.
┗ 2012.10.03. 09:59 □ 저는 제대 후 공무원 시절인 1983년 8월 을지연습 때는 남태령의 벙커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을지훈련 벙커에 중앙부처에서 공무원 2명씩 차출되어 상황실에서 교대 근무하였는데(임무는 특별한 상황에 대하여 자기 처부와의 업무연락이지만, 실제로는 하는 일이 별로 없었음) 상황실까지 들어가는데 세 번 검문을 하더군요. 국가와 군사에 관한 핵심지휘소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벙커 안에서 별들을 워낙 많이 보게 되니까 별 한두 개는 별같이 안보이고 서너 개를 달아야 제대로 된 별과 같이 보이더군요. 공무원은 해군 영관식당에서 식사하였고, 대통령이 방문(근무)한 날은 대통령하사금도 내려주더군요.
┗ 2012.10.03. 10:03 □ 1974년 말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1973년 말에 통신대에서는 송년회식을 비교적 거하게 하였습니다(3년 동안 제일 크게 한 회식). 졸병들이 부산을 떨며 회식준비를 하여(저는 졸병이지만 마침 통신운용지시를 작성하느라 준비과정에는 불참) 즐거운 분위기에서 회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새해 아침에 분위기가 싹 바뀌었습니다. 다들 연말 분위기에 들떠 술도 마셨지만 회식 후에 뒷정리가 일부 잘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인가 야간에 곧장 살벌한 집합이 있었습니다(졸병들은 자나 깨나 조심하여야 하였지요).
┗ 임봉환(16-4-4강습지원/87.3∼89.8) 2012.09.28. 07:48 □ 제가 알고 있는 창설 당시 미래의 군 대체 인력이 부족한 상황을 놓고 시범적으로 운영하였으며 특공연대, 공수를 합작한 부대를 만들려고 했던 취지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 시에 적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적 후방 중요시설물 폭파, 교란, 전쟁 물자 공급을 차단하는 등 그 이상은 군사 기밀이라서…. 각 연대마다 1개의 대대가 강습대로 편성되었으며 강습 지원부대는 각대대의 중화기 중대를 강습지원중대로 명칭을 했으며 저는 로켓소대에서 근무하며 주무기는 KM 202, K1소총이었고 한 소대의 인원이 6∼8명 정도 너무 적었습니다. 공격, 침투 훈련 등 오전만 근무하고 오후는 매일 전투체력을 했고요.
┗ 2012.09.28. 09:01 □ 임 전우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강습부대가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예부대였군요. 황금과 같은 청춘기를 보내며 3년간 복무하였던 부대얘기라서 애착이 가서 질문했는데 이제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다만, 무기이름은 생소). 임 전우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2012.09.24. 14:22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장교식당 옆이 피엑스이고 뒤가 이발소와 다림질실인데 이발병은 고참이라고 이발하러가면 군기 잡는다는 식으로 이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깎아주면서 졸병들을 가지고 장난하다보니 수송부등에서는 자체로 가위와 이발 기구 가지고 머리를 깎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송부에 있던 전우를 제대 후 동생대학졸업식에 나라시 택시를 부리던 택시기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군대있을 적에도 장난 잘하던 스타일이 사회 나와서도 그대로 인 것 같더군요. 유류계이므로 수송부 요원들과는 자주 접하고, 연대 내에 있는 모든 차량의 연료를 관리하다보니 배차계와도 밀접하고 3년 동안 군수과이면서 수송부와는 같이 생활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 2012.09.29. 09:41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는 연대이발소를 이용한 적이 없고, 훈련소시절 대충대충의 이발이 생각납니다. 면도는 세 동작으로 끝이었지요. 세탁실은 무슨 일이 있어 가 보았는데 소령계급장의 군복이 말끔하게 다림질되어 있었습니다. 통신대에서는 저보다 빠른 선임병들이 복장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는데 그들은 통신대 내에서 옷에 풀을 먹여 각이 서도록 다림질을 하여 입었습니다. 안 전우님은 유류계로서 업무적으로 수송부와는 바늘과 실 관계이었겠네요. 그래서 수송관이 군수주임 예하소속이었겠지요? 수송부에는 저보다 한 달 못되게 빠른 전우(통신대가설병과 동기)가 제대할 무렵에 장기근무 지원을 하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 2012.10.02. 13:25 □ 저는 초임병 시절인 1973년에 수송부내무반에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무슨 교육이 있었거나 수요일 경제의 날이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1974년 이후로는 그다지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수송부내무반 건물의 북쪽에는 의무중대가 있었지요. 의무중대는 후임병(전에 얘기한 보초와 관련하여 감방에 갔었던 전우)이 며칠 입원(?)하였을 때에 문병하러 가 봤습니다. 그 무렵에 중위 군의관이 두세 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의무중대 서무계는 암구호 때문에 매일 통신대에 왔었습니다.
