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1 章 제삼대(第三代) 무림전주(武林殿主)
그날, 냉운은 불사검제의 세 가지 비급을 읽다가 한 가지 엄청난 사
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불사검제의 무공이 너무도 심오해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알
지 못하는 냉운이 익힐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큰일이군."
검을 어떻게 쥐는지도 모르는 냉운이 불사검제의 상승검도를 어찌 익
히겠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냉운은 낙담하다가 아주 쉬운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하하……, 우선 다른 절기를 익히고 나중에 불사검제 사부의 절기를
익히면 되지 않는가? 내게는 많은 비급이 있지 않는가?"
냉운은 웃으며 품안에서 몇 권의 비급을 꺼냈다.
우선 비룡신군의 비룡경이 있었다.
당금 강호에서 천하제일로 불려지는 절학, 그것은 냉운이 얻은 비급
중 가장 미약한 무공비급이었다.
그 다음 천축혈마의 혈마경이었다.
무영천존의 무영비급,
귀검마성의 검보,
천뢰상인의 천뢰경,
도합 다섯 가지 비급이었다.
그 정도라면 익히는 데 곤란함이 없을 것 같았다.
"우선 비룡경을 터득하자."
냉운은 다른 비급들을 한데 놓아두고 비룡경 안의 절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룡경을 펼치자 정성껏 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비룡경을 익히는 자는 절대 자만해서는 안 된다. 비룡경은 일신을
수호할 뿐 천하의 절기라 불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무공이 아니라
정의를 수호하는 마음이다.>
일생을 백도를 위해 헌신한 비룡신군. 무림기인전의 관문에 걸려 외
팔이에 내공의 절반을 상실했는데도 부나비처럼 날아드는 무림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 년 간을 절곡 입구에서 허비하지 않았던가.
냉운은 비룡신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인이다. 그분을 무공으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냉운은 보다 경건한 마음이 되어 비룡경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 수록된 것은 내공권장금지공(內功拳掌擒指功) 등 무림의 제
반절기였다. 냉운은 글을 처음 읽는 초동의 심정이 되어 비룡경의 재
반절기를 낱낱이 읽어 나갔다.
처음에는 생소했으나 반복해 읽는 동안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한 천하제일의 기재. 심오한 무예의 세계는 학문과
도 일맥상통한지라 차츰 그 오의를 깨닫게 되었다.
냉운은 몸으로 익힐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비룡경의 내용을 숙지했다.
눈을 감고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게 되었을 때 다른 비급들을
읽기 시작했다.
불사전에 들고 나서 열흘이 지났을까.
냉운은 오음절맥의 신효를 이용해 여러 가지 비급의 내용을 완전히
외우게 되었다.
알지는 못하나 외우는 것은 마치게 된 냉운은 오음절맥을 치유시킬
때가 되었다고 여기며 세 개 옥병을 꺼내놓았다.
그는 그 약효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을 다 복용할 필요는 없다."
냉운은 그 중 삼선단이라는 약병은 건드리지 않고, 남은 두 개 약병
의 뚜껑을 따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만년옥지액과 만년화구내단은 극음극양(極陰極陽)의 상극성(相極性)
을 갖고 있는 영약이 아닌가!
불과 얼음이 뒤섞이면 어찌 되겠는가?
하나, 냉운은 그것을 모르고 한꺼번에 복용할 바보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극성의 성질을 이용할 요량으로 한꺼번에 극음극양
의 영약을 복용한 천하의 기재였다.
몸의 반은 얼고 반은 타는 듯했다.
천년옥지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즉사했으리라.
하나, 냉운은 약효를 충분히 이길 만한 근골(根骨)의 소유자가 된 후
였다.
고통이 강했으나 참을 정도였다.
"으음……."
뜨거운 기운과 찬 기운이 부딪치며 몸이 쪼개지는 듯 괴로웠다. 오음
절맥 부위가 달구어진 젓가락으로 지져지는 듯했다.
우르르르릉 ―!
열류(熱流)와 빙하(氷河)가 한데 맞부딪치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 경락(經絡)이 달구어졌다 식었다 하며 몸이 탈태환골(脫胎環骨) 되
어갔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산사태에 쓸리는 잡초같이 한순간 와르르 씻기
우며 전과 다른 구조를 갖게 되었다.
즉,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기운용이 빨라지고 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고 크게 다쳐도 쉽게 낫는 놀라운 신체가 된
다는 말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웅!
냉운은 백회혈(百會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개정(開頂)의 순간이었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 시원하게 뚫리며 몸이 깃털로 변해 하늘로 나
는 듯 가볍게 느껴졌다.
