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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못된 교장(校長)
어느 해 5월 8일, 어버이날 아침 9시.
부산시 북구 덕천동에 있는 ㄷ초등학교 운동장에 조회가 열리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며칠 전 학교에서 실시한 어버이날 기념 백일장에서 입상한 어린이에 대해 학교장 상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쉰두 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교장에 임용된 ㅇ교장이 단상에 올라가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는 입상 어린이들을 앞에 세우 놓고, 상장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정년을 한 해 앞둔 노 교무선생님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인다.
“이 어린이는 부모님께 효도를 하였으므로…….”
그때였다. 일부러 초청한 수십 명의 학부모 사이에서 얼른 보아 아흔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연세에 비해 무척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그만 두이소.”
순간 ㅇ교장의 얼굴엔 핏기가 싹 가시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표정을 고쳐 잡고 할머니를 쳐다보며 한마디 건네었다.
“할머니, 도대체 누구세요? 그리고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도 학생입니더. 아니 쫓겨난 학생 아닝교. 11년 동안 이 학교 뒷 건물에서 민 요며 한글을 공부해 오다가, 열흘 전 교장 선생님이 문을 닫는 바람에 갈 곳이 없 어져 버린 불쌍한 노인 학생이란 말입니더. 왜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꺼?”
“…… .”
학부모 석에서 웅성대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학부모도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효경에 이르기를 경로와 효친은 결국 같은 덕목이라고 했는데 우리 노인들을 쫓아낸 교장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효친 표창을 줄 자격이 있능기요?”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선생님들이 할머니를 제지하려 했으나, 워낙 할머니의 연세가 많은 데다 서슬이 시퍼런 터라,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치마를 들추더니, 속곳 호주머니에서 뭔가 하얀 천을 하나 끄집어내었다. 그러고는 그걸 힘차게 펼쳐 드는데, 아! 거기에는 서툰 글씨로 쓴 구호가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아리랑’을 부르게 해 달라.
그 순간이었다. 그게 마치 신호이기라고 한 듯 학교에서 빤히 마주 보이는 여섯 군데의 골목에서 하얀 한복으로 곱게 차려 입은 노인 학생들-할아버지와 할머니-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둘 셋 넷……이건 끝도 없다. 얼른 보아 400명은 됨직하다. 그러더니 그들은 삽시간에 운동장을 가득 메우곤, 마침내 스탠드까지 차지하고 만다. 그분들은 모두 손에 글씨를 쓴 하얀 천을 펼쳐 들고 있다.
노인들을 내모는 게 경로사상 실천인가
우리 민요 많이 불러 남북통일 앞당기자
‘극락’이란 글자 알아 우리 발로 극락 찾자.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앞서의 할머니가 구호를 선창하자, 나머지 모두가 복창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청려장 지팡이 - 명아주 줄기로 만든 장수 지팡이 -를 짚은 중풍 환자도 대여섯이나 된다. 얼른 보아 실어증까지 심하게 앓는 노인도 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앗지 마라
전통 윤리 말만 말고 행동으로 가르치자.
이쯤에서 운동장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ㅇ교장은 곤혹스런 표정인가 싶더니 교장실로 피해 버렸고, 어린이들은 처음엔 약간 호기심으로 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 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운동장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ㄷ초등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서 11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토요일 오후마다 노인 학교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는 구상모 선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 시대의 기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에게는 적어도 노인들과 일화가 엄청나게 많다. 그것도 그야말로 배꼽을 잡을 정도로 기상천외의 이야기들이다. 우선 몇 가지 소개해 보자.
엑스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는데, 노인 학생들이 어찌나 졸라대는지, 하는 수 없이 관광 희망자를 조사해 보았더니, 삽시간에 120명에 이른다. 버스 한 대당 40명씩 탄다고 해도 자그마치 석 대가 필요하다. 초등학교의 교감이 본업인 그에게는 인솔 자체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미 자기네들끼리 경비를 거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결심하였다.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자!
학교에는 병가를 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구상도 선생은 심한 긴장성 두통을 앓고 있었다. 동료들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2박3일이지 일요일이 끼인 터라, 이틀만 어떻게 요령을 피우면, 노인 학생들을 인솔해 갔다 와도 탄로 나지(?) 않을지 모르는 게 아닌가.