┗ 2012.10.02 13:25 □ 1973년 겨울 무렵에 통신대에서는 각 기행중대원 10여 명을 소집하여 몇 주일간 적색과 백색기를 이용한 수신호통신 교육을 한 적이 있습니다(저는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교관은 1년 빠른 무전병?). 그 교육에 의무중대에서는 비교적 키가 작고 통통한 전우(저보다 수 개월 고참)가 참가하였습니다. 그 전우는 그 교육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우가 사회에서 수술 등 의료행위 경험이 있으므로 본부대의 많은 전우들이 이 전우에게 야매로 1974년 겨울에 포경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런 것을 알고서 부끄럽지만 저도 그 당시 3천 원(?) 가량의 돈을 주고 야매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잘 되었고 후유증이 없이 곧바로 완치되었지요. 그 전우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2012.09.29. 08:05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제가 신참 때는 조선일보에 전년부터 연재된 최인호 작 '별들의 고향'이란 소설(그 후에 영화화)이 고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통신대는 행정반에만 신문이 있으므로 간부들이 없을 때나 일과 후에 고참들이 와서 봤습니다. 당시는 신문을 철하여 한 달 정도 보관했었지요. 그 소설이 끝나고 1973년 하반기부터 조선일보에 홍성유(洪性裕) 작 '비극은 있다"가 대략 2년간 연재되었는데 저는 이 연재소설 전반부를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왜냐면, 일제강점기말 얘기부터 시작된 이 소설은 625전쟁(저는 1950년생)에 대하여 개전상황을 포함하여 전쟁진행상황을 자세히 묘사했기 때문이었지요. 북괴군의 주력인 제105탱크여단에 복무하는 주인공이 통신참모(중좌)에게 북괴군남침 이전에 개전계획(작전명령) 등을 듣는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졸병이지만 군인인 저도 실전상황처럼 묘사한 625동란 이야기가 대부분인 이 소설을 매우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휴전과 그 이후 이야기인 후반부는 그다지 감명 있게 읽지 않았는데 소설 말미는 주인공이 휴전 후에 간첩으로 남파되어 서울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것으로 매듭진 것으로 기억됩니다. 1974년 말(?)경에는 당시에 야당지였던 동아일보의 광고 중단 사건이 있었지요. 그 당시에 보안대에서 연대(대대포함) 내의 동아일보 구독자를 조사하여 보고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무렵에 제1대대의 경우는 전령이 연대인사과 문서취급소에서 신문을 수령해 갔는데 도중에 항상 통신대를 들렸는데, 대대장님이 신문을 보시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보는 싫어하신다고 하더군요.
┗ 2012.09.29. 07:57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통신대는 제가 복무하는 동안 내내 조선일보만 부대경비로 구독하였습니다. 금액은 기억 안 나지만 사무용품비도 매달(분기?) 나와 일동거주 선임하사님에게 부탁하여 갱지 등을 구매하였습니다. 청주에서 발행하는 충청일보는 매주 전방부대에 무가로 배부되어 충북이 고향인 제가 충북의 전국청소년체육대회 3연패 등 고향소식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안대가 사병들은 신원특이자들에 한해서만 동향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예를 들어, 인사과원이 취사병으로 보직변경). 저는 연대에서 자유투표해서 그런지 투표한 기억이 잘 안 나고, 훈련소에서 유신찬반투표 시에 중대장 등이 유신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교육한 것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 2012.09.29. 09:46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는 '국방부시계'라는 말을 훈련소(향토사단신병교육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조교들이 "요령피지 말라", "잘 못 하면 '국방부시계'가 멈춘다"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훈련병들끼리는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제 경우에 1973년은 분위기도 살벌하고 졸병이라 정신없이 바빴으므로 말 그대로 일과 후의 개인시간은 전혀 없었지요. 통신대는 대장, 보좌관, 선임하사 등 간부들의 마음이 좋아서 동네형님이나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고참들은 전혀 딴판이었지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거칠고 드세었지요(물론 아주 선한 분도 계셨지만). 당시의 군대문화가 일제강점기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더군요.
