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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카나다 400건 이상 동시다발 산불 발생
캐나다가 불타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400건 이상의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타오르면서 역대급 '산불 시즌'을 나고 있다. 캐나다 국토 380만헥타르(약 3만8000㎢)는 이미 불에 탔다. 한국(남한) 면적(10만㎢)의 3분의 1이 넘는 규모다. 산불이 만들어낸 짙은 연기는 바람을 타고 국경을 넘어 뉴욕 등 미국 동부 지역까지 퍼졌다. 이례적인 산불 확산의 원인으로는 기후 변화가 꼽힌다. 때 이른 폭염과 건조한 날씨가 만든 재난이라는 것이다.
2022년 미해군 전투기 훈련비행 중 캘리포니아 사막에 추락. 조종사 사망
2019년 이정은 미국 LPGA 최고권위대회 US 오픈 우승.
2018년 비올리스트 김세준 제4회 도쿄 국제 비올라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첫 2위
2016년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사망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 3차례에 걸친 프로권투 헤비급 챔피언 통산19차례 방어 프로복싱 통산전적 56승(37KO)5패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양심적 병역거부 실천, 인종차별 반대투쟁인 흑인민권운동 활발히 참여,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 BB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
2015년 이승엽(삼성)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400 홈런(국내 기준, 일본 8년 기록 합치면 559개)
2015년 애국지사 최도균 선생 별세
애국지사 최도균(92) 선생이 2015년6월3일 오전 7시 50분 별세했다.
평북 영변 출신으로 일본 동경문리대 재학 중 독립운동을 위해 ‘나라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1943년 체포돼 3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귀국해 독립유공자협회 편집장과 부회장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1 중국 남부지역 50년 만에 최악의 홍수 사망 175명 실종 86명
2010년 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
유 전 총리는 191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1937년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을 마쳤다.
1951년 한국은행 도쿄(東京)지점장을 시작으로 뉴욕사무소장, 부총재 등을 거쳐 1961년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1962년엔 상공부 장관, 이듬해인 1963년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내며 당시 박정희 정부의 국가 경제발전 전략을 짜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82년 제15대 국무총리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대한적십자사 총재, 한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비기업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제19·20대 전경련 회장을 맡아 산업화 시대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경련 명예회장, 대신경제연구소 회장, 롯데제과 고문, 호남석유화학 회장 등도 역임했다.
영어가 유창했던 유 전 총리는 한국무역협회장이었던 1981년엔 '88서울올림픽' 유치 대표로 활약했다. 특히 당시 유치위원장이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도와 올림픽 유치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10년 6월 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2009년 원로배우 도금봉씨 별세
1950~60년대 은막을 풍미한 여배우 도금봉(79·본명 정옥순)씨 1933년 인천에서 태어난 도씨는 악극단 ’창공’에서 ’지일화’라는 예명으로 이름을 떨치다 1957년 ’황진이’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예명 도금봉은 영화계 데뷔 당시 황진이가 살았던 개성의 옛 이름인 송도의 도(都), 황진이가 즐긴 가야금의 금(琴), 그리고 영화계의 봉우리가 되라는 뜻의 봉(峰)을 한자씩 따 지은 것이다.
또 한국 최초의 공포영화라는 평도 받는 이용민 감독의 1965년작 ’살인마’에서 악녀 역할을 했고 이후 악녀 이미지가 추가됐다. 이듬해 ’목없는 미녀’, ’월하의 공동묘지’(1967), ’백골령의 마검’(1969) 등 공포 영화에 잇따라 출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육체파 배우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관순’(1959) 등의 역할도 소화, 영화배우 활동 초기부터 연기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1960-1970년대에는 정상급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도씨는 ’새댁’으로 제2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1963), ’작은 꿈이 꽃필 때’로 제1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2), ’토지’로 제1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4) 등을 수상했다. ’황진이’이후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0년대까지 TV 드라마에서 활동하다 1997년 전당포 노파로 분한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를 끝으로 40년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복집을 운영하며 두 아들과 평탄하게 살았으나 10여년전 사업을 정리한 뒤에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3일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타계했지만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고인의 유언으로 별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01년 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영화 ‘희랍인 조르바’와 ‘길’의 명배우 앤서니 퀸은 60년이 넘는 기간을 스크린에서 활약하며 ‘노틀담의 곱추’ ‘아라비아의 로렌스’ ‘25시’를 포함해 150여편이나 되는 출연작을 남겼다.
