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로린 마젤 지휘
=== 작품 해설 === <2011년 9월 5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최은규 글>
말러, 교향곡 제6번 a단조 '비극적'
판본에 따라 2-3악장의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1903~1904년 작곡, 1906년 말러 자신의 지휘로 에센에서 초연
말러가 그의 비극적인 [교향곡 제6번]을 완성하던 1904년,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빛나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부인 알마가 있었으며 사랑하는 두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시기에 비극적인 [교향곡 6번]을 작곡한 말러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907년에 사랑하는 장녀 마리아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심각한 심장병 진단을 받았으며 10년간 몸담았던 빈 오페라 극장에서 사임했다. 말러는 그에게 닥쳐올 비극을 예감하며 비극적인 교향곡을 작곡했던 것일까? 이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인해 말러의 부인 알마가 그녀의 [회상록]에서 밝힌 [교향곡 6번]에 대한 해설은 더욱 그럴 듯하게 들린다. “교향곡 6번은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며 예언적인 작품이다. 그는 제6번에서 그의 인생을 음악적으로 예견했다. 그는 또한 운명으로부터 세 번의 타격을 받았고 세 번째 타격은 그를 쓰러뜨렸다.”
말러가 정말로 그의 미래를 음악적으로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러가 [교향곡 제6번]을 작곡한 이후 비극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 때문에 말러의 [교향곡 6번]은 더욱 무시무시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사실 말러 자신이 붙인 ‘비극적’이라는 타이틀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a단조의 비극적인 화음으로 마무리되는 교향곡의 충격적인 엔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타격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결말이다. 환희와 승리로 마무리되는 교향곡 1, 2, 5번이나 정화된 결말에 이르는 교향곡 3, 4번과 차별화된다.
압도적인 비극적 분위기
1악장이 시작되면 첼로와 베이스의 강한 반복 음을 배경으로 군대행진이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길한 운명의 발걸음 같기도 하고 혹은 처절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것 같기도 하다. 거칠고 리드미컬한 군대행진 주제에 이어 갑자기 위로 치솟아 오르는 아름다운 주제가 나타나는데, 이는 말러가 ‘알마의 테마’라 부른 열정적인 선율이다. 아무런 예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놀라운 멜로디는 듣는 이의 마음을 한껏 뒤흔들어 놓는 매력이 있다.
[교향곡 6번]만의 특이한 그밖에도 많다. 이 교향곡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토록 비극적인 내용을 지극히 고전적인 형식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향곡 구성에 따라 모두 네 개의 악장을 갖추었고 1악장은 엄격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몇몇 주제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교향곡 6번]을 이루는 주제들은 고전적 명확성과 간결함을 보여주며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논리적인 동기 발전 수법을 보여준다. 또한 말러의 초기 교향곡에 빈번히 등장하곤 했던 신호나팔 소리나 대중가요 같은 잡다한 음악도 이 곡에선 나타나지 않기에 정돈된 통일성마저 느껴진다.
1악장이 진행될수록 알마의 주제는 점차 군대행진 리듬에 동화되며 어둡게 변모하기도 하지만, 1악장 말미에서 트럼펫에 의해 찬란하게 연주되면서 a단조로 시작된 1악장이 A장조의 승리로 마무리한다. 그래서 말러 연구가인 콘스탄틴 플로로스는 알마의 주제가 트럼펫에 의해 찬란하게 표현된 것을 ‘알마의 신격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제6번 교향곡]에 비친 단 한 번의 찬란한 빛은 덧없이 사라지고 1악장의 환희는 승리의 도취감을 충분히 즐길 사이도 없이 급히 끝나버린다.