┗ 2012.09.27. 11:04 □ 1973년 군단FTX훈련 때는 통신대장(ROTC출신)님이 처음 수행하는 훈련이라고 전에 훈련에 많이 참가하셨던 전임 통신대장님(이중성 대위)께 부탁하여 전임 통신대장님도 훈련에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1974년 초의 눈이 내리던 날에 통신대장님이 바뀌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새 통신대장님이 행정반에 도착하실 때까지 구 통신대장님은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구 통신대장님은 5군지사 행정장교(부대명칭, 직책 가물가물)로 전임되었는데 저보다 고참인 통신대 기재계 등이 그 분에게 부탁하여 그 부대의 휴가증을 발급받아 2∼3일 휴가를 간 적도 있었습니다. 기재계는 담당업무 중에 배터리를 사단에서 수령하여 공급해주는 일이 가장 많았습니다.
┗ 2012.09.27. 11:04 □ 후임 통신대장님은 제가 전역을 위해 연대에서 전출되기 전날 통신대행정반에서 간단한 환송파티를 해주셨습니다. 즉, 막걸리는 PX에서 사고, 멸치와 두부는 사병식당에서 구해다가 이별주를 마시며 저의 전역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제가 군복무 시에 모셨던 두 분의 통신대장님 모두 마음이 좋은 분이셨지요. 통신대 보좌관은 주로 통신기기 정비나 보급 등 주로 기재계와 정비병에 관련된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하셨는데 두 분의 보좌관님도 마음이 좋으셨습니다(선임하사님들도 마찬가지로 좋으셨습니다). 1973년의 어느 대대의 기동훈련에서 어느 하사가 감전으로 전사하여 그 하사가 소지했던 작은 박스를 조사차 연대본부로 가져왔는데 그 안에 담배도 있어 통신대 선임하사님이 가져다 피운 일도 있었습니다.
┗ 2012.09.27. 14:35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 □ 환송회를 잘 받고 나오셨네요. 저는 고참들 환송회는 제가 주선을 많이 하였는데 저의 밑에 있는 후임들이 수단이 없어서 제가 대대 군수관에게 결산 시 받아 놓는 피엑스차용증으로 막걸리와 맥주 과자 등 사오게 하고 환송회를 한 것 같습니다. 중이 제머리 깎은 격이지요. 일전에도 쓴 것처럼 저는 대대 유류결산 시 보급장교님들께 px차용증을 받아서 많이 회식시 이용 많이 했습니다. 후임들이 돈 걷을 일이 없었지요 막걸리보다 맥주나 소주 좋아하는 체질이라 술값에 돈이 안 들어갔습니다. 제대 며칠 전 군수참모가 저녁이나 먹자하더군요. 병기과 제대할 사람과 저녁 먹었는데 술도 없이 저녁만 장교막사에서 사모님이 차려준 것 먹고 환송연이 이러나했습니다. 그때는 휴가 나왔다 들어갈 때는 청자담배를 보루로 사가지가서는 한 갑씩 휴가 턱을 하였습니다. 여름에 휴가 나오려고 의정부를 지나서 마장동동서울터미널에 내려서 또 버스타고 서울역에서 인천행전철타고 집에 가면 3시간-4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절은 교통이 불편해서 아마도 야밤이나 그 다음날 도착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출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휴가 가는 것도 신고식하고 간 것 같은데 틀린 기억일까요.