"으음……."
냉운은 고통이 끝나고 희열이 시작됨을 느끼며 계속 운기행공에 들어
갔다.
아주 오래 지속될 운기행공이었다.
그의 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몸 주위 흰 기류가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공지기(內功之氣)가 무형(無形)에서 유형(有形)으로 화해 몸 주위
에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 *
무림인들이 꿈에서라도 가고 싶어하는 장소가 있다.
창오산(蒼梧山) 무림기인전이 바로 그곳이다.
신비에 휩싸여 외인의 출입을 영원히 금하고 있는 듯한 무림기인전
안에서 살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약관(弱冠) 스물.
용모는 하늘의 선물이라 할 정도로 지극히 빼어났고, 마음의 광명정
대함은 나이답지 않게 호호탕탕한 청년이 바로 무림기인전의 두 번째
주인이었다.
무림기인전 안.
지하 연공실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검법(劍法)을 연
마하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오리알 만한 철환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져 항상 냉기를 뿜어내는 철환의 빛은
검은빛이었다.
청년은 검환을 응시하다가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무형의 진기가 실낱같이 퍼지며 철환의 표면으로 퍼져 나갔고, 맑은
쇳소리와 함께 철환이 퍼져 세 자 길이 흑색 보검으로 변했다.
거의 같은 순간, 검은 청년의 손에 의해 부챗살 펴지듯 펼쳐지며 팔
방을 가르고 있었다.
"귀검팔절식(鬼劍八絶式)!"
청년은 크게 소리치며 여덟 초 검식을 잇달아 시전했다가 가볍게 거
두어들였다.
스스슥 ―.
벽면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청년이 검에 검기(劍氣)를 일으켰기 때
문이었다. 검신이 아닌 검기로 사물을 베는 경지. 무공이 입신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검을 쳐내는 속도였다.
도합 팔 초로 이루어진 귀검팔절식. 일 초가 아홉 식으로 이루어졌으
니, 그의 검은 수유의 순간 칠십이 번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벽면에 새겨진 거미줄 같은 검흔.
벽면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면 눈을 감을 시간도 갖지 못하고 시체로
화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공할 검초를 전개한 그의 표정이었다.
"귀검마성의 검식은 쾌속하고 초절하군. 하나, 살기가 지나치다. 광
명정대하지 못하니 위력은 극이 될 수 없다."
청년은 검환을 거두며 한 자루의 보검을 주워 들었다.
백금 검집이 고색창연했고, 오색 검술이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불사어검(不死馭劍)을 터득했으니 한 번 시험해 귀검팔절식과 비교
해 봐야겠군."
청년은 중얼거리며 검자루에 붙어 있는 조그만 단추를 눌렀다.
강철음이 유난히 날카롭게 퍼져 나갔다.
직후, 용명(龍鳴) 같은 검명(劍鳴)과 함께 검신(劍身)이 나타나 석실
안을 환히 밝혔다.
그것도 잠깐, 청년이 기합과 함께 검을 흔들자 그의 손을 떠나 석실
을 빙빙 돌며 금빛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검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사실 금검은 청년이 만들어 내는 내공력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중이
었다.
윙!
검이 수직으로 솟아올라 천장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가 급히 떨어져
내렸다.
파파팟!
돌바닥에서 모래가 피워 올랐다.
그것도 잠시, 검은 다시 방향을 틀어 사방 벽을 길게 그어대며 비룡(
飛龍)같이 움직였다.
"하하하……!"
청년은 손을 흔들어 흡인력을 발휘해 냈다.
천지를 찢을 듯하던 보검이 기세를 꺾고 청년의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었다. 검신은 흠집 하나 없었다.
"과연 명검이다."
청년은 흐뭇한 표정을 하고 검을 검집 안으로 회수했다.
"귀검은 다만 검강으로 사물을 벨 뿐이다. 불사어검은 심검(心劍)의
경지를 초월했으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하다가 이내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며칠이 지났을까? 모든 것을 익힌 후이거늘, 기인전이 봉쇄되
어 강호로 나가지 못하다니……."
그는 무림기인전주 냉운이었다.
냉운은 불사검제의 마지막 검학을 전개한 것으로 무공 수련을 끝마쳤
다. 비룡경을 위시한 혈마경, 무영비급 등등의 무공도 완벽히 익힌
후였다.
이제껏 피나는 수련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엄청
난 시련을 극복했기에 천 일이 되기 전 연공을 마칠 수 있게 된 냉운
은 무료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익힌 무공들은 한 시절을 풍미한 절세의 무공들, 그것을 익히면
서 수양의 도 역시 높아져 있었다.