아무튼 그의 두통은 출발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하기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제일 먼저 구상모 선생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으니, 그깟 긴장이니 두통이니 하는 말 따위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사진을 몇 장 박을랍니꺼?”
“선생님요, 안 아프도록 박으이시소.”
게다가 일찌감치 흘러간 옛 노래, 예를 들어 ‘오동동 타령’이니 ‘항구의 사랑’ 따위를 불러 댄다. 단박에 차 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궂은 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냐//// 둘이서 걸어가던 남포동의 밤거리/ 지금은 떠나야 할 슬픔의 이 한밤/ 울어 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 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순간 어느 할머니가 구상모 선생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뺨에다 느닷없이 뽀뽀를 해 버리고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어느덧 구상모 선생의 온몸은 땀으로 젖는다. 반시간도 안 지나서 실장은 마이크를, 총무는 비닐봉지를 들고 맨 앞자리부터 훑어나가기 시작한다. 소위 오늘 필요한 최소한도의 공동 경비-기사 팁 따위-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뻔하지. 노래 한 곡씩 부르고 대신 천 원짜리나 오천 원짜리 지폐를 비닐봉지에 넣는 것이다.
이윽고 실장과 총무가 구상모 선생한테 다가오더니 하는 말이다.
“오늘 25만원 모았네예.”
그로부터 버스 안에서는 내내 노래잔치다. 학교를 벗어났으니 가슴에 맺힌 한을 그렇게라도 풀어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게 구상모 선생의 지론(?)이다. 다만 술이라도 한 잔씩 하고 나면, 아예 벨트를 걸고 복도에까지 나와서 줄기차게 춤추는 모습! 아닌 게 아니라 애간장을 다 녹일 만큼 불안하다.
속리산에서 일박을 하고 엑스포에 들르게 되었다. 그제야 구상모 선생은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도무지 자신이 없다. 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쩌다가 노인 학생들 한둘을 잃기라도 하면? 비록 120명 전원이 고무줄로 단단히 끈을 한 밀짚모자를 썼다지만, 어쩌다가 바람에라도 날려가 버렸을 땐 아마도 단단히 곤욕을 치러야 할 것이다. 구상모 선생은 겁이 덜컥 났다. 그래 입장하는 노인 학생들을 앞에 세워 두고 연설을 한다.
“절대 혼자 다녀서는 안 됩니다. 일행을 잃어버리면 찾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글을 모르신다 아닙니꺼. 무조건 앞 사람의 꽁무니를 잡으이 소. 혼자서 화장실은 절대 가지 마이소. 알라(어린애)도 아니고 까짓 오줌 하나 못 참습니꺼. 알겠지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만큼, 구상모 선생은 정신없는 가운데 그 넓은 데를 헤매고 다녔다. 도중 도중의 정확한 인원 점검 따윈 아예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오직 노인 학생들을 따라 다니며 밀짚모자 숫자 세기에만 정신을 쏟다보니 하루해가 넘어 가고 있었다.
파김치가 되어 버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도 그 많은 단체, 특히 노인 팀 중에 그들이 가장 질서가 있어 보이는지, 방송국 기자가 느닷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아닌가. 구상모 선생은 짐짓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런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구상모 선생은 무심결에 노인 학생들과 기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란 친구가 이러는 게 아닌가!
“내일 아침 7시에 전국에 방영됩니다.”
그 소릴 듣고 구상모 선생은 얼른 자리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만약 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교감이라는 사람이 학교에 병가를 내 놓고 엑스포에 모습을 드러내 놓았다며, 직원들이 경악할 것을 빤한 노릇. 재수 없으려면 자빠져도 코를 깬다는데, 이건 방송국 때문에 신세 망쳤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니 자칫하면 징계감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말이다. 상사가 이런 불호령을 내린다 치자.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든지 조리를 해야지, 아무리 노인들이 조른다고 해서 관광 인솔을 해? 당신 정신 있어 없어? 거기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 터덜터덜 걸어 입구 밖으로 나오는데, 버스 기사가 한 사람 달려 나오더니, 구상모 선생의 옷소매를 잡고 구석으로 이끈다.
“구 선생님, 기사 생활 30년 만에 오늘 정말 희한한 걸 구경했습니더.”