퀸은 1915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해 ‘가출옥’(1936)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생활 끝에 ‘혁명아 자파타’(1951)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따내면서 주목받았다. 이어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에서 생존 에너지로만 똘똘 뭉친 듯한 차력사 역을 맡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37년 세실 드밀 감독의 딸 캐서린과 첫 결혼을 했지만 리타 헤이워스를 비롯한 숱한 여배우들과 밀애를 나눴다. 1957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1993년 퀸이 비서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는 바람에 1997년 파경을 맞았다. 퀸의 자녀들은 81세의 나이에 낳아 화제가 된 마지막 아이를 포함해 13명에 달했다.
2001년 6월 3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별세했다. 86세였다.
2000년 지중해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됐다. 당시의 저택과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리스 고전 문헌을 통해서만 알려졌던 고대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약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이 2000년 6월 3일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역사적 가치와 보존 상태 등에서 이집트 투탕카멘 왕릉에 비견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 책임자 프랑크 고디오는 이날 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이시스 여신상을 공개했다. 그는 2년에 걸친 탐사 끝에 아부퀴르만 해저에서 1500여년 전 발생한 지진 또는 홍수로 수몰된 고대 도시 유적을 발견했으며, 당시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저택,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고 밝혔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인 파라오 시대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고대 도시는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여러 도시와의 무역을 통한 번영과 이시스 여신-헤라클레스 등을 모신 화려한 사원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 화려했던 헤라클레이온의 생활상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된 사원 등에 대해 기술했으며, 그리스 비극과 각종 여행담에도 이들 도시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만 약 1500년 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유물 중에는 기원전 7세기인 제26대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상, 이집트·그리스 시대 조각의 머리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1998년 독일 고속열차 탈선으로 100명 사망
독일 뮌헨을 출발, 시속 2백km로 함부르크를 향해 달리던 ICE(도시간 고속철) 열차가 1998년 6월 3일 오전 11시 하노버 북쪽 50km 지점에서 철로에 뛰어든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탈선, 최소한 1백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했다.
사고는 함부르크 남쪽 1백km지점인 에쉐데 역 부근을 지나던 고속열차가 고가도로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앞부분 4개 차량이 철로를 벗어나 도로 교각을 들이받아 일어났으며, 열차 객실 13량이 부서졌다.
이 충돌로 철로와 교차하는 도로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객실 2량을 덮쳤다. 사고열차는 최고시속이 2백80km로, 정원 7백59명에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 3백여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은 선로이상과 바퀴파손 등으로 밝혀졌다.
1995년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사망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리우회담 개최
1992년 6월 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가 개막됐다. `유엔환경개발회의 (UNCED)`란 공식 명칭의 이 회의는 정부 대표들이 참가한 지구정상회담과 민간 환경단체들이 개최한 지구포럼으로 이루어졌다. 지구정상회담의 경우 미국 등 114개국이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이 이끄는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178개국과 국제기구에서 8000여명이 참석했다.