1악장이 끝나면 악단에 따라 느린 안단테 모데라토 악장을 연주하기도 하고, 혹은 빠른 스케르초 악장을 연주하기도 한다. 이는 말러가 [교향곡 6번]을 여러 차례 개정하면서 생긴 혼란이다. 어느 악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악장 순서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향곡에서 2악장은 대개 느린 악장이므로 2악장으로 안단테 모데라토 악장이 연주되는 것이 좀 더 전통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빠른 스케르초 악장의 리듬이나 분위기가 1악장과 닮았기에 1악장과의 연결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1악장에 이어 스케르초 악장을 연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대개 교향곡의 스케르초 악장은 일종의 빠른 춤곡이라 할 수 있으나 말러의 [교향곡 제6번] 스케르초는 조금 다르다. 이 악장에서 말러는 춤곡의 리듬을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왜곡하고 갖가지 상징을 담은 타악기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그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악마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 스케르초가 더욱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 섬뜩한 이중성 때문이다. 스케르초는 소름 끼치는 악마의 댄스 음악으로 시작하지만 이 악마의 춤에 이어지는 트리오 부분에서 놀랍게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순진무구한 음악이 나타난다. 알마는 그녀의 [회상록]에서 이 악장의 트리오 부분에 오보 솔로로 표현되는 어린이의 놀이 음악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 음악이 말러의 두 아이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증언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섬뜩한 일이다. 스케르초 악장에서 어린이의 놀이 음악은 비극적인 음악으로 변하며 추락하기 때문이다. “스케르초 악장에서 그(말러)는 두 아이들이 모래 위로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묘사했다. 무시무시하게도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비극적으로 변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작은 소리만이 흐느끼듯 사라져간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최후의 타격에 쓰러지다
안단테 모데라토 악장의 분위기는 다른 악장들과는 사뭇 다르다. 과격한 군대 행진 리듬이나 불규칙한 춤 리듬, 또는 듣는 이를 압도하는 공포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음악은 말러의 가장 비극적인 교향곡에서 잠시나마 희망과 고요함을 느끼게 해주는 평화로운 간주곡이며, 말러의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처럼 관현악으로 표현된 아름다운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 악장은 말러의 음악 중에서도 듣기 좋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하기 때문에 말러 음악의 입문 곡으로서도 널리 추천되고 있지만, 불규칙한 악구와 애매한 화성, 그리고 재현부가 빠져버린 급격한 종결 등 그 음악 어법은 혁신적이다.
4악장 피날레는 웬만한 고전 교향곡의 전 악장에 맞먹을 정도로 연주 시간이 길고 형식의 엄격함과 자유로움을 갖춘 음악이다. 그러나 음악학자 에르빈 라츠는 예외적으로 긴 길이에도 불구하고 이 피날레에는 ‘집중력’과 ‘간결함’이 있음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악장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이 이미 서주에서 음악적 복선으로 미리 암시되고 이후의 모티브 전개 방식도 논리적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덩치 큰 피날레에서는 알마의 회상록에 언급되었던 ‘영웅에게 가해지는 세 번의 타격’은 거대한 나무망치의 강력한 타격으로 상징되고, 어두침침한 금관 코랄과 신비스러운 현의 레치타티보, 불길한 군대 행진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종결부에서 트롬본과 튜바의 무거운 푸가토가 연주되면서 음악은 점차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트럼펫은 마지막으로 강렬한 코드를 연주하며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해보지만, 그것은 a단조 단3화음의 비극적인 절규일 뿐이다.
추천음반
말러 [교향곡 제6번]의 추천 음반으로는 단호한 리듬감과 세밀한 표현이 살아있는 조지 셀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1967년 세브란스홀 실황음반(Sony)과
처절한 비극성이 강조된 텐슈테트와 런던 필하모닉의 음반(EMI)이 있으며,
최근에 나온 음반으로는 명징한 음향이 돋보이는 얀손스와 RCO의 음반(RCO Live)과
군대행진 리듬의 긴박감이 살아있는 게르기에프와 런던 필하모닉의 음반(LSO Live)이 있다.