“?”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할머니를 한 분 봤다 아닙니꺼?”
“도대체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이야기인데요?”
그가 하는 이야기가 이렇다. 기사 세 사람이 자기들끼리 점심을 먹고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는데, 버스 구석에 피로 회복제 박스가 하나 있기에 열어 보았더니, 글쎄 그 안에 뜨뜻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가 담겼더란다. 거 참 희한한 일이다 싶어 헤쳐 본 즉, 아뿔싸 어느 할머니가 기지(?)를 발휘해서 비닐봉지에 쉬-실례를 하고선, 시치미를 떼었다는 것이다. 구상모 선생도 그제야 파안대소를 했다. 구상모 선생인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있으랴. 과연 정조준(?)이 가능할까?
여담이다. 구상모 선생이 그토록 단단히 일렀으니, 그 할머니인들 얼마나 주눅이 들었겠는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할머니가 그런 위기 대처 능력(?)이 없이 치마라도 버렸다면 피차가 모두 망신이었으리라.
문제는 다음날 새벽이었다. 잠이 없는 노인 학생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자기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이미 집에다 장거리 전화를 해 둔 철없는(?) 상당수 노인들의 표정은, 기고만장 그것이었다. 그에 비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를 구상모 선생은 초조하기만 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수습한다? 참, 학교 직원들뿐만 아니지. 그 많은 학부모며 어린이들의 눈은 또 어떻게 속인다는 말인가.
드디어 텔레비전에서 타이틀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구상모 선생은 가슴이 두방망이질함을 느끼면서 그 앞에 앉아, 마치 칼을 치켜든 망나니 앞의 사형수 표정일 수 밖에. 아나운서의 몇 마디 코멘트가 있고 나니, 과연 그의 노인학교 학생들이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하는 게 방영이 되는 것이었다.
노인 학생들은 그저 신바람이 나서 기자 앞에서 어린애들처럼 입을 열고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이윽고 카메라 앵글이 서서히 움직인다. 아마도 줄을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전부 담으려는 뜻이리라. 순간 아! 구상모 선생의 전신이 멀리 화면에 비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카메라를 의식한 그가 얼른 몸을 숨기는 찰나여서, 그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여행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할 해외 나들이를 세 번이나 하였다. 그것도 65세 이상의 노인들만 87명, 30명, 80명씩 모시고 대만과 태국, 그리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것이다. 오죽하면 대만에 갈 때 워낙 대단원인 걸 보고, 대만 영사관 왕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을까? 자기로서는 거기에 근무한 지 십 수 년 동안 개인의 자격으로 그렇게 많은 노인들을 한꺼번에 모시고 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며 말이다. 따라서 그런 여행단을 인솔하려면 엄청난 고생을 각오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막힌 일들이 따로 왜 없었겠는가.
대북시 뉴 아시아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구상모 선생이나 87명의 노인들이 낯선 땅에서 잠이 올 리 없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객실 하나에 두 사람씩 들었는데, 개중에는 사돈이 세 쌍이 있었다. 아무리 사돈이 좋으면 며느리 발뒤꿈치가 고와 보인다지만, 그분들이 정말 4박 5일 동안 친하게 지내는 걸 보니, 구상모 선생으로서도 느끼는 게 많았다.
밤이 좀 늦어 국내에서 그렇게도 먹고 싶어 안달이었던 바나나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객실마다 찾아 돌아다니는데, 에의 그 사돈끼리 든 305호실에 들어가다 말고 구상모 선생은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화장실에서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구상모 선생은 화장실 벽에다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사돈, 궁둥이 이리 마 내미이소.”
“그래도 되겠능교?”
이어 뽀드득 소리며 물 끼얹는 소리가 난다. 구상모 선생은 기겁을 하였다.
호텔 종업원이 봤으면 뭐라 할 것인가 말이다. 출국 전에 외국 호텔 화장실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는 걸 수없이 일렀건만, 그것도 둘이서 알몸으로 때를 밀어 주고 있으니……그러나 저러나 사돈끼리 연출한 그 정겨운 광경 따위를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은 구상모 선생 말고 또 어디 있으랴. 이튿날. 또 일어나기가 무섭게 사고가 터졌다.
