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보(洑)에 얽힌 추억
<‘가뭄 극복을 위한 옛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자료를 찾아
우리 카페에 올리고 보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고향에서 어릴 때의 보(洑)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나는 ‘앞거랑’과 ‘자호천’에서 뛰놀려 자랐다. 여름이면 보안에서 멱을 감았고, 겨울이면 보안에서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며 놀았다. 여름의 물놀이는 하루의 일과였고, 겨울에는 내가 만든 앉은뱅이스케이트로 ‘앞거랑’을 누볐다. 그르다 물에 빠지면 시냇가에 불을 피워 옷을 말리고 때로는 옷을 태워버려 어머니의 꾸중도 많이 들었다.
다음은 보(洑)에 대한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의 나무를 이용해 물을 막은 보의 사진은 이미 인터넷 상에는 사라진 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20BC355591F1FE22)
나무와 돌로 만든 옛 보는 살아지고 콘크리트 보 만이 남았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통적인 농업용수원의 주류는 보에 의한 것이며, 1935년까지만 해도 남북한
을 통틀어 9만 514개소의 보가 있었고 여기에서 물이 대어지는 몽리면적은 전 관계면적의 약 50%인 51만 2000㏊에 이르렀다. 따라서 제언(堤堰)에 의한 23만 4000㏊나 양수기 및 기타에 의한 34만 7000㏊보다도 컸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산미증산운동(産米增産運動) 그리고 광복 후의 연이은 미곡증산 시책이 추진됨에 따라 하천상류의 많은 부분이 저수지로 바뀌고 또 기존의 소규모 보도 대형화됨에 따라 그 수는 1995년 말 현재 1만 8425개소로 줄어들고 몽리면적도 10만 9000㏊에 불과하였다.
보는 수위를 높여 필요한 수량(水量)을 확보하기 위해 하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만드는 시설인데 이를 보통 보(洑)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들은 홍수가 날 때마다 유실되어 매년 다시 수축하는 것이 통예(通例)였다.
1.우리고장의 보(洑)들
자호천의 상류부터 차례대로 적으면 군드랫들보, 대배미보, 일견보, 윗뒤귀미보, 아래뒤귀미보, 새들보,
하배기보, 오산들보, 창말보 등이 기억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1013A5591F22B18)
수 백 년을 나무와 돌로 해마다 보수하여 만들어진 '일견보'
2.보 만들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재래식(在來式) 보는 대부분 하천에 가로로 적당한 간격마다 말목을 깊이 박고 물이 고이는 쪽에 긴 통나무들을 가로질러 걸치고 이에 기대어 큰 돌을 놓는다. 그 위에 소나무 가지를 덮고 또 그 위에 다시 큰 돌로 소나무가지를 덮는다. 그 다음은 돌 사이에 자갈을 끼워 넣어 물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의 아래쪽에는 홍수가 나도 보가 떠내려가지 못하게 촘촘히 나무말목을 강바닥에 깊이 박는다.
평소에는 그 자갈 사이로 물이 새어 나가지만 날씨가 가물며는 그 위에 진흙을 두껍게 덮어 물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여 수량을 확보했다. 보의 높이는 들에 필요한 물의 양만 확보 할 수 있게 높이를 정했다.
그리고 수문 근처에는 수위를 조절하는 여수로(餘水路)를 만들어 일정량의 물만 들판으로 흘러 들어가게 수위를 조절하였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그 보 도랑을 막아 여수로로 물을 모두 강의 아래쪽으로 흘러 보내어 들판의 논에 물이 마르게 하여 벼의 추수를 도왔다.
보의 구실의 하나는 보 위로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는 징검다리 구실도 했다.