┗ 2012.09.29. 08:29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답글에 대한 제 답글) □ 안 전우님께서 군수과 살림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연대참모들의 숙소는 1973년(?) 무렵에 연대 밖의 남쪽으로 4동을 나란히 새로 신축하였지요. 그 무렵에 독신자 장교용 숙소(BOQ)도 새로 신축하였는데 장소는 기억나지 않네요(연대장 숙소 가는 길?). 그 당시 휴가 후 귀대 시에 담배 사가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부대에서 관례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대 앞을 지나가는 버스가 마장동터미널을 이용하였으므로 휴가를 갈 때 꼭 거쳤지요. 연대 앞의 정류장(명칭은 가물가물)이 제1대대 쪽으로 떨어져서 약간 경사진 도로 옆에 있었습니다. 저는 휴가를 갈 때 본부대서무계에만 통보한 것 같은데,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 2012.09.27. 22:37 □ 통신대의 경우는 극히 일부가 떡도 해오고, 소주를 사오는 전우도 가끔 있었지요(졸병은 젓가락까지). 그러면 회식을 하였지요. 저는 고향이 충북이라 을지로에 있던 터미널에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갔는데, 고속버스는 현역일 때만 탔습니다(사회에서는 철도를 무임승차하므로 철도만 이용). 나중에는 군제대후 복학한 형님자취방에서 하루 묵고 귀향. 지하철 1호선(당시는 종로선)은 두 번째 휴가 중에 개통되었으므로 귀대 전에 형님과 함께 기념으로 타봤습니다(첫 휴가는 1973년 추석 때). 통신대는 저보다 5개월 빠른 충남(보령?)출신 선임이 충북에서조차 안 쓰는 희한한 사투리를 가끔 썼으므로 별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2012.09.28. 19:54 □ 저는 입대 전부터 졸병 때까지 담배를 피웠으나 담배가 체질에 맞지 않아 1973년 중반 무렵부터 담배를 안 피웠습니다. 이틀에 한 갑 나오는 화랑담배는 이에 따라 후임병에게 주었지요. 훈련소부터 필터가 없는 담배가 나왔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필터달린 화랑담배가 나온 것으로 생각되나 제가 1973년 중반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아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안 나네요. 많은 전우들이 힘들고 괴로운 병영생활에서 담배피우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함께 나눠 피는 것이 전우애였지요. 저는 제대 후 술을 마시고 담배 2개피를 연거푸 피웠다가 이튿날 결근한 적이 있을 정도로 담배가 몸에 안 맞았습니다.
□ 2012.09.27. 16:51 (제 글쓰기에 대한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 □ 서 선배님과 이렇게 부대이야기 답글 쓰니 술술 그 시절 기억이 납니다. 나이 먹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 하지요, 이유가 기억할만한 것이 젊을 때 보다 없어서 그렇다합니다. 아마도 21연대의 이런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시절의 전우들이 많이들 들어오면서 재미있는 글과 보고 싶은 사람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저도 올해 우연히 8사단전우회 홈피를 인터넷에서 접하여서 가입하고 들어와 볼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보다 3년 정도를 한곳에서 보내다보니 할 말과 기억도 많이 나는 편입니다. 또한 고생도 많이 하고 자급자족의 물자 부족한 상태에서도 살아본 것이 기억이 많이 납니다. 저희형제는 3남2녀 인데 형은 방위제대 막내는 면제라 저만 3년 만기예비군입니다.
┗ 2012.09.28. 00:18 (안익섭[21HQ/73.09∼76.06] 전우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저도 안 전우님과 부대이야기를 나누면서 잊어버렸던 옛 전우들 이름이나 희미하였던 부대 내외의 환경, 또는 제가 몰랐던 사실 등을 새로 알거나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21연대전우카페가 따로 있을 줄 알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있다면, 보다 가까이에서 근무하였던 전우들과 더 자세한 옛날애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사단전우회카페에서 활동하는 전우들의 근무시기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다양한 부대의 폭 넓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좋으나 1970년대 전반에 통일화-국방단색 전투복을 입었던 전우들은 아날로그 시대, 흑백TV-흑백사진 세대라 그런지 카페활동이 상대적으로 적네요.
┗ 2012.09.28. 17:01 □ 영평천은 이동 쪽에서 오는 하천과 일동 쪽에서 연대 앞으로 흐른 하천이 38교 부근에서 합류하여 운천 쪽으로 흘렀지요. 전에 언급한 것처럼 연대에서 1973년에 하계휴양을 갔었습니다. 38교를 지나 이 하천을 따라가는 도로 옆 우측 산기슭의 숯(옹기?) 굽는 집들이 기억납니다. 연대 앞 도로와 하천 사이는 논밭이 있었지만, 수 년 전에 가보니 온천이 들어차서 도로가 혼잡하였습니다. 현역 시는 서울에서 아주 먼 전방이라 느꼈는데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전방이란 느낌이 별로 안 들더군요(현역과의 인식차이인지는 모르지만).
┗ 2012.09.29. 08:23 □ 저는 8남매(5남3녀) 둘째로서 형제가 많습니다(4형제는 만기전역, 막내만 방위출신). 남자형제 셋째는 병참학교(1978년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이전)를 나와 제3사단에서 근무(사단본부대의 경리계)하였는데 1978년에 만삭의 집사람과 면회를 가니 부대원들이 우리 사단이 예비사단이라 훈련이 무척 세다고 얘기하더군요. 다른 데서도 이런 얘기를 몇 번 들었으나, 저는 기행중대 출신이라 그렇겠지만 훈련이 세다고는 전혀 못 느꼈습니다. 셋째에게 병참학교 배출 시에도 집사람과 면회를 갔었고 넷째(군의학교를 거쳐 인제의 원통에 있는 제12사단의무중대의 서무계로 근무)에게는 1982년(?)에 안경 때문에 면회를 갔습니다. 제게는 형님께서 두 번 면회를 오셨고 저도 입대 전에 형님(서울의 송파에 있는 보안대)에게 면회를 갔었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제37향토사단에서 훈련수료 후 열차이동시에 충북선열차내로 특별면회를 오셨습니다(당시는 훈련 후 면회제도가 없었음).
