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 수원행궁 - 축만제입니다.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습니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장안문
장안문 용그림
장안문 현판
장안문 측면
동북각루
화홍문 현판
화홍문
동북각루와 버드나무
동북포루와 억새
동북포루
동암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연무대
이정표
국궁체험장
창룡문
창룡문 측면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봉수대
9개의 시장이 모여 있습니다.
남수문
정조대왕
조선의 제22대 국왕. 선왕인 영조 재위기인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인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
1752년(영조 28) 태어나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년)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자(임오화변)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사위)을 23살에 정식으로 이었다.
1776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3개월 뒤 할아버지 영조가 8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부 영조와 함께 조선 후기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되는 한편 조선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인 세도정치를 불러온 당사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정조의 생애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겨 후세에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정조대왕
수원남문시장
시장 천장
팔달문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은 동, 서양의 성곽의 장점과 조선의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건설한 수원 화성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 정신을 알리기 위해 만든 전문 박물관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정조대왕 태실
여민각, '더블어 사는 행복한 도시' 란 의미입니다.
수원화성행궁
화성행궁은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입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행차를 거행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습니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 되었습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습니다.
화성행궁 홍살문
낙남헌
임금의 수라상
화서문
서북공심돈
수원팔색길
수원서호 : 축만제
수원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 및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년(정조 23)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로 조성된 관개 저수지이다. 수원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말하는 것으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킨다. 또한 남지(南池)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8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석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는 축만제 남쪽에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을 지었고, 항미정은 1908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 · 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국내 최초 등재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수원 서호
축만제
항미정
서호에 핀 구절초
서호 철재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궁능성시 올해 마지막 투어에 많은 기자단이 참석 하였습니다.
날씨는 추우나, 하늘은 파랗게 청명한 늦가을 날씨를 보여 줘 투어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평소에도 수원 화성을 몇번 다녀 갔지만 오늘 수원 화성의 억새는 또 다른 감흥을 안져 주네요, 그리고 연무대에서 체험한 국궁 활쏘기는 꼭 한번 체험 해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20여년 전 서호 근처에 6년 정도 살았던 기억으로 방문한 서호공원에 그때와는 많은 모습이 달라져 있네요. 금년의 마지막 궁능성시 투어를 오늘도 2만 4천보 이상 걸어 다녔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