노인 학생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야단났단다. 남씨 할머니가 깨어날 줄 모른다는 게 아닌가! 그 소릴 듣는 구상모 선생은 실로 눈앞이 캄캄하였다. 이 이역만리에서 할머니가 숨이라도 거둔다면? 평소에 어머니 손 한 번 아 잡아 드리던 자식이라도 삿대질을 하면서 달려들 게 아닌가. 여기선 병원 입원도 그렇게 까다롭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실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 되어 몇 시간을 그렇게 기다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미스 한을 객실에 남겨두고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수밖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할머니가 깨어났다는 전갈이다. 사연인즉 기가 막힌다. 행여 멀리라도 심하게 할까 봐 따님이 사 준 멀미약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며느리가 또 걱정이 되어서 귀 뒤에다가 뭔가 하나를 붙여 주더라는 게 아닌가?
팁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처음에 잡아 드린 25층이 너무 ‘하늘에 가까워’ 겁이 나서 못 자겠다며 4층 그러니까 ‘땅 가까이’ 내려와 나흘 밤을 보낸 두 분 할머니가 있었다. 그래도 행여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는가 싶어 특별히 보살펴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기세가 오른 탓인가. 이미 두 노인에겐 달러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오고간 이야기가 이랬으리라.
“그래도 우리가 대한민국 노인인데, 쩨쩨하게 1원을 팀으로 놓겠노? 백 원이면 몰라도…….”
“맞다. 우리 손주 놈은 천 원짜리도 우습게 여긴다 아이가.”
그러면서 그들은 호기롭게 1백 달러 한 장씩을 각자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고 내려 온 것이다. 침대가 둘이라도 한 개에만 1달러를 놓아야 할 팀이 2백배로 둔갑을 하고 말았으니, 이건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호텔 종업원에게 발견되었을 때에는 ×주고 뺨 맞는다더니 돈 손해 보고 나라 망신시키는 꼴 아니고 무언가. 구상모 선생은 또 총알처럼 객실로 뛰어 올라가야만 했다. 하기야 그런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2만 원을 환전하여 현지에 가서 쓰고 나머지 3천 원은 손자 학용품 값으로 도로 갖고 온 할머니도 있었으니 그런대로 위안은 된다 하겠다.
아참, 태국에서 겪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경험담도 빠뜨릴 수 없다. 당시 여든셋 된 손병태 할아버지는 자식 둘을 낳아, 장남은 대학 교수요 차남은 회사 중역으로 키운, 그러니까 ‘자식 농사’를 잘 지은 분이다.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서 사는데, 그런 대로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지 않다. 할아버지는 평생 옷이라고는 흰 바지저고리만 입다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뭔가 하나 겉에 걸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토퍼를 하나 사게 되었다. 태국은 덥지만 정작 김포 공항에서 출국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추위가 걱정이 되었겠지.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겉옷을 벗었다. 할아버지의 그 차림새는 오히려 격에 어울리는 것 같아, 구상모 선생은 적이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이튿날 새벽 비행기가 돈무앙 국제공항에 착륙하고 나서도 할아버지는 내내 그 바지저고리 차림일 수밖에.
그날 밤, 호텔에서 30분이나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의 식당에까지 나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할머니들과 한자리에 어울려, 비지찌개를 맛있게 먹고서는 식탁 사이사이를 돌고 있는데, 아무래도 손병태 할아버지의 차림새가 이상하다. 구상모 선생이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아뿔싸! 할아버지는 밑이 짧은 파자마 차림이다.
위에는 다행스럽게 모시메리인가 뭔가를 걸쳤는데……. 그렇다고 해서 떠들어대다가는 나라 망신일 것 같고, 무엇보다 노인에 대한 그런 태도는 구상모 선생의 정서에는 맞지 않아, 여행사 직원을 구석자리로 불러내었다.
“이거 큰일 났소. 저 할아버지가 글쎄 파자마 차림으로 앉아 계시질 않소. 어쩌면 좋겠소?”
그러나 그의 대답은 뜻밖이다.
“걱정 마세요. 우리나라에서는 저게 허물이라도 이만저만 허물이 아니겠지만 여 기서야 예삿일입니다. 여기선 반바지 하나만 있으면 1년을 사는 거 모르십니까?”