┗ 2012.09.29. 08:27 □ 제가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관물 중에서 가장 질이 않 좋은 것은 양말과 내복이었는데 공교롭게 이들은 흰색이었습니다. 양말은 금방 구멍이 나고 내복은 신축성이 없어 며칠 입으면 목과 손목, 발목 부분 등이 늘어나 헐렁해지고 보온도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양말과 매복이 국방색으로 바뀌면서 질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1973년경에 입대한 후임병들의 군복을 보니 한 번 빨면 탈색되어 마치 회색이나 흰색처럼 보이는 군복이더군요. 저는 보급관련 일을 담당하지 않아 자급자족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지만 물자부족은 느꼈습니다. 저는 군대막걸리 맛은 잊었지만 그 때의 향수가 남아 수년 전에 이동이나 일동 막걸리를 가끔씩 마셨습니다.
□ 2012.09.29. 08:22 (제 글쓰기의 제 댓글) □ 이제 생각났습니다. 유류파동 전인 1973년 초반에 야외기동훈련을 두 번 있었으나 군단 FTX훈련만 생각나고 하나는 무슨 훈련이었는지 가물가물하였는데 그것이 1973년 3월 하순의 RCT훈련으로 제21전투단 훈련이었네요. 다만 오래 전이라 혹시 두 훈련의 명칭을 틀리게 기억하는지도 모릅니다. 제 고향에서는 2월 중순경까지만 김치를 먹는데 훈련을 가서 민가에서 김치를 얻어먹었습니다. 한편, 장교들이 민간식당(?)에서 회식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시절의 회식이 기억났었습니다. 훈련 때는 사단헌병중대에서 1개 소대 정도가 연대로 파견 나왔습니다. 훈련나간 연대본부의 빈자리는 어느 대대의 1개 중대(?)가 파견을 와서 경비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연대에 배치된 헌병들은 훈련장입구에서 연대차량 등의 교통정리나 지휘부 경비 등을 담당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야외기동훈련 시에 졸병들은 훨씬 더 힘들게 되지요. 하지만, 몸은 고달파도 일상적인 영내생활보다 새로운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동훈련 시에도 취급횟수는 적었으나(매일은 아니나) 군사편지가 왕래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동훈련 시에 저는 졸병으로서 통신대잡일도 하였고 제 고유 업무인 통신행정업무로 밤늦게까지 근무하였습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또한 기억이 맞는가도 모르나, 비상시 특별통신망 구성방안, 연락 두절시 긴급 유선망 확보방안, 비상시 인접부대와의 통신확보 방안 등등을 작성했습니다. 이 업무는 평상시 병영 내의 근무 시에는 다루지(접하지) 않았었고 훈련 시에 갑자기 특별오더로 하달되어 당황도 하였지요. 그러나 제 고유 업무이므로 혼자서 끙끙거리며 나름대로 열심히 작성하여(잘 작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상황실(훈련통제실?)로 제출하였지요. 이 외에도 평소와 같은 통신병력・장비현황 등의 보고사항도 제출하였습니다.
┗ 2012.09.29. 08:22 □ 1973년 10월에 1박(야영)하면서 사격한 자동화사격장은 제16연대 제1대대의 사격장(높은 언덕에 위치)이었네요. 저는 사격이 별로지만 그 때가 군복무기간 중에 사격성적이 가장 좋았습니다(90점/100 정도?). 그 때 사격성적이 불량한 전우들은 휴가가 취소되었다가 한참 후에 가게 되었지요.
