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13일 대공세를 벌여 국군이 지키고 있던 금성
돌출부를 치고 들어왔다. 공격에 나서기 직전 중공군의 한 부대가 국군 방어지역을
작은 모형으로 만든 뒤 지형 숙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한국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는 여러 나라의 군대가 뛰어들었다. 미군을 비롯해 유엔 참전 16개 국가, 그리고 공산 측에서는 북한군을 돕기 위해 중국의 군대가 전쟁에 참여했다. 각 나라 군대는 그 나라의 인문적인 환경이 빚어내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전투 유형이 있었다.
각 전투 장면에서 내가 가끔씩 일부 참전 국가 군대의 특징을 서술한 적이 있다. 영국군은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오후 4시쯤이 되면 차와 쿠키 등의 과자류를 마시고 먹는 ‘티 타임’을 즐기지만 책임의식과 의무감이 매우 뛰어나다는 식의 설명 말이다.
미군은 밤의 행군(行軍)을 끔찍이도 싫어해 ‘낮에는 호랑이, 밤에는 고양이’라는 말을 들었다. 미군의 전체적인 전법(戰法)은 대량의 장비와 물자를 동원해 자신에게 다가온 적을 우직하게 밀어내는 식이었다. 따라서 거대한 시스템이 힘차게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느껴지곤 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중공군은 앞에서도 자주 언급한 그대로다. 그들은 ‘밤의 군대’였다. 중공군은 미군과는 전혀 다르게 ‘밤에는 호랑이, 낮에는 고양이’였다. 그들이 훤하게 밝은 대낮에 공격해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매번의 공격에서 드러나는 중공군의 가장 큰 특징은 은밀함과 기만(欺瞞)이다. 정면 대결은 중공군에 아주 찾아보기 힘든 전투 유형이다. 그들은 늘 안개처럼 은밀히 다가와 상대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곳만을 골라 치고 들어온다.
상대의 정면에 나타나 공격을 펼칠 때도 그들은 묘한 심리전부터 펼친다. 피리와 꽹과리라는 도구를 사용해 컴컴한 밤중에 상대의 감각을 교란하는 데 주력한다. 이어 펼쳐지는 전법은 매복과 우회, 그리고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노리는 포위다.
개전 초반인 1950년 10월 평북 운산에서 맞닥뜨린 중공군이 그랬고, 51년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의 중공군도 그랬다.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은 그런 전통적인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은밀함과 기만성,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우회와 매복, 그리고 포위로 이어지는 패턴은 늘 같았다.
53년 7월 들어 그런 중공군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전선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두고 판단해 봤을 때, 중공군은 역시 예상대로 금성 돌출부를 향해 다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의 정면을 노리고 나타난 그때의 중공군 병력은 무려 5개 군(軍)이었다. 그들의 편제상으로, 1개 군은 한국이나 미국의 1개 군단에 해당했다.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중공군 1개 군에는 사단 수가 3개였다. 육군본부가 펴낸 『현리-한계 전투』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중공군 1개 사단은 평균적으로 1만6000여 명의 병력이었다. 따라서 중공군 5개 군이 금성 돌출부 전면에 포진했다면, 어림잡아 약 24만 명의 병력이 모여들었다는 얘기다.
금성 돌출부는 전체적으로 31㎞의 전면이었다. 53년 7월 이곳에는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9사단과 수도사단, 국군 2군단 소속의 국군 6·8·3사단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돼 있었다. 예비로 빠졌던 국군 5사단까지 포함하면 모두 국군 6개 사단이 방어에 나섰던 셈이다.
그 전면에 15개 사단, 24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국군이 2.5배의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자주 거론했던 51년의 강원도 현리 전투, 7월 공세에 앞서 벌어졌던 53년 6월의 금성 돌출부 일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차원의 공세가 벌어질 판이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그런 움직임이 정보망에 속속 잡히자 아군의 대응도 긴장감을 높이면서 이뤄졌다. 도쿄에 있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일본에 주둔 중이던 187 공수연대전투단과 미군 24사단을 한국으로 공수해, 금성 돌출부 후방에 배치했다. 금성 돌출부의 모든 전선은 그런 긴장감이 훨씬 높았다. 돌출부 전면을 이끄는 국군 2군단은 물론이고, 좌우로 인접한 미 9군단과 10군단도 경계심을 높인 채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추측하건대, 그에 앞서 벌인 6월 공세에서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승리를 충분히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국군만을 노리고 펼쳤던 과거의 공격에서 대승을 거뒀던 것에 비해, 6월 공세는 크게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중공군의 7월 공세는 휴전을 직전에 둔 시점에서의 최대 공격이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것은 금성 돌출부 전면에 모여든 중공군의 압도적인 병력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한반도 전역을 뒤덮은 검은 구름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밤낮 없이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는 땅 곳곳을 적시고 있었다. 대규모 중공군 공세를 예감하는 시점에서 그런 비는 결코 반가운 대상이 아니었다. 새카맣게 몰려오는 중공군은 그런 어두운 구름 속에 몸을 감출 것이고, 비 내리는 날 일몰시각 뒤의 짙은 어둠은 역시 그런 중공군을 감쌀 것이다.
거대 병력의 중공군을 막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미군과 유엔 참전국 공군의 공중 폭격 지원은 그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줄곧 쏟아지는 비는 전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마음속 우려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중공군은 북쪽으로 솟아 자신의 전선 상황을 관리하는 데 매우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던 금성의 돌출부를 잘라내는 데 모든 힘을 쏟을 태세였다. 53년 7월의 한반도 상공을 덮은 먹구름처럼 중공군은 새카맣게 그 돌출부의 북면(北面)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7월 중순에 다가가면서 전선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금성 돌출부 전면에서는 소규모 국지전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적막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가 이와 같을까.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