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懷古)
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은 아쉽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시절인데 추억마저도 없다면 너무 삭막한 생활이 될 것이다. 일상에 쫓기다 보면 보통 과거의 시간은 망각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따금 어떤 상황에 마주하다 보면 절로 연상되는 일이 있다. 어릴 적 추억인데 주로 부모와 형제들이고, 다음으로 주변의 인물들이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면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문학을 하신 선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많은 문학/예술인을 마주 접하고 살았다. 대부분이 가난하게 생활했으나 그래도 마음만은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여유가 있었다. 대부분이 교직에 봉직하셨는데 당시에 교사는 그나마 사회로부터 지성인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권력이나 부와는 멀어진 생활이었지만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선각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시절이었다. 나름의 공명정대한 시론을 펴면서 현실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야성(野性)적인 기개가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자주 회동하던 이들은 술 이래야 겨우 김치에 막걸리를 기울였지만 그래도 웃음과 해학이 살아있는 대화가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서로가 수시로 왕래하고 어울리면서 마치 한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던 관계였다. 더욱 1966년 무렵은 『남풍(南風)』이란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문학 활동에 전념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아둔한 기억으로 「조두현」, 「최학규」, 「이철균」, 「채규판」, 「박병순」, 「박항식」, 「이병훈」, 「장순하」, 「허소라」, 송하춘」, 「이춘재」, 「정인촌」 시인 등과 소설가였던 「홍석영」, 「윤흥길」 작가와 평론가였던 「김교선」, 「천이두」, 「이상비」, 「이보영」 선생 등이 떠오른다. 유명 서예가였던 「최정균」, 「권갑석」 선생과 미술가였던 「방의걸」, 「나상목」 화백 등도 추억에 남는다. 나는 자주 심부름을 다니면서 어른들을 자주 뵙게 되었는데 제법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선비(先妣)께서도 이들의 사모님과 교유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와 소설을 쓰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고귀한 일로 여기던 꿈 많은 시절이었다. 이후 거의 대부분이 대학교수로 진출하여 평생 교분(交分)을 나누며 살았다.
얼마 전 전주에 갔다가 「덕진 호수」를 찾았다. 잠시 구경 차 갔는데 요즈음은 아예 연꽃으로 단장한 명소로 변하여 있었다. 비교적 시내와는 벗어난 『전북대학교』 옆에 위치하여 다정한 젊은 남녀의 데이트 코스이거나 지역 주민들이 종종 산보를 하는 곳이었는데 예전의 낭만적인 모습은 느낄 수가 없었다. 제법 오랜 호수인데 이곳의 붕어가 가장 맛이 있다고 들었다. 수산학의 기틀을 다진 물고기 박사 「유수(流水), 정문기(鄭文基, 1898~1995)」는 우리나라 어류연구와 수산학에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데 일찍이 그런 증언을 하였다. 지금은 많은 주택으로 에둘러져 있는데다가 입출입하는 유수량도 부족하고 맑지 못하니 그런 명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출입문에서 가까운 곳에 이 지방 출신 시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신석정(辛夕汀), 이철균(李轍均, 백양촌(白楊村)시인의 시비였다. 모두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분이라 상세히 돌아보니 절로 그분들과 맺은 옛 추억이 떠올라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신석정(辛夕汀:1907~1974) 시인은 누가 뭐래도 서정시의 대시인이시다. 1931년에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제3호에 시(詩)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우리에게는 교과서에서 배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란 시로 각인(刻印)되어 있다. 「한용운」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기도 했으며, 「김기림」은 그를“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그는 평생을 고향 땅에서 시작(詩作)과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여 불모지인 지방의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셨다. 어쩌다 선친을 따라 전주에 가면 대면을 했으며, 특히 군문(軍門)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드리니 산전수전을 경험하신 대시인은 마치 손자를 대하듯 따뜻한 포옹으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3학년 때 노시인이 대한민국 예술문학상을 수상함에 따라 축하의 편지를 드렸더니 곧바로 답신이 오기도 하였다.
시인은 선친이 각별하게 따르고 배운 스승으로 항상 커다란 거목으로 자리하신 분이다. 1969년에 선친께서 처녀 시집인 『석류초(石榴抄)』를 출간하게 되자 서문을 써 주시면서 성원하고 격려를 해 주셨다. 「완당(阮堂)」님의 『사난결(寫蘭訣)』에 비유하여“난을 기르는 노력과 정성으로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시도(詩道)의 정진에 추호(秋毫)의 나태도 없이 줄달음질 각오로 임하길” 당부하셨다. 더불어 “새는 알(卵)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다. 알은 세계(世界)다. 탄생(誕生)을 의욕(意欲)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破壞)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로 결론을 맺었다. 사위가 「최승범」 시인으로 선친과는 같은 대학에서 봉직하였다.