하기야 1년 내내 무더운 태국에서 에티켓 따지다가는 쪄서 죽을 노릇이겠지만 파자마를 입고 시내 나들이를 했다니 찜찜하다. 그래도 여행사 직원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위로가 되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추억.
첫날 분수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는 공원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80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국땅에서 카메라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노인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사뭇 긴장한 표정들이고……순간 구상모 선생은 그걸 풀어 줘야 하겠다는 생각에, 여행사 직원에게 예의 ‘사진 박기’ 농담을 던진다.
“빨리빨리 안 박고 뭐 하노?”
그 한마디 때문에 노인들이 까르르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정말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싶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해서 그런지 그 순간이 싱가포르 가이드의 카메라에 잡히고 만 것이다. 구상모 선생은 귀국할 때까지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며칠 뒤 혼자서 싱가포르에서 갖고 온 비디오를 보다가, 분수가 눈에 띄기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이다.
“빨리빨리 안 박고 뭘 하노?”
순간 구상모 선생은 등골이 써늘하였다. 저 비디오를 노인 학생들의 식구들이 보았을 때 도대체 뭐랄 것인가 말이다. 도대체 선생님이란 사람이 뭐 빨리빨리 안 박고 뭐하노? 더구나 어린 손자며느리까지 거기 석였다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좀 진지한 사연이나 한 번 적어 보자.
적어도 구상모 선생의 신념은 이렇다. 비록 지금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노인 학교가 노인 여가 시설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 노인 학교마다 각기 남다른 바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어느 노인 학교처럼 으슥한 골방 같은 곳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다 놓고서는, 벌건 대낮부터 안주며 술을 내다 팔고 급기야는 춤 선생까지 붙여다 사교춤이나 가르친다 치자. 이 나라 노인 문제는 결국 갈 곳이 어딜까?
구상모 선생의 노인 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뚜렷하다. 그는 노인 학교에서 시작과 끝 무렵엔 반드시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민요를 부르는데. 그건 단순히 노인들에게 흥을 돋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느 누구든 그의 노인 학교에 가서 왜 그렇게 민요를 열창하느냐고 물어 보라.
백이면 백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예,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7천만 겨레가 한데 어울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우리 민요뿐이라서 부르는 기라예. 민요만 열심히 부르면 통일이 빨리 오지예.”
어쨌든 노인들의 그 진지한 표정과 자세 앞에선 모두가 옷깃을 여미게 되리라. 사실 분단 이후 생활 습관이아 문화 형태가 엄청나게 틀려졌지만 아직도 민요만은 가락이며 가사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도 잘 알고 있다. 해외에서 열린 국제 경기에서 둘 중 어느 한쪽이 이겼을 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아리랑’을 목이 터져라 불러대는 것을 보아서도, 구상모 선생을 비롯한 노인들의 그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북한의 민요인 ‘신고산 타령’이나 우리 남한의 민요인 ‘밀양 아리랑’인들 왜 못 부르겠는가. 구상모 선생의 민요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찍이 그는 유네스코 즉,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기구의 협조를 받아, 이 땅의 노인들이 보고 부를 민요집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그분들이 돋보기 없이도 능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활자로 인쇄하여서 말이다. 물론 국악 대사전, 가요 집성, 민요 대전 등 참고 도서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고,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노인 학교 학생들에게서 가사 채록도 하는 한편, 서너 군데 양로원 할머니들을 만나 한이 서린 소리를 직접 듣기도 했다.
따라서 웬만한 출판사에서 만든 대중 가요집도다 무게도 있어 보인다. 게다가 해외에 있는 우리 노인들이 이 책을 볼 경우를 예상하여, 부록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동요 중, 고향이나 조국을 생각하게 하는 곡은 전부 수록하였다. 특히 이 동요들에는 악보까지 인쇄하였다. 그 악보는 노인들이 보라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에 근무하는 한국 학교 교사들이나 시창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매체로 쓰라는 뜻으로 실은 것이다. 실제 방콕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 학교 임설주 선생은 이런 탄사를 보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시도입니다. 저는 중등학교 음악교사 자격증을 갖고 여기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지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여기 있는 노인들이 불 과 몇 십 명밖에 안 되지만, 어떻게 하든지 한곳에 모아 민요며 동요를 가르치도 록 해보겠습니다.” 실제 그런저런 사연으로, 해외에 배포된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가 300부를 넘었으니 구상모 선생으로서는 시쳇말로 적어도 그 분야에선 원 도 한도 없는 셈이다.