그의 몸에는 태산을 일거에 무너뜨릴 힘이 잠복해 있다. 그 힘을 사
용한다면 기인전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후후……, 사부께서 무공의 완성만을 바랬다면 구태여 천 일의 기간
을 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께선 유지를 진정으로 받들 후계자를
원하신 것이다."
냉운은 불사검제가 남긴 뜻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정의를 수호하는 마음이다.>
비룡경 안의 글귀가 새삼 떠오른다.
불사검제 역시 후인이 무공을 얻어 세상을 어지럽힘을 염려했기에 천
일의 기한을 둔 것이리라.
냉운은 무료하게 며칠을 보내다가 뭔가 궁리를 해냈다.
"그렇지."
냉운은 쾌재를 부르며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냉운은 불사전 어귀에 서서 가짜 불사전 쪽을 바라보게 되
었다.
그 안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냉운은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 중 단 하나, 요지천마의 백골을
유심히 살폈다.
"요지천마의 무공은 사부님을 제외한 무수한 고수 중 최고라고 하지
않는가? 오대불귀객 중 다른 네 사람이 절기를 남겼으니, 요지천마도
절기를 남겼을 것이다."
냉운은 중얼거리며 몸을 날렸다.
휙!
그는 평행으로 오 장을 날아 허공 중에 몸을 멈추었다.
비영(飛影), 환영(幻影), 추영(追影), 잠영(潛影), 탈영(脫影)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소리마저 감춰지는 무영신법(無影身法). 냉운이 이
룩한 경지는 비급을 남긴 무영천존도 경험하지 못했던 지고한 경지였
다.
냉운은 허공에서 진기를 돌리며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능공섭물진기(凌空攝物眞氣)가 일어나 오보단장산으로 죽은 요지천마
의 백골을 허공으로 떠오르게 했다.
"하하……!"
냉운은 득의해 웃으며 다시 불사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요지천마의 백골이 곧 냉운의 곁으로 떨어졌다.
"백골이라도 반갑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냉운은 중얼거리다가 백골의 옷섶을 뒤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권의 양피지 비급이 손에 쥐어졌다.
<천마인구결(天魔刃口訣)>
겉장에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냉운은 득의해하며 겉장을 열어 보았다.
요지천마가 적은 글이 눈 안에 들어왔다.
<노부는 요지천마라는 사람이다. 노부는 천하제일인이라 불렸으나 불
사검제라는 위인에게 패하게 되었다. 노부는 그 수모를 참을 수 없어
폐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폐관하던 노부는 결국 불사
검제를 꺾을 무공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을 여기 적는다. 천마인(
天魔印)이라는 아주 무서운 수법이다. 천마인의 창시자는 천마왕(天
魔王)이다. 그는 구절마제의 사조(師祖) 신마(神魔)와 함께 쌍마(雙
魔)라 불리우던 사람이었다. 여기 수록된 천마인은 신마의 혈화천지
참(血化天地斬)과 함께 마공쌍절(魔功雙絶)로 불린다. 혈화천지참이
실전되었으니, 천마인은 마공 중 최고 위력이다.>
그 다음부터 천마인 구결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주 놀라운 마공이었다.
사실 냉운은 이미 몇 가지 마공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익힌 마공은 천축혈마의 혈마경과 귀검마성의 마검이었다. 두
가지 모두 놀라운 마공이었다. 하나, 천마인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
었다.
천뢰상인이 남긴 무당 절학 천뢰신강은 가장 위력적인 강기( 氣)라
고 불리우는데 천마인보다는 약하다.
천마인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상대를 살려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천마인은 어떠한 호신강기(護身 氣)라도 박살을 낼 수 있고, 심지어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도 박살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사용할 때 손바닥이 혈색(血色)으로 물들고 눈알이
핏빛으로 물든다는 것이었다.
마귀와 같은 형상이 되는 동시에 마음속이 마성(魔星)으로 가득 차게
된다.
"너무도 두려운 마공이다."
냉운이 천마인을 익히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마공을 익힌다면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
냉운은 천마인구결의 겉장을 덮었다.
하나, 그는 곧 마음을 바꿔 겉장을 열고 구결을 읽게 되었다.
"마공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위력이 결정된다. 무공이라는 것은 결국
한 뿌리에서 자라난 여러 가지가 아닌가?"
냉운은 마공을 익혀 올바르게 쓰리라 생각하고 천마인 수련에 들어가
는 것이었다.
다시 알 수 없는 긴 시간이 흘렀다.
