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99. 10. 4. 토요법회 _ 김제원 교무님 설법
Q. 대종경 전망품, 정산종사법어 유촉편을 보면 모두 미래 세계를 긍정적,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무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약 양과 음이 한 쪽만 있을 수는 없고 상존하면서 서로 밀어내는 ‘음양상추’의 원리가 있다면 미래 세계가 반드시 전적으로 긍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서는 어째서 긍정 일변도로 미래세계를 전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좋은 질문입니다. 음양이 같이 있을 것인데, 왜 밝게만 이야기하셨느냐는 것이 질문의 요지입니다.
답변을 드리자면 사실이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주는 성주괴공합니다. 지금은 ‘성’의 시기 이지만, 성 하면서 그 속에 성주괴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은 생로병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 하지만 그 가운데 부분적으로 생로병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음양이 함께 있지만, 크게 보면 앞으로의 시대는 밝아진다는 겁니다. 전망품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비슷한 말씀이 정산법어 도운편과대산종사법어에도 나옵니다. 단순히 중생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기운을 북돋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성자들은 항상 천년 이천년 오천년 만년이 지나도 사실인 내용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석가모님 부처님도, 대종사님도 말씀하신 내용중에는 아직 틀린 것이 없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보통 사람들의 말과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세계에서 바탕하여 말을 합니다. 선악의 마음, 분별의 마음, 주착의 마음, 업력에 가린 마음, 원근친소에 끌린 마음, 자기의 지견에 바탕한 마음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온전한 정신에 바탕해서, 성품에 바탕해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자들이 하는 말을 그냥 말이 아니라 ‘설(說)’ 이라고 하며, 뒤에 ‘법(法)’을 붙여 ‘설법(說法)’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의 말은 법이 아니지요.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방 지나면 엎어질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항상 자신 있게 말씀하시지요. 대종사님도 자신 있게 정전을 내놓으셨잖아요.
Q. 전에는 성가는 법회나 예식 전 단순히 분위기를 좋게 해주는 것 인줄만 알고 무시 했는데 17장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노래를 작곡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성가는 가사에 진리를 담아서 까지 만들어야 하므로 작곡이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성가는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나요?
A. 법회 의식에는 기도, 독경, 성가, 헌배 등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이게 단순히 형식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원불교의 건축 하나만 봐도 건축 안에 식이 있고 철학이 있고 대종사님의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건축 또한 대종사님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법회 식순 하나하나에는 대종사님의 법을 본인의 가슴 속에 효과 있게 깨닫고, 마음을 맑히고, 밝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들이 들어가 있어요. 여러분은 음악에 대해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수행에 있어 효과적인 것이 바로 소리입니다. 기도를 할 때, 또는 독경을 할 때 목탁 소리가 있는 것과 없이 하는 것은 그 느낌이 천지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이 갖추어져 있는 형식의 본의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해요. 삼일절, 국군의 날, 광복절 같은 날에 굳이 행사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그 날의 의미를 잊지 말고 잘 계승하자는 것이겠지요. 요즘 귤과 밤이 제철입니다. 밤은 모든 부분을 먹지 않고 안에 속 알맹이만을 먹지요. 겉을 싸고 있는 밤송이와 껍데기는 버립니다. 처음부터 껍데기 없이 밤 속살만 대롱대롱 매달리면 좋겠죠. 하지만 그래서는 밤은 영영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껍질이 있어야 알맹이가 자라기 때문이지요. 이 쓸모없어 보이는 형식 속에서 결국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생성됩니다. 여러분들은 학교, 군대, 또는 사회라는 형식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 형식을 우습게만 생각하지 말고, 한번 그 형식의 본의를 파악해보세요. 법회전 기도식에 늦게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기도라는 형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늦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법회는 법회가 시작되기 전에 50%가 끝납니다. 법회를 제시간에 오려면 전날부터 챙겨야합니다. 잠도 조금 일찍 자고 마음도 준비해야지요. 이렇게 하면 법회 오기 전에 이미 법회를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교당에 도착해서 한 주일간 자기가 지은 업장을 사배하면서, 또는 문을 열면서 다 녹이는 것이지요. 식순 하나하나에 의미를 느끼시면서 법회를 보시면 카타르시스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법회중 요가를 하는 것도 아무 이유 없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형식의 본의를 알게 되면 형식은 더 이상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일그일에 일심으로 하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할 때 배우자의 중고등학교 성적, 건강기록부 까지 다 떼어 오라고 요구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식들을 통해 그 사람의 살아온 바와 인생관 그리고 정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형식의 본의를 파악해 본의와 도리어 맞지 않는 폐습은 없애야겠지요. 