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원(金錦園, 1817~1850?)의 시, 유점사(楡岾寺)
楡岾寺 | 金錦園
懸崖天畔一禪庵
山北淸鍾響在南
打起白雲閑出洞
招來明月靜沈潭
惺惺頓覺浮生夢
寂寂如聞古佛談
五十三佛淸淨界
靈通百劫慧燈參
'懸崖天畔一禪庵(현애천반일선암)
山北淸鍾響在南(산북청종향재남)
打起白雲閑出洞(타기백운한출동)
하늘가 낭떠러지에 있는 선승의 암자 하나
북쪽 산 맑은 종소리 남쪽을 향해 퍼지고
흰구름이 일어나며 한가로이 게곡을 감싼다
招來明月靜沈潭(초래명월정침담)
惺惺頓覺浮生夢(성성돈각부생몽)
寂寂如聞古佛談(적적여문고불담)
초대받은 밝은 달은 조용히 연못 속에 잠기는데
깨달음을 얻기는 그저 뜬 구름같은 희망인 듯
고승의 이야기 그저 적막하기만 하다
五十三佛淸淨界(오십삼불청정계)
靈通百劫慧燈參(영통백겁혜등참)
유점사 53불상의 청정한 세계여
백겁토록 그 영통한 지혜의 등불 밝혀주소서
김금원(金錦園, 1817~1850?)의 시 유점사(楡岾寺)
31본산 중의 하나인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는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관동 제일 가람으로 장안사, 표훈사, 보살사 등 60여 개 사찰을 말사로 거느렸다. 그 유명한 절들을 말사로 두었다니 유점사는 예로부터 고승대덕이 법통을 이었을 법한데, 김금원(金錦園, 1817~1850?)도 고불(古佛,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승려)의 설법을 들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기에는 본인의 말대로 그저 꿈이었을테고 능인보전 안에 존치된 유점사 53불상에는 감화됨이 없잖은 듯...
<유점사(楡岾寺)>
ㅡ'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 김금원(金錦園, 1817~1850?)ㅡ
'규수 사마자장' 호칭 받음
조선 최초 여류 시 동아리 '삼호정시사' 만듦)
'懸崖天畔一禪庵(현애천반일선암)
하늘가 현애에 있는 선암 하나
* 현애(懸崖): 깎아지른 듯 가파른 언덕 * 선암(禪庵): 선승이 있는 암자
山北淸鍾響在南(산북청종향재남)
북쪽 산 맑은 종소리 남쪽 산에 울리고
打起白雲閑出洞(타기백운한출동)
흰구름이 분기하며 골짜기에 한가로이 드러난다
* 타기(打起): 분기하다; 나뉘어 갈라지다
招來明月靜沈潭(초래명월정침담)
깊은 못이 명월을 초래하니
물속으로 고요하게 스며든다
* 초래(招來): 어떤 결과를 가져오거나 이끌어 냄
惺惺頓覺浮生夢(성성돈각부생몽)
슬기롭게 순간 깨달음은 꿈같은 부생이고
* 부생(浮生):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
寂寂如聞古佛談(적적여문고불담)
고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고요하다
* 적적(寂寂): 적적하다, 고요하다, 쓸쓸하다
* 고불(古佛): 오래된 불상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승려, 나이가 많은 노인
五十三佛淸淨界(오십삼불청정계)
오십삼불상의 청정한 세상에
* 유점사는 오십삼불상을 모시고 있다 * 청정(淸淨):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불교), 맑고 깨끗함
靈通百劫慧燈參(영통백겁혜등참)
백겁토록 영통하니 부처님 공경에
불법이 중생을 밝게 깨우친다
* 영통(靈通): 신묘하게 잘 통함 * 백겁(百劫): 아주 오랜 세월
* 혜등(慧燈):지혜의 등불이란 뜻으로 불법이 중생을 밝게 깨치는 것을 등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부군 김덕희와 28세에 들린 금강산 유점사.
문학과 불교에 학식이며 깨달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새삼 느낀다.
규수 사마자장, 여인 사마자장!!!
금원김씨錦園金氏
금원(錦園)금앵(錦鶯)
호는 금원(錦園). 1817년(순조 17) 강원도 원주(原州) 봉래산[蓬萊山] 기슭에서 태어났다.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원주에서 태어난 김금원은 당시 조선 여성으로는 드물게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통달했고 시문을 지을 수 있었다. 신분이 기생이었고 노류장화로 남자들의 꽃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금원은 춘추를 읽으면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이구나~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더욱 여자라고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러나 책에 머물지 않고 담장 밖 세상을 향한 열망을 품었다. 그녀가 여행을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850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여행 과정을 기행문으로 남겼다. 충청도 호서 지방의 호(湖),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동(東), 평양과 의주 등 관서지방의 서(西), 서울 한양의 낙(洛)을 따서 책 이름을 `호동서락기'라 했다. 제목 자체가 그녀의 여행지인 셈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원주 관아의 기생이 되었다가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金德喜)의 소실이 되어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843년(헌종 9)에는 27세의 나이로 문명을 떨쳐,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김덕희는 추사 김정희의 육촌으로 결혼 당시에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규장각(奎章閣) 학사(學士)를 지낸 문사(文士)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관인(官人)이 되었다. 1845년(헌종 11) 금원(錦園)은 의주부윤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갔고, 1847년 서울로 돌아와 남편의 별장인 용산(龍山) 삼호정(三湖亭)에서 기거하며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는 여성 문학의 새 지평을 마련한 조선 최초 여성 시인들의 시 모임이었다. 김금원은 일생 하고픈 일을 기어이 해냈던 대표적인 의욕 있는 여성이었다.