┗ 2012.09.29. 18:50 □ 통신대 사병은 육군통신학교(당시는 대전소재), 제1군통신교육대(학교?), 제5군단통신교육대 등의 후반기교육자 출신과 무교육자 등 4부류의 출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무교육자 부류에 해당되었고요. 각각의 특색이 있겠으나 후반기교육자들의 교육생활 얘기를 들어보면 피교육생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군대에서 어느 교육이든 피교육생은 항상 괴롭다는 말이 있었지요). 1973년에 육군통신학교교장(준장)이 우리 연대를 방문하여 제가 통신학교출신현황 등이 포함된 브리핑차트 등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통신주특기(280 무선정비병)로 보직은 통신대 서무계이었으나 통신기술자체는 문외한이었지요. 저의 통신대 전입 2∼3주 후에 제일 먼저 제대한 왕고참이 저에게 '옴의 법칙'을 갑자기 물어서 우물쭈물했더니 옴의 법칙도 모르면서 어떻게 통신대에 왔느냐고 하더군요.
┗ 2012.10.18 22:22 □ 안 전우님도 기억하시겠지만, 그 당시는 야전잠바가 평상복보다도 더 질이 인 좋은 편이었지요. 그래서 극히 일부 사병들은 미군야전잠바를 사적으로 구입하여 입었지요. 미군잠바는 단추 대신에 저크가 달려있고 현재의 등산복처럼 머리를 감쌀 수 있는 간이모자(?)도 달려 있었으며, 기능과 질적인 면에서 국군용보다는 훨씬 좋았지요. 지금은 질이 좋아졌지만, 당시의 국군용은 한 번 세탁하면 줄어들고 보기가 좋지 않았지요. 또한 일부 전우들은 하절기에 수경사(현 수방사) 병력의 복장처럼 반팔 카키복도 사적으로 구입해서 입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리고 동절기는 귀에서 턱까지 덮을 수 있는 아전 모자를 구입해 쓰는 전우도 있었지요. 저는 물론 불편하더라도 지급품만 착용하였습니다.
□ 2012.09.01 (제 글쓰기에 대한 제 댓글) □ 사실 저는 연대에 전입되어 군수과 서무계가 될 뻔했습니다. 서무계 사수(우? 병장)가 제대말년이라 군수과에서 이정문 상병의 후임 조수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작전과에서도 저의 전입을 동시에 요구하고 이에 대한 통신대의 항의(저는 통신주특기였으므로) 때문에 입장이 곤란한 인사과에서 저의 주특기(훈련소 수료 후에 28* 통신정비 부여)대로 통신대로 발령을 내었지요(자대배치 후에 280 무선정비병 주특기 부여). 통신대에서는 서무계 보직을 받았으며(사실 저는 통신기술 자체는 문외한), 그 후 얼마 안 되어 통신주특기의 신병이 겁도 없이 통신대가 아닌 타 처부로 가려 하였다(사실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입대기신병이 불려다닌 것이었지만)고 교환실과 행정반에서 중고참들에게 왕창 얻어맞으며 무척 호되게 신고식을 하였습니다.
┗ 2012.09.01 □ 이와 관련하여 군대의 부대배치나 보직은 운이 7할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나면, 제가 연대본부대 배치되고 나서 불과 몇 개월 후에 명문대학 출신 등 우수자원이 연대에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배치되자 인사과에서 이들을 각 대대의 중대로 발령을 내었지요(당시는 연대인사과에서 중대단위까지 배치발령. 당시에 소총중대 서무계가 연대에서 제일 좋은 보직이란 말도 있었음). 저의 연대전입 시는 제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연대의 각 처부에서 데려가려고 하였는데 만일 몇 달 늦게 전입되었다면 찬밥신세였겠지요?
