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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 2023. 12. 25. 성탄절예배.
예수님의 인카네이션, 이 땅에 오심이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2023년의 순간순간을 무엇으로 시작하셨습니까?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주님의 시대의 시작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이 땅의 끝은 어디입니까?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의 때가 세상의 끝입니다. 항상 시작과 끝으로 매듭을 짓고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그런데 세상의 끝이 신앙인에게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시작이 됩니다. 2023년 신년 주일의 교회력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송년 주일을 보내고, 송구영신 예배로 끝과 새로운 시작이 동시에 다시 열립니다. 그런데 시작과 끝의 마디마디가 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마디마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출생의 예언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시작이 아담의 잘못으로 에덴동산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에덴동산의 막이 내리면서 아담을 용서하고 용납하신 하나님은 바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알린 예언이 성탄절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세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임마누엘로 표현되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시작에 대한 예수님의 출생이 여러 각도에서 시대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예언이 되었는데 한 부분이 아니고 여러 부분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예언 되었습니까?
1-1. 장소와 역할과 태어나시는 방법이 예언 되었습니다. 미가서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그런데 마태복음 2:1-2.에서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베들레헴에서 출생을 합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입니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깊이 보지 않으면, 예언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지 않으면 베들레헴은 존재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은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는 장소입니다. 역할은 평강의 왕입니다. 평화의 왕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시는 방법은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납니다. 잉태되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상상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 동원 되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할 때에,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동정녀, 처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낸 마리아는 분명히 남자를 알지 못한 동정녀입니다. 동정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한 아이,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야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두렵고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마리아를 설득합니다. 눅 1;37, 38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고, 마리아라는 한 동정녀를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1-2. 혈통과 지위와 행함의 기준이 예언 되었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예언되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고 왕의 지위입니다. 공평과 정의가 행함의 기준입니다.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는 이미 다윗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서 의로운 한 가지가 나옵니다. 행13:22-23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다윗의 혈통에서 왕으로 오셨고, 세상에 대하여 공평과 정의를 세울 때에 지혜로 행하도록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름의 의미가 담겼습니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과 아들로 예언이 되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이 부분을 은혜로 나누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이루어 질 역사를 예언하시고 약속하시고 축복하시면 그 예언과 약속과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시는 신실한 주님이 여러분의 곁에 좌정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며,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것이 임마누엘로서 오신 예수님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 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호적 하는 일로 예언을 이루시고 성취케 하십니다. 겉으로는 최고 권력자이고 최고의 통치자인 아우구스 투스 황제가 이 일을 합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강력한 통치자에 의해서 호적이라는 동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예언이 성취가 되도록 합니다. 여러분, 언약의 성취가, 예언의 이루심이 호적 하는 일로 시작을 하는데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성취가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항상 세상 속에서 역사와 환경과 사람들의 능력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깊은 영적인 멧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도 그 약속의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적 하는 일로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십니다. 호적 하는 일로 이스라엘의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의 시대를 엽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어떤 일을 하실 때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 속에 멧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대와 그 때의 문화와 상황을 이용하여 역사를 이루시고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면 호적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요? 호적, 거주등록법의 기원은 로마시대가 시작입니다. 기원이 로마입니다. 그러면 호적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호적의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태어나면 출생신고, 이사를 가면 전출과 전입신고, 세상을 떠나면 사망신고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근거가 호적입니다. 