형식의 본의를 파악하면 그일그일에 일심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최고봉은 시이고 그림의 최고봉은 추상화입니다. 중국 사서삼경에도 시경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시편이 있습니다. 대종사님도 전망품의 시가 있습니다. 시는 때가 탄 사람이 아니어야 지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맑아야 시상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선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이라는 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얻은 맑음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예악(禮樂)이 있습니다. 공자님도 예악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원불교는 ‘깔깔대소회’가 있습니다. 인간 지정의 삼방면에 이성만 있으면 너무 차갑습니다. 여기에 감성이 들어가고 정이 들어가고 조화가 있어야 그 사람의 인격이 비로소 원만한 인격인 거예요. 현대에는 유머 경영이 요구됩니다. 유머가 없는 인간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유머는 멍청한 사람은 잘 못해요. 또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유머가 나옵니다. 대종사님은 유머가 많은 분이셨습니다. 어떨 때는 개구쟁이처럼 보일 때도 많았어요. 대종사님은 키가 작은 각산님을 보며 한번은, “재근이는 않아도 재근이고 서도 재근이다.”라고 놀리셔서 주변을 대소하게 만드신 적도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과 정이 어우러지면 시너지 효과가 나옵니다. 이성만으로 똘똘 뭉쳐 냉철하고 얼굴이 경직된 사람을 과연 누가 좋아할까요? 남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중 하나가 바로 무표정으로 일관하거나 인상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인간의 감성 같은 게 없으면 안되요.
가장 아름다운 건축은 첫째는 자연이지만 둘째는 종교 건축물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행에도 도움이 되지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음악으로 만들면 더욱 큰 효과가 있습니다. 원불교 성가 126번째 장 이전의 곡들은 당시 교단 초기였으므로 사실 순조롭게 작곡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때는 주로 당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들한테 소산님과 범산님 같은 선진님이 교리를 쉽게 추려서 만든 가사를 주시고 곡을 붙여 달라 해서 만들었습니다. 원불교 성가 중에는 유난히 인기 있는 곡들이 있는 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곡들도 있습니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결국 인기 없는 노래는 잘 작곡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제대로 하면 그 자체가 수행입니다. 노래니까 형식으로 치부하는 순간 그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수일수록 바둑을 정성스럽게 둡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야이든지 고수는 절대 대충대충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는 만큼 재미있고 또 아는 만큼 정성을 들여 한다는 뜻이지요. 모르면 모르는 만큼 함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 그 일에 일심으로 하라는 거예요. 본의를 몰라도 정당한 것이라면 일단은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면할수록 빨리 맛을 느끼는 거예요.
Q. 28장을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 복이 적다고 되어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복을 많이 짓는 것이 당연한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여기서 ‘지혜’는 ‘지식’으로 해석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 같습니다.
이 법문에서 지혜가 많은 사람이 복이 적기 쉽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과 지혜 간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에 갇힌 좁은 지혜를 뜻합니다. 우선 지혜가 있으면 당연히 복을 불러오고 복이 있으면 지혜를 부르지요. 행복은 다름 아닌 지혜와 복이 함께 있을 때입니다. 부처님은 무량한 복과 지혜를 두루 갖추고 계십니다. 복과 혜는 자석의 양극처럼 같이 가기가 쉽습니다. 가령 내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직장에 가게 되는 복이 따라오지요. 그러나 별개일 경우도 존재합니다. 수행은 하지 않고 봉사만 하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나중에 복만 있고 지혜는 어두워지게 됩니다. 인도의 한 궁궐에서 지내는 코끼리가 그 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대에 한 코끼리가 있었는데 먹이도 좋은 음식을 먹고 온몸에 실크도 두르는 등 복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복이 많은데도 사람으로 못 태어났을까요? 바로 공부를 안했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를 하지 못해 착심이 많고, 업력에 끌려 사람으로 못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첫째로 착심을 따라 육도사생의 몸을 받습니다. 이 때 마음의 지혜가 있어야 악도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몸을 받고나면 자기의 업을 따라 인연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과 지혜는 함께 가지만 나누어지는 자리에서는 나눠집니다. 중국의 한 황제가 백성들의 세금으로 온 평생 주색낭유에만 심취했다가 죽었습니다. 뒤를 이어받은 아들이 아버지의 치적을 적으려 해도 하나도 적을 게 없자 결국 무덤 앞에 글자 없는 큰 비석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 몸을 아예 못 받거나 지혜는 있어도 복은 이미 다 까먹어서 이생에 찢어지게 가난할 수 있어요. 달동네에 사는 사람을 보면 어리석어서 거기 사는 사람이 있고 지혜가 있음에도 거주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지혜도 없고 복도 없는 사람이 있고 지혜는 있으나 복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중간하게 지혜를 갖추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상에 갇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지혜는 퇴색하고 복도 멀어지게 되겠지요.