3.보의 손질하기
봄이 되면 경작자 일명 ‘보꾼’들이 모여 보 도감(都監)을 선출하고 일 년 간의 할 일을 의논한다. 오랫동
안운영하여 왔기 때문에 보 마다 자산이 꾀 많았다. 보에 필요한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해 보 소유의 산이 있는 것이 통례였다. 이를 ‘봇갓’이라 불렀으며 ‘새들보갓’ ‘아래뒤귀미보갓’ ‘하배기봇갓’ 등 이 있었다.
또한 ‘보꾼’들이 모이 며는 그날 참으로 막걸리를 마신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보에 자주 가게 되면 술을
배운다는 이야기가 있다.
봄에는 못자리하기 전에 보의 보수를 한다. 겨우내 방치되었던 보의 파손부분에 물이 새어나가지 못하
게 솔가지를 덥고 진흙을 저다 덮는다.
날씨가 가물며는 농부들의 할 일의 우선순위의 첫째가 보 하러가는 일이였다. 그리고 결석을 하면 반드
시 곡식으로 ‘골(벌금)’을 내었다.
4.보에 얽힌 이야기
1)하배기보는 우리들의 수영장이었다.
‘앞걸(앞시내)’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 다음 가는 곳이 하배기 보안이다. 수심이 깊고 넓었다. 나는 그곳에서 물에 빠져 죽을 번도 했다. 큰물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강바닥을 잘 모른다. 얕은 곳에서 걷다가 좀 안으로 들어간 것이 화를 자초했다. 물속 바닥의 흙이 무너지며 내가 점점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헤엄이 초보라 죽을힘을 다해 손을 져어 물 밖으로 나온 일이 있었다.
여름이면 학교가 파하면 모두들 책보자기를 들고 제일 먼저 찾는 곳이 하배기 보안 이다. 옷을 벗기가 무섭게 준비운동도 없이 물속으로 잠수하여 단숨에 10여m씩 헤엄 처 나갔다. 수영을 마치고 보 가에 나와 햇볕으로 몸을 말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르니 여름이면 검둥이가 되는것이다.
2)아랫뒤귀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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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물이 줄어든 96년도 큰형님과의 추억이 있는 아래뒤귀미보를 찾으니 그 좋던
반석(盤石)은 살아지고 흔적만 조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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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뒤귀미보 밑의 물길과 저 멀리 굴뱅이(소금강) 아래에 사갓바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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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118C53A5591F2580B)
이곳은 사갓바위가 도로확장으로 묻힌 곳이다. 멀리보이는 다리 밑
근처에 새들 보가 있었고. 그리고 왼쪽은 윗뒤귀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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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 년 전 현수아비, 현석아비, 나와 셋 사람이 삿갓바위가 있던 곳에서 투망으로
피라미를 많이 잡았다. 그때 주은 추상적인 무늬가 있는 수석이다.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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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된 우리 집 논이 있었던 아랫뒤귀미 들이 있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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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중에서 맛으로 손 곱는 꺽지의 모습
우리 집 논의 대다수가 아랫뒷귀미들에 있었다. 외마지논, 기역자논 두마지기논, 구논, 등 모두 가까이 있어 농사짓기에 편리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논농사 일을 할 기회가 적었다. 주로 소의 먹이인 소풀
베기와 소먹이기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한번은 경산형님와 함께 아래뒤귀미보 안에 꺽지를 낚으러 갔다. 형님께서 보안의 옆에 위치한 넓은
반석위에 앉아서 물벌레를 낚시에 꿰어 꺽지를 낚으셨다. 물벌레는 여울진 곳의 돌 밑에 붙어사는 곤
충의 애벌레이다.
그 날 운이 좋았던지 수 십 마리를 낚았다. 나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뀐대기’을 만들어 꿰어서 물
에 당구는 일을 하였다. 낚시가 끝난 석양나절에 형님은 자전거에 나의 꼴망태기를 싣고, 나는 꺽지
‘뀐대기’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던 일이 회상된다.