┗ 2012.09.01 □ 또한, 제가 초임병 시절에 작전과 교육장교(중위, 3사?)의 요구로 가끔씩 일과 후에 작전과의 서류작성이나 대필 등의 조력을 많이 하였지요(어떤 때는 밤12시까지 조력한 기억도 있음). 당시에 작전과 병력은 업무가 바쁘다는 사유로 점호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이에 대해 통신대 주종규 선임하사가 당직사관 시에 "담배피우거나 화장실 갈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냐고" 물은 적도 있음). 그런데 몇 개월 지나니 요령도 생기고 조력이 헛되다는 생각이 들어(일과 후의 내무반생활에 빠지므로 고참들 눈치도 보인다는 생각도 들어) 핑계를 대고 작전과의 조력요청을 거절하여 교육장교가 일과 후에 직접 통신대로 몇 차례 전화도 걸었지요. 그렇게 거절하다가 73년 중반부터는 아예 조력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수많은 조력에도 불구하고 단지 마지막 몇 차례 거절의 교육장교 괴씸죄로 상병 진급 시에 불이익(몇 개월 늦게 진급)을 받았지요. 즉, 그 후에 제가 상병진급 대상이 되기 대략 8개월 전부터 상병과 병장의 진급시험(사격, 체력측정 등) 실시(그 전까지는 시험이 없이 자동승진)로 시험의 주관을 교육장교가 담당하였기 때문이었지요(인사과에서는 단지 그 평가결과에 따라 발령). 이 시험제도 때문에 저와 비슷한 시기의 복무자(8개월 정도 빠른 고참에서 6개월 정도 늦은 후임병 들까지 대략 1년 전후) 대부분이 시험에 떨어져서 몇 개월씩 늦게 진급되는 피해(?)를 보았지요. 그래서 병장이 적으므로 부대에 따라서는 상병이 내무반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병장이 부족함에 따라 1974년 이후에는 훈련수료 후에 교육을 몇 달 받고서 병장을 다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러한 병장은 각 대대로 배치되었는데, 그런 병장은 짬밥수가 극히 적었으므로 사병들이 물병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는 대학에서 교련을 배운 햇수에 따라 일찍 제대시켜 주는 제도(교련 1년은 1달 혜택, 2년은 2달, …)가 있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후임병이 선임병보다도 먼저 제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2012.10.20. 05:47 (오뚝이 독수리 카페; 통신대 병장 신지훈 아빠 댓글에 대한 제 답글) □ 후배전우의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드님이 제가 현역 시에 복무하였던 통신대에서 복무하는군요. 반갑습니다. 카페 글을 읽어보니 통신대가 본부중대와는 별도의 중대인 것 같군요. 제가 복무할 때는 본부대소속이었습니다(본부대는 그 전의 정보, 작전, 통신 등의 병력을 관리하는 본부중대와 인사, 군수, 병기, 수송 등의 병력을 관리하는 근무중대를 합친 부대). (본부대는 병력자원관리 단위부대, 각 과와 통신대는 주간근무소속으로 연대참모역할). 참고로, 제가 제21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의 추억(제8사단전우회카페)을 정리하여 자유게시판에 게재하였습니다.
첫댓글 돌격 !
선배님의 성의있으신 글모음에 존경의 경례를 올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손 전우님 감사합니다.
저도 손 전우님께서 전우회카페 올리신 좋은 글을 잘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선배님 기록보전에 대해 경의를표합니다 저도나름 메모는하는성격인대 선배님한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단~결
김 전우님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에 많이 기록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약간 조금씩 기록하는 습관은 생애 첫 직장의 직속상사를 보고 배운 것 같습니다.
김 전우님께서는 전우회카페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기록을 잘 하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카페에 올린 글은 연대군수과 안익섭 전우님이 계속 댓글을 달아주시어 이에 대해 답글을 쓰면서 서로 답글을 주고받다 보다 보니 잊었던 기억을 되살린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당시를 회상하여 안 전우와 댓글 등을 주고 받은 것이므로 약간의 착각이나 오류가 간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전우가 도중에 제 오류를 지적한 내용도 있습니다.
저희 후배들이 선배님들 뵐 면목이 없어지는것 같습니다. 제대한지 불과20여년밖에 않된 저는 기억저편이 잘 나지않고 있는때,선배님께서 이런추억과 기억을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질타하시는 것만같아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돌격!!!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건강하십시요.
박 전우님! 너무 송구스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일기는 안 쓰지만 현역시절 업무일지 쓰던 방식을 살려, 또한 군입대 전의 직장상사님을 모방하여
나중에 1984년부터 매일 수첩에다 그날의 중요사항(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만을 몇 가지씩 메모하고는 있습니다.
그랬더니 드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는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통신대에 작은 포켓수첩에 깨알 같이 일기를 쓰는 몇 개월 빠른 고참이 딱 한 분 있기는 하였습니다.
박 전우님께서 카페활동에 적극적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기록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고 약간만 하는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등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 유산이 있는 등 기록에 우수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우리나라의 기록문화가 줄어든 것처럼 언론에서 얘기하네요.
일본의 경우는 1980년대의 여객기 추락사고 시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도중에도 급박한 상황을 메모로 남겨놓는 등 ‘기록의 민족’이라고 언론에서 얘기하네요.
제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선생이 메모하지 말고 머리속에 기억하라고 말씀(메모지가 없어지면 전혀 기억이 안 되니까)하셨지만
속뜻도 있겠으나 100% 옳은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배님에 대단한 경의를 표 합니다,
저는 중대에 비치된 노태우연대장의 상폐밖에 기억이 없습니다,
바로 선배님 근무 때 인것 같은데 저희 중대가 연대장 노태우대령께
상폐를 받았더군요,
예. 제가 막 연대에 전입하였을 때에 연대장님이 노태우 대령님이었는데
이듬해인 1973년 3월(?)경에 공수부대로 영전하였습니다.