호적을 왜 합니까? 호적을 보면 어떤 한 사람이 누구의 자녀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누구와 결혼해서 독립해 나갔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여러 가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호적을 왜 이때에 하게 됩니까? 호적을 하게 된 유래는 백성들의 편의보다는 통치자들의 편의 때문이었습니다. 주로 세금과 군인을 강제 징집할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한 때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멧세지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호적이 예수님의 시대가 열리는 약속과 예언을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이 호적 하는 일로 유대 땅의 한 조그만 동네,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은 역사상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하고 안정된 정부와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로마를 이끌어 간 것은 각 지방의 실력자들인 원로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로원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1인 통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구스도, 아우구수투스 황제 때에 로마의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이 되었습니다. 이 시저가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전 로마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할 것을 명령합니다. 당시 유대 땅도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시기에 유대 땅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호적 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요? 여기에 몇 가지 성탄의 진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1. 호적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호적을 해야 천국백성이 됩니다. 호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는 의무 사항입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그 땅에 살려면 호적은 필수적입니다. 거주민의 의무입니다. 귀찮다고 호적을 하지 않으면 로마에 의해서 탄압을 받습니다, 살아가는 데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벌금을 물고 강제부역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호적을 해야 합니다. 호적을 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고, 보호받는 일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호적을 등록 하지 않았다면, 일본 거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귀찮더라도 호적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와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싫지만, 거추장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해야 될 일은 반드시 하시는, 그래서 그 일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적해야 하는 때에, 반드시 호적을 해야 하는 주님의 나라가 탄생합니다. 예수님의 시대, 메시아의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가 호적 하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유대의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는 위대한 시대가 열립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축하하는 사람도, 축하하는 잔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사관이 없어서, 여인숙의 말구유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시작을 축하한 것은 단지 천사들과 목자와 동방박사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열린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막 탄생하신 아기 예수입니다. 그 밤에 위대하고 새로운 나라가 열리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로마에 호적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에 무언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도 백성들에게 똑 같이 호적할 것을 요구합니다. 로마에 살려면 로마에 호적을 해야 하듯이, 주님의 나라, 주님의 백성이 될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나라에 호적을 해야 했습니다. 믿음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호적 하려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평안과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등록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호적한 사람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들판에서 자기 양을 지키던 목자들과 낯선 동방의 박사들, 그리고 나이 많은 노인, 시므온과 안나 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 나라에 호적하지 않을까요? 초라했습니다. 요람이 아닙니다. 구유에 얇은 천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아기가 세상을 정복할 것이며, 로마의 황제도 무릎을 꿇게 될 것을 몰랐습니다.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가 열국 위에 뛰어난 나라가 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번성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이미 로마백성으로 호적을 했기 때문에 새 나라에 이중으로 호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로마인들과 헬라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법에 복종하지 말고 예수님의 나라 법에 복종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죽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딤 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로마를 스승으로 두었습니다. 큰 스승을 두었습니다. 귀가 가렵습니다. 눈은 있으나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의 허탄한 이야기를 쫒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율법의 나라에 등록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나라는 이미 그 힘을 잃었습니다. 율법은 자기 백성을 사단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죽음과 양심의 갈등으로 부터 구원받지 못합니다. 400년의 암흑기를 거쳤지만 기대하는 예수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수 없는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율법의 나라에 등록된 사람들이라도 다시 호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에 호적을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반드시 호적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을 수 없고 폐기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보증입니다.