지구포럼 역시 전세계로부터 약 7900개의 민간환경단체가 참가했다. 보통 `리우환경회의`로 불리게 된 이 회의는 경제개발로 인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지구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1991 일본 규슈 나가사키 현의 운젠다케 화산 폭발 사망 38명 행불 36명
1991년 정원식 총리서리 폭행사건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鄭元植-事件) 또는 외대 사태(外大事態)는 1991년 6월 3일 오후 18:30분 경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강당에서 당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어 교수직을 사퇴하는 정원식(鄭元植)에게 계란, 밀가루, 페인트, 짱돌, 소주병, 맥주병, 유리조각, 인분 등을 집단으로 투척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시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전교조를 불법화하고 전교조 인사들의 구속과 불이익 조치를 취한 데 대한 학생 운동권의 집단 반발이었다. 전교조 불법화 문제와 강경대 치사 사건과 학생운동가들의 연이은 분신 자살 사건, 시위 도중 도망치다가 동료 시위대에 깔려죽은 김귀정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학생운동권의 정부, 문교부 당국에 대한 반감은 거셌고, 전교조 불법화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의 집단 해고를 강행한 정원식은 운동권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계란과 밀가루, 페인트를 뒤집어 쓴 정원식의 사진이 각 일간지와 외국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6·3 외대 사태, 외대 계란 사건 등으로도 부른다.
1989년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 사망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86년 한국 축구 36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1978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75년 도피성이민 우려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3년 윤이상 동양인으로는 처음 베를린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뽑힘
1973년 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소련의 최신형 TU144 초음속 항공기가 1973년 6월 3일 파리교외 르브르제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항공쇼에서 시험비행중 귀빈석 스탠드를 저공비행으로 통과한 직후 공중폭발, 인근 주거지역에 추락하여 소련승무원 6명 전원을 포함한 8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지점인 구생빌르 마을에는 가옥 15채가 파괴됐고 1백여채가 기체파편의 낙하로 부분파손을 입었다.
에어 쇼의 마지막날인 이날 소련항공계의 자랑인 TU144기를 구경나온 30만명의 관중들은 귀빈석 위를 저공비행한 후 구름속으로 수직상승 하자마자 곧 폭음,화염과 함께 산산조각난 기체의 파편들이 떨어지는 극적인 추락현장을 목격했다. 이날 공중폭발한 초음속항공기 TU144는 영불합작 의 콩코드기의 유일한 경쟁자이였고 외형도 콩코드와 흡사했다. TU144기는 1968년에 처녀비행을 했고, 1970년 5월 21일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1972년 서독 폴란드 수교
1972년 미-영-프-소 베를린협정 정식 조인
1971년 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김종필의(1926~)의 정치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는 ‘2인자’와 ‘풍운아’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 곳곳에 흔적을 남긴 그의 정치 역정은 영광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김종필은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를 만나 대위 시절이던 1952년 2월 박정희의 조카인 박영옥과 결혼, 조카사위와 처삼촌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러 김종필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데타에 기획자로 깊숙이 참가했다. 5·16 성공 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군사정부의 두 번째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1963년 1월 9일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한 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3년 2월, 8개월간의 1차 외유에 나섰다.
1963년 10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귀국한 그는 그해 12월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뒤이어 공화당 당 의장으로 복귀했다
개헌 국민투표 때는 전국을 돌며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충성을 맹세해 1971년 6월 3일 풍운아 생활 10년 만에 국무총리로 기용되었다. 김종필은 1975년 12월까지 4년 6개월간 재임했으나 김형욱·이후락으로 이어지는 중앙정보부장의 전횡에 눌려 주요 국정에서는 소외되었다.