=== 인물 정보 === <2014년 8월 5일 네이버캐스트 / 황장원 글>
명지휘자 열전
로린 마젤
1930.03.06 ~ 2014.07.13
2014년 7월 13일, 미국 버지니아주 캐슬턴에서 작고한 로린 마젤은 우리 청중에게 특히 친숙한 지휘자였다. 아마 정상급 거장들 중에서 그처럼 국내 무대에 자주 올랐던 인물도 달리 없을 것이다. 1966년 베를린 독일 오페라의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2013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 이르기까지, 그는 거의 반세기에 걸쳐 약 15회나 한국을 찾아왔다.
그가 이끌고 왔던 오케스트라들의 면면도 뉴욕 필, 빈 필, 프랑스 국립, 피츠버그 심포니, 필하모니아, 시카고 심포니, 뮌헨 필 등으로 무척 다양했다. 또한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초청된 스칼라 오페라단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공연했고, 2003년 서울시향, 2008년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을 지휘했는가 하면,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와 유독 인연이 깊었던 로린 마젤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여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살펴본다.
지휘의 신동
로린 마젤은 무엇보다 ‘신동 지휘자’로 유명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신동’은 흔한 편이지만, 지휘계에 있어서만큼은 예외이다.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마젤처럼 ‘거장’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젤은 1930년 3월 6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2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모는 미국 출신의 유대인 음악가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20년간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했다. 말하자면 마젤의 음악적 재능은 그의 가계에 깊이 뿌리박힌 DNA에서 유래한 것이었던 셈이다.
마젤의 음악교육은 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엔 바이올린을 배웠고, 지휘봉을 잡은 건 일곱 살 때부터였다. 그의 지휘 스승은 러시아에서 망명한 블라디미르 바칼레이니코프라는 인물로, 신시내티와 피츠버그에서 프리츠 라이너의 부지휘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마젤은 8세 때 스승을 따라 가족과 함께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마젤이 지휘 무대에 공식 데뷔한 것도 8세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악단은 아이다호 대학 오케스트라, 곡목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당시 이 ‘신동’의 출현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마젤은 미국 각지의 오케스트라들과 거장들의 부름을 받았다. 9세 때는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의 초청으로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11세 때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그를 NBC 방송 콘서트 무대에 세웠다. 그리고 15세가 될 때까지, 마젤은 뉴욕 필하모닉을 포함하여 미국의 거의 모든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다녔다. 참고로, 그의 프로 지휘자 경력은 84년 생애 중 무려 72년에 달한다.
신기록 제조기
데뷔와 경력부터 그렇지만, 마젤은 그야말로 ‘기록의 사나이’로 불릴 만했다. 1960년, 30세의 마젤은 ‘바그너의 성지’인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레퍼토리는 [로엔그린]이었고, 이 축제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미국인 지휘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얼마 후 같은 축제에서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도 지휘했다. 1980년에는 은퇴한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후임으로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포디움에 올랐는데, 빈(Wien) 출신이 아닌 지휘자로서는 최초였다. 그는 그로부터 7년간(1980~86) 연속해서 이 유명한 음악회를 이끌었고, 그 후로도 4회 더(1994, 1996, 1999, 2005) 출연했다. 보스코프스키를 제외하면 최다 출연 기록이다.
아울러 그가 맡았던 포스트의 숫자와 종류도 기록적이다. 그는 1965년 베를린 독일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평생 동안 미국과 유럽을 넘나들며 실로 다양한 단체를 이끌었다. 아마 그처럼 많은 메이저 오페라 극장 및 오케스트라를 수중에 넣었던 지휘자도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베를린에서 마젤은 독일 오페라뿐 아니라 서베를린 방송교향악단(RSO 베를린)까지 맡아서 11년 동안 이끌었다. 1970년부터는 노장 오토 클렘페러를 보좌하여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함께 이끌었다. 1972년 클렘페러가 은퇴를 선언하자 악단측이 그에게 상임지휘자 자리를 제안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해 마젤은 조지 셀의 후임으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았고, 1977년부터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겸임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보직을 맡는다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마젤은 그런 기간을 꾸준히 이어갔다. 클리블랜드에서 물러난 후에는 피츠버그 심포니를 맡았고,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을 놓은 다음에는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쿠르트 마주어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을 맡았고, 이후에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 발렌시아 주립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등을 거느렸다. 그런 다망한 활동을 소화하기 위해 그가 자신만의 ‘생체 시계’를 지니고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스캔들
마젤은 일세를 풍미한 스타 지휘자였고, 늘 화려하고 거침없는 성공가도를 달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연히, 그로서는 너무도 뼈아팠을 시련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련은 주로 1980년대에 집중되었다.