냉운은 겉보기에는 온화하나 사실 지극히 강한 청년 고수로 변모한
채 기인전이 열릴 순간을 기다리며 소일했다.
책 읽기가 하루 일과의 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내공 연마였다.
* * *
딱딱한 돌침상 위.
정좌하고 운기조식(運氣調息)하고 있는 약관 청년 하나가 있었다.
봉황(鳳凰) 같은 눈매를 지닌 청년이었다. 피부 빛이 지나치게 흰 것
이 흠일 뿐,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용모였다.
그의 코에서 두 줄기 흰 기류가 흘러나왔다가 다시 코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내공이 등봉조극(登蓬造極)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나이를 생각한다면 믿어지지 않는 성취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운기행공하고 있던 청년은 돌침상이 흔들리는 것을 알고 운기조식을
거두며 눈을 떴다.
우르르릉 ―!
사방 벽이 흔들흔들거렸다.
"아, 처음 있는 일이다.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인가?"
그는 얼른 침상 아래로 내려서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일순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천장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고, 무엇인
가 돌무더기와 함께 떨어져 내려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무 상자 하나가 천장이 무너지는 통에 떨어져 내리며 박살이 난 것
이다.
나무 상자가 부서지며 돌바닥에 흩어진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다. 우
선 붉은 보자기로 싼 물건 하나가 있었고, 한 개 네모난 금상자가 있
었다.
그리고 봉서 하나가 있었다.
청년은 얼른 봉서를 주워 들고 떨리는 손으로 봉서의 붙여진 부분을
뜯어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천 일이 지나는 순간, 이것을 보게 되리라. 제자에게 한 벌 새 옷과
보물 약간을 전한다. 그것을 갖고 밖으로 나가거라.>
청년에게 매우 낯익은 필체였다.
"드, 드디어 천 일이 지났구나!"
감격해하는 청년은 천 일 전, 이곳 무림 기인전에 들었던 냉운이었다
. 냉운은 사부의 배려가 한 치 어김없다는 데 감탄해하며 보따리를
끌러 보았다.
깨끗한 흑삼(黑衫) 한 벌이 들어 있었다.
"천잠사(天蠶絲)로 짠 옷이군."
냉운은 그것이 수화(水火)와 도검(刀劍)을 막는다는 천잠사의라는 것
을 알고 불사검제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그는 몸을 씻은 후 옷을 걸치리라 생각하며, 옷 보따리와 함께 떨어
져 내린 금상자 뚜껑을 열었다.
보광이 눈을 아리게 했다.
금은(金銀) 덩이와 용안만한 명주가 가로 일곱 치 세로 일곱 치, 그
리고 높이 두 치 되는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값진 것은 황궁에도 없다는 열두 알 봉황주(鳳凰珠)였다.
봉황주 한 알의 값은 일 성을 살 만했다.
그것은 밀국의 보물이었다.
금상자 안쪽에 적힌 글이 있었다.
<결코 남의 것을 취하지 말거라! 되도록 남에게 베풀어 주거라. 노부
불사검제는 고집스럽고 괴팍해 많은 원성을 들었다. 노부가 못다 한
적선을 세상에 베풀어라!>
불사검제의 친필이었다.
"사부님의 뜻을 이어받겠습니다."
냉운은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리라 결심하며 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얼마 후, 냉운은 청수(淸水)로 목욕해 깨끗해진 상태가 되어 돌아와
천잠사의를 걸쳤다.
그 외 신발과 흑색 문사건(文士巾)도 있었다.
냉운은 옷의 감촉이 아주 좋다는 것을 알고 흐뭇해하며 근처를 돌며
갖고 나갈 것을 취했다.
여러 가지 비급은 싸서 잘 묻었다.
강호로 갖고 나갈 경우 분실할 염려가 있고, 없앤다는 것은 비급을
남긴 사람에 대해 죄를 짓는 것 같아서였다.
냉운은 불사신검(不死神劍)과 귀검환(鬼劍環), 그리고 원래 지니고
있었던 물건과 그 상자를 지니고 불사전을 나서게 되었다.
떠나기 전 불사검제의 시신에 대고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강호로 나가 뜻을 이룬 후, 다시 오겠습니다."
냉운은 사 배한 후 불사전을 나섰다.
오보단장산이 깔려 있는 가짜 불사전을 넘는 데는 탄지지간이 소모되
었다.
불사지문은 움직이지 않은 채 냉운을 배웅했다.
극락관도 변화하지 않고 있었다. 냉운은 귀검환과 귀검팔절식을 남긴
귀검마성의 백골을 안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냉운은 지옥도를 유유히 빠져나와 무림기인전 밖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한 가지 미루어 두었던 일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신법
을 시전했다.