3)새들 보
o사발모지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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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사발모지’를 헌 천을 이용하여 본으로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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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모지에 많이 들어가는 피라미
물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사발모지’가 있다. 흰 사발에 흰 천을 사발을 감쌀 정도로 잘라서 그 한가운데에
지름 약 1.5cm정도의 둥근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흰 사발 안에다 된장을 넣고 그 천으로 사발을 덮어 뒤쪽
에서 묶는다. 물속의 물의 흐름과 고기가 많이 모이는 장소를 택해 그 곳을 약간 파고 주위를 정리하여 사발에 물을 가득 채워 구멍 난 곳의 천만 보이게 둘레에다 모래로 사발을 묻는다. 그렇게 하여 두면 된장남새를 맡은 피라미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일단 들어가면 나올 수는 없다. 나는 고기들이 많이 들어갈 때 까지 강변에서 소풀을 베어 망태기에 담는 일을 한다. 한참 후에 조심스럽게 물속 사발모지에 가서 손으로 구멍을 막고 사발을 들고 나와 고기를 꺼낸다. 그 고기는 배를 따서 내장을 빼내고 돌 위에다 말린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피라미가 많이 잡혔다.
o은어 잡이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5B6395591F2B22E)
은어는 떼를 지어 다닌다. 낚시와 투망 이외는 잡을 수가 없다.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50년도 가을의 어느 날 우리 집은 폭격으로 불타버려서 원산댁 사랑채에 살고 있을 때다. 피란 갔다 온 후라 들과 산에는 전쟁 무기들이 흩어져 있어 장난삼아 주우러 다녔다. 지금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짓을 한 것이다.
공산군의 소총을 주어서 ‘함지골’에서 석평형님과 내가 총을 소아보기도 했다. 발사 할 때에 어께의 반동이 아주 심했던 기억이 난다. 석평형님은 대담하여 수류탄을 터뜨려 물고기도 많이 잡았다.
어느 날 동무들과 새들 보를 건너다 보 아래쪽의 깊지 않는 물속에 팔뚝만한 은어 가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전쟁 중이라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물고기들의 천국이었다. 산란하러 올라온 은어가 보의 장애로 더 올라가지 못하고 그곳에 많이 모인 것같았다. 그 날은 물고기 잡는 기구도 없는 맨손이었다.
그래서 여럿이 나무 막대기를 주어서 물속 은어 떼를 후려쳐 물 가 얕은 곳으로 몰아내어 은어를 손으로 잡았다. 잡은 큰 은어를 버들가지에 꿰어 들어 신나게 집으로 돌아온 추억이 떠 오른다.
첫댓글 어릴때 외가에 가서 앞개울에서 손으로 물고기를 잡으시고, 근처 저수지에서 낚시하시던 기억이 나는데 다 어릴때부터 자양에서 갈고 딲으신 실력이셨군요?
어느땐가 누가 귓귀미보에서 과수용 "유산동"살충제를 뿌려서 하베기보까지 물고기 많이 죽은적 있셨다,
귀미보에서 큰뱀장어를 잡으려고 보니 이미 셋물이 나온 사이에서 해독이되여 잡지못해 아쉬운일들,
20대초반 추석때 명절인사차 자양에 젊은 청년이모여서 삿갓바위 위에서 계피가루빻아서 풀어서 메기를 많이잡은일,,
댐상류에 투망으로 많은고기를 잡은 추억들,
물고기 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후에 할아버지께서 하베기 보안에서 꺽지낙시하셔서 매일 회을 먹을정도로
고기잡으신 할아버지 옛추억이 새롭게 생각이 나네요,
이제는 2004년도 부터는 투망 다버리고 냇가에 많은 고기잡은 죄업을 사할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릴적에 사발모지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무렵 제가 물고기를 잡아오면 어머니가 고추장을 풀어서 찜을 만들어 주셨는데 저는 물고기 비린내가 싫어서 손도대지 않아, 어머니가 제발 물고기 잡아오지 마라고 만류했던 기억이 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