1982년, 이전까지 승승장구하던 마젤은 유럽 최고의 포스트 가운데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를 거머쥐었다. 그것도 극장과 공연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총감독 자리였다. 그때가 아마 그의 절정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부신 정상에서, 그는 불과 2년 만에 내려오고 만다.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극장측, 시 당국과 마찰을 빚은 끝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984년 하차했던 것이다.
다음은 1989년. 그 해 베를린에서는 얼마 전 타계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투표가 있었다. 그 투표에서 마젤은 다니엘 바렌보임, 오자와 세이지, 제임스 러바인 등과 함께 유력 후보로 꼽혔으나, 결국 당시로서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런데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직후 마젤은 향후 일정을 포함하여 악단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다행히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는 몇 년 후 회복되었지만, 당시 그에게는 낙선의 충격이 그만큼 컸던 것이 아닐까. 나중에 마젤은 뮌헨과 뉴욕에서도 논란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런 일들은 이 때의 상처에 비하면 ‘새발에 피’였으리라. 어쩌면 빈에서부터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3세 연하의 아바도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억측도 해볼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올해 나란히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휘의 달인
마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지휘의 천재였고, 그의 바통 테크닉은 탁월하고 주도면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마디로 ‘지휘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를 ‘비범한 청력을 지니고 완벽하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최고의 지휘자’로 여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차가운 이성과 자기 확신으로 무장한 지휘 기술자’로 폄하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탁월하고 비범한 지휘자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지휘가 너무 ‘잘난 척’하거나 기능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 그가 남긴 음반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 베를린 시절이나 말년에는 달랐지만, 그가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 만든 음반들은 이상할 정도로 감흥이 적거나 인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은 일단 그가 ‘리코딩’에 임한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실제 무대에서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해석이나 극단적인 제스처도 서슴지 않는 그였지만, 영구히 기록으로 남는 리코딩 상황에서는 자세가 180도 달라져 지극히 평범하거나 경직된 해석을 들려주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전무후무한 지휘의 천재였던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 평론가는, “그에게 지휘는 마지막까지 도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쉬운 일 같아 보인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필자에게 그런 그의 지휘는 종종 얄밉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치 모든 음악을 한 단계 위에서 내려다보며 재단하는 것 같았고, 언제나 한두 발짝 앞서가며 시간의 흐름마저 관리하는 듯했다. 그 결과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가장 열정적이거나 역동적인 순간에조차 특유의 냉랭함을 풍기거나 독특한 분절감 내지 정체감을 빚어내곤 했다.
그런데 영원히 거만한 유희를 즐길 것만 같았던 이 초인적인 지휘자에게도 원숙기라는 것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청중은 지난 두 해 동안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12년과 2013년, 예술의전당에서 마주한 그의 음악에서는 사뭇 특별한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들려준 말러, 시카고 심포니와 들려준 모차르트와 베토벤, 뮌헨 필하모닉과 들려준 스트라빈스키 등은 그 날의 관객들에게 실로 경이로운 체험으로서 오래도록 기억될 듯싶다.