이철균(李轍均:1927~1987) 시인(아호는 有人)은 평생을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가신 분이다. 한마디로 천재적인 시인이었는데 남들이 보기에 괴짜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날 술에 취하신 선친의 안내로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당시에 처음이라 어떤 분인지 몰랐으나 선비께서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셨다. 이후에도 종종 늦은 시간에 방문하여 잠자고 쉬어 가게 되었다. 삭풍이 부는 찬 겨울에 두 분의 술자리를 준비하신 어머니도 고생하셨다. 가게의 문을 두드려 막걸리를 사는 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두 분은 문학과 세상 이야기를 장시간 나누셨는데 내게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은 분으로 기억된다. 두 칸짜리 셋집에 살면서 툇마루 건넛방에 어린 남동생과 있었는데 형편이 누추함에도 거리낌 없이 지내시던 소탈한 모습이 바로 엊그제 같다.
1927년 전주에서 출생한 「이철균」 시인은 1954년 문예(文藝)지에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철균」 시인은 「감꽃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 외롭고 쓸쓸함 속에서 시를 통해 행복과 풍족함을 누렸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 시인으로 생활하다가 한때 전주고 동료 교사였던 「하희주」 시인의 서울 자택 별채에서 지병인 위암으로 1987년에 작고하셨다는 소식은 나중에야 들었다.
전주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시인이지만 그러나 시를 쓰는 사람들도 그의 이름이나 행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생전에 개인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사후에 유고시집이 나왔다. 그만큼 적적한 일생을 사신 분이다. 전주에서 한평생 시와 함께 살았던 「이철균」 시인은 시가 곧 그의 생활 자체였으며 인생의 전부였다. 외로움은 그의 운명인 듯 항상 안고 살았다. 불평할 줄도 몰랐고 불만도 없었다. 생활도 건강도 가난해서 의지할 곳도 없이 오직 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주고 교사 시절의 제자 일동이 주관하여 시비를 건립하여 그 이름이나마 후세에 남게 되었다. 바람처럼 살았던 「이철균」 시인은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다음은 시비에 새겨진 시의 전문이다.
한낮에
嶺 넘어 /구름이 가고
먼 마을 호박잎에/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마당 한구석/조으는 꽃에
울 너머 /바다를 잊어
흐르는 千峯이 /환한 그늘 속 한낮이었다.
작품 속에서 한낮의 시간은 평화롭다. 고개 넘어 구름은 한가롭게 넘어가고 호박잎과 빗소리, 나비와 꽃과 봉우리가 시인의 마음속 풍경을 채운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한낮으로 떠올린다.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槿, 1916~2003)은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이며 교육자이다. 「백양촌」은 그의 아호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일하여 중학교와 대학을 수학하였다. 1945년 전주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시작으로 삼례중학교, 전주고와 전주 성심여고에서 근무하였다. 「백양촌」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김해강」 · 「신석정」 · 「서정주」 · 「이철균」 시인들과 함께 왕성한 활동으
로 문학의 꽃을 피웠으며, 『백양촌 문학상(1989)』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후학들이 평가하길 “「백양촌」의 시 세계는 작품들의 시적 관심사나 형상화 측면에서 주로 자연과 자아 존재론적 탐구에 기초한다. 「백양촌」의 시적 언어는 마치 동요의 색채를 띤 것처럼 맑고 담백하다. 그는 일상어를 통해 시적 정서와 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기반」 시인은 “「백양촌」 시인의 고독(孤獨) · 통한(痛恨) ·우수(憂愁)는 내면의 외로움과 아픔과 시름을 눈물짓지 않는 엄숙한 극복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시(詩)속에 작용하는 원근(遠近)의 거리와 명암(明暗)의 차이를 조명하면서 빛을 부르는 노래로 자아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시심(詩心)의 미학(美學)”이라고 조명하고 있다. 「김해성」은 “백양촌의 시 세계는 ‘시름’과 사는 ‘고독(孤獨)의 미학(美學)’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필자와는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으나 선친을 통해서 간접으로 알고 지냈으며, 그의 시집을 통해 익히 명성은 알고 있었다. 지난 1994년도에는 선친이 『백양촌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병석에 계시는 선생을 대신하여 가족으로부터 상을 받으셨다. 나중에 아드님이 검사 출신의 「신건(辛鍵, 전 국정원장)」씨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덕진 호수」에 있는 세분의 시비를 돌아보면서 문득 옛 시절이 그리워졌다. 이들과의 인연은 뭐라 해도 선친이 남긴 정신적인 덕목이다. 자칫 머뭇거리는 사이에 잊고 지내는 것이 세상의 인심일진데 자식이나마 그 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기본 도리라고 본다. 더구나 출구를 나서면 가까운 곳에 『전북 문학관』이 있다. 그곳에는 국문학의 원조이신 「가람 이병기」 선생 및 「미당 서정주」와 「채만식」 작가 등 지역 출신의 인사를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예향(藝鄕)다운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선친의 일부 유품도 전시되어 있는데 여유 공간이 있으면 더 많은 자료를 전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개관하고 선친의 시비 건립에 크게 공헌한 「양규창」 시인은 지금은 남원의 『최명희 문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어 잠시 통화를 하고 몇 가지 상의를 하였다.