2-2. 그러면 새로운 나라에 호적을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그 나라에 호적 하는 방법은 양피 가죽 종이 위에 이름을 적어 넣고, 가족사항과 사는 곳과 직업을 적음으로 호적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호적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시집을 가기 전에 처녀의 몸을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도구로 드려서 그 나라에 호적을 합니다. 요셉은 그 아이를 받아 최선을 다하여 키우기로 약속함으로 호적을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가지고 찾아와 엎드려 그 아기를 왕으로 섬기고 경배함으로 호적을 합니다. 들판의 목자들은 밤새워 양을 지키다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뛰어와, 천사의 메세지를 전하면서 경배하고, 그 나라에 호적을 합니다. 시므온은 그 나라가 열린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이 직접 보게 된 것을 감사하며 기도함으로 그 나라에 호적을 합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 안나는 그 나라의 시작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통하여 호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주님의 나라에 호적을 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을 통해서 그 나라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마음과 믿음과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라도 새로운 나라에 반드시 호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그래야 죽음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은 새로운 나라에 호적을 하셨습니까? 호적을 하셨으면 호적에 대한 믿음이 그대로 유지가 됩니까? 영원한 호적이십니까? 다시 할 필요가 없는 호적입니까? 오늘 적은 무리이지만 아기 예수 탄생과 함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 됨에 새로운 자세와 믿음을 갖는, 다시 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호적을, 소유한 주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경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이 호적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대리인은 아니 되고 본인이 직접 해야 합니다. 새로운 나라의 호적은 어떤 조건,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서도 꼭 본인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따릅니다. 여러분, 호적을 아무 데서 하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재 살고 있는 마을에서, 본인이 아닌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대신 해도 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로마의 명령은 반드시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곳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고향은 유대지방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갈릴리와 유다 사이에는 사마리아 지방이 끼어 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유대 사람이면 절대로 그 지방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서편으로 우회해서 갑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같이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거리가 120 km 입니다. 지금 같으면 간단하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은 나귀와 걷는 것입니다. 물론 말이 있었지만 말은 일반 시민들이 소유할 수 없는 재산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20km를 간다면 그 거리는 엿새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호적 때문에 백성들은 며칠 동안 생업을 중단해야 합니다. 장사와 농사와 어업과 목양을 잠시 쉬어야 하는데 백성들에게 보통 부담이 아닙니다. 여러 날 집을 떠나 왔다 갔다 하면서 드는 비용이 있습니다. 로마의 명령은 백성들에게 결코 달갑지 않습니다. 교통도 불편합니다. 고을마다 혼잡했고 모두가 불만으로 로마 정부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에, 이 호적을 하는 일이 처음이 아니라 몇 년 전에도, 구레뇨 사람이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이미 한 번을 했습니다. 두 번 째 입니다. 번거롭습니다.
그리고 호적을 해서 백성들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없습니다. 호적을 근거로 각종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귀찮고 번거롭고 손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더라도 호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요셉 역시 번거롭고 귀찮습니다. 남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내 마리아가 홀몸이 아니고, 만삭의 몸입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야 합니다. 도중에 어떤 상황이 될지?, 인적이 드문 허허벌판에서 산기가 있으면? 그래도 호적은 꼭 본인이 해야 합니다. 누구든 예외가 없습니다. 만삭의 여자도 꼭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타인이 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내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을 자녀라도,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본인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진료는 의사가 하나 약은 본인이 먹어야 하고, 낳아서 키워주는 것은 부모가 해 주지만 자각하고 깨닫는 것은 본인이 해야 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물론 주님의 은혜가 전제 되어야 하지만 본인의 몫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에 호적 하는 일,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그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내가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떠맡길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직접, 내 믿음 가운데서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직접 하셨습니까? 부모가 대신 해 준 것은 무효입니다. 나 홀로 고민하고, 내가 깨닫고 영접해야 유효합니다. 주님께 고백하고 경배하고 호적을 하셨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책임지시고, 주님이 이끄시고,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그런데 호적을 하면 의무가 주어지고 권리가 부여됩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백성으로 호적이 되면 가장 기본적으로 납세와 여러 가지의 의무가 주어집니다. 사람마다 세금이 매겨지고, 남자들은 국가가 부르면 나가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그런 의무를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만약 이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그 여파는 결국 살아가는 삶에서 본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의무가 괴롭거나 짐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와 기쁨은 제곱 비례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에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버림을 받은 자들이 다 다윗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거대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다윗이 10년 이상 도망을 다니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합니다. 자기 몸 하나 추스리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사백 명씩이나 모여 들었으니 그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며 돌볼 수 있습니까? 나중에는 600명이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감당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쓰레기 취급을 받던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고 결국 그들에 의해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됩니다. 통일 왕국을 이루는데 위대한 일꾼들이 됩니다. 다윗은 이들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고 때로는 그들에게 배신도 당하지만 결국 그 의무는 생각할 수 없는 기쁨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호적하므로 많은 의무사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의무만이 아니고 구원의 즐거움과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받습니다. 의무는 선물과 은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고, 이스라엘을 얻고, 비전과 꿈을 이룹니다.