육룡이 몸을 뒤집는 듯한 몸놀림으로 수십 장을 가로지른 냉운은 한
구 백골이 누워 있는 장소에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바로 천축혈마의 백골이었다.
"전에는 이것을 들지 못했었지!"
냉운은 천축혈마의 허리춤에 있는 은빛 보따리를 바라보며 손을 끌어
당기는 자세를 취했다.
경미한 파공음과 함께 묵직한 보따리가 손아귀 안으로 빨려들었다.
보따리를 끄르자 날이 무딘 계도(戒刀) 하나가 나타났다.
<혈마계도(血魔戒刀)>
검신에 새겨진 네 자 글씨였다.
하나, 그것은 보통 백관계도(百貫戒刀)라 불렸다. 길이가 두 자 정도
이나 무게가 백 관이나 되는 기이한 쇠붙이이기 때문이었다.
"하하……, 이것을 들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냉운은 웃으며 백관계도의 손잡이를 잡고 미간과 평행히 세웠다.
그는 한 가지 구결을 외우며 백관계도를 힘차게 쳐냈다.
우르르르릉 ―!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백관계도의 끝에서 혈색(血色) 도강(刀 )이 일어나 십 장 밖으로 폭
사해 나갔다.
"혈마도(血魔刀)!"
냉운의 부르짖음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꽝!
핏빛 도강에 부딪치게 된 언덕의 한 부분이 산사태를 만들며 붕괴되
었다.
"하하하……, 천축국 무공이 과연 대단하군."
냉운은 웃으며 백관계도를 다시 은빛 보자기로 둘둘 말아 지니고 허
리띠에 찼다.
직후, 그는 백장하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천축혈마는 백관계도를 지녔기에 백장하를 다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히 죽어갔다고 유언했다. 하나, 불사검제 사부의 전인은 백관계
도를 지니고도 백장하를 가로지르리라.'
냉운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며 몸을 끌어올렸다.
흑삼 자락이 펄럭이며 흑선이 그어졌다. 그의 몸이 천천히 상승되었
다가 갑자기 번개같이 움직여 가는 것이다.
파공성이 아주 요란했다.
사람이 있었다면 검은 별똥별이 백장하를 길게 가로지르는 장쾌한 광
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냉운은 허공에서 진기를 바꿔 가며 신법을 절정 수위로 유지했다.
백 장은 아주 먼 거리였다. 무궁한 내공을 지닌 그였으나 칠십여 장
을 난 다음 진기의 흐트러짐을 느꼈다. 그 순간 중심을 잃은 듯 휘청
이며 독액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만독불침의 신체도 녹이는 백장하의 독액, 냉운은 발이 독액에 닿으
려는 순간 재빨리 진기를 순환시키며 발등을 밟고 날아올랐고, 삼십
여 장을 경쾌히 가로지르며 백장하 건너 마른땅에 내려섰다.
"하하하……, 드디어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군."
냉운은 백관계도를 지닌 채 백장하를 가로넘은 것이다. 천축혈마가
그 광경을 봤다면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천령개를 부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냉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낯익은 장소를 찾게 되었다.
"칠채를 흘려내던 벽독신주를 빠뜨린 장소가 여기군."
냉운은 백장하를 굽어보며 안력을 돋구었다.
두 눈에서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냉운은 기름같이 끈끈한 독수(毒水) 밑에 잠겨 있는 한 알 영롱한 구
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잃어서는 안 되지. 혈영신마의 선물이었으니……."
냉운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우르르릉 ―!
독수가 샘물같이 솟아올랐으며, 진득한 독액 속에서 한 알의 영롱한
보주가 튀어나왔다.
벽독신주였다.
벽독신주는 독액 속에서도 그 형용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하……, 오래 기다렸다."
냉운은 흡인력으로 빨아올린 벽독신주를 손바닥 안에 쥐며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잊지 않으리…….'
그는 감사해하는 표정으로 벽독신주를 응시하다가 소매 속으로 넣으
며 침사관 위를 치달렸다.
기러기 털도 뜨지 못하는 침사도 냉운을 가라앉히게 하지 못했다.
냉운은 곧 검은 점 하나로 변했다.
그는 처량한 소년으로 들어와 절세고수로 화신해 돌아가는 셈이었다.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하늘이 큰 선물을 주었으리라.
불귀지처(不歸之處) 무림기인전의 전설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무림기인전은 이제 불귀지처가 아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삼 년을 보내고 돌아나가는 사람이 있으니, 이제
불귀지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