유네스코에서 이를 아주 높이 평가하여 회지에다 대서특필해 소개했는가 하면, 광주에서 열린 전국 대회 등에서 유네스코 활동 우수 사례로 3년 연거푸 소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참 구상모 선생은 광주 대회에서 단상에 불려 올라가 전국에서 모인 300명 유네스코 회원은 물론 외국인들도 상당수 참석한 가운데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민요 7곡을 부르는 영광도 누렸다. 나아가 그 민요책 활용 효과의 극대화야말로, 구상모 선생이 이날 이때까지 단 한 푼의 사례 따윌 받지 않고 노인 학교를 운영해 온 데 대한 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주장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자.
“우리 세대가 이만큼 살도록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뻘 되 시는 노인들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65세 이상의 보통 노인 2/3가 글을 모르는 다시 말해 문맹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언젠가 길을 가는 데 앞서 가는 노인 학생 한 사람이 ‘전셋방 있음’하는 광고문을 거꾸로 붙이더란 말입니다. 그 노인들이 저승가기 전에 글자 한 자라고 가르쳐 드리는 것이 이 시 대를 사는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에게 ‘영이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따위를 내놓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민요예요.”
그의 주장은 과연 그럴 듯하다. 이 땅에서 우리 민요 ‘아리랑’이나 ‘밀양 아리랑’, 혹은 ‘도라지’, ‘사발가’ 따위를 모르는 노인은 거의 없으니, 따라서 그걸 한 자 한 자 따라 읽게 하면 그 학습 효과는 기대 이상일 것임은 명약관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 번 예를 들어 보자. 구상모 선생은 노인 학교 수업 때 칠판에다가 큼지막하게 비교적 쉬운 ‘도라지’ 가사를 쓴다. 노인 학생들 앞에는 민요집은 물론 ‘도라지’며 ‘대바구니’, ‘지화자자’, ‘에헤이요’ 등의 낱말 카드가 놓여 있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처럼 공부하는 것이다. 가끔 노래를 부르면서…….도라지 도라지 도라지/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대바구니로 철철철 다 넘는다/ 에헤이요 에헤이요 에헤이요/에야라 난다 지화자자…….
유네스코로 봐서도 이건 대단한 수확이었다. 이 국제단체의 교육 분과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부문이 ‘문맹 퇴치’인데, 불행스럽게도(?) 이 시대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 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한 이름 없는 한 교육자가 저승 가기 전의 노인들의 까막눈을 없애자는 운동에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따라서 유네스코에서 구상모 선생의 노인 학교를 ‘노인 문해(文解)’ 학교로 지정해 준 것을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큼지막한 현판도 달아 주었다. 현판식을 하는 날 노인 학생 3백 명이 모여,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야단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실제 노인 학교에서 이를 적용해 보니, 노인 학생들이 흥미진진해 하였다. 구상모 선생의 또 다른 익살.
“여기 한 번 보이소. 저승 가시면 염라대왕이 ‘니 그래, 글자 한 자라도 아는게 있는고?’하고 묻는단 말입니다. 그럴 땐 얼른 ‘도라지’를 생각하이소, 그래 ‘예, 지 는 말입니더. 노인 학교에서 배웠는데예. 다른 글자는 몰라도 ‘도라지’의 ‘도’자는 아는 기라예.‘ 그렇게 대답하는 깁니더. 염라대왕이 다시 말할깁니더. ‘그래 장하 다. 다른 노인들은 경로당에서 십 원짜리 고스톱이나 치면서 얼굴 붉히고 지냈는 데, 니는 노인 학교에서 글자 공부를 했다는 말이제? 그게 어디냐 말이다. 좋다. 너는 착한 일을 하였으니 천당이나 극락에 가거라!”
그가 또 손짓발짓 다해서 열을 내면 또 노인 학생들은 까르르 웃는다. 한 술 더 떠서 이럴 때도 있다. ‘이’자를 가르치면서 엮어내는 진풍경이다.