지휘자 아닌 마젤
마젤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의 바이올리니스트 데뷔는 15세 때였고, 한때 피츠버그 심포니와 파인 아츠 4중주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뮌헨에서 자작의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플루트 협주곡(제임스 골웨이 독주)을 발표했는데,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는 자신이 직접 맡아서 연주했다. 2005년 5월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그의 첫 오페라가 상연되었는데, 조지 오웰의 소설에 기초한 [1984]였다.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이올린과 지휘봉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독보적인 능력은 그를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무대로 인도하기도 했다. 그가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의 포디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 솔로를 병행하는 모습은 2005년 공연 실황 영상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는 2004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신년음악회 실황 영상물에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또 마젤은 2009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캐슬턴 페스티벌’을 창설하기도 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주도하고 데니스 그레이브스, 제임스 골웨이 등이 공동 설립자로 참여한 이 여름 음악제는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공연과 세미나 등으로 구성되었다. 작고하기 얼마 전인 2014년 6월 28일, 예정했던 개막공연 지휘를 취소한 대신 연사로 나선 마젤은 그 만년의 작업을 ‘사랑의 노역 이상의 것, 즐거움의 노역’이라고 규정했다.
마젤의 유산
마젤은 리코딩보다는 실연에서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지휘자지만, 이제는 그가 남긴 유산들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젤은 300개 이상의 음반·영상물을 남겼다. 그중 서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시절의 여러 개성적인 녹음들(DG),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시벨리우스 교향곡집(Decc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절의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과 거슈윈 [포기와 베스], 피츠버그 심포니를 지휘한 레스피기 [로마 3부작](Sony),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시절의 R.슈트라우스 관현악곡집(RCA),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바그너 관현악곡집(RCA) 그리고 최근 차례로 출반되고 있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말러 교향곡집(Signum) 등은 따로 언급해둘 만하다.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면모는 영상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라 페니체 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푸치니 [나비부인]이 대표적이다. 또 과거 화제를 모았던 영화판 오페라들도 놓치기 아까운데, 조셉 로지 감독의 [돈 조반니]와 프란체스코 로지 감독의 [카르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오텔로] 등이다.
주요 경력
· 1960년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
· 1965~71년 :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상임지휘자
· 1964~75년 : RSO 베를린 상임지휘자
· 1972~82년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 1977~91년 :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 1980~86. 1994, 96, 99, 2005년 : 빈 필 신년음악회 지휘
· 1982~84년 : 빈 국립 오페라 총감독
· 1984~88년 :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고문
· 1988~96년 :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감독
· 1993~2002년 :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 2002~09년 :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
· 2008년 : 뉴욕 필의 평양 공연 지휘
· 2006~11년 : 발렌시아 주립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 2011~14년 :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음악감독
추천 음반 10선(협연 제외, 무순)
· 프랑크, 교향곡 d단조/멘델스존, 교향곡 5번 * 악단 : RSO 베를린, 베를린 필하모닉 <DG>
· 시벨리우스, 교향곡 4·7번 * 악단 : 빈 필하모닉 <Decca>
·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 악단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Decca>
· 레스피기, 로마 3부작 * 악단 : 피츠버그 심포니 <Sony>
· R.슈트라우스, 돈 키호테 외 * 악단 :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RCA>
· 바그너, 서곡과 전주곡집 * 악단 : 베를린 필하모닉 <RCA>
· 말러, 교향곡 5번 * 악단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Signum>
· 거슈윈, 포기와 베스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외 <Decca>
· 베르디, 아이다 * 밀라노 스칼라 극장 실황 <Decca>
· 푸치니, 3부작 * 런덤 심포니 외 <Sony>
추천 영상물 10선
· 2005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DG>
· 2004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신년음악회 <TDK>
· 바그너, 말 없는 반지 * 악단 : 베를린 필하모닉 <EuroArts>
· 2008년 평양 콘서트 * 악단 : 뉴욕 필하모닉 <EuroArts>
· 베르디, 레퀴엠 미사 * 2007년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실황 <EuroArts>
· 푸치니, 투란도트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실황 <TDK>
·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실황 <Arthaus>
· 모차르트, 돈 조반니 * 조셉 로지 감독 영화판
· 비제, 카르멘 * 프란체스코 로지 감독 영화판
· 베르디, 오텔로 *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 영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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