이때의 동인들이 운초(雲楚)김부용(金芙蓉)·경산(瓊山) 김경산(金瓊山)· 죽서(竹西) 박죽서(朴竹西)· 金錦園의 동생 경춘 김경춘 (瓊春 金瓊春) 등이었다. 금원(錦園)은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1850년(철종 1)에 『호동서락기(湖東西落記)』를 탈고하는 한편,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竹西詩集)』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일찍부터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대부분의 동인(同人)들은 기생 출신이거나 소실들이었는데 김운초(金雲楚)·박죽서(朴竹西)등은 저마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일류시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원주가 고향인 박주서와는 친교(親交)가 가장 깊었다. 이후 김씨는 동인들과 더불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운데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김금원의 시문은 『호동서락기』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김금원의 편지를 잇달아 받아보고
벗이 날 위로하려 재삼 편질 보내니,
몇 줄 안 된 글이지만 그 뜻은 넘쳐라.
변변치 못한 술일만정 약이 되나니,
시든 꽃 비록 있다지만 쉬 떨어질레라.
저마다들 병을 얻어 서로 찾지 못했지만,
혼자 지내기 좋아하는게 그 어찌 인정이랴.
여러 벗님네들 문안 받기 부끄러우니,
속세 떠나 살자던 생각 도리어 옅어져라.
박죽서(朴竹西) - 『죽서시집(竹西詩集)』
금원김씨錦園金氏 의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에는 27세의 나이로 문명을 떨쳐,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헌종 11)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경산(瓊山)·박죽서(朴竹西)·경춘(瓊春) 등이었다.
1850년(철종 1)에는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가사나 바느질 대신 글공부를 했다. 경서와 사서의 대략을 통하고 옛 문장들을 본받아 시와 문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열네 살에 부모 허락을 받고 남장(男裝)을 한 채 여행을 떠난다.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을 거쳐 금강산 일대를 마음껏 누비고 관동팔경을 빠짐없이 유람한 후 설악산을 관통하였다. 한양을 섭렵한 후 그는 첫 여행을 멈췄다.
‘여자가 남자의 복색을 갖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침이 옳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후 그는 여성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고, 29세가 되던 해 의주부윤의 벼슬을 받은 남편을 따라 평양을 유람하고 의주에서 2년을 지낸다. 31세가 되던 해 벼슬에서 물러난 김덕희와 함께 한양 용산 지역에 있던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면서 여성 시회(詩會)를 조직하여 19세기 여성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34세가 되던 1850년 봄날 자신이 여행했던 기록들을 모아 ‘호동서락기’를 완성하였다. 1851년에서 1856년 사이의 어느 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19세기 조선 여성문학사의 중심에 우뚝 선 그녀가 바로 김금원(金錦園)이었다.
그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야만국이 아닌 조선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만 가난한 집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했다. 총명하고 넓은 식견을 가졌어도 여성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슬퍼하였다. 강한 여성의식은 동생인 경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금원의 눈에 비친 경춘은 외모와 문학적 자질이 뛰어나 고금(古今)에서 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금원은 ‘경춘이 규중의 여자였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했음’을 애석해했다.
의주 생활 2년간 보았던 풍경 중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남다른 기녀들의 모습이었다. 금원이 기록한 기녀들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군복을 입고는 굳센 말에 올라타 대오를 갖추고, 호각과 북소리에 맞춰 마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였다. 삼호정에서 지냈던 시간 역시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주체적이었다. 운초(雲楚)라 불렸던 김부용(金芙蓉),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 등과 함께 시회를 주도했다. 이 모임을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으로 칭하기도 한다. 특히 금원은 당대 최고의 문인인 홍한주(洪翰周), 신위(申緯), 서유영(徐有英) 등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삼호정시단 활동은 동우회 수준을 넘어 여성문학사의 지평을 넓혔다.
금원은 기괴한 곳을 탐색하고 이름난 곳을 여행했던 사실에 대하여 ‘남자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평생지기였던 운초 역시 금원을 여자 중 영웅호걸이라 불렀고 남자가 되지 못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음을 슬퍼하였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