당시 함께 문학을 하시던 모든 분이 굳건한 강단(剛斷)에다가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태생적으로 권세와 부귀를 탐하지 않아서인지 꼬장꼬장한 절조(節操)에다가 시류(時流)의 혼탁한 이득을 멀리하는 고고한 선비의 길을 걸으셨다. 대부분이 고향을 지키며 후학의 양성에 정성을 다하셨다. 가정의 살림은 잘 몰랐어도 약자와 더 가난한 이웃을 돕고 소외된 계층의 어린 학생들을 돕고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한 삶을 살았다. 까닭에 지금도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존경하고 추모를 하고 있다. 이는 후손들도 배우고 익혀야 할 정신이다.
하지만 세월은 이기지 못하고 한 분씩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일부 생존하신 어른들과 통화를 하면 안쓰럽고 내 자신의 역할 부족에 대한 회한(悔恨)이 가득하다. 생전에 선친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시던 분들인데 더 늦기 전에 찾아뵙고서 대면 인사를 드리면 그나마 위안이 될 듯하다. (2022. 8. 11 작성/ 8. 17발표)
첫댓글 남당이 만난 옛 문학인들을 이리 추억하니 옛적 국어선생님들이 어렴풋이 눈에 어른거리네요. 그분들이 가르쳐주신 은덕으로 문학수준은 아니지만 이 카페에 글 올리며 지낸다 싶네요. 남당의 의리와 그 따뜻한 효심이 느껴집니다.
남당의 가정적 분위기와 자라면서 좋은 사람들과 접촉했던 그 경험이 부럽습니다. 그러한 소중한 경험들이 오늘의 남당을 만드는데 밑걸음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농촌에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남당과 같은 경험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근면 성실을 몸으로 체현하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지요.
엊그제 보관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한동안 쉬면서 써둔 글이 있지만, 선뜻 내놓지 못하고 보관 창고에 대기중 입니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바 부모님과 스승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지만, 그나마 스스로 노력하여 성장하는 것이 이치일진데 두분은 이미 넉넉한 인품과 지성으로 소기의 성취를 하셨으니, 오히려 소생이 부러워하고 지냅니다!
남당의 연고지인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인과 문인들에 대한 그리움과 깊고도 풍성한 교류에 관한 회고를 적어주셨군요.
전주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전주하면 그 인근의 김제, 순창, 정읍 등을 포괄하여 기라성 같은 많은 문인들이 떠오르는군요. 서정주, 아리랑의 조정래, 그리고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릿한 소설가 최명희... 소설가 신경숙도 그 지역분이지요? 재미있게 본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와 <우리들의 불르스> 극본을 쓰신 노희경이라는 작가분도 전주분이시더군요.. 우리 문우회 지송님의 수필 <괜찮아, 널 돌볼게>도 여러 이야기가 고향 전주의 한옥마을로부터 시작되더군요. 아름다운 작품을 쓰신 그곳의 모든 분들이 새삼 그리워지네요~
남당님이 회고하신 분들이 대부분 익히 들었던 고향 지역의 문인, 화가이십니다. 어쩜 그리 옛 분들을 자세히 기억하며 열거하셨는지 놀랍습니다. 이제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안타깝고 그립습니다. 전북문학관에 가봤는데 남당님처럼 자세히 살피지 못했네요. 참고로 <혼불>의 최명희 작가 여동생이 제 여고 동기 친구입니다. 덕분에 고향의 발자취,옛시절을 따라서 기억을 더듬었어요.감사합니다.
그 많은 문인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계시니 그 추억만 해도 인생의 값진 자산이라 생각됩니다.
부럽군요. 교과서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서정주 시인도 그곳 분이시군요.
남당 덕분에 우리 카페가 아주 풍성합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신석정 시인님에 대해 좀더 알고싶어 검색해 보고 시도 접해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맡을 수 없는 것을 깊고 세밀한 관찰로 시에 담아 전해주는 시인님들의 위대함에 존경을 표하는 요즘입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래요?
반갑고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시인을 배워 김시인님도 대성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