“아무리 글자를 모른다 해도 ‘구’자는 알아야지예. 구상모가 내 이름이고예. 자, 큰소리로 따라 외우시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의 ㄱ을 손잡이 달린 그릇 위 에 얹는다! 제 아내 성(姓)이, 이(李) 가(哥) 아닙니꺼? 그것도 알아야지예, 사모님 인데…….동그라미(O) 하나에 ‘작대기 (|)하나 이게 바로 ‘이’자 아닙니꺼? 이 승만 대통령 알지예?”
이 기막히는 사례는 신문이나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그러자 이웃중학교 학생들도 다투어 자원 봉사를 나왔다. 다만 20평 교실에 130여 분의 노인들이 들어앉아 있으니, 중학생들이 사이사이에 들어가서 개별지도를 돕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노인들은 인권이란 것도 없나 보다. 만약 초․중등학교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사람을 돼지 취급한다며 야단났을 것이다. 실제 구상모 선생의 노인 학교에서는, 일단 교실에 들어오기만 하면, 소피가 보고 싶어도 화장실에는 갈 엄두를 하지 않아야 한다. 도무지 비집고 나갈 수가 없는 탓이다.
그래도 노인 학생들에게는 이 학교가 유일한 낙이다. 그건 오후 2시에 수업이 시작되는데도, 12시가 못 되어 와서 기다리는 노인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늦게 오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원 봉사를 하는 강사진도 대단하다. 우선 부학장인 ㅈ교수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노인인권문제연구소의 책임을 맡아 있고, 기획실장인 ㅂ씨는 지방의 문화 원장이다. 교무 과장인 ㅅ시인은 현역 공군 중사이고, 지역사회과장인 ㄴ 씨는 구의회 부의장이다. 그리고 음악과장인 ㄱ씨는 항공사 사우회 음악 반장으로서 색소폰 연주자이다. 그 밖에 구연 동화를 하는 어머니 단체인 색동 어머니 부산 회장 ㅁ여사, 시조 국창 ㄴ여사 등이 일체의 보수나 수당을 받지 않고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 하면 진짜 대학교 강사 못지않은 진용이라 해도 과언 아니리라. ㅈ교수가 재롱(?)을 피우고, ㅅ시인이 전투복의 한쪽 가랑이를 걷어 올린 차림으로 각설이 타령을 부르는가 하면, 거기에 맞춰 ㄱ씨의 색소폰 반주가 분위기를 절정으로 몰고 간다.
중국의 세계적인 석학 장석생 교수며, 베트남의 옌 교수까지 두서너 번씩 왔다 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언젠가 ㅂ대학교 ㅈ명예교수가 노인 학교 고문인 ㅎ교육위원과 함께 방문하여,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되어 희희낙락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아,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 아닙니까?”
하면서 감탄하였다. 그 때 구상모 선생은 이런 말로 화답하였다.
“감사합니다. 노인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인들로 무릉도원의 고 사 성어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약속한 바 있습니다. 먼 훗날 우린 저승 무 릉도원에서 낮엔 들에 나가 일하고 밤엔 한자리 여기서처럼 노래 부르고 춤추고 하면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11년 동안 먼저 저승 가신 분들이 아마 터 잡고 기다 리실 거예요.”
어쨌든 뭐니 뭐니 해도, 노인 학교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교실을 빌려 준 이때까지의 세분 교장 선생님들의 배려를 빠뜨릴 수 없다. 그분들이야말로 요즈음 입만 벙긋하면 강조하게 되는 ‘교육 개혁’이나 ‘평생 교육’의 한 획을 그은 공로자들이라 해도 괜찮으리라. 어쩌다 명절에 인삼 한 상자를 들고 교장실로 방문을 해도 기어이 돌려보내는가 하면, 송년회장에서 끝까지 노인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백발가’를 부르는 그 분들을 보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교육자의 참모습을 본다고 찬사를 보낸다.
특히 ㅊ교장 선생님은 워낙 미남인데다가 노래 솜씨 또한 일품이고, 춤 역시 끝내주는 터라, 할머니들이 오줌을 쌀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작년 연말 송년회 때만 해도 오후 2시에서 밤 9시까지 노인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런데 3월1일자로 새로 부임한 ㄹ교장이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이렇게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노인 교실을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이건 도대체 누구 학교인지 분간이 안 됩니 다. 다들 퇴근한 토요일 오후에 남의 학교 교감이 와서 노인들과 ‘늴리리야’를 부 르다니 어디 말이 되기라도 합니까?” 듣다 못한 어느 교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마디 한다.