사도 요한은 열 두 제자 중 가장 어린 제자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마리아를 가리키며 너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갔지만 그래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의무 사항이 됩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돌보기 시작하는데, 다른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때에, 요한은 시골에서 마리아를 봉양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40년 세월이 마지못해 보낸 의무의 시간 입니까? 그 시간은 예수님과의 일을 추억하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주님의 사역을 새롭게 조명한 통찰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30,40년인 지난 이후에 요한복음과 요한 1,2,3 서, 요한 계시록이 사도 요한의 손끝에서 탄생을 합니다. 여러분, 의무를 다 하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런 짐이 아닙니다. 의무를 다 하는 것은 곧 기쁨을 심는 것입니다. 그 의무는 30배, 60배, 100배의 기쁨과 복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나라에 호적하신 것 때문에 부과된 의무를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탄생하신 아기께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의지하고, 구주로 모시기 바랍니다. 보호하심 속에 믿음과 왕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평안과 기쁨과 복을 주십니다.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보장받습니다. 이 은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 연결이 됩니다. 로마의 백성으로 호적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나라에 호적하시겠습니까? 그 밤에 떠들썩하던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로마의 백성으로 호적을 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왕궁에 있으면서 로마가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해서 그 달콤한 맛에 취했던 헤롯과 그의 신하들, 세계를 호령하던 가이사 아구스도,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밤에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과 요셉과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는 그 첫 번 성탄에 주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천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매년 성탄절기가 되면 이 들의 이름이 전 세계에 불려졌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제 다시 한 번 그 백성 됨을 누리고 있는지 확인 하는 것이 이 성탄절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이 기쁜지,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거운지, 의무를 다 하는 일이 짜증나지는 않는지, 주님 앞에 드려지는 내 시간, 내 소유, 내 재능, 내 희생이 아깝지는 않은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부끄럽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그 모든 의무에 대하여 점검하는 것이 성탄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믿음을 바로 세우고 바래진 신앙 호적을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호적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오시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 영광, 땅의 평화가 이 호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시작이고, 땅의 평화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은 무엇이며, 평화는 무엇입니까? 이 것이 어떻게 우리와의 만남에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습니까?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죄와 고통에 신음하는 인생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인생이라도 스스로의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18;23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뜻만 있다고 일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고 훌륭한 법이 있어도, 그것을 듣고 순종하는 백성이 없으면 그것은 온전한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분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아기 예수님은 오셔서 33년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함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또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근심, 걱정, 절망, 죽음 이 모든 것에 메여있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도 이 문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를 드린 분이 있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평안이고, 평화입니다. 오늘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물질의 개념이 아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맞이하고 축하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에 호적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땅의 평화입니다. 이 것이 시작이고 끝이고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서 걸어서 6일 넘게 걸리는 거리를 여행하여 출산을 한 것은 인생에 큰 위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울과 두려움이 없이 잘 견디어 냈습니다. 무엇으로 견디어 냈습니까? 믿음입니다. 장차 세상의 구세주가 된다는 천사의 말을 통하여 평안을 되찾은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루살렘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호적을 끝내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 출산한 몸으로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사렛 집이 아닌 8일 만에 초 태생 남자 아이를 바치는 정결예식을 치루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이 때에 할례도 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장자 남자아이를 죽이는 대신에 양의 피로 대속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고, 양의 피가 묻은 집의 이스라엘 장자는 죽음이 지나가고 애굽의 장자만 죽였기 때문입니다. 율례를 지키고 할례와 제사의 의무를 다한 것은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눅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스라엘을 속량할 구세주를 보았으니 눈을 감아도 좋고 이 아기가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과 빛과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신앙의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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