Q. 27장을 보면 단순한 몸으로 순결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여자 교무님들이 성직자로서 정녀를 하시는 게 이 법문을 기준을 삼아서 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 그렇습니다. 법문을 보시면 송 자명이라는 여자 교무님께 말씀하시고 계시지요? 여자들이 과거에는 세상일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남존여비의 풍습과 각종 사회 제도 때문입니다. 대종사님께서 평등을 외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여자들도 능히 천하의 일꾼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길을 열어주셨지요. 서로를 용서해주고 이해해주며 세세생생 이 사업을 알뜰히 하라고 했죠. 원불교는 세계 사업입니다. 이왕이면 한 가정에 얽매여서 살다 가는 사람보다는 세계 사업하는 세계 사람이 되라고 했죠. 옛날에 여자들은 삼종지의가 있었죠. 어릴 적에는 아버지, 크면 남편, 크면 자식한테 의지하며 살았지요. 기왕이면 그런 삶을 살지 말고 결혼을 하던 안 하던, 자식이 있든 없든 한 가정이나 개인주의 가족주의의 울을 넘은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출가는 말 그대로 ‘집’을 벗어나서 살아봐라 하는 거예요. 그럼 무궁하게 복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Q. 그렇다면 여자 교무님들이 정녀로 사는 게 정산종사님 말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요?
A. 앞으로 여자 교무님들이 다 정녀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은 장래에 반드시 바뀔 것입니다. 영과 육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원불교입니다. 육신의 의식주 정신의 의식주가 함께 어울려야합니다.
Q. 34장에서 대종사님이 삼원에 대해 인증하셨다고 합니다. 삼원은 누구시고 또 어떻게 인증하셨단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삼원을 농사로 비유해 이야기 해주신 법문이 있습니다. 바로 변의품 32장입니다. 그 법문을 보면 인증은 인증할 사람이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과 같은 성자가 인증을 하면 그것이 진정한 인증입니다. 삼원은 다음 세 분을 뜻합니다. 첫째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재우 선생님입니다. 동학에는 사인여천이라고 하지요. 이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동안 하늘만 모시던 사상에서 탈피하여 사람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최재우 선생님이 삼원 중 첫째이십니다. 두 번째는 해원사상을 주창하신 강증산 선생님입니다. 강증산 선생님 역시 대단하신 분이죠. 세 번째는 바로 대종사님입니다.
Q. 흔히들 기도를 하는 게 진리에 감응하기 위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굳이 봄이 빨리 와달라고 기도를 정성스럽게 해 진리와 감응해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봄이 예년보다 일찍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A. 우주가 음양상승하는 것과 우리가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음양상승이라는 것은 우주의 음과 양이 서로를 미는 것입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인 하지에도 이미 겨울의 기운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제일 추울 때에도 양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은 지금은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지만 50대 넘으면 남성호르몬과의 분비량이 역전되면서 목소리도 걸걸해지게 되지요. 남자도 마찬가지여서 50대가 넘으면 여성스럽게 됩니다. 여기에 음양에 이치가 담겨있습니다. 음양의 이치와 기도를 했을 때 내가 변화되는 것은 다른 내용입니다.
음양의 이치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음으로 쓸 것인지 양으로 쓸 것인지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음양도 결국은 하나 속에서 나온 거예요. 이 하나를 무극 또는 태극이라고 해요. 동양에서는 음양을 쪼개서 64개로 나누기도 합니다. 대종사님이 그걸 참고하신 후에 인과보응을 접목시키신 것이지요. 여러분에게는 자연적 음양이 있고 심성적 음양이 있습니다. 심성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연적인 생로병사의 기간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있습니다. 음양의 이치 속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음양의 이치가 있지만 그 속에서 음과 양이 조절되는 거예요.
첫댓글 감사감사^^
타이핑 감사합니다.. 근데 질문자가 누구인지 나와 있으면 좋겠다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