1969년 호남 정유공장 준공
1965년 미국 제미니4호 발사. 애드화이트 소령 미국 최초로 21분간 우주유영
미국의 2인용 유인위성 `제미니4호`가 1965년 6월 3일 발사돼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이 미국 최초로 21분간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소련의 레오노프 소령보다 3개월 늦은 것이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선회했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이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1964년 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5·16군사혁명 후 2년7개월 만에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첫 대규모 난관에 봉착했다. 한·일 간 국교수립을 서둘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구악 근절을 내세우면서 신악을 양산한 것도 반발을 부채질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면서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명이 거리로 진출한 것을 신호탄으로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부터 6월 3일까지 대학가와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 등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자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6월 3일 시위가 절정을 이룬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길은 수만명의 학생들과 경찰들로 뒤덮였다. 사태가 4·19를 방불케 하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후 9시40분,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점으로 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에 해제됐지만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
1963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1963년 6월 3일 로마 카톨릭의 교황 요한 23세가 오랫동안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881년 12월 25일 태어나 1953년 베네치아 대주교를 거쳐 1958년 10월 9일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261대 로마법왕으로 5년 재임하는 동안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가 남긴 업적은 크다. 그는 국가와 정치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힘썼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평민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서 교황으로 당선된지 몇 달만에 전 교황 비오12세가 19년 동안에 한 것보다 많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1962년 10월 11일에 카톨릭교공의회를 열었다. 이것은 2천년의 카톨릭교 사상 21번째의 공의회이며 근 백년 동안에 처음으로 열리는 회합이었다.
비(非) 카톨릭신자들에게도 유명했던 교황은 평화와 종교단결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세계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상당한 영항력을 행사했다. 요한23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인 바티스타 몬티니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바오로6세가 됐으며 6월 30일 바티칸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1963년 미국 노스웨스트항공 DC-10기 태평양 추락 사망 101명
1963년 시인 오상순 사망
1962년 프랑스 여객기 이륙도중 파리공항 추락 1백30여명 사망
1961년 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1961년 6월 3일 비엔나에서 역사적인 냉전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은 비엔나에 이틀간의 정상회담에서 여러 국제적인 현안에 합의하지 못했으나 양국은 적어도 대화를 재개했다. 대화재개 자체가 지난 1960년 5월 흐루시초프가 U2기 사건으로 결렬시킨 파리 정상회담에 비하면 성공적었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베를린의 미래와 위상에 관해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소련은 동베를린의 통제를 동독 당국에 넘겨주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국은 서베를린에 대한 소련 간섭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양 지도자는 라오스의 주권에 관해 제한된 합의에 도달했다. 라오스 정권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 게릴라에 의해 위협받아 왔다.
1959년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1959년 6월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140년 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영주에게 불과 얼마되지 않는 비용 만을 지불하고 싱가포르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인도로 가치가 없던 때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영국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후 反식민지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결국 이날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했다
1957년 미국 중동조약기구(METO)에 가입
1957년 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5년 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 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50 프랑스 등반대(대장 모리스 에르조그) 안나푸르나(‘수확의 여신’이라는 뜻) 제1봉(8,091m) 올라 사상처음으로 인류가 8,000m 넘는 산에 발을 디딤
1949년 국회, 전국무위원 인책사임안 가결
1948년 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일정이 차질을 빚은 것은 무슬림연맹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였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1947년 군정청, 산하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
1946년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는 `정읍 발언` 연설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해방정국에서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가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다고 판단.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더이상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보고 이같은 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지역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설득전을 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종전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과 세계적화전략에 과감히 맞설 것임을 다짐했다.
1946년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1943년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37년 영국왕 에드워드 8세 사랑 위해 왕위 포기하고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
1936년 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36년 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29년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 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24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사망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 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 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
1921년 소설가 유주현 출생
1917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6년 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5년 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1년 사찰령 공포
1910년 미국 작가 오 헨리 세상 떠남 『마지막 잎새』 『20년 후』
1905년 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출생
1903년 서울-수원 전신전화 개통
1902년 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
189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사망
1895년 청, 일본에 대만과 팽호도 할양
1894년 동학난 진압위해 청에 파병 요청. 이홍장 파병
1884(조선 고종 21) 미국 선교사 매클레이 포교와 육영사업 허가
1878(조선 고종 15) 강원도 간성의 건봉사 불 3,000여간 태움
1875년 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사망
1786년 추사 김정희 출생
1657년 영국의 생리학자 하비 사망
1646(조선 인조 24) 임경업 장군 청나라에서 풀려나 돌아옴
1338년 고려, 지진 피해
1116년 송나라의 대성악 고려에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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