“교장 선생님, 어차피 우리가 그 교감 선생님처럼 노인 교실을 운영하지 못할 바 에야, 400명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서라도 그대로 맡겨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모르는 소리 작작해요. 요컨대 주체가 누구냐고 중요합니다. 우리가 직접 운영한 다면 또 모르지만…….” 그러고서 토요일이 아닌 평일에 노인 교실을 운영할 직원 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두 달이 넘었지만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그 소득 없는 일에 달려들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그는 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낌새를 차린 노인들이 교장실로 찾아갔다. 그러자 ㄹ교장은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은 않고 예의 그 목에 힘주는 표정으로 노인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노인들도 알 건 알아야 합니다. 남의 식구가 방 한 칸을 차지한다면 가만있겠습니까?”
노인들도 만만찮다.
“그래서 구상모 선생님이나 우리도 항상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는 기라예. 팔십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닙니꺼. 학교 화장실 더럽히지 않을라꼬 겨울철엔 ‘오줌 안 누기 운동’도 벌인다 아닙니꺼. 그런데 지난 두 달 넘 는 동안 교장 선생님이 부모 뻘인 우리를 한 번 찾아 봤는기요? 우리가 거지라도 그런 대접은 안 받았을 낍니더. 자식이 부모를 잘못 모시면, 설사 남이라도 모셔야 될 거 아닝교? 오랜만에 찾아온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연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굶겼는데, 보다 못한 이웃 사람이 식사 대접했다는 이야기 들었는기요? 결국 그 어머니는 죽었십니더. 교장 선생님 하는 짓이 그것과 다를 게 없는 기라예.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보였다면 교장 선생님 학교의 직원들도 토요일 오후에 남아서 강의 를 하면 될 거 아닝교? 교장 선생님은 무식한 우리보다 평생 교육에 대한 신념도 없는기요?”
그건 시내 박사 교장 1호인 자타가 인정하는 교육 이론가 ㄹ교장에게는 대한한 모욕이었다.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하여튼 학교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줄 수 없어요. 누가 뭐래도 문들 닫습니다. 교장이 한 번 선언한 것을 바꿀 수 없어요.”
그러자 어느 여학생이 악담을 퍼부었다.
요시(일본말) 보입시더. 내가 이 학교를 떠나는 날 우리 정들었던 교실 카텐을 면도 날로 짝 찢어 걸레로 만들어 놓을 테니……. 거기다가 코나 풀어 놓을끼요. 당신이 교장이면 교장이지, 무슨 그런 회포요 횡포가! 내 참 더럽고 아니꼽아서. ”
그래도 교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막 추위가 시작될 무렵인 11월 중순 어느 날 토요일 아침, ㄹ교장은 그야말로 냉혹하게 노인들이 모이던 교실의 문을 폐쇄해 버리고 말았으니……행여나 싶어 노인 수십 명이 틈만 나면 교실 앞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자물쇠는 항상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 공간은 거미줄이 얽혀 마치 유령 집 같은 느낌을 줄 따름이었다. 강사들은 그런 정황에서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아니 ‘사필귀정’만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아가 이 사회가 아직 노인 복지가 어쩌고저쩌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게, 그들의 한결같은 정소요 판단이었는지 모른다. 자칫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들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도 두려웠다. 그들도 명예를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서 6개월 뒤 어버이날, 그 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 400명이 드디어 집단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같은 시간 노인 학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ㄴ문화예술인협회며, ㅂ민속보존회 등 그래도 정신이 썩지 않은 사회단체의 회원 60명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1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있었다. 가족들 또한 이에 질세라, 극비리에 작성해 온 4천 명이 연기명으로 날인한 탄원서를 각계에 보낼 준비에 바쁘다.
바야흐로 교육계의 한 부조리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이참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까지 그래도 소문은 들었을 법하련만, 뒷짐만 진 채 수수방관해 왔었던, 상급 기관의 대처가 어떨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 들은 직무유기로 손가락질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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