제가 군복무할 때에 연대장이 두 번 바뀌었는데 노태우연대장님은 연병장에서 성대하게 이임식을 하였으나
후임 연대장님은 이임식을 하였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복무 시의 노태우 연대장님 재직기간은 짧지만, 제가 전입되기 전에는 많은 활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운동을 좋아하셔서 부대체육대회를 많이 하고 연대에 정구장도 만드셨다고 합니다.
저의 연대전입 직전에 실시한 RCT에서 크게 이겨 영전하시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부대원들도 연대장님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정구장은 참모부건물 뒤편에 있었는데 제가 1972년말에 연대에 전입되니 당시에 유행하였던 "체력은 국력"이란 입간판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다른 내용의 입간판도 더 있었는데 문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 때 내무반에는 "연대장(노태우)님 하신 말씀, 막강한 인사과 말 없이 수고했다"라는 인사과의 플랭카드가 페치카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때는 노태우 연대장님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제대 후 몇 년이 지나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노태우 장군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더군요.
제가 복무할 적의 연대장님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되셨으니 제21연대에서 복무한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됩니다.
정구장에 체력은 국력이라고 써있고 테니스를 치는것은 일과시간내 이루어지어서 본적은없고 정구장위에 정훈과 사무실
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하여간 이렇게 정리하신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21연대의 역사가 기록된것같습니다. 연대장 이취임식을 병들과 연병장에서 하지않고 아마도 장교식당이나 연대장실에서 이루어진것이아닌가 추측됩니다.아마도 어떤 제한사항이 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도되고 그렇지않으면 일동이나 이동의 음식점에서 이루어지었을것같기도합니다.유류주입하고
우루루짚차타고 나가는경우는 자주본것같습니다.하여간 21연대 모음을 잘만드셔서 결집의 단초가됩니다.
그러했군요. 후임연대장님의 이임식을 연병장에서 하시지 않고 간부들의 환송회 정도로 이루어졌군요.
노태우 연대장님 바로 후임 연대장님이신지 그 다음 연대장님이신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두 분 중에 한 분은
대학의 학군단장을 하시다가 오시거나 학군단장으로 가신 것으로 기억되며 연병장에 직할대원들이 모여 훈시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저의 군복무 중에 유일하였던 연대장훈시라고 기억합니다.
'체력은 국력'이란 입간판은 제가 연대에 막 전입되어 대기병일 때에 정구장과 함께 제일 처음 본 시설이라서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대기병들과 CP 뒷길로 정구장까지 갔다 되돌아오다 CP보초에게 이유없이 한 대 맞았죠.
같은 시기 연대에서 근무했다하니 반갑슴니다 3대대에서 3년을 마치고 73년8.15일 제대 했는데 지금도 잊을수가 없네요
얼머전에 이글스밴드근무 했던 임하사를 맞났지요. 40년전에 소대장도맞났고 나는 인천 부평에 있슴니다만
그당시 연대 선발대회 때문에 격구와 각종 평가로 연대 가끔갔슴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느낌은 감니다
서 후배님 참으로 대단하심니다 노태우연대장님 전속부관이었던 분 기억이 남니다만 모든 것을 기억하시니
한번 통화나 합시다 목소리 019-345-0051 홍재웅 49년생
선배님 안녕하세요. 제3대대는 다른 대대와는 달리 약간 떨어져 위치하고 있어서 저는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제3대대 바로 옆에 우리 사단의 유일한 탱크부대인 전차중대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3대대 통신대장님과 통신병들은 연대통신대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런데 연대통신대의 한 중고참이 제3대대 최홍기 중위님과 학교동기라 말을 놓으니까
연대통신대장께서 사병이 장교에게 말을 놓는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73년8월 제대이면 저에게는 왕고참이십니다.
선배님은 소띠이시군요. 기회가 되면 전화올리겠습니다.
저는 운동이 별로인데 선배님께서는 운동을 아주 잘 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
서사범님의 글을 보면 감탄이 나옴니다
이글스밴드에 근무했던 이성용이 내친구인데 그당시 군가 제목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라
많은 장병들이 불르곤 했지요
어디거주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참반갑슴니다 49년생 소띠이네요 목소리 한번 들려